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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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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7일 03시 29분 등록

  아버지. 새벽에 아버지 차를 닦았어요.  일찍 일어 나시는 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하려고 아예 잠을 안 잤습니다. 어제 본가에 들르다 골목에 주차해둔 아버지 차를 보니 세차를 안 한 듯 보이더군요. 어머니께 아버지차가 깨끗하지 않은 날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요즘 무리를 하셔서 차도 제때 세차를 안 하신다고 하셨어요. 
팔순이 되기 전에 어머니와 세계 여행을 하실 계획을 앞당기고 싶으셔서 아침 일찍 일을 나가셔서 새벽까지 있으신다고요. 아버지가 칠순이 넘으신지 삼 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아버지에게 일부 의지하고 있는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밤새 잠자리가 편치 않았습니다.

 우리 형편에 과분하다 싶은 댁으로 동생을 여위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혼수가 부족하지 않도록 하라고 어머니께 누차 당부 하셨지요. 동생은 덕분에 혼수 잘해 갔다는 소리를 시댁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가 뜻하지 않게 박사과정까지 하기로 결정하고 의논을 드렸을 때도 아버지는 ‘잘했다“며 기뻐해 주셨어요.

제가 학위를 따고 모교의 시간 강사 자리를 겨우 얻은 처지에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생각보다 큰 전셋집을 학교 가까이 선뜻 얻어 주시며, 조그만 집이라도 사 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저러한 모양새로 저는 우리 집 형편이 아주 상류층은 아니지만 꽤 규모가 있는 살림살이로 짐작하며 지냈습니다. 한 번도 돈이 아쉬워 원하는 것을 못해 본 경험이 없을 만큼 남부럽지 않게 자란 까닭이었지요. 아버지가 말단 공무원 생활을 정년퇴임하실 때 까지도 생활비를 도움 받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겼습니다.

아버지가 퇴임하시고 몇 달 후에 갑자기 쓰러지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까지도 집안 형편을 잘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암2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족들은 너무 많이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 집안재정 상태는 더 놀라웠습니다. 모아 두었던 저축은 물론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 받아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충당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통장잔고는 바닦이었던 것이지요.

그 상황에 이르러서야 서른이 훨씬 넘은 장남인 제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돈 걱정 시키지 않으시려고 한 번도 집안 형편을 말씀 하시지 않았던, 최선을 다해 저희 남매를 뒷바라지 하시느라 종잇장 같이 얇아진 아버지. 하지만 염려와 달리 아버지는 한 번의 결근 없이 45년간의 공직 생활을 해내신 투지로 병을 이겨 내셨습니다. 그리고 퇴직하신지 삼 년 만인 68세에 다시 택시 기사가 되셨습니다.

저를 불러 술잔을 권하며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저는 지금도 어제일 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수님, 아비가 망신 주는 것은 아니지?  교수님만 괜찮다면  다시 택시 기사로 직업을 바꿔 보련다. 이렇게 집에 있으니 더 많이 아프고, 내 존재감이 없어 허망해” 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제 안에서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일제 때 태어나 해방을 맞고, 전쟁을 겪고, 모든 것이 부족한 시기여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시고, 평생을 일만 하신 아버지. 노년기에 접어 든 아버지가 다시 68세의 연세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하니 울지 말라 하셨지만, 제가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가 핸들을 잡으신 지도 어느덧 6년이 지나셨네요. 그동안 아버지는 개인택시면허를 받으시고, 쉬는 날에도 복지관에 나가 노인 분들을 위한 급식 자원봉사도 하십니다. 아버지가 굳이 교수님이라 부르는 공부 많이한 아들은 보통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신 아버지 앞에서 부끄럽기만 합니다.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할 때면 아버지가 얼마나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손님들에게 친절했는지를 자랑하십니다. 제가 봐도 아버지는 서비스 정신이 으뜸인 운전기사가 맞습니다.

잠을 설치다 일어난 저는 새벽에 차를 닦고 또 닦으며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내년에 전임이 될 희망에 부풀었는데 그마저, 전임제가 없어진다 하니 다시 기운이 빠지기는 하지만, 시간 강사 육년에 이제 이골이 났습니다. 지난번에 뽑아 주신 차 할부금도 다 못 갚았는데, 어디든 불러만 주면 달려가야지요. 한때는 교수도 아닌데 교수라 불리는 것에, 겉치레를 하는데 그 알량한 강사비를 써야 하는 것이  싫어 그만 둘까도 했지만 이젠 제법 강의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아버지. 일 좀 줄이시고 건강 좀 챙기세요. 생각해 보면 저의 희망은 명망 있는 학자나 신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희망은 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아버지이셨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것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교수가 되기 위해 연구 논문 발표도 하고, 더 잘 가르치려 노력하겠습니다. 꼭  제자를 사랑하는 교수, 아버지 세계여행 하실 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 드리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러려면 오래오래 건강하게 제 곁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버지 택시는 오늘 새벽에  반들반들 윤이 나게 제가 닦았습니다.
  아버지. 유쾌한 택시기사인 나의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그 많은 것들, 삼분의 일이라도 제 아이에게, 제자들에게 가르치도록 애쓰겠습니다.  

IP *.228.8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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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7 09:59:50 *.110.90.238
그런 아버지.. 그리고 아들... 손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 하셨던 말씀.
나눠주셔 고맙습니다.  온전히 빛날 그날을 위해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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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01:40:03 *.71.76.251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님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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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원
2009.06.17 10:53:15 *.55.46.29
앤 선생님, 택시안에서 인터뷰를 하시다니..대단하세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책으로 엮어서 나올때가 언제인지요? 사인 꼭 받을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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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01:38:35 *.71.76.251
책이 언제 나올지 지금으로선 기약할 수 없습니다. 초고가 끝나야 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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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02:42:16 *.71.76.251
그대 본지 오래네. 연수 준비로 바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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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9.06.24 04:24:07 *.248.75.8
택시 안에서 인터뷰를 한 것도 대단하지만, 택시 기사의 시선이 아니라 그 아들의 시선으로 편지를 쓴 그대의 능력이 더 대단해.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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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2009.07.01 16:28:16 *.38.144.148
서지희님의 글에 매번 가슴 깊은곳에 뭔가 뭉클하는 경험이, 비단 저만 겪는 것은 아니겠지요? 장식적이지 않은  일상속 평범한 영웅들의 감동과 따뜻한 휴머니티가 담긴 글에 팬을 자처합니다. 언젠가 정성스런 책으로 또한번 되새김 할 수 있길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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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02:41:18 *.71.76.251
혹시 책이 나오게 되면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 힘이 되는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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