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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2일 05시 44분 등록
 

6월 오프 과제:


*내게 닿아있는 역사


6월 수업의 과제는

1.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역사적 장면 3을 골라내고

2. 왜 특별히 인상적인지를 설명한 후

3. 그 장면이 상징하는 것을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 역사에 반영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는 것이다.


***들어가며


처음 이 주제를 받고 형상화라는 말이 어려워서 생각을 깊게 해보았다. 동료들은 각자 이해한 만큼 설명해주며 이해를 도우려했지만 나는 골똘히 생각을 계속했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세계사와 한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숱한 역사의 뒤안길에 힘을 가지고 써내려 간 역사보다는 못다한 이야기들이 어느 행간에 묻어있을 것 같은 실패한 혁명과 그 혁명가의 생애에 마음이 갔다. 비주류의 관점에 더욱 공감하는 반항적 기질 탓일까?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꾼의 관점일까?


그러면서 노촌 이구영 선생님 생각이 났다.


 노촌 이구영 선생님은 30년이란  시간의 간격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언제나 나를 “친구”라고 불러주셨다.

선생님과 나는 생일이 같아서 어딘가 기질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옆에 앉으면 언제나 옛날 이야기들를 해주셨는데 그 시간은 참 아름다웠다. 주로 선생님이 직접 겪으신 이야기이니 손에 잡힐 듯 흥미진진한 역사이며  생생한 증언이었다. 벽초 홍명희 선생님을 만났고 직접 가르침을 받던 일, 혜화동 로타리의 여운형 선생의 피살 장소, 해방 후 유명인사들과의 교류, 의암 유인석 의병장과 집안 어르신들의 의병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중 어떤 부분은 선생님께서 책으로 정리해 두기도 하셨다.


나는 한국 현대사를 어렴풋이 읽었고, 역사책 읽기조차도 통제되던 군사독재시절을 살아나온 지라  명철하게 사리분별을 할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의 이야기는 마치 기록영화를 보고난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되었다.

나도 지나간 역사들을 훝어 내리다가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내가 서 있었던 가까운 현대사를 기록해보고 싶었다. 한 세대가 흘러가면 쉽게 왜곡되고 또 잊혀질 그런 사건들을 찾아보았다.



*** 내가 선택한 역사적 사건


1. 독일의 통일

1990년 10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 아래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일.


 ↑ 브란덴부르크 문 / 독일 베를린. 베를린의 상징으로 한때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 이었다. 위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승리의 여신인 빅토리가 조각되어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독일은 소련군이 진주한 동독과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서독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되었다. 그러다가 냉전체제가 굳어지면서 1949년부터는 동서 양쪽에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공식화하였다. 1950년대 초에는 한때 중립 통일안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무산되고, 60년대부터는 국제적 냉전 기류에 편승한 서독의 이른바 할슈타인원칙에 따라 대결 국면이 조성되어 동독은 베를린에 장벽을 둘러싸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결 국면이 전환기를 맞은 것은 1969년 W.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여 할슈타인원칙을 포기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72년대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동서독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1982년 H.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총리의 동독 방문에 이어 1987년에는 E.호네커(Erich Honecker) 동독 공산당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도 동독측은 1민족 2국가라는 통일 이념을 자본주의적 민족과 사회주의적 민족이라는 2민족론으로 바꾸어 통일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서독은 1국가 2체제론을 내세워 독일 민족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M.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ov)에 의해 추진된 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Perestroyka)이다. 그 영향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눈치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동독도 같은 행보를 걷게 되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첫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L.데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 정권이 탄생하는 등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를 틈타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을 내세워 소련에 경제협력을 약속하고 주변 국가에 외교 공세를 펴면서 1990년 초부터 독일 통일의 외부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동서 양 당사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이른바 2+4회담이 열려,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되고, 9월에는 2+4 회담의 승인을 얻어 10월 3일 마침내 민족통일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통일 후 1990년 12월 2일 전독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H.콜(Helmut Kohl) 총리가 이끄는 통일 정부 구성을 끝냈지만, 통일 전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동독 경제의 회복과 동서독 주민간의 경제적 격차 해소, 사회주의 체제에서 빚어졌던 재산권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되어 있다.



2. 통혁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이었다. 통혁당은 전위정당으로서의 지도이념을 명확히 내걸었으며, "당면의 최고 목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수행, 부패한 반봉건적 사회제도를 일소하고 민주주의제도 수립, 민족 재통일 성취"를 당강령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79년까지 통혁당 재건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사건 적발지역도 서울경기에서 호남과 부산 경북지역까지 확대되는 특징을 갖는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에서는 통혁당을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이남간첩조직으로 몰아갔으나, 오늘날은 이남의 독자적인 전위정당 건설로 보고 있으며, 군부 치하에 피라미드 세포로 구성된 지하당으로 존재했다는 것과 통일을 주장하면서 친북성향을 띄었던 탓에 이북연계설의 의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슬퍼런 박정희 군부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도 이 사건을 빌미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대표적인 인사로는 조동일, 임중빈, 박성준 박사(한명숙 초대 여성부 장관 남편) 등이 있으며, 지금은 중고등학생 권장도서이기도 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영복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중에 집필한 책이다.



3. 노무현의 꿈



노 대통령은 2007년 10월 2일, 오전 7시 55분께 태극기와 봉황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달린 전용차인 벤츠 S600을 타고 청와대를 출발, 세종로와 강변북로, 자유로를 거쳐 통일대교를 넘어 조용한 아침 출근길을 달렸다. 장관들과 청와대 비서진으로 구성된 공식수행원 13명도 다른 승용차편으로 동행했다.

민통선 마을인 통일촌 주민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회원 등 700여명은 오전 8시 40분께 대통령 일행이 통일대교 남단에 들어서자 도로 양쪽에 길게 늘어서 태극기와 풍선을 흔들며 환송했다.

노 대통령은 차에서 잠시 내려 통일대교 남단 철조망에 걸린 통일 염원 리본을 읽어본 뒤 다시 차에 올라 차 유리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 환송 행렬에 화답했다.

출발에 앞서 노 대통령은 국무위원들과 10여분 간의 간담회를 한 뒤 5분간 방북에 앞선 `대국민 인사'를 했다. 노 대통령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며 연설 도중 간간이 미소를 띠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경의선 도로 남북출입사무소(CIQ)를 지나 청와대를 출발한 지 한시간 만에 군사분계선(MDL)에 도착했다. 군사분계선 앞 약 30m 지점에서 내린 노 대통령은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MDL 바로 앞에서 소감을 밝힌 뒤 분계선을 넘었다.



*** 나에게 인상적인 이유


1.독일 통일


1989년 11월 9일.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우리가족은 독일에 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무척 조용한 그들이 그날 은 광란에 가까운 몸짓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진 뉴스에서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춤을 추던 그 모습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사실 몇 달 전만해도 서 베르린으로 가기위해 동독 땅을 지나갈 때 경비가  삼엄했다. 매우 굳은 표정으로  빈틈없이 차량을 샅샅이 검사하고 심지어 자동차 밑바닥을 거울로 비춰보면서까지 동과서의 경계를 지키던 모습을 직접 겪었는데, 반공국가 출신인 우리는 더더욱 긴장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베르린으로 갈 때에는 단 몇시간의 체재를 위해서 철조망 사이로 긴 줄을 서서 한사람씩 힘든 패스를 해야했으니  외국인으로서 두 번 다시 가고싶지 않다는 인상을 깊이 남겼었다.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렇던 베르린이 이제 통일이 되어 망치로 그 두꺼운 장벽을 헐어내고 있었다. 통일독일 후 우리 집에 오는 고국의 손님들은 모두 베르린 장벽을 보러가고 싶어했다. 통일후에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셨던 신부님이 우리집을 방문하셨을 때  함께 베르린으로 갔는데 신부님은 망치를 빌려서 한동안 매우 몰입하여 그 장벽을 깨뜨리셨다.  사연을 알고 있는 나는 참 마음이 아팠었다.


그 시절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오래 계속되던 통일비용에 관한 이야기였다. 엄청나게 들어가는 동독의 재건을 위한 경비로 인해 긴축재정을 해야하는 일을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독일은 준비가 되어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그들에게 선물처럼 가져다준 통일을 위한 준비가 오래전부터 되어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업들이 생겨나고 동독치하 인민들의 한많은 생활도 공개되고 악명높은 스타지의 활동도 공개되어 개인의 역사들도 비극과 희극이 교차되는 고통들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공동체는 세계의 패권을 다시 가져갈 수 있을 만큼 큰 힘으로 자라났고 독일은 거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통혁당 사건


*그러다가 1997년 신영복 선생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글 <더불어 한길>에 이끌려서 더불어 숲을 찾아갔지만 차츰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배우게 되었다.  우선 선생님의 개인사와 크게 맞물려있는 통혁당 사건을 알게 되었다. 독재정권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이 사건은 통일에 관하여 조금 앞선 생각을 가졌던, 그 시대의 깨어있는 인물들과 그들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그 허구가 만들어낸 잘못된 판단에 의해 생일 아침에 끌려간 신영복 선생님은 만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비전향 장기수이거나 이념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물론 신 선생님보다 계급이 높다. 감옥에서는 형량이 계급인 것이다. 물론 노촌선생님이 신샘 보다 더 계급이 높았다. 노촌선생님은 북에서 살다 오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신샘은 북한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벼슬을 높이하셨다.


그래서 차츰 우리시대의 역사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샘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쩌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현대사의 굴곡을 간접체험 함으로써, 나의 시대를 근본부터 다시 성찰하게 되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미 통혁당 사건을 주제로 쓴 논문도 많았고 이제는 공개되어있는 문서도 있었다. 선생님은 물론 사면 복권되셨다.  1988년 8월에 출소셨고 그후 성공회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다.

개인의 역사를 아름답게 승화시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백만 부 이상의 독자를 가진 명문장을 내놓으셨고 지금 선생님은 그 편지를 다시 쓰고 계신다.


3. 노무현의 꿈


노무현의 죽음은 뒤로 물러나 조용히 있던 나에게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평소에 정치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최소한의 참여만 하고 있었는데 최근 몇 년사이에 일어나는 변화들은 ‘아, 이 모든 일이 민중의 자각에서 비롯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어떤 변화의 물결이 자주 출렁이고 있었고, 월드컵이라든지 촛불행진이라든지 항상 나의 친구들은 그곳에 가 있고는 했다. 내가 참 무지한 것이 늘, 보고 듣고는 있었지만 깊이 공감하며 내 의사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의 정치적 견해가 없었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많은 일화들을 들으며 그가 꿈꾸었던 <사람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다시 나의 꿈이 되고 반드시 노력해서 이루어야할 숙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땅인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서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을 해야할 것 같았다.  



*** 나의 비전

그런데 6월 항쟁 당시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김정남 교문수석의 책으로 공부를 했다. <진실, 광장에 서다.> 라는 책이다. 물론 이끌린 것은 아름다운 문장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암흑의 시절 민주인사를 도왔다. 오원춘 사건, 강신욱변호사의 법정구속사건, 김지하의 옥중 양심선언, 인혁당의 고문사실. 결국 박종철고문 사건의 진상까지 그 사람의 기록에 일의 결말이 다 나와있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도 이 분의 노력으로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다. 햇빛 출판사에서. 어쨋든 김영삼 정부에서 교문 수석을 했고 색깔론으로 흔들려서 물러났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명문장은  이 분의 글이다. 그래서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일의 전말을 .


그리고 노촌 선생님의 친구 분들 , 이렇게 저렇게 엮여서 옥살이 하신 분들, 노촌선생님께 와서나 하소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 그들을 편안히 받아들여 주었을까?  선생님은 다행히 재정적인 압박을 받지 않으셔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이 이제야 모두 연결이 되면서 바르게 이해 되었다. 바로 나와 함께한 역사였으며, 나에게 닿아있는 역사였다. 


역사를 비전으로 연결시켜보았다.

형상화하라!

참 어려운 숙제다.  숙제는 항상 어려운 법이다.


첫째, 노란색을 골라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날, 노란 옷에 노란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만나는 사람들이 밝고 환하다고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노무현 노란색입니다.”  한편 자랑스럽고 한편 슬펐다.


두 번째, 밴디트가 되겠다.

로빈 후드가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이야기속의 그를 무척 좋아했었다.

에릭 홉스봄이 쓴  1959년 판 <사회적 도적과 원초적 반란자들>에서 의적이 연구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거기에 나오는 사회적 도적, 이 도적이 밴디트다. 영어에서 의적을 나타내는 단어인' bandit' 의 라틴어 어원은 ‘법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밴디트의 적은 광범위한 권한을 이용해서 개인의 이익을 도모한 부정부패의 원흉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바탕인 반골정신은 무의식을 흐르는 넓은 강과도 같은가 보다. 어린마음에도 세상의 부조리함이 눈에 보였나보다.

어쨌든 홍길동이 좋았고, 임꺽정이 좋았다. 진정성이나 청정함과 같은 것은 세 살난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요즈음 자주 든다. 나의 호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백범의 말처럼 마음 좋은 것이 드러나는 것 같다.


17 세기말 , 18 세기초가 해적들의 황금기였다. 그때 해적의 고유한 문화적 규율이 완성되었는데, 평등주의와 집단적인 저항이 두드러지는 규범이었다.


“스틱스 강과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아케론 강을 미소하며 응시할 수 있는자,

자신의 최후에 용감히 맞설 수 있는자, 그는 왕들과 신들에 비겨서 손색이 없으리라.“

                                               -아가멤논 중에서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며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치는 환경 속에서도 늠름하게 바다를  지배했던 뱃사람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해양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이 어디에 연유하는 것일까? 일본에게 하도 약탈을 당해서 그런가? 한판 붙어볼 배짱 있는 위인이 나타나지 못해서 인가? 이순신의 일생을 보면 해군이 되고 싶지 않을 것같다.  마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말이다.


해적의 행위를 미화할 생각은 없으나 그들의 사회에는 매우 합리적인 규범들이 있었다.

제1의 목적은 약탈이고  그들의 행위는 국가와 상인 및 선장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당연히 그들의 제1복수는 상선의 선장들이 휘둘렀던 폭력적이고 감정적인, 전횡적인 선상 권위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제2복수는 국가 권력이었다.


해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해골과 X자로 가로놓인 뼈다귀 그림이다. 졸리 로저 Jolly Roger 라 불리는 이 그림은 만국의 해적들이 공통적으로 달고 다니던 상징물이었다. 원래는 선장들이 사망자를 기록하기 위해 항해일지에 그려 넣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해적은 공동체 윤리의식이 강했다. 해적 공동체의 제 1원리가 바로 동료들 사이의 이해와 협력이었다.
내가 어느곳에 있든지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이해와 협력은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 될 것 같다. 공동체주의, 그래서 "다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기가 나의 삶의 목표이자 중요한 가치관이다.


어쨌든 해적이 미래의 꿈이다. 상징이기도 하고.


세 번째 형상은 발라드이다.

로빈 후드도 원래는 중세의 발라드 <로빈 후드의 무훈>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 여러가지로 이야기로 각색이 되어서 사람들의 낭만과 흥미를 유발했다.

해적의 이야기도 청소년들의 모험심을 불러 일으켰고, 사실과 허구의 중간쯤에서 꿈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갔을 것이다.



*** 다시 나가며

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을 얘기하겠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속에서부터 올라와서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그런 결말에 이르른 것 같다. 전에 더불어 숲의 사람들은 매우 강성으로 대정부 집회에 참석하고는 했었는데 나는 특별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늘 함께 옆에 머물러서 과정을 보고 겪었다. 


이제 내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내가 겪어온 일들을 말하면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기억이 날 것이고 각자 자기에게 닿았던 역사로 기록해갈 지 모른다. 내가 노촌 선생님께 영향을 받고, 오늘 이렇게 노촌 선생님을 회상하는 것처럼 30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친구가 되는 공감대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서 유장한 세월을 흘러 바다로 가게 되겠지....


*** 요약

1. 세가지 역사적 사건은

-독일의 통일

-통혁당 사건

-노무현의 꿈


2.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마디로 통일로 규정되는 이 단어는 내게 닿아있는 역사이다.

독일에 있는동안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 다음 해에 통일이 되는 것을 보았다.
나의 선생님은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생일날 아침에 잡혀가서 20년 20일을 징역 사셨다. 그의 깊은 성찰은 오늘 날의 젊은이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울고 싶을 때 꺼내 읽는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나를 일으켜세운다. 행동하도록 .

<知難 行易> 알기는 어렵고 행동하기는 쉽다고 했다. 백범의 말이다.


이제 왜 내가 변화해야 하는지 잘 알았으니 그대로 실행하는 일이 남았다.


3. 형상화

-노란색으로 

-의적이 되어, 해적이 되어.

-이야기 꾼이 되겠다.

 시를 노래하겠다.



IP *.67.22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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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2 15:57:51 *.12.130.72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가깝게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래서 역사가 전해 내려옴이 참 중요한 것도 같고요.

노란 점퍼에 노란 운동화를 신고 있는 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잘 어울리세요...^^
프로필 이미지
2009.06.23 14:37:28 *.118.47.142
좌샘~
저는..역사에 대해..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는 문외한이거든여..
싸움..투쟁..으로 비쳐지는 것에.. 마음이 가지 않았져.
근데.. 싫다는 이유로.. 피하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잘 모른다는 핑계로.. 그네들에게만 맡기려 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좌샘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실천으로..행동으로.. 옮기는 날도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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