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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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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1일 08시 56분 등록

부정적 소심 극복하기

부정적 소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을 패배의식에 젖도록 강제하는 자기비관이다. 긍정적 소심이 배려, 경청, 협동심인 반면 부정적 소심은 스스로를 패배의 늪에 빠지게 한 채 나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올가미 또는 덫과도 같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떠한 일을 하든 스스로를 콤플렉스에 갖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부정적 소심은 시간이 경과하면 경과할수록, 그것이 활개치도록 놓아두면 놓아둘수록 마치 이분법으로 끊임없이 증식하는 단세포 생물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나를 장악하게 된다. 처음에는 난 이래서 안돼, 난 저래서 안돼.... 하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자신을 곧추 세우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하나 쌓여가는 실망, 좌절, 포기는 서로 얼키고 설키어 패배의식으로 만들어 진다. 또한 이것은 끊임없이 커지는 불가사리 마냥 확대되고 넓어지게 되어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린 채 자기 자신을 패배의식 아래, 굴욕적인 노예처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원래의 내 모습이 어떠한지, 내가 잘 하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이것하나만큼은 자신있었다 하는 것조차 잊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감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자신 자체를 잃어 버리는 것이다. 즉, 삶의 기본이자 주체가 되는 자신을 잃게 됨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방향, 의미, 소명, 책임 그리고 인생의 목적까지 모두 한꺼번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도록 만드는 이 무서운 부정적 소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부정적 소심을 제거하거나 최소한으로 줄인 후 긍정적 소심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우리가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먼저 자기정체성이란 무엇이며, 패배의식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인지 그 연결고리를 찾아 보자.

자기 정체성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기저의 근간이 되는 ‘자아(自我)’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자아’란 무엇일까. ‘자아’란 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로서 나 자신을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로써만 존재하게 만들어 주는 독특한 형질(形質)이라 할 수 있다. 인도의 명상가인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아’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자아란 관념ㆍ기억ㆍ결론ㆍ경험과 이름을 붙일 수 있거나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온갖 형태의 의지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행동을 통해 의식적으로 반영되었거나 아니면 미덕으로써 정신적으로 반영된 종족ㆍ단체ㆍ개인ㆍ친족 등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축적된 무의식의 기억, 이 모두를 쫓는 것이다.’

조금 어렵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정의를 보자. 유명한 심리학자인 고든 올포트는 ‘자아’를 ‘우리 존재 속에 있는 일종의 핵심’이라 축약하여 정의 내리고 있다. 즉 우리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관념ㆍ기억ㆍ결론ㆍ경험ㆍ의지ㆍ의식 등을 통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 발현형태인 정체성에는 대개 두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첫째는 철저히 자신의 관점으로 접근한 개인적 정체성이다. 이것은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하는 것으로써 자아가 요구하는 욕망, 의지, 열정 등을 따라가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 개인적 정체성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기다움’이 될 것이다. 즉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개인적 정체성에 따라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아가 요구하고, 바라고, 원하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가장 행복하고 위대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정체성으로, 이것은 내면의 목소리보다는 사회적 활동을 통한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지게 되는 정체성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지위, 책임, 역할, 체면 등 긍정적일 수도 있겠지만 부정적일 수도 있는 여러 가지 다양성이 포함된다. 개인적 정체성이 ‘자기다운 삶’이라고 본다면 사회적 정체성은 ‘사회 안의 나’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보다 쉬운 예를 한가지 들어보도록 하자.

 

한 소심한 대학생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부모는 그가 법대에 진학하여 법관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왜냐하면 법관이 되면 높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가질 수 있으며, 좋은 결혼은 물론 재물 또한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집안에서 고조 할아버지가 법관을 지내신 이후 끊어진 명맥을 그가 다시 이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심한 그는 부모의 소원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법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을 배우며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법이란 것이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별 문제없이 이끌어 가기 위한 규정이나 규칙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즉 인간이 법을 발 밑에 디딘 채 자랑스럽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 아래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학교 내 사회 봉사활동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면서 나눔을 몸으로 실천하는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고통받으며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선배들의 정성과 열정에 금방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또한 전염되고 말았다.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웃고 슬퍼하며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의 소원을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자아가 이끄는 대로 길을 떠나기엔 그는 너무 소심하고 유약하기만 했다. 마음에도 없는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는 고시에 낙방했으며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한번에 만족할 만할 결과를 얻기란 힘든 것이라며 그를 위로하였고, 다시 힘을 내어 도전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는 괴로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싫기만 했다....

  

위의 예에서 보게 되면 부모의 뜻에 따라 법관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정체성을 의미한다. 사회의 정해진 룰 안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회적 지위, 계급, 체면, 책임, 역할 등을 자신의 모습으로 내세우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 정체성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개인적 정체성이 자아의 욕망대로 ‘자기다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면 사회적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 혹은 활동을 통해 얻어낸 성과의 결과물을 통해 나를 대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테면 우리가 여러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공간을 가면 무도회에 비유한다면, 이 곳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얼굴에 쓰거나 입어야만 하는 가면이나 복장이 곧 우리의 사회적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패배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정체성과 연관이 많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 계층이 존재한다. 민주주의 사회이고, 국민이 주인이며, 만민은 평등하다는 구호를 아무리 외쳐대고 홍보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을 하게 되며 끊임없이 한단계 위로 올라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에서 뒤처짐은 곧 추락을 의미하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참한 삶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패배의식은 대개 사회적 기준 또는 잣대에 의해 만들어 진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얼키고 설키며 사는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삶 혹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존재하며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도태되거나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즉 패배의식이란 사회적 기준을 쫓아가지 못함으로써 생겨나는 일종의 사회병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기 비관이나 자기 비하가 심해지게 되는 것이며,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게까지 만든다.

특히나 소심한 사람들의 경우 사회적 적응력이 다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잣대를 만족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해결을 위한 온갖 스킬을 배우고, 자신감 생성을 위한 극기 훈련에 참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부여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하지 못할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게 될 때 바로 패배의식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소심한 대학생은 법관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괴로워 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사회적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실망감, 자기비관, 자기비하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심한 대학생이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 보도록 하자.

 

소심한 대학생은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집안의 장손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책임 그리고 법관이 되었을 때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정체성 등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이 아닌 자신 내부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까지 속이는 가식적인 삶을 살기는 싫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마음 자체가 끌리는 그러한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거창한 사회적 성공없이 그저 평범하게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점점 말수가 없어졌다. 부모님과의 대화도 거의 끊다시피 했다. 괴롭고 외로웠다. 그리고 슬펐다. 펼쳐져 있는 법전 위로 그의 뜨거운 눈물 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횟수가 점차 늘어갔다. 그는 이렇게 지낼바에야 차라리.... 차라리...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 실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이 더더욱 싫어졌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면 봉사활동 동아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선후배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눔을 실천하였다. 자신의 고통은 만나는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1/10 아니, 1/100도 되지 않을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더욱 더 열심히 봉사활동에 참여하였고, 그러한 노력으로 삶의 억눌림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들의 표정에 작은 미소라도 번지게 될 때, 그 또한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눔을 실천할 때 이 세상 어떤 순간보다도 행복했고 즐거웠다.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어려움과 땀을 함께 나눌 때 자기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로소 자기 자신의 소명을 찾았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 삶이 바로 ‘자기다움’의 삶임을 알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후, 마침내 그는 사회적 허울에 불과한 법의 길을 버리고, 나눔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집안에서는 한바탕 태풍이 밀려 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권유나 설득 심지어는 으름장 조차도 더 이상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결심은 확고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길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웃고 있었다. 행복의 향기가 몸전체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부모들은 그의 결심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길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자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소심한 대학생의 경우 사회적 정체성을 포기한 대신 자신의 정체성 즉 자아(自我)가 원하는 길을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회적 기준의 성공보다는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어렵고 힘든 결심이긴 했지만 결국 ‘자기다움’을 실천하여 개인적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자기 비관, 자기 비하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던 패배의식을 깨끗이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다.

소심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한 예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리를 괴롭히는 부정적 소심은 처음에 얘기한 바와 같이 사회적 정체성과의 이격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기준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만들어 놓은 불공정 룰에 다름 아니다. 애초 시작부터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사회적 기준에 목매지 말라. 수많은 대중들이 가고 있는 길이라고 해서 나도 내키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헉헉대며 뒤쫓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패배라고 하는 단어는 경쟁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발을 딛고 숨쉬며 살아가는 이 사회는 어울림과 화합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경쟁이 기본으로 깔려져 있는 장소이다. 사회적 성공이라 함은 타인을 딛고 일어서서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피라미드 형태는 사회적 성공틀의 대표적 모형이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좁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성공한 사람들 보다는 실패한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타인과의 경쟁은 피치 못할 패배를 불러 오지만, 나와의 치열한 경쟁은 나를 성장하도록 만든다. 고로 자아의 욕망이 무엇인지 꼼꼼하게 잘 살펴보고, 그것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실행방법을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일 수 밖에 없다. 사회에서 양육되었고,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부대끼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우리란 존재는 사회의 모태(母胎)이자 근원이며, 구성원이란 것이다. 결코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부품이 아니며,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더 좋은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 각자 해야 할 사회적 책임, 사명 그리고 각자의 소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쫓아 사는 삶이 바로 개인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자기다움’의 삶인 것이다.

 

해결 방안 모색하기

보다 구체적으로 그림을 예로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아래의 그림에는 X축과 Y축으로 나뉘어진 4개의 상한이 존재한다. 먼저 X축은 사회적 기준 혹은 잣대로써 오른쪽으로 갈수록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며, 왼쪽으로 갈수록 실패를 가리킨다. 즉, X축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보았던 사회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음 Y축은 개인적 기준으로써 위로 갈수록 이상적인 자아를 의미하며, 아래로 갈수록 실제적인 자아, 현실의 나와 유사한 자아를 가리킨다. 즉, Y축은 개인적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개인적사회적정체성구분1.jpg 

(그림1)


각 상한별 성격과 내용을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구분

사회적 기준

성 공

실 패

 

제Ⅰ상한

▶ IDEAL (이상적인)

▶ 사회적 기준 : 성공/개인적 기준 : 이상적

▶ 가장 이상(Ideal)적 삶의 형태

▶ 현실에서 달성 불가능

▶ 종교 창시자들(예수, 부처, 마호메트..)

제Ⅱ상한

▶ PROFOUND (심오한)

▶ 사회적 기준 : 실패/개인적 기준 : 이상적

▶ 심오한(Profound) 개인적 사상관

▶ 홀로 도(道)의 길을 걷는 사람들

 

제Ⅲ상한

▶ EXCELLENT (훌륭한)

▶ 사회적 기준 : 성공/개인적 기준 : 실제적

▶ 가장 현실적 성공의 형태

▶ 능동적/적극적/치열한

▶ 사회적 선도자, 장인, 사상가 등

제Ⅳ상한

▶ NATURAL (자연스런)

▶ 사회적 기준 : 실패/개인적 기준 : 실제적

▶ 가장 일반적 삶의 형태

▶ 수동적/피동적/적당한

▶ 일반적 대중


○ 제Ⅰ상한 : IDEAL

제Ⅰ상한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적 기준에서는 이상적 자아를 추구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큰 성공을 이루는 것으로, 인간의 삶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삶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Ⅰ상한의 이름을 IDEAL(이상적인)이라 붙일 수 있긴 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는 거의 이루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본 다 할지라도 종교를 이 땅에 뿌리내린 창시자들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어찌보면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 제Ⅱ상한 : PROFOUND

제Ⅱ상한은 사회생활과는 무관하게 나 홀로 독야청청 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성격이다. 사회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실패한 사람들일 수 있지만, 개인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이상적인 자아실현을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은 2가지 경우일 수 있다. 처음에는 사회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적 룰을 따랐지만, 점차 개인정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 간의 격차를 느끼게 되면서 이상적 자아실현을 이루는 방향으로 옮겨간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예 처음부터 개인적 정체성 만을 추구한 경우로, 이들은 사회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홀로 자신의 자아실현만을 위해 명상하고 수양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제Ⅱ상한의 이름은 PROFOUND(심오한) 이다.

 

○ 제Ⅲ상한 : EXCELLENT

제목 그대로 제Ⅲ상한의 이름은 EXCELLENT(훌륭한) 하다. 현실에 굳건하게 발을 딛고 실제적 자아를 추구함과 동시에 사회적 성공까지 이루어낸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이상적 자아실현이 절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 안에서 맺어지는 여러 인간관계를 통해 얼키고 설키고 부딪히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개인적 정체성 또한 이러한 사회 안에서 발견하고 이루어 가는 길이 보다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며, 소위 일반 대중들이다. 그러나 일탈을 꿈꾸며 성공을 바란다. 삶의 변화를 원하며 한 차원 위로의 이동을 원한다. 자신의 ‘자기다움’을 이룸과 동시에 사회적 성공까지, 소위 2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제Ⅲ상한은 현실에서 우리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영역으로, 사회적 리더인 선도자 혹은 사상가, 기술로 시대를 이끄는 장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의 삶은 쉽게 달성될 수 있는 삶은 아니지만 우리가 꿈꾸는 삶이기도 하다.

 

○ 제Ⅳ상한 : NATURAL

제Ⅳ상한은 실제적 자아의 모습에 가깝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혹은 실패한) 영역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구간이자 가장 일반적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은 대개 피동적, 수동적 그리고 적당함과 안정됨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적으로는 보다 나은 환경과 위치, 계층으로의 수직이동을 원하지만 생각에 그칠 뿐, 일상생활은 큰 변동이나 변혁이 없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제Ⅳ상한의 이름은 NATURAL(자연스런)이다. 엄밀히 따져본다면 이 상한의 이름은 FAILURE(실패) 혹은 ORDINARY(평범한) 란 단어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다. 하지만 NATURAL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기 때문이다. 일상 반복적이고, 안정적이며 큰 무리 없이 현재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마인드이며, 이것이 물 흐르듯 세상을 살아가는 자연적인 흐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기준을 조정하라

자, 이제 해결방안을 찾아보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는 바로 제Ⅲ상한의 EXCELLENT(훌륭한)이다. 실제적인 자아실현을 이룸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성공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영역이 바로 우리가 안착하기 원하는 구간인 것이다. 일반 대중들이 모여 있는 제Ⅳ상한에서 제Ⅲ상한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

 

1) 개인적 기준을 실제적인 부분으로 조정하라

앞에서 살펴본 그림1에 의하면 개인적 기준이 이상적에 가까운 구간은 제ⅠㆍⅡ상한에 해당되는데, 이 두 구간의 특징은 사회적으로 성공 혹은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Ⅰ상한인 IDEAL 구간의 경우 사회적 성공에 가깝기는 하지만 실제 사례를 감안하면 사실상 일반인들이 달성하기 불가능한 신의 영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제Ⅱ상한인 PROFOUND 구간의 경우 또한 사회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혼자 만의 개인적 이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사회적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하겠다. 즉 이 두 구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회적 정체성과의 접점이 없고, 무엇보다 개인적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개인적 기준이 높다는 것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개인적 기준이 높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개인적 정체성이 높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자아의 모습이 실제적이라기 보다는 이상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즉 실제적인 내면의 나의 모습과 이상적(무의식적으로 바라는 나의 모습)인 모습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칼 로저스는 이와 같은 차이를 실제적인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의 모델을 보게 되면 실제적인 자아는 사람의 성격적인 특성인 자신의 강점과 한계, 좋고 싫음, 외모와 정서적 깊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이상적인 자아는 한마디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되길 바라는 모습으로, ‘나의 존재는 이러이러하게 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은 타인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사랑과 애정, 존경과 관심, 부러움까지 받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상적인 자아와 실제적인 자아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 사회는 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개인으로서의 나는 사회의 일원으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칼 로저스는 이 차이를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자기존중이 생길 수도 있고 혹은 자기비관이나 자기 비하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 차이에 대해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했다는 식의 긍정적인 반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자기존중 의식을 키워주게 되지만, 이와 반대로 기대치가 높아 항상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게 되면 패배의식의 기초가 되는 자기 비관, 자기 비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부정적 반응을 긍정적 반응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을 위해서는 개인적 기준을 조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즉 사회적 기준이 되는 X축을 상향화(그림2)하여 개인적 정체성의 실제적 부분(실제적 자아)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제ⅠㆍⅡ상한의 영역은 줄어드는 반면 제Ⅲㆍ Ⅳ상한의 영역은 확장되게 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제Ⅲ상한의 영역이 늘어나는 효과가 나타난다.

 

개인적사회적정체성구분2(개인적기준 조정).jpg

 

(그림2)

 

자, 여기서 한가지 더. 그렇다면 개인적 기준의 상향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혹은 실제적 자아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3가지 실천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 실제적 나를 발견하라

② 사회와 나를 연결하라

③ 사회 속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라

각각에 대한 세부내용은 이 장이 아닌 다른 장에서 보다 세부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다.

 

2) 사회적 성공 기준을 낮춰라

두 번째 방법은 사회적 기준을 하향시키는 것이다.

먼저 그림 2에서 본 것처럼 개인적 기준을 상향(X축을 개인적 기준의 이상적 방향으로 이동)시키게 되면 실제적 자아가 차지하는 공간이 위로 올라간 공간만큼 늘어나게 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사회적 기준을 실패방향으로 하향(Y축을 사회적 기준의 실패방향으로 이동)시키게 되면, 제Ⅲ상한인 EXCELLENT(훌륭한)의 공간이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그림 3 참조)

 

개인적사회적정체성구분3(사회적기준 조정).jpg


(그림 3)

 

사회적 기준을 실패 방향으로 하향시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왜 우리는 사회적 기준대로 살지 않고 그 기준을 조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아온 교육에 대해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받아오는 교육은 크게 2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는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사회적 규범, 규칙 그리고 예절 등을 배워 큰 무리없이 사회에서 적응하도록 돕고자 하는 것으로, 이것은 소위 사회를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평균적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그 가운데서도 사회를 이끌어 갈 중추적 인재 혹은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 이들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테스트에 의해 선별되어, 그들만이 모인 장소에서 차별화된 교육을 받게 된다. 비평준화 학교, 과학ㆍ외국어 학교 그리고 특수 사립학교들이 그러한 예로써, 그들은 이 곳에서 하이 클래스의 교육을 받은 후 다시 상위 몇 %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상위 교육기관으로 진학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나 흐름을 살펴 보게 되면, 이러한 상위 몇 %의 사람 중에서 사회를 대표할 만한 인재나 리더 그리고 중추적 인물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이렇게 커 나간 사람들은 사회적 기준으로 보게 될 때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예전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 또한 상위 몇 % 중의 사람들이고, 이들이 자신들에게 적합하고 적절한 사회적 성공 기준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 기준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웬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 사회를 구성하고 기반 틀이 되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평균적인 교육을 받고 평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꿈은 크고 비전은 원대하며 목표는 커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성공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TV나 신문 수많은 미디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회적 성공사례는 물론 부럽긴 하겠지만, 나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맞는, 나를 위한 맞춤 사회적 성공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야만 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적성, 성향, 개인적 가치관, 실제적 자아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이 사회 속에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하고, 이어서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 내야만 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자신에게 잘 맞는 일임에 틀림없다. 또한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그 일을 함에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까지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일은 자신의 성공기준에 부합되는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추가하자면, 그 일이 사회적으로도 무언가 공헌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좋아서, 내가 잘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을 통해 사회적 기여까지 할 수 있다면 이것은 개인적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가장 최상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적 기준을 재조정 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만의 사회적 성공기준을 재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즉 제Ⅲ상한인 EXCELLENT(훌륭한) 구간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그림4 참조)

 

 개인적사회적정체성구분4(완성도).jpg


(그림4)

 




 

IP *.64.23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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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9.08.19 16:00:16 *.41.107.197
연구 많이 하셨네요.....4분면적 해석도 그렇고......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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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1 21:58:11 *.254.5.27

휴우................ 부정적 소심이 저인거 같아요.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나요??? 훈련을 해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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