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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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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8일 12시 00분 등록
떠난다는 것은 분명히 즐겁고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 인천 공항으로 갈 때까지,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근심걱정이 일상의 길모퉁이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을 앞두고 써야했던 개인사 50페이지를 간신히 제출했고, 미처 마무리하지 못하고 남겨둔 일들, 이렇게 오래 비워도 되는 걸까? 치대는 일상들 속에 전혀 자유로울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모든 일들을 던지듯 하고 떠난 여행은 참으로 오랜만에 나서는 홀가분한 탈출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파리에 이어 내게는 세 번째 유럽이었다. 푸른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는 긴 해변도로와 다홍빛 지붕을 가진 중세 도시들의 모습, 그 곳의 풍경을 내 눈에,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 어서 그 곳의 공기를 내 가슴에 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 곳에 도착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크로아티아 항공에서 내려 드디어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그곳 시간으로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별로 이국적이지 않았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숙소로 향하는 버스 차창 밖으로 둘러 본 시내는 그렇게 늦은 밤이 아니었는데도 적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직 내전의 불안한 공기가 사라지지 않은 까닭일까?


크로아티아는 불과 십여 년 전에 전쟁을 겪은 국가이다. 현재 UN의 중재로 평화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직접 가서 본 그 곳의 거리와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그 때의 상처들이 새겨진 건축물, 총탄 자국이 남은 집들,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관에선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은 듯했다.


우리에겐 생소한 나라인 이 곳은 근처 유럽인들에게는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어 현지인들보다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모여든 관광객이 많은 나라, 그래서인지 누가 현지인인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고, 워낙 동양인이 눈에 띄지 않는 낯선 풍경이다 보니,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나를 대하는 듯했다. 처음엔 낯선 여행지에서 그리 친절하지 않은 그들에게 조금 인간미가 떨어져 보이는 감도 없지 않았으나, 차츰 시간이 지나자 우리를 조용한 눈으로 낯설게 대하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적당한 거리감이 오히려 부담 없어 좋았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나날이 관광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크로아티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삶의 터전 - 야외 시장

도시, 마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야외 시장에는 그 나라,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이 있다. 시장은 그 나라의 의식주를 가장 손쉽고 흥미롭게 경험하는,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가장 생기 있는 삶의 터전이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의 가장 중심 거리에서 열리는 유명한 야외시장 Dolac. 테두리에 하얀색 줄무늬가 그려진 수십, 수백 개의 붉은색 파라솔이 연출하는 광경이 그야말로 장관인 이곳은 자그레브 주변 지역에서 매일매일 공수되어 온 신선한 과일, 채소, 육류, 생선, 크림과 치즈 등을 구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시장의 상점 중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곳은 주로 싱싱한 제철 농산물을 파는 곳들이다. 특히 보라빛깔의 자두, 각종 베리류, 놀라운 크기의 아스파라거스는 색상이 다양해서 꼭 사지 않더라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이것저것 고르게 된다. 여행객에게는 다양한 과일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니 이곳에서 과일을 구입해 숙소에서 먹는 것도 좋다. 계절 생산물들을 가지고 만든 다양한 먹을거리, 크로아티아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빵집, 카페, 레스토랑 등도 함께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료는 맥주지만 주변 지역에서 자라는 포도로 만든 와인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곳 사람들은 매년 11월 11일을 공휴일로 지정, 세인트 마틴 데이라고 하여 그들만의 칼라, 냄새, 소리, 향기의 향연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와인 축제를 연다.


또한 시장 입구에서 마주하는 꽃시장, 옷과 갖가지 핸드메이드 레이스, 곱게 수놓은 소품들, 수공예 기념품, 생활용품 등 가판대 위의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는 흥미로왔다. 선물용으로는 단연 크로아티아 국기가 그려진 핸드메이드 소품들이 꼽힌다. 손맛이 느껴지는 다양한 크기와 디자인의 핸드메이드 소품들은 그 손길과 섬세함 때문에 정감이 간다.


시장마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 같은 게 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한 도시를 이해하는 데는 재래 시장만한 게 없는 것 같다. 시장은 가장 빠르고 재미있게 그 도시의 생활과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여 여느 유럽의 시장처럼 규모가 상당히 클 것이라 기대했는데 의외로 이곳은 소박하고 깨끗하게 잘 정돈된 시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재래시장의 왁자지껄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장 곳곳에 넘쳐나는 사람들, 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사진을 찍고 기웃거리는 낯선 이들에게 어설픈 눈짓으로 나름대로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상인들의 모습이 여느 시장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이 시장은 우리네 시장과 다를 바 없이 과일, 채소, 해산물 등을 파는 일반시장의 모습이지만 이곳을 내가 좀더 매력적으로 느낀 이유는 바로 이런 크로아티아인들의 장을 보는 모습을, 그 속에서 그들의 다양한 삶의 표정을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시장은 어디서나 그 마을, 지역 사람들의 자랑이자 삶의 터전이다. 소박하지만 아름답게 자신들의 시장을 지금까지 이어온 그들이 살짝 부러워졌다. 지금은 많이 개량, 선진화 되었지만, 백화점, 대형마트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의 옛 시장도 이곳처럼 삶의 중심이 되고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낡음의 가치 - 앤티크 마켓

나는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 낡았지만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물건들, 그래서 무엇이든 깊이 있게 물건을 만드는 파리를 사랑하고, 장인의 깊은 손길이 느껴지는 이탈리아를 동경한다.


오래된 물건,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바로 앤티크 마켓. 그 곳에는 삶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이 있고, 그 깊이와 낡음을 가치로 인정하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북이 쌓여있는 물건들 사이에서 보물을 건져낼 때의 짜릿함,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앤티크 마켓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여행을 가서 앤티크 마켓을  잊지 않고 찾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다행히 크로아티아 크리크 섬에서도 앤티크 마켓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는 앤티크 마켓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었다. 여행 전 살펴 본 정보 어디에서도 앤티크 마켓에 관한 내용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광장을 벗어나고 대로변을 지나 우연히 골목골목을 거닐다 발견한 곳이었다.


그곳은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으나, 앤티크 가구를 비롯한 각종 앤티크 보석함, 그림과 액자, 도자기와 글라스, 테이블 웨어, 앤티크한 쥬얼리, 핸드메이드 옷과 갖가지 레이스 소품들, 모형 자동차, 앤티크 인형, 재봉틀 등 앤티크 마켓의 구색은 갖추고 있는 듯했다. 결코 값이 싸지도 않지만 결코 물건의 질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잠깐 나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닌 발품 팔며 일일이 채집하고, 내 마음에 들어와 작은 울림을 가져다 주고, 무언가를 어렵게 구하고, 오래오래 사랑하고,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을 장소다. 


앤티크 시장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오래된 것들, 이 보물에 나의 손길, 나의 손때를 묻혀 나의 추억을 깃들이고, 나의 이야기를 담고, 역사를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앤티크 마켓. 이곳을 거닐며 즐기는 나의 여행은 시간과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느끼는 여정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할 때면 역사가 깊은 동네,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가게, 오래된 카페, 곳곳에 숨겨진 낡은 골목을 드나들며 어김없이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물건들,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것을 즐긴다. 볼거리가 가득한, 내가 본 것들에 대한 자랑거리가 생기는 앤티크 마켓에서 나는 눈이 아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뭔가 채워지는 걸 경험하곤 한다.


여행의 참맛 - 골목골목

여행의 참맛이란 이름난 광장, 대로변의 웅장한 건물과 그곳을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광장 구석구석 나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 몇 블록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속의 생활과 찰나를 속속들이 확인해야 비로소 내가 다른 곳에 와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넘쳐나는 인파들로 혼이 빠지는 광장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 한가로이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들을 여유 있게 내 눈에 심을 수 있는 곳, 가끔은 볼거리가 너무 많아 그 날의 목적지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그런 곳, 나에게 골목은 바로 그런 곳이다.


유독 크로아티아는 (골목골목에도) 트렌드를 선도하는 여느 유럽의 다른 세련된 도시와는 무언가 다른, 아름다운 자연과 그들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한 곳이었다.


크로아티아 스타일의 핵심은 맑고 새파랗게 선명한 하늘, 뽀송뽀송 솜사탕 같은 구름, 투명한 에머랄드빛 호수, 깊은 세룰리언 블루빛 바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전하는 천해의 자연환경에서 묻어나는 자연스러움이며 그것이 삶에 스며들어 세월을 이어오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표출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집의 외관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나 회벽을 그대로 두거나 모노톤의 페인트칠을 하였으며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강렬한 햇볕과 비와 바람에 빛바랜 모습의 벽은 우리가 일부러 낡은 것처럼 보이게 칠하려는 노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깊이감이 있다.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거친 느낌의 벽이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이런 거친 벽과 대조를 이루는 나무로 만든 갤러리 창문에는 밝은 색상으로 페인트칠을 해서 이 창을 향해 들어오는 강렬한 햇볕을 적당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창문의 색상을 아름답게 칠함으로써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벽은 오히려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골목 양쪽에 있는 건물, 집들의 컬러풀한 창문, 베란다를 장식한 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소박한 분위기에 화사하면서도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색칠하지 않은 얼룩진 거친 벽과 화이트, 옐로우, 오렌지, 그린 등 밝은 컬러의 창문은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느낌이며 그곳에 놓인 화분이며 장식한 꽃들이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포인트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 골목 일대를 돌아다닐 때에 나는 나만의 보물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곳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나는 눈으로만 기억하기에 아까워 쉴새 없이 셔터를 누르다보니 수십, 수백장의 사진들이 쌓여갔다.


크로아티아 골목 곳곳에 널린 색색의 빨래들을 사진으로 담다보니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이 겹쳐졌다. ‘캘리포니아 드림’에 맞춰 춤추는 여주인공의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과 세월의 흔적으로 낡고 낡아 검게 바랜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아무렇게나 널린 흰 빨래가 연출하던 색채의 대비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빌딩들이 꾸며내는 백만 불짜리 야경 뒤에 숨겨진 홍콩의 또 다른 색깔, 또 다른 홍콩의 모습으로 내게 묘한 인상을 남겼었는데... 해안을 가까이 두고 있음에도 습한 기운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크로아티아의 날씨는 빨래를 말리기에 아주 적당한 날씨라 생각했다. 어제 저녁 숙소 테라스에 널어놓은 우리의 빨래도 누군가의 사진 안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을의 골목골목 자그마한 집들, 익숙해진 골목들과 아기자기한 기념품 가게, 거리에서 직접 만든 인형, 스카프, 또는 그림이나 티셔츠를 파는 상인들은 골목 여행에 재미를 더한다. 단순한 낙서에서부터 색감이나 구도가 범상치 않는 작품들, 섬세하기 그지없는 붓놀림이 느껴지는 작품들까지 다양한 그라피들이 전하는 위트도 여행의 기쁨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또 골목골목 사이에는 고풍스런 성당들이 숨어있어 견고하면서도 당당하게 지어진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는 건물의 외관은 오직 그 속의 숭고함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기품이 가득하여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다.


크로아티아의 모든 골목을 다 밟아 주리라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기지만, 지칠 때 가장 반가운 골목은 그늘진 골목이다. 그림을 파는 아저씨는 진작부터 자리를 펴고 있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그늘가에서 쉬고 있다. 보기 좋게 그을린 여자들의 반짝거리는 구릿빛 어깨도 보인다. 대부분이 여행자들인 도시, 그래서 그런지 이런 모습들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들도 어김없이 양손으로 햇빛을 가리고선 반짝반짝 빛을 내며 유혹하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가판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색 바랜 책과 소품들이 시선을 끄는가 하면 그 옆 앤티크 소파 위 바구니에 담긴 찻잔과 인형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걷다 치친 나의 피곤함을 녹여주는 것은 거리 곳곳에 있는 홈메이드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여행 내내 함께 한 내 여행 동지는 원래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 곳의 아이스크림은 그리 달지도 않고 계속 당긴다며 그 달콤함에 감탄을 연발하곤 했다. 여행자의 긴장과 피곤을 달래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여행도 여행자의 관심사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 인테리어 패브릭 데코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는 나는 여행지, 그 나라와 도시, 골목골목을  다니며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나의 일에 적용시키곤 했다. 유명 관광지도 흥미로웠지만, 어느 곳을 가든 나의 관심사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테리어, 옷차림, 생활 방식, 라이프 스타일, 바로 생활의 발견이었다. 


거울에 무심하게 걸어놓은 컬러스톤 목걸이, 유리로 만든 귀걸이, 반지, 액세서리 등 소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해 구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다. 디자인 자체가 독특하다거나 특별히 눈에 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세심하게 변화를 준 전통문양과 수제품이 주는 정성스런 손길과 고급스런 느낌은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형형색색의 원단과 다양한 소품들이 천장과 벽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고유의 색감과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아기자기한 패턴의 원단, 모자, 액세서리, 옷, 신발, 가방, 등은 모두 수제품이다.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감과 패턴을 보고 있노라면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대자연이 바느질 한땀 한땀에 표현되어 있는 듯하다.


생활의 고단함이 우리를 여행이라는 아름다운 길로 옮겨 놓지만 일주일이라는 짧은 일정 때문에 빨리 가서, 빨리 보고, 빨리 느껴야 한다는 여행자의 압박감이 오히려 나의 발목을 꽁꽁 묶어버릴 때가 있었다. 볼 것 많고 즐길 것 많은 도시와 그 위용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 유적지도 좋지만, 이런 여행자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려면 때로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로변이나 유명 관광지에서 벗어나 몇 블록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도시의 덩치 좋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숨어 있는, 상대적으로 작아서 운치가 느껴지는 좁다란 골목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다. 물리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차이지만 그 곳에는 전혀 다른 공기와 풍경, 시간이 존재함을 느낀다.


크로아티아의 골목은 다른 유럽 도시, 파리나 프랑크푸르트에 비해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조금 약한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여행을 잘 하는 사람은 시간과 싸우지 않는다는데 나에게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비워두는 여유가 필요함을 느낀다.


이번 여행이 끝나고 요즘 치명적으로 나의 발길을 잡는 건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빛, 아침 나절의 맑은 공기, 살갗을 간간히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일의 편의상 차를 운전하게 된 이후로 좋지 않은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걷지 못하는 괴로움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한들한들 걸으며 이곳저곳 기웃기웃하며 걸어다니는 걸 좋아했고, 운동 삼아 야구모자 눌러쓰고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신고 빠르게 걷는 걸 좋아했다. 살살 걷는 중에는 슬깃한 곁눈질만으로도 내 마음을 끄는 발견이 있었고, 빠르게 걷는 중에는 무거운 생각들을 쫓아버리고,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여행 중 내가 건져 올린 가장 큰 소득이라면 다시 걷는 즐거움이다. 시장, 앤티크 마켓, 골목 곳곳, 내 눈이, 내 마음이 향한 곳에는 언제나 내 발품이, 내 발걸음이 함께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여행은 여행지, 여행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함께 있어, 그들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노력이 있어, 그들의 배려와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크로아티아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되었고 우리는 행복했다. 


여행이 좋은 건 어린 아이의 마음이 되기 때문일 거다. 따부님~, 따부님~하며 연신 사랑하는 이를 향해 달려가고, 어렵다, 어렵다하면서도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어떻게 전할까를 연구하며 쪽지 뽑기를 준비하고, 여행 전부터 와인과 치즈에 쩔어 살겠다고 공표하더니 여행 내내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아이가 절대 피워서는 안될 시가를 그것도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을 꼬득여 피우게 하면서도 행복해 하고, 그 어린 동생은 유치한 자신의 본능을 꺼내주어 고맙다하면서도 아직 그때 취한 시가의 향이 가시지 않은 듯 사랑의 정의를 연신 바꾸어 대고 있고, 거리 곳곳에서 함께 한 이들의 표정을 잠시라도 놓칠세라 호기심 가득한 어린 아이의 맑고 검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순간포착의 묘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애쓰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내내 부끄러워하면서도 그 무거운 짐의 무게를 감내하며 찰칵찰칵 모든 이의 아름다운 표정과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을 담아낸 어린 풋내기 전속 사진사의 순수한 마음, 그리고 이 모든 장면장면 하나하나를 따스한 눈빛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끌어안아주었던 우리의 주술사도 거리 공연 때만큼은 스스로를 벗어던지며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아이들에게 탈선을 부추기고, 그 누구보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유치하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모습으로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카페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려도, 어린 아이의 표정으로 거리를 뒤뚱거리며 활보해도, 아무리 유치하게 행동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가 바로 여행자의 도시, 크로아티아가 아닐까..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일과, 마음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지만 소나기가 잠시 땅을 적시고 사라진 선선함이 묻어나던 밤, 여행의 여운이 남아서였는지, 여행지에서의 발걸음이 그리웠던 것이었는지, 참으로 오랜만에 걸었다. 예전에 쓰던 모자, 예전에 신었던 운동화 끈을 다시 고쳐 메고서 집에서 잠실까지, 석촌 호수를 한바퀴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걷고 또 걸었다. 많이 힘들 줄 알았는데 예전보다 더 열심히, 더 힘차게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길가의 건물들도, 보도블록의 모양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데 익숙했던 그 길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변경연 홈페이지에 있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글귀가 문득 떠올랐다. 나를 다시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여행은 삶을 바꾸기보다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꿔 놓는 것 같다.


비록 그들과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시장에서, 마켓에서, 골목골목에서 마주친, 나와는 다른 세상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던 그들의 삶의 표정 속에서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일에 울고 웃고 즐거워하며 괴로워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여행을 할 때 유명한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삶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경험에 감사하고, 나와 다른 곳에서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문화와 생각들을 이해하는 마음,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마음,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면서 바라본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번 여행은 분명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지리라 믿는다.


여행.. 지금은 일상으로 돌아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아쉽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부지런했더라면, 더 즐겼더라면, 하지만 그 짧은 시간들을 통해 내가 한 걸음쯤은 발전했다고 믿는다. 내가 그동안 새로운 삶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있었다는 것을 겸허히 깨닫게 된다. 이 여행을 하면서 조금 더 넓고 깊은 시선으로 여행하는 법을 배웠다. 크로아티아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행운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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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12:44:21 *.249.57.210

여행이 좋은 건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서일 것이다...여기 하나 더 추가해야 할 내용있잖아.

졸려 죽겠는데, 언니들이 침대에서 이리 앉히고 뒤집어 앉혀도 아무 불평없이
침대 머리를 붙잡고 사투를 벌인 그 꼬마 소녀 말이야...
카메라만 들이대면 "언니, 안녕~~"을 되뇌이며 어딘가 어색한 그 순간을 모면해보려는 수줍음 많은 꼬마 소녀.
걔 말이야...

네가 하고 싶은 말. 품고 있는 말 다하지 않아도
이제 조금씩 더 들려와...
그래서 어떤때는 덥석 다가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우리 같은 부류잖아. ㅎㅎ

혜향아.
야구모자에 운동화. 그리고 걷기.
우리 언젠가 같이 하자.
그냥 걷자고. 아무 말 하지 말고...

이런! 이러다 절대 못 헤어지겠는걸~! ㅋㅋㅋ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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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08:42:38 *.40.227.17
뭐.. 잠 좀.. 몬자면 어때여.. 언니야들과 그 많은 밤?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는데.. ^^
아직꺼정.. 그 후유증이 조~께 남아있는 듯 하지만여..

이리저리 뒤집고 다.. 괘한은데.. 사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이지만..
깨우는데도 비몽사몽인 아?를.. 침대헤드에 끌어다 세워 앉히는데..  두손 두발 다 들었어여..ㅋㅋㅋㅋㅋ

그래도.. 계속되는 그 날의 추억들이.. 하나하나 쌓이면.. 더 많은 이야기들로 추억의 꽃을 화~알짝 피우겠져?^^

근데여.. 언니.. 같이 겉는 거이는..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셔야 할 거이 같아여..
제가 한번 걸으면.. 먼별이가 생각?하는.. 산보.. 산책.. 수준이 아니거든여..ㄲㄲㄲ
대신.. 언제라도.. 수다떨며.. 걷는 거이는.. 먼별이의 수준?에 맞춰.. 오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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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8.28 19:00:36 *.251.224.83
저런!  일과의 전쟁은 몰라도 마음과의 전쟁이라니,
걱정이 되는데요?^^
모쪼록 승리하여 진정한 마음의 주인이 되기 바래요.

크로아티아의 모든 골목을 다 밟아 주리라,
와인과 치즈에 쩔어 살겠다,
두 가지 목표가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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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08:52:15 *.40.227.17
명석 썬배님~ ^^

무쟈게 방가~방가~에여..
안녕히.. 그리고.. 잘 지내시져? ^^

전쟁.. 지금보니.. 제가.. 표현이 좀.. 과했나봐여..
이 글.. 좀.. 비몽사몽에 썼거든여.. 헤헤^^

선배님의 바램.. 잘 받들어.. 진정한 마음의 주인.. 되도록 노력할께여..
진심으로 감사해여..^^

근데.. 선배님.. 또 언제 뵙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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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23:22:25 *.145.58.162
모랄까.. 참으로 신애언니스러운 글이에요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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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08:57:31 *.40.227.17
숙인~ ^^

나?스러운 글이라.. 칭찬이지?.. ㅋㅋㅋ

땅큐~. ^^

쎄이야~, 서울 시스터즈는 계속 된다는 거이.. 알고 있지?
노래.. 안무.. 기발한? 뽕짝필까지.. 어케하면.. 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을지.. 늘.. 생각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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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9.08.29 00:53:02 *.12.20.78
나의 룸메이트 향! 얘기도 많이 들어주고 잠도 같이 자 주고 같이 공감해주고.... 무엇보다 같이 걸어주고 골목 골목 돌아다니기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난 원래 통뼈지만 그 깡마른 몸에 지치지 않는 걸 보고 놀랐어.
암튼 우린 환상의 배추벌레였어.^^ 
보.고.싶.다...... 향.^^  이럴 줄 알았어. 여덟밤을 함께 보내고 나면 이렇게 그리워 할 줄 알았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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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09:05:48 *.40.227.17
춘희 언니~ ^^

우리.. 같이 한 거이가.. 정말.. 많았져?
언니가.. 울그이도 그렇고.. ?형이랑 좀.. 잘 맞는 거이 같아여.. ㅋㅋㅋ

글구.. 그날밤.. 언니야가 덥쳤?을때.. 비몽사몽이긴 했지만..
'언니.. 아름다워~' 한 거이는 진심이었어여~ .. 그리고.. 그 비내리던 그날 밤?도.. ^^

언니~, 나도 보고시퍼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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