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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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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31일 16시 05분 등록
 

질긴 놈


저녁을 먹고 한적한 공원을 찾아 우린 다음 일을 궁리했다. 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거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자."

"뭐가 그리 급해. 내일부터 하자"

"오늘 그냥 가면 내일 아침엔 나오기 싫을 것 같아서 그래 임마."

"하여간 성질하고는........ 그래 까짓거 오늘부터 하자. 그런데 집에는 뭐라고 하지."

"너는 회사가 늦게 끝나 우리집에서 잔다고 해. 그리고 나는........"

"그래 그러면 되겠네. 그러면 너는....... 너는 집에 뭐라고 할껀데."

"그러게 나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거냐. 내가 니 걱정 덜어줬으니까. 이번엔 니가 생각 좀 해봐."

"하여튼 생각하는 것 하고는. 간단하잖아 너는 우리집에서 잔다고 해."

"아! 그러면 되겠구나. 참 쉽네. 근데 말야. 내일은 어떻게 하지. 모래는......"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저녁이 다 지나고 밤도 깊어갔다. 괜한 객기를 부려 회사에서 먹고 자며 하자고 했지만 그 이상의 뾰족한 방법은 없다. 빽도 나와 같을까? 난 총도 칼도 없이 전쟁터로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 건물 주변은 가로등 말고는 불빛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모든 건물에 형광등 불빛은 사라졌다. 그나마 사무실 앞 가로등이 '여기가 니들이 들어갈 곳'이란 것을 알려주는 듯 버티고 있다.


경리누나가 남기고 간 열쇠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적막만 가득한 사무실로 들어가는 심정이 꼭 아무도 없는 다른 집에 몰래 들어가는 듯 했다. 우린 그렇게 밤손님처럼 조심조심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 옆을 더듬었다. 벽에서 조금 튀어나온 스위치가 손에 걸렸고 잠시 후 환해졌다.


"빽. 이제 우리 뭐하냐. 막상 오긴 왔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제부터 생각하면 돼지 뭐. 홍아. 근데 경리누나 정말 내일부터 안 나올까?"

"열쇠까지 우리한테 주고 같잖아. 근데 너도 신경이 쓰이긴 쓰이나보다."

"아니. 신경이 쓰인 다기 보다. 뭐 그렇다는 거지. 기왕 이렇게 된거 사무실에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 같으면 다시 오겠냐. 여태 있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하긴. 니 말이 맞는 것 같다."


뜬금없이 경리누나 이야기를 꺼내면서 빽은 사무실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장에는 컴퓨터 관련 서적과 캐드 매뉴얼도 보였다.


"홍아. 근데 아까 내가 물었던거 너 아직 얘기 안했거든."

"무슨 얘기."

"니가 왜 그렇게 여기에 집착하는지 물어 봤었잖아. 아까는 상황이 그렇고 해서 더 물어보지 못했는데 갑자기 니 뇌 구조가 궁금해졌어. 왜 그러는 거냐?"

"다 끝난 야기기 잖아.  뭘 또 그 얘길 꺼내고 그래. 너 또 마음 변하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고. 이상해서 말야. 내가 너하고 하루 이틀 지내 온게 아니잖아. 너나 나나 서로 오가며 같이 잠잔 적도 몇 달은 될 꺼고. 난 내가 너란 인간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의외라서 말야. 어쨌든 니가 함께 있자고 해서 그러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게 더 궁금해."


별 생각 없이 걷던 길에 뭔가가 떨어져 이게 뭐하는 물건인지 궁금할 때가 있는데 빽이 딱 그랬던 모양이다. 하긴 내가 빽이었어도 궁금했을 것 같다. 다른 얘들 다 떠난 마당에 산적같은 사장의 이상한 제안으로 엮인 상황은 분명 정상은 아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냐?"

"아니. 궁금하다기 보다 이상하잖아. 난 니가 무슨 약이라도 먹은게 아닌가 싶어 걱정된다."

"아이고. 눈물이 앞을 가리네."

"얌마. 농담 아니라니까?"


"아마. 이곳에 같이 왔던 애들도 모를 꺼다.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있잖아. 여기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라며 담임이 이야기 하던 그날 있었던 일 때문에 그래. 초등학교 시절부터 최근까지 선생님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

"그래. 뭔 일이 있긴 있었던거야. 그래 계속해봐."

"사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학교 다니면서 말썽만 안 피웠지 뭐 제대로 한 거 하나도 없잖아. 공부도 그렇고 자격증도 그렇고 말야. 이럴 줄 알았으면 너같이 말썽이라도 피워보는 건데 말야."

"이게. 확. 장난하지 말고."

"근데. 그날.  내가 끼워팔기라도 해달라며 이상한 소리 했었거든. 담임도 어이가 없었는지 기막혀 하더라고. 그러더니 애들 다 보내면서 나만 남으라고 그러는거야."

"왜 너만 남으라고 그랬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내가 담임이냐?"

"알았어. 그래서."

"난 또. 한 쿠사리 듣겠다 싶었지. 그날 도 애들 다 있는데 한 쪽팔림 당했거든."

"아. 새끼는 그거 니 생활이잖아."

"그래서 나도 그려려니 했지 뭐. 한 두 번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담임은 대범하잖아."

"대범하지. 너를 여기 추천해주신 걸 보면 대범하지. 암. 대범한 분이시지. 그럼."

"나 얘기 끝낼까. 여기서."

"알았어. 이제 그냥 듣기만 할게. 새끼 까칠하긴."


"그날 애들 다 가고 담임이 그러더라고.

'현웅아! 끝까지 남아라. 난 니가 공부를 못하고 자격증도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보다도 선생님은 니가 참 질긴 놈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교 성적과 자격증은 이미 지나간 과거다. 잘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는 헛똑똑이 보다 묵묵한 사람을 원한다. 그러니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일을 묵묵히 해라. 일이 어려워 할 수 없거든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 보면 뭔가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서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는 거야. 기막히지 않냐 배추 한포기 배추 두포기. 그리고 내가 다른 애들 보다 많이 떨어지니까 더 많은 시간 투자하라는 거야. 나를 믿는다면서."


"진짜냐. 그 거짓말."

"아. 새끼 정말. 속고만 살았나. 내가 왜 이런 말을 지어내."

"아니. 왜 담임은 너한테만 그런 말을 해주냐. 나한테는 어디 가냐고 묻고는 사고치지 말고 잘 하라고만 하던데."

"내가 어떻게 알어. 내가 담임이냐."


승진인 담임선생님의 나에게 해줬다는 말에 별 반응이 없었다. 평소에 연극 좀 더 봤으면 실감나게 했을 텐데.


"근데. 빽. 솔직히 나 누구한테 이런 얘기 처음 들어봤거든. 기분이 이상하더라고. 뭐냐. 거 있잖아. 이런 걸 감동먹었다고 하나. 암튼 그때 난 결심했어. 담임선생님이 시키는데로 하겠다고. 여태 한 번도 그렇게 못했잖아. 그래도 졸업하기 전에 한번은 해봐야지. 그런 이야기까지 해줘가며 소개시켜준 회사잖아.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고 싶어. 그리고 선생님은 내가 질긴 놈이랬어. 하지만 질긴 놈은 아니잖아 내가."


빽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듣고만 있었다.


"니가 잘 알잖아. 내가 얼마나 질기지 못한 놈인지. 한 번 시작해서 끝까지 해본 게 없잖아.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랬고. 자격증도 없잖아."

"왜. 있잖아. 달력공장 아르바이트. 그건 끝까지 했잖아. 그리고 넌 니가 재미있어 하는 것만 하잖아. 질릴 때 까지. 근데 왜 달력공장 아르바이트는 안 질렸을까? 어쨌든 그건 그렇고 그래서 이번엔 좀 질기게 들러붙어 보겠다. 그거 아냐."

"맞어.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게 어디 그러고 싶다고 그래지냐."

"그게 내가 널 찾은 이유다."


빽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라고."

"달력공장. 거긴 니 소계로 갔잖아. 난 내가 먼저 그만두면 니가 별 볼일 없는 놈으로 보일까봐 끝까지 갔던 거야. 물론 돈도 필요 했지만."

"너 그거 알어. 결국 거기서 니가 더 인정받았다는 거."

"난 그런 거 몰라. 암튼 나로 인해 니가 피해 받는게 싫었어. 이번엔 니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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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9.08.01 20:34:09 *.131.127.100

질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겨야 하는 이유는 알 것 같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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