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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9일 09시 42분 등록

생명을 주기

올해는 유난히 거물급 부음이 많이 들린다. 지난주 과제도서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에서 오쇼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은 장례식장에 가서조차 죽음을 직면하기를 싫어한다.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애써 망각하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 셈인데, 자연스레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해 주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마르틴 그레이는 정말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사나이다. 1922년 생인 그는 홀로코스트와 대형산불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아흔에 가까워가는 지금까지도 생존해 있다. 그가 생명을 지켜내 다시 세우려 했던 것은 ‘가족’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탄생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는 나의 소원이 마르틴 그레이에게도 어떠한 성공 이상으로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는 점에서, 그와 나의 공통점을 찾은 듯했기 때문일 것이다.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 이후에는 무서운 것이 없어진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하도 많이 인용해 닳고 닳아진 ‘필생즉사 사필즉생(必生卽死 死必卽生: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 말을 굳이 다시 인용하지 않더라도 ‘잘못 되면 죽기 밖에 더하겠는가’하는 오기를 가지고 덤빌 때 일들이 술술 풀렸던 경험을 제각각 가지고 있을 테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 두려움이야말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건 사실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사제서품식에 다녀왔다. 사제서품 예식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모두가 흰 천을 깐 바닥 위에 엎드려 신부로써 평생 자신을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부분인데, 이 장면은 ‘누가 나의 목을 치더라도 나는 순명하겠다, 나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심지어 서품을 받는 사제들마저 감동에 눈물을 흘리는 엄숙한 장면이다.
(참고: 2005년 12월24일 방영된 KBS스페셜, <150년만의 공개 가톨릭 신학교-영원과 하루>) 
다시보기 링크 http://www.kbs.co.kr/1tv/sisa/kbsspecial/vod/1373798_11686.html
이 장면을 현장에 가서 실제로는 처음 보면서, 나 또한 내 생명을 내놓을 정도로 무엇을 사랑해본 적이 있었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최근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 ‘생명’을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키며 무척 강조하고 있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결혼을 앞두고 지난해 말 ‘가톨릭 약혼자주말’ 프로그램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다루는 주요 테마 중의 하나가 ‘생명을 주기’였다. 처음 그 주제를 보자마자 당연히 가정이라는 것의 생물학적인 목표인 2세를 낳고 인류를 이어나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 짐작했는데,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낳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부부가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말을 하기, 즉 언어 사용에 있어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긍정적인 말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러한 ‘생명을 주는’ 행동과 말은 부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친지에게. 이웃에게, 또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든 독자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르틴 그레이도 책에서 이런 사례를 종종 다루고 있다. 모두가 굶어 죽을 정도인 상황에서 ‘빵 한 덩이 줄까?’하는 그 호의, 회색 눈의 차가운 독일군 병사가 소년에게 눈 찡긋하는 인간성, 도망친 유대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시골의 농부들의 넉넉한 인심. 여러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받은’ 체험을 그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났기에 그가 결국 살아남아 ‘복수’가 아니라 ‘그 와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회고를 남긴 것이 아닐까.

마르틴 그레이는 자기 책의 성공 기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았다며 반응해 왔는지’로 본다고 한다. 100만 통의 편지를 받았다는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는 커다란 메아리를 만들어 냈으니까. 나는 그렇게 거창한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겠다. 나의 책이 독자들에게 한 순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거나 여타 종류의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나의 생명력을 나누는 기쁨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내가 실제로 생명에게 나의 피와 살을 나누어주고, 목숨이 위태할 수도 있는 출산 과정을 거쳐 내 속에서 키워낸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 오늘따라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더불어, 나의 의지에 따라 생명을 주는 말을 할 수 있는 입이 있고, 따뜻한 눈길을 보낼 눈이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내 손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기적에, 무사해준 내 온몸에, 그런 기적을 가능케 해준 나의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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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산
2009.06.29 14:14:25 *.216.130.188
아인이 말처럼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생명력을 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하늘이 내려주신 여성의 권리 많이 누리시길~^^
(이쁜 애기 많이 나르라는 얘기야! 실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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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30 13:05:45 *.12.130.121
생명주기가 비단 생물학적 뜻만이 아니라 힘을 줄 수 있는 말을 통해 긍정의 힘을 나누어 주는 일이라니 놀랍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과연 긍정의 힘을 나누어주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네...
아인이는 분명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 내면에 있는 그 차분하지만 강렬한 열정으로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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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30 23:59:04 *.40.227.17
아인~^^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글로.. 서로에게 생명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참으로 멋지고.. 가슴 찡하게 다가오네..

나는.. 지난 오프에서.. 그대의 눈빛?으로 감지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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