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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일 01시 40분 등록

최근에 감기 때문에 고생이다. 읽어야 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데 몸이 비실비실하니 오랫동안 무엇인가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피곤이라는 공기입자가 내 방에 떠다니다가 퇴근하는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자석에 쇠붙이 붙듯 내게 달려드는 것 같다. 잠이 보약이라고 평소 믿는터라 쏟아지는 졸음에 굳이 저항하지 않고 8시이든 9시이든 잠이 오면 순순히 바로 동행한다.

 

일찍 자서 그런지 요새는 새벽에 눈이 잘 떠진다. 어느 날 인가. 아마도 그 날도 전날에 뉴스도 보기 전에 잠을 잤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새벽 4시이다. 더 자보려고 해도 정신이 또렷한 게 잠이라는 녀석이 이미 내게서 떠난 모양이다.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습관처럼 노트북을 켜고 음악을 틀어놓았다.

 

노트북을 켜면 자동으로 로그인 되는 메신저 창.

새벽 4시의 그곳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수많은 친구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불 꺼진 메신저 창을 보니 왠지 이질적인 느낌이 난다.

마치 시간의 틈을 잠시 벌리고 그 사이로 나 혼자 들어가 앉아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간의 공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눈을 뜨고 활동하는 그 어느 순간에나 내 곁에는 소통할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든, 온라인상으로 마주하든 말이다. 새벽의 그 시간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타인이 사라지고 만 남았기 때문이다. 두어 시간 남짓 되는 특별한 시간임을 알기에 그때는 나와 재미나게 놀았지만 만약 나와 소통할 사람이 그렇게 모두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사람 때문에 상처 입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누구도 세상에 홀로 내버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보면 그는 세상의 움직이는 힘을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본 명제 :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1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2법칙)

 

에너지는 창조될 수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에너지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는 일뿐이다. 단 에너지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일정액의 벌금을 내며,” 여기서 벌금은 일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손실된 에너지가 바로 엔트로피 Entropy이다.

 

리프킨은 이러한 엔트로피이론이 산업전반에 통용되는 절대 명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의 엔트로피이론을 소통의 역사에도 대입할 수 있을까?

 

최초의 인류는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의 표정이나 태도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자라는 표준화된 커뮤니케이션 툴이 발명된다. 문자는 인류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신의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공간적 제약이 없는 글은 멀리 있는 이에게 소식을 전달해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또한 글은 말과 달리 기록이 되고 저장이 되어 원한다면 몇 번이고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하며 인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서신의 역사는 최근 십여년을 제외하고 인류의 가장 훌륭한 소통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어서 19세기 말 과학이 신을 앞질러 가며 마술과 같은 기적을 사람들에게 선물할 시기, 전화가 발명되었다. 전화는 서신의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시간적 제약을 해결해주었다.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일지라도 전화선만 연결되어 있다면 실시간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전화는 말이 가지는 시간, 공간의 한계를 멋지게 해결해주었다.

 

그리고 최근 반세기도 안되는 시간 동안 이라는 새로운 소통의 툴이 생겨났다. ‘은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1 : 1 대화를 넘어 1 : 多 또는 多 : 多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말과 글, 그리고 전화와 웹으로까지 이어지는 소통의 역사를 보면 17세기 이성주의자들이 늘상 주장한 바와 같이 소통의 도구역시 눈에 띄게 진보했다. 그렇다면 진보된 소통의 도구만큼이나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소통을 더 잘하게 되었을까?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을까?

  

나는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웹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광장이 아닌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사람을 직접 보고 이야기 하는 것보다 모니터를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 세대가 되어 버린 듯도 하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많아졌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 만날 기회도 생겼고, 오랫동안 연락을 못했던 친구와도 웹을 통해서라면 바로 접속하여 말을 건넬 수 있다. 전에는 상상도 못할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장벽들이 거의 다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종종 모니터 안에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수많은 소통은 공해가 되기도 한다. 거짓 정보가 확대 재생산이 되기도 하며 한 사람을 살리고 죽이기까지 한다.

바로 소통의 엔트로피의 증가이다.

 

그렇다고 소통의 저엔트로피 사회를 위해 과거의 커뮤니케이션 툴로 회귀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소통의 도구의 비중을 적절히 분배하는 삶의 지혜는 필요할 것이다.

나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묻어 있는 사람이다. 이메일 보다는 못난 글씨라도 정성 들여 쓴 편지가 좋고 전화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내 오래된 버릇 중에 하나가 받은 편지는 절대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쪽지에 적은 글이라도 왠지 그것을 버리면 안될 것 같다는 강박관념이 생긴다. 아마도 나를 위해 그것을 적은 상대방의 시간과 정성이 자꾸 떠올라서 그러는 것 같다.

 

가장 좋은 소통의 방법은 직접 만나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소통을 하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눈빛에서 표정에서 목소리에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가 있다. 입으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그리고 느낌이라는 감각기관까지 소통의 대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더 활발한 소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소통의 도구를 진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꼭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소통의 엔트로피를 발생시켜 나를 더 바쁘게 하고 더 외롭게 만든다.

 

올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먼저 연락을 해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때론 술 한 잔식 하면서 소통의 저엔트로피를 실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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