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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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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2일 16시 58분 등록

비가 잦은 요즘, 새벽에 비오는 소리에 잠이 깨는 수가 많다. 며칠 전 새벽에는 그야말로 양동이로 퍼붓는 듯한 강우량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날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 나의 산책로는 집 근처의 수원화성, 수원 시내를 감싸고 있는 성벽과 잘 생긴 소나무로 가득 찬 숲이 좋아서 거의 매일 들리곤 한다.

그 날은 익숙한 산책길이 흠뻑 젖어 평소와 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비에 젖어 더욱 울창해 보이는 숲과 검은 나무둥치들이 밀림을 연상시켰다. 화성열차가 다니는 넓은 도로에 빗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경사진 도로를 달려가는 빗물이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산수화에서 산이 겹쳐 선 모습 같기도 하고, 지도의 등고선 같기도 한 포물선은 아름다웠다.


큰 길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시냇물이 지천이었다. 조촐한 계곡마다 하얀 시냇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힘차게 흐르고 있었고, 돌담 틈에서도 샘물이 솟듯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땅 속에 쥐구멍처럼 뚫린 곳에서는 동그랗게 수막을 형성하며 물이 흘러넘치고, 즐겨 다니던 계단 위로는 다단계^^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시냇물 구경을 하며 걸었다. 저마다 모양도 달랐지만 특히 물소리가 매혹적이었다. 물의 양과 장애물, 그리고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소리가 모두 달랐다.  상큼하고 영롱한 물소리를 들으며 한참동안 서 있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글로 옮겨 적을 수가 없었다. 물소리는 들리는 순간 사라졌다. 아주 로맨틱한 순간에 잠에서 깨어난 꿈같았다.


길모퉁이를 도니 신천지가 열렸다. 잠자리. 어디서 왔는지 수십 마리의 잠자리가 비행쇼를 벌이고 있었다.  높은 곳에는 바람이 세게 부는지 커다란 나무 꼭대기가  크게 일렁이자 먹구름이 빠르게 흩어졌다. 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가다 말고 바람에 떠밀려 갔다. 잉잉, 쏴아, 후드득...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순간 나는 음악을 들은 것 같았다.  아니 음악을 느꼈다. 감각이 발달한 청각장애자가 음악을 느끼는 기분이 딱 이럴 것 같았다.

아, 인생은 아름다워.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 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넓은 집, 해외여행, 고급와인이 없어도 지금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것들이 다 충족된다 해도 지금 누리고 있는 충만감이 없이는 말짱 도루묵일지도 몰랐다. 나는 그 순간을 음미하며 한참동안 그 자리에 못박혀 서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르페 디엠’을 외치며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살아있으라고 말한다. 살아볼수록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좀 더 일을 열심히 할 걸, 그래서 돈을 좀 더 모을 걸’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좀 더 애틋하게 아껴주고 사랑하지 못한 것, 좀 더 인생을 즐기며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절절한 회한을 남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짧은 시간에 전체를 꿰뚫는 힘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보통 사람도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서운하게 하면, 나는 누군가를 소홀하게 대한 적이 없었는지 나의 경험을 톺아보면 된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예전 일을 떠올려 보면 된다. 5년 전, 10년 전의 고민 중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어떤 어려움도 끝까지 지속되는 것은 없다. 지금 겪는 고난은 언젠가 내가 허비한 시간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의 어제가 오늘을 만들었듯이, 나의 오늘이 내일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충분하다.


장애물은 위기가 아니라 이정표라는 말도 있다.  이 문제가 내게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깨달으면 스트레스에 쩔어 있지 않아도 된다. 실패에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으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한 경험을 오랫동안 곱씹지 않게 된다. 상대방이 꼭 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상 일이 꼭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있는 대로 바라보라. 그러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으면 된다. 매 순간을 음미하고 향유하고 구가하면 된다. 삶을 가졌으면 다 가진 것이다. 그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은 슬픈 것입니다.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신화의 힘’에서 --

IP *.251.22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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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22 16:59:38 *.251.224.83
ㅎㅎ 오랫만에 글을 올리려니까 생각보다 굉장히 쑥스럽네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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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23 19:45:06 *.251.224.83
현웅님도 계속 글 올리기를!
잘 읽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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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9.07.22 18:50:02 *.195.187.4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오늘 글 많은 걸 생각케 해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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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09.07.22 19:42:39 *.249.57.212
삶은 이대로도 행복하고 충만하다... 오늘의 주제 좋은데요~

무슨 그런 말씀을요. 한 번 연구원은 영원한 연구원이잖아요.
쑥스럽다니, 당치 않으세요.
기쁘고 즐거운 맘으로 선배들의 글을 기다리는 후배이자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망설이지 마시고, 성큼성큼 글들 마니마니 남겨주세요~

선배님들이 여기 이 곳에 글을 남길 때 용기를 내야 한다는 건 아니되실 말쌈이에용!
전 내년에도 망설임없이 글 올릴꺼에용~~~ ㅎㅎㅎ

언젠가 말씀하신 앨리사의 컬처 살롱 더 확장해서 더 마니 친해지는 자리 꼬오옥 마련할게용~
더운 장마철에 늘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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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23 19:49:00 *.251.224.83
블로깅에도 익숙하고,  자기표현 욕구가 강한 편인데도
생각 이상으로 글 올리는 것이 신경이 쓰여서 조금 놀랐네요.
그러면서 하나 또 깨달았지요.
신경쓰인다고 자꾸 안하게 되면 그러다가
아주 감각을 잃고
'살짝 쉰 세대'로 그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요.
요 이야기는 그리하여 계속 글을 올리겠다는 말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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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산
2009.07.23 09:20:03 *.8.27.5
선배님, 글 너무 좋습니다^^.

언젠가부터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음식에 대해 'So what?'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거 아니어도 더 좋은 것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죠.

깊은 산, 흐르는 냇물, 맑은 공기, 시원하고 정갈한 물, 그리고 좋은 사람들..... 이미 주변에 있는데 그 중요성과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서 몰랐던 것 뿐인 것 같습니다.

네,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굉장한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을 바꾸고 찾아나설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나서지 않을 때 느껴짐은 없는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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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23 19:53:19 *.251.224.83
그럼요.
'온전히 그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소극성이나 무사안일주의와는 다르겠지요.

우직하고 소탈하게 또 누구보다 즐기면서 가는
사슴개 조르바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부럽기도 하구요.
여행기를 비롯해서, 많은 실험과 수확이 있는 가오기를 계속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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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09:40:24 *.230.92.232
명석 썬배님~^^

안기래도 선배님 글.. 언제 올라오려나???.. 기다렸어여..
왜냐구여? 댓글 달려구여..ㅋㅋㅋㅋㅋ

썬배님이 쑥스럽다 하시니.. 제가 더 쑥스러워지려고 해....여....ㄲㄲㄲ
거그다 망설이기까지 하시다니여.. 제가 더 망설여져여.. ㅋㅋㅋ
아유~, 부끄러워하시기는여..^^

용기내어? 올리신 글이라 그런지.. 이케 말씀드려도 괘한을지 모르겠으나..
글이.. 부드러워여..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걷다가..
하늘 한 번 바라보고.. 주위 한번 둘러보고.. 멀리 보고.. 가까이 보고..
무쟈게 여유있고..편안한   느낌이랄까여..^^

저도 걷는거이 무쟈게 좋아하는데.. 몬 걸은지가 하도..오래 돼야서 조께 승질날라 그래여..ㅎㅎㅎ
살면서.. 긍정의 힘.. 이거이가 지금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아주고..
또.. 변화시키는 훌륭한 힘이 되어주는 거이도 같아여..

근데여...선배님... 다단계 폭포란?  바로? ㅋㅋㅋ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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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23 19:58:33 *.251.224.83
ㅎㅎ 우리 불확공주가 댓글 달아주려고 기다렸다니 아주 기분이 좋은데요?^^

내 글을 부드럽다고 말해 주어서 고마워요.
나로서는 망설이다 글을 올린 보람이 있더라구요.
내 글이 딱 객관화가 되면서,
아~~ 벌써 내 글이 변경연에도 덜 어울릴 정도로 노티가 나는 건가?
싶었으니 말이에요. ^^

선생님께 시도 선물받고
신나게 댓글도 달고, 재미있게 연구원 생활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요.
벌써 중반이라니 믿겨지지가 않네요.
계속 즐겨가며 완성되어 가는 나날 되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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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09:03:04 *.246.196.63
카르페 디엠.. 중학교때 항상 책상위에 붙여놨던 문구예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감명깊어서 적어놨지요
고등학교 가서 서양철학사를 배우다 보니,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과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대구를 이루는 말인 것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마치 상반되어 보이는 두 말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메시지이죠~
오늘 선배님 글 통해서 잠시 잊구 살았던 경구들을 떠올립니다 ^^
글이 참 생동감이 넘쳐요. 글 속의 묻어나는 즐거움과 감사함이 여기까지 퍼져오는듯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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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9.07.28 08:43:23 *.251.224.83
숙인을 보면 명민한 젊은이를 보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으면서,
오히려 연구원 이후가  궁금해지지요.
나도 보기 드물게 분석적이고 똘똘한 ^^  쎄이의 글 잘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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