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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曉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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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일 10시 58분 등록
 

소유와 공유의 차이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데이비스 마이어 교수는 그의 책 ‘미래의 부’에서 인류 역사에서 부가 어떻게 이동해 왔는지 생생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이 불과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원시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농업사회의 문을 연 후 호미와 곡괭이 등을 이용해서 땅에서 부를 창출하기까지는 4계절, 즉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산업시대에는 공장을 세우고 기계를 돌려 시간단위로 돈을 벌었다. 그래서 ‘시간은 돈이다’라는 슬로건이 산업사회를 대변했다. 기계가 대량으로 물건을 생산하는 시대는 사람들의 소비욕망을 자극했고 부추겼다. 산업시대는 물질을 풍요롭게 하고 편리한 생활을 제공했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는 기계의 부품 정도로 평가 받았다. 산업사회는 인간소외라는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산업사회에서 사람을 고용할 때 “당신은 누구인가?” 혹은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를 묻기보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제는 정보와 지식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전자혁명의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젠 ‘정보가 돈이다’라고 한다. 시간과 공간의 혁명, 속도의 혁명, 그리고 지식의 보편화 등이 이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이제는 자본과 학력 대신 전자상거래와 접속을 통해 돈을 벌고 있다. 전자혁명의 시대는 소유의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공유와 접속의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농업시대와 산업시대가 상호배타적인 ‘소유’를 통해 삶이 존재했다면 오늘날에는 ‘공유’를 통해 삶이 존재하게 된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 소유에서 공유로의 변화는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소유와 공유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소유는 차별을 가져오고 경쟁을 가져온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삶의 갈등은 소유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리고 그 소유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문제로 돌아간다. 우리는 항상 소유함으로써 결론을 맺고 마음도 그때서야 비로소 쉴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의 쉼일 뿐 또다시 다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간다.


소유와 경쟁이 수요와 공급의 질을 향상시키고 다변화하는 기회가 되지만 이는 양적인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양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없다. 정신은 저마다 아름다운 빛깔을 띠고 있다. 소유의식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데 한계가 있다. 정신은 자유를 갈망하며 사랑을 갈망한다. 더욱더 열린 세계로 날아가고자 한다. 소유하면 소유당한다고 한다. 집을 소유하면 결국 집의 속박을 피할 수 없고 자동차를 소유하면 결국 자동차의 속박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손을 뻗어서 붙들면 도리어 그것이 내손을 붙드는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경제적 개념은 소유에서 출발하고 있다. 여기서는 등잔을 태우는 초불과 같이 소유할수록 주변을 점점 고갈시키게 된다. 하지만 소유할수록 자신이 확대되고 강화된다고 여긴다. 반대로 무소유가 되면 나 자신이 부재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 소유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소유하면 할수록 나의 존재가 그만큼 확보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렇다면 최초의 소유는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나라는 의식영역의 확보이다. 자의식을 체감하는 것이다. 자의식을 체감할수록 스스로 존재한다고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자의식을 더욱더 확보하고 강화시키는 데로 귀결된다. 이것이 인생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느낌과 생각, 감정, 그리고 육체 역시 자의식의 연장인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연장으로 물건과 집, 토지, 신분과 교육도 여기에 포함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나의 연장이며 소유물의 일종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끊임없이 주변을 끌어당기려는 본능적인 패턴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더 빠른 속도로 주변을 흡수하고 주변환경을 파괴해 갈 것이다. 그것을 부분으로 쪼개보면 아주 작고 사소한 우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고갈을 위협하고 있다.


소유개념이 온통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 속에 갇히는 일이며  세상과 분리되는 길이다. 이중성의 함정에 빠진다. 양극단 둘만이 존재한다. 공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접속의 시대에는 공유의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 물질경제에서 정신경제로 옮겨갈수록 더욱더 공유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제 기존의 소유개념에서 공유개념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소유하려는 영혼, 소유되어진 영혼은 그물에 갇힌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것을 영원한 윤회라고 부른다.


소유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가?

우리는 어떻게 더 많이 공유하며 공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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