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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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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일 19시 37분 등록

 

자기조직(self-organization)과 엔트로피 (entropy), 네겐트로피(negentropy) 그리고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

 

원래 내 연구 분야는 심리학의 한 분과인 운동 학습과 제어(motor learning & control) 였었.  물리학에서 태동되어 발달한 이 분야는 동역학(dynamics)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행동에 관한 학습과 발달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이다.

인간 행동을 자연의 물리적 현상과 동일하게 취급하며 그것이 어떻게 진화 혹은 발달하는지를 규명하려는 분야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인간행동에 관한 많은 원리들이 밝혀졌지만 여러가지 문제점도 있다.  특히 자연 물리적인 움직임이 아닌 의도적인 행동에 대한 규명은 아직까지 많은 장애물이 있다.

 나의 연구 영역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직관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직접지각(direct perception)에 관한 것이었다.  어떻게 펜싱선수들이 300 mm/sec 이내에 의도된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른 식으로 전술전략적인 의도적 행동을 생각하는 과정(인지과정 = 감각과정 + 지각과정) 없이 어떻게 선택적으로 수행하는가 였다. (현재까지 밝혀져 있는 사고과정을 거치는 행동들은 절대시간이 요구된다. 그 시간은 일반적으로  300mm/sec 이 넘는다.

예를 들어 반응시간 테스트 같은 것이다.  실험판에 있는 전구의 불이 켜지면 양 발을 발판에서 움직이는 시각반응은 예측 없이 행할 때 300mm/sec  이내에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빠른 시간에 반응하는데 (예를 들어 택시운전 기사가 돌발 상황에 대해 악셀레이터에서 급브레이크를 밟는 시간은 250mm/sec 정도로 빠르다.) 그러한 반응과정을 간단하게 말하면 직접지각이라고 한다.

 동력학에서 나오는 여러 개념중의 하나가 바로 엔트로피다.

엔트로피의 개념은 클라지우스가 1850년 열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열확산의 끊임없는 증가량의 레벨을 엔트로피라고 부른 것이 시초가 되었다. 열역학 제2법칙으로 에너지 소산의 법칙이라고 했는데 용어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폐쇄계 즉 에너지의 유입이 없는 하나의 계 내에서 에너지는 계 전체에 골고루 퍼지는 현상을 실례로 들고 있다. 유기체나 식물들은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므로 (음식물과 공기등을 통해서)개방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계에서는 엔트로피가 반대의 방향을 갖게 되는 데 이를 네겐트로피라고(negative + entropy) 하며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규정하였다.

인간의 운동행동에 있어서 엔트로피의 증가는 무질서도의 증가가 아닌 확산으로서 주어진 행동 내에서의 에너지의 균등한 분산이다. 예를 들어 골프 스윙을 하는 경우에 초보자들의 행동은 매우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이는 힘을 스윙에 필요한 근육군들에 적정하게 분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의 총량이 늘어나거나 즐어들어도 (에너지 유입이 많아지거나 즐어들어도)이러한 문제는 동일하게 존재한다.

자세와 동작의 훈련에 의해서 (학습과 제어) 학습자는 주어진 힘의 총량은 전체 동작의 일련의 과정에 적정하게 분산시킬 수 있게 된다.  물론 의도적이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힘을 빼는 방법을 학습하고 그 다음에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하기 때문에 이는 힘이 주어진 계 전체 (하나의 일련의 동작 전체)의 구조와 배열에 따라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의 분산은 집중된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지만 어느 순간에 우리는 힘이 전체적인 스윙의 과정에 따라 적정하게 배분 되어진다. 이는 프리고진은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라고 말한다. 산일구조는 엔트로피가 증가되어 혼돈 상태에 이르다가 순간적으로 새로운 질서로 변환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로 베나르 세포(Benard cell) 라는 것이 있는데 바닥이 평평한 냄비에 물을 데우면 열이 올라감에 따라 물이 뜨거워지다가 대류현상이 일어나고(엔트로피의 증가) 어느 순간에 분자집단이 협동하여 육각형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새로운 질서).이 육각형 무늬를 베나르 세포라고 한다.)

골프 학습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바로 어느 순간에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안정된 스윙을 하게 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모른다. 다만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습에서 수행곡선은 선형적으로 증가한다. 다시 말해 연습량과 수행점수(성과)는 비례한다. 이를 파워곡선(power curve)이라고 부르는데, 전통적인 학습은 이러한 원리에 준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복잡한 인간행동의 많은 수행들은 이러한 파워곡선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되는 경우 파워곡선의 학습 형태를 띠는 선형적인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멈추고 하다가 어느 순간에 핸들의 조정력, 패달에 대한 양발의 힘조절 그리고 몸의 중심 잡기등이 전체적으로 일련의 균형을 갖추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을 지나면 전체적인 균형을 갖추고 자전거를 타게 되는 것이다.

동력학에서 이를 익스포넨셜 커브(exponential curve )라고 부른다.  이는 선형적(linear)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고원현상을 보이다가 급격이 상승해서 레벨 업을 하는 비선형적(nonlinear)인 계단형태의 학습현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순간적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갖추는 각 부분들의 조직화를  자기조직(self-organiazation)이라고 부른다. 일단 학습이 완성되면 주어진 계 내에서는 전체적인 균형이 갖추어져 세부적인 조직화 (상세화)의 다음 단계의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

인지학습에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통찰 혹은 깨달음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자기 조직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자기 조직 현상은 일련의 준비단계 즉 비틀거리고 멈추고 혹은 넘어지는 과정(최근에 출판된 텔런트 코드라는 책에서 이러한 점을 설명하고 있다)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에 완성된다는 것이다.

나는 엔트로피를 무질서의 증가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주어진 계 내에서의 에너지의 분산이다. 왜냐면 주어진 계의 전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는 그것은 에너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확산에 의한 재구성)과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사건이나  행동들에 대한 단서들이 그 통합적인 전체성을 확보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무질서와 산만함을 뜻한다. 그러나 그 전체성을 확보하면 그것들은 사건과 행동의 내부 구조의 일부라는 것을 지각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담화글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 이상의 문장으로 구성된 글말을 담화(discourse) 혹은 텍스트(text) 라고 한다. 담화글은 단어와 문장이 하위 단위로 포함되지만 단어의 의미나 문장의 문법만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없다(Just & Carpenter, 1987). 예시는 심리학의 '언어구조와 과정'에서 나오는 담화글의 이해과정의 내용을 인용했다.

 

 창호지가 잡지 보다는 더 좋으며, 길거리보다는 해변이나 들판이 좋다.(중략) 어린 아이도 즐길 수 있는 놀이다. 일단 성공하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중략) 만,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다시는 할 수 없다.

 

문장 구성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연날리기라는 제목의 글이다. 우리는 각 부분들을 이해하여도 전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상당히 혼란스러우며 생각을 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산만해진다. 그러나 전체성으로서 연날리기라는 제목을 알게 되면 그 내부의 모든 것들은 균형을 잡고 연날리기의 하위구성요소로서 구분이 명확해진다.

 

담화글이라는 하나의 작은 단위의 수준이지만 동일하게 거대한 자연물리세계로서의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만 카오스가 된다. 깨달음과 통찰처럼 하나의 산일구조화 과정을 거쳐 또 다른 질서를 발견하게 될지는 혼돈의 끝에 이르렀을 때만이 알 수 있지 않을까?

 

리프킨의 견해는 인간의 관점과  물리적 환경의 영역에서 유기체의 생명 존속에 대한 경고로서 의미있지만 거대한 우주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는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던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차원에서 균형잡힌 자연의 일부였던 기존의 질서로 회귀하는가 아니면 차원을 높여 새로운 진화된 생명유기체로 발전하는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의 전체성을 확보하고 있는가에 있다. 현재의 우리는 자연친화적인 과거로 회귀할 수 있는 전체성을 잃었으며 미래의 새로운 전체성은 모호한 상태이다. 

달리 말해서,  요즈음 사람들은 도덕성이 형편없다고 말하면서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지만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명쾌한 도덕성의 규범적 준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떻게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인지가  분명했었다.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인가?

그것이 점점 혼돈속으로 빠져 들고 있는 이 시대의 엔트로피의 증가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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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9.08.02 19:55:14 *.131.127.100
어려운 소리 한다고 할까봐,,, 걱정이 된디,
그래도 내 생각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는 위안을 하면서?! 썻당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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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현
2010.03.01 06:58:53 *.196.253.20
PRITJOF CAPRA의 히든 커넷션을 읽다  백산선생의 칼럼을 읽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접근이 가능한
개념임을 알고 많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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