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혜향
  • 조회 수 288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9년 8월 3일 09시 55분 등록
나의 수집 이야기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에서 접속의 시대를 강조하면서 더 이상 소유는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소유에 따르는 비용과 책임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항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인 접속을 하려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변화와 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접속의 반대인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여러모로 불리할 뿐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 저는 물건을 모으거나 소유하는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바비 인형 시리즈를 모으고, 동생이 우표 수집에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시큰둥했을 뿐이고, 그러다보니 부모님께 인형을 사달라, 장난감을 사달라, 옷을 사달라, 등 배우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해달라고 조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제 생일날 선물로 받은 인형을 친한 친구가 무지 부러워하면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친구에게 덥석 안겨주기도 했고, 저에게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 그들에게 더 긴요하게 쓰일 것 같은 물건들은 동생들에게,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유일하게 물욕과 집착, 이를 테면 소유욕을 보인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예림당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창작 동화책 시리즈였습니다. 제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무렵까지 살았던 동네 언덕길 큰 사거리 약국 옆에는 조그만 책방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친구를 따라 간 그 곳에서 그림이 너무나도 예뻤던, 색감이 너무나도 환상적이었던 그 책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는 용돈을 아끼고 아껴, 명절 날 큰 집에 다녀와 세뱃돈 받은 것을 모아서, 때로는 가득 차지도 않은 저금통을 따서, 엄마를 졸라서, 서점에 가 한참을 고르고 고른 동화책 한권을 손에 넣고는, 집에 오는 내내 펼쳐보며 얼마나 뿌듯해하고 행복해했는지 모릅니다. 혹여나 책을 펼칠 때 구김이라도 갈까봐 책벌레 여동생이 보여 달라는 것도 모른 체하며, 한번만 보여주라는 엄마의 말씀에 말도 안 되는 변명만 하면서 되도록 보여주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노심초사하며 조심조심 얼마나 소중히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단초가 되고 연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제게는 어떤 물건에 꽂히면 그걸 집중적으로 모으는 것을 즐기는 수집벽이 있습니다. 같은 디자인의 다른 칼라, 같은 아이템의 다른 버전, 컬렉션, 시리즈별로 모으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행을 가면 주로 걸어 다니면서 오래된 공간, 가게 같은 데 들어가 거기서 예쁜 것, 특이한 것, 브랜드 있는 컬렉션 같은 것들을 보고, 사기도 하고, 모으는, 그런 게 재미있습니다.


제가 좋아하고 제가 지향하는, 북유럽의 자연목과 실용적인 디자인이 만나 혁신적이면서도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벨기에의 한 출판사 ‘BETA PLUS' 와 싱가포르의 출판사 ’PAGE ONE' 에서 나오는 인테리어 컬렉션은 신간이 나올 때 마다 꼭 구입하고, 일본에서 출간되는 파리의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한 포켓북 사이즈의 ‘에디션 드 파리 시리즈’는 파리의 깊이 있는 문화와 생활을 동경하는 제게 마치 그 곳을 여행하는 듯한, 그 곳에서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즐거움과 만족감을 줍니다. 프랑스의 일러스트 작가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녀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일러스트와 색에 반해 그녀의 그림책은 모두 가지고 있고, 보태니컬 꽃그림의 대가 피에르 조셉의 장미꽃 시리즈, 백합꽃 시리즈를 구성한 아주 오래전에 출간된 책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민예연구가 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 이야기>에는 수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수집에는 지(知)보다 의(意)와 정(情)이 강하게 작용한다. 수집에 열중하는 사람은 매사를 이성적으로 처리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다. 타산적인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자신의 재정적인 상황을 망각하고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어 한다.”

이성적인 판단에서 보면 이러한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뭔가 자신을 몰입하는 대상을 가진 사람에 대해 야나기 무네요시는 ‘인간다움’을 지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취미나 연구를 위하여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으고 먼 곳까지 나가 발품을 팔고 찾아 헤매는 이들의 몰입을 저는 이해합니다. 저 역시 수집하는 시리즈의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면 하루라도 먼저 보고 싶어 마음이 설레고, 마음에 드는 옷이나 가방, 신발은 그 당시만 꾹 참고 빠져나오면 되는데 제가 꽂힌 책과 일러스트, 그림들은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일년에 몇 번 꾸지 않는 꿈에서도 보입니다. 때로는 다른 곳에 쓸 돈을 아끼고 아껴 여기에 투자합니다.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인터넷으로, 경매를 통해서, 해외로 나가는 인편이 있으면 부탁을 해서라도 꼭 손에 넣어야 마음이 놓이곤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소유욕이 강해서, 단지 소유할 목적에서 그것들을 모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부터 당장 쓸 것도 아니고, 오랜 기간 묵혔다 내다 팔 목적이 있는 고가의 명품들도 아닙니다. 이제는 습관이 되다 시피한 중독성 강한 수집벽이 저의 재산이고, 이것만이 저의 가능성과 창의성을 키워줄 보물이라는,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한 번은 쓰여 질 것만 같은, 왠지 그럴 것만 같은 가능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하나 밖에 없다고, 혹시나 상처 낼까, 흠집이라도 날까, 자주 꺼내어 보지도 않는 것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모으고 모아 데는지, 그거 살 돈이면 좀 더 멋지게 치장하고 여유 있는 문화생활을 즐길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의 수집벽은 여전히 그칠 줄을 모릅니다. 중독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이 언급한 것처럼 현대가 접속의 시대라고 해서 소유하는 것이 반드시 불리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저 머리가 복잡할 때, 스트레스가 좀 쌓였을 때,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면 저는 그동안 수집한 책과 그림들을 꺼내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제 수집의 흔적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의외의 소득을 올리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고 제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모으는 작업이 계속 되다보니 이것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제 생각에, 제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저만의 특별함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것은 저에게 정서적인 포만감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마음의 부자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칠 수가 없습니다. 그쳐지지가 않습니다. 바쁘고 지친 생활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에너지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동시에 제 습관이자 놀이이자 취미활동이면서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행복이라는 생각입니다.


저의 수집품, 저의 유일한 소유의 흔적들은 하나같이 최고의 명품이 아닙니다. 제 눈에 아름답게 보였고, 제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에, 제가 선택했고, 제가 저의 명품으로 인정했을 뿐입니다.


수집한 물건은 자신의 온기와 오랜 손때를 묻혀 시간을 담아야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시도했던 수집은 제 마음의 발자취, 제 학습과 탐구의 기록, 제 발품의 흔적, 그것을 어루만진 제 손때, 그리고 그것과 함께한 제 추억, 제 역사의 시간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선택된 물건들이기에 너무나 귀하고 소중합니다.


요즘 들어 제게는 새로운 수집벽이 하나 추가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여행지에서 그 곳의 정취와 감성을 담은 그림을 모으고, 사진을 남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때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여행의 기억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일년에 한번, 방문한 여행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곳을 정해 그 곳에 대한 나다운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성당 현관 입구 발아래 새겨진 독특한 문양에, 또 어느 날은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리 간판을 보면서,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투영하는 자연의 색감, 번잡한 듯하지만 아름다운 질서를 내뿜는 도시의 야경, 심지어는 음료수 병에 붙은 라벨, 초콜렛에 새겨진 디테일한 문양까지, 작은 것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것에 집중해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고, 눈으로 심고, 마음에 새기고, 샘플을 모으고, 사진으로 남겨 매일 밤 숙소로 돌아와 사진기를 돌려보며 간단한 스케치와 함께 느낌을 기록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여행의 정취를 한껏 담은 이 기록들 위에 세상을 향한 저의 감동을 더해 스케치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달력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을 듯하고, 액자를 끼워 어울리는 공간에 걸어두어도 괜찮을 것 같고, 앞으로 쓰여 질 저의 책 한 페이지에 담아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이야 딱히 어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애초부터 존재하는 바이고, 이런 식으로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도 인간의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아름다운 대상,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본래의 진면목을 그 행위에서 찾아내고 또 그것을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수집품 하나하나는 나의 친근한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내 은사이기도 하다.”


수집은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길고 긴 여정인 동시에 자신의 인간적인 향내를 드러내는 가장 열정적인 일이라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말은 저의 초라한 수집 경력을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합니다. 저를 인간다운 수집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다가가게 합니다. 저를 아름답고 열정 가득한 수집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IP *.40.227.1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