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예원
  • 조회 수 413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8월 3일 09시 54분 등록
극히 미시적 문화의 기호학적 분석

(이런 말도 안되는 어려운 제목 따위는 무척 싫어하는데, 그렇다고 딱히 붙일 만한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은 또 하나의 Me-story 일 것이다. 이번 주에는 나에 영향을 끼친 대중문화의 흐름편 정도 될까?

처음엔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 대중문화의 기호학적 영향을 분석해 보겠다고 가열차게 시작한 글인데, 100%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내 삶에 이런 영향을 미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기호학자들께서는 기호학적 분석이라는 어설픈 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시도를 가상케 생각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방송인 이다도시는 지난 2006년 모국인 프랑스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핵위협 속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나라에서 사는 게 얼마나 무섭니. 매일 거리에서 군인들 보고 살지?’라고 물어오는 프랑스 사람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이 ‘북한’과 ‘전쟁 가능성’이라는 외부 변수로 인해 좌우된다는 것은 서구가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은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세계 11번째 경제규모를 가진데다, 정보통신 강국으로 우뚝 선 ‘세계 일류’가 되었다는 자존감이 높아가던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1980년대를 열며 태어난 나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결실을 맺고 문화적 풍요가 무르익는 가운데 자란 첫 세대다. 미국과 유럽에 있는 동세대 친구들과 비슷한 문화적 환경에서 자랐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나 위와 같은 외부 시각의 간극을 알고는 충격에 빠진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문화를 향유하며 살았다고 생각해왔지만, 현대 한국의 대중문화의 흐름을 되짚으면서는 철저히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변천한 대중문화에 동화된 삶을 살아 이 자리까지 왔음을 알게 된 것이 이 글을 쓰며 얻게 된 큰 수확이다. 지금까지 나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문화의 ‘기호’들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짚어보고, 그 영향을 차분히 되짚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문화 –유년기

얼마 전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어렸을 때 흑백TV를 보며 자란 사람들은 자라서도 흑백의 꿈을 꾼다는 것이다. 1980년대 첫 컬러TV가 출시되었을 때 제대로 된 시력을 갖추게 된 나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컬러TV 1세대’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획기적인 컬러TV로 접하게 된 컨텐츠는 있는 진실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지도, 그리 건전하지도 못했다.

뒤돌아본 1980년대는 암울하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진실은 왜곡되고 은폐되었고, 군인 출신 대통령은 국민을 바보로 만들기 위한 이른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사상 유례 없이 독재자 정권에 의해 주도된 대중문화는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화려한 꽃을 피우는 듯 보였다. 1982년 프로야구 리그가 창설되었고, 정권은 영화산업을 지원했다. 대규모 문화행사 유치와 개최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미스 유니버스 대회와 아시안 게임, 서울올림픽 등이 잇따라 열렸다. 퇴폐 향락문화가 지배하고 도박문화가 횡행하며 따라서 정치에는 무관심해지도록 철저히 기획된 거대한 틀에 국민들은 우롱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빨갱이’와 ‘삐라’ 등의 단어가 넘실대던 이 시대에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는 뒤늦은 2000년대 이후에나 이 시대의 진실을 접하게 된다. 이 때도 가장 훌륭한 교과서는 영화가 된다. ‘꽃잎’과 ‘화려한 휴가’ 등은 흥행에도 성공하며 그 시절의 광주를 모르고 자란 젊은이들을 역사교육 시킨다.

이처럼 역사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었으나 은연중에 나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에 있어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과 행동 등은 국내에서의 천주교의 인식을 매우 좋게 만들었는데, 이는 한창 한국 천주교회가 성장하던 1990년, 작은 초등학생 꼬마가 제 발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게 하는 일로도 이어진다. 이 종교와의 만남은, 민주화의 과정에서 산출된 기호 작용에 근거한 것임을 이제 더욱 명확히 바라보게 되었다.


두 번째 문화 -10대

 근면성실하게 일해온 베이비붐 부모세대를 둔 덕에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은 1980년대 이후 청소년층이 누리게 되었다. 서울 강남 지역의 중산층 출신 청소년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용돈으로 상당한 구매력을 갖춘 신흥 소비 집단으로 등장한다. 10만원이 넘는 나이키 운동화와 게스 청바지를 가지기 위해 애쓰던 이 세대는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고 콘서트에 가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 강남의 학교에서는 ‘10만원 이상인 나이키 운동화 금지령’이 내려져 매일 아침 등교시간마다 나이키 운동화를 ‘잡기’ 위한 촌극도 벌어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이후 음반, 문화시장 전체 판도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기존까지는 10대의 문화는 주로 팝송, 중장년층은 트롯트 위주의 가요로 확연히 양분되던 시장이었다면, 가요의 폭발적인 인기와 이후 각종 댄스, 아이돌 그룹의 등장에 효시가 된 것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지금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에게 공식처럼 반복되고 있는 ‘앨범발매-활동기-앨범준비기-해체와 은퇴’ 등의 용어와 수순도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에 가요계에 정착된 것이다. 은퇴와 재결성 등 세대의 풍파를 겪으며 지금껏 17년째 장수하는 서태지의 뒤에는 벌써 30대 장년으로 든든한 사회적 중추가 된 이 1990년대의 팬들이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 자유화 정책과 문화 개방으로 인한 미국, 일본 문화의 유입 역시 나와 우리 세대를 강타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조기유학’ 1세대들의 수기가 출판되면서 강남권의 조기유학 붐을 조성했다. 이 조기유학 1세대의 대표주자는 영화배우 남궁원의 아들 홍정욱씨다. 영화배우처럼 수려한 외모와 하버드 우등졸업이라는 훌륭한 간판, 절대 멈춤 없이 살겠다며 에세이집 ‘7막 7장’에 마침표를 모조리 뺀 자신만만한 태도에 청소년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매료됐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홍씨는 헤럴드 미디어 인수로 30대에 언론사 사장을 지내고, 18대 국회의원까지 당선됐다. 그가 당선된 지역구인 노원구는 강북권 교육열의 중심지로, 청소년기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신혼부부들이 많이 첫 둥지를 트는 곳이다. 한때는 대표적인 서민 동네로 한나라당의 약세 지역이었지만, ‘제 2, 제 3의 홍정욱’을 꿈꾸는 이들이 이변을 만들어낸 이채로운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미드(미국 드라마)’가 열풍이지만, 1990년대 초 청소년들 사이에도 미국 드라마는 선풍적인 인기였다. 공영방송에서 앞다투어 ‘케빈은 열두살’, ‘천재소년 두기’ 등 미국 청소년 드라마를 방영해주었고, 뒤이어 미국 중산층 젊은이들의 고민과 사랑을 그린 ‘베벌리힐스 90210’ 등도 큰 인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제 뒤돌아 보건대, ‘베벌리힐스 90210’ 드라마는 한국 중산층 청소년들의 환상을 만족시켜줄 만한 소재와 내용으로 큰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풍적 인기는 해당 드라마 출연진들이 국내사의 샴푸 광고를 단발로 찍는 데 수억원대의 파격적인 개런티를 받을 정도였다.

지속적이고 미화된 이미지의 작용은 작은 소녀를 급기야 ‘미국 병’에 걸리게 만들었다. 입시위주의 학교 생활, 안정되지 않은 가정에서 탈출할 돌파구를 찾던 나는 미국에 가면 환상적인 세상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다. 조기유학을 보내달라고 우기는 고집불통 딸에게 내려진 처방은 미국에 계신 큰아버지 댁으로 짧은 어학연수를 보내 스스로 기가 죽어 오도록 하자는 것이었는데, 미국에서도 꽤 잘 적응하면서 부모님의 전략에는 큰 차질이 생길뻔했다. 다행히 큰 저항 없이 귀국하고 공교육 체계 안으로 들어왔으나 ‘다시 미국에 나가겠다’며 영어공부에만 매달리는 기현상으로 이어졌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쉽게 동화되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는 이후 선택의 순간마다 남과 다른 길을 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세 번째 문화 –대학 이후

역동적인 한국의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욕을 남겼던 사건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벌어진다. 1990년대 말 거품경제의 종말을 고하는 외환위기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사태가 그 것이다. 경영학과 대학 입시 면접에서 나는 이런 포부를 밝혔다. ‘제가 우리나라를 IMF체제 하에서 꺼내겠습니다.’ 당시 교수님들은 ‘자네가 졸업하면 이미 해결되어 있을 텐데?’하며 껄껄 웃으셨지만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대학생들의 시련은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나날이 깊어져만 가고 있다.

최악의 취업난으로 인한 대학 신입생들의 경력관리가 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외환위기로 어려워진 가정형편에 대학에 진학한 나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도 1학년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의 학사학위를 최단시간에 마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전공은 광고와 방송이었다. 특히 광고학과의 인기는 1970년대 후반생들이 이끌었다. 광고는 기호학에서의 인간의 욕망과 신화를 함축하는 하나의 담론이 되어버린 텍스트가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컬러TV를 보고,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90년대 말까지 살아온 그들에게는 광고가 그들의 기호작용에서 큰 영향을 했기에 이를 공부하고, 광고업계에서 일하고자 하는 꿈을 품게 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하는 가사처럼 어느새 선망의 직업은 ‘TV에 나오는 사람’이 됐다. 지금은 막강한 부를 구축할 수 있는 스타급 연예인이 되는 것이 초등학생들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우리 세대의 인기직업은 기자와 아나운서 등 조금 더 공부했던 사람임이 증명되는,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심지어 가톨릭 수도회 중에서도 최근 신세대 지원자들은 방송과 여러 매체를 통한 선교를 추구하는 수도회를 선호한다고 한다. 역사에 흐르는 대중문화의 기호 작용이 일반인뿐만 아니라 속된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의 선호체계까지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처럼 지대한 영향을 미친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흐름과 작용을 이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능동적인 문화 주체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특히 우리는 결국 소비 문화의 희생자이자 주요 주체였다. 똑 같은 쟌스포츠, 이스트팩 배낭을 매던 학창시절, 가느다란 여학생들마저 헐렁한 힙합바지와 닥터마틴 부츠를 신던 20대 초반의 모습이 똑 같은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같은 문화를 주체적 생각 없이 소비하는 열풍은 지금이라도 멈추어야겠다. 30대, 40대에 이르러 자녀를 키워나가면서도 똑 같은 군중의 하나로 키워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신있는 육아’를 하기 위해서는 당장 눈길이 돌아가는 비싼 수입 유모차 검색을 멈추어야 할 텐데. 그게 참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닌가 보다.

 

 

IP *.51.88.25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