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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1일 21시 09분 등록

오늘은 커다란 유리 창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 초록 고양이는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삐쭉 내밀고 그림들을 하나씩 둘러보기 시작했다. , 그런데, 이 그림 아

래서 발이 묶였다.
a-3.jpg


<안국주_가출>

오래 묵은 듯한 빨간색, 그 유혹적인 그림 아래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론가 도망가는 듯

한 여인. 그녀는 어디로 자꾸 도망가는 걸까? 아니, 내 눈에는 이 여인이 도망가는 것보다는 무언

가를 찾아 헤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럴 거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이는 걸거다. 그게 아

마 사람들이 말하는 자아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자신도 몰랐을 거다. 이렇게 많은 다양한

자아들이 내면에서 함께 살고 있을 줄은.

 

사람들은 말이지 그걸 잘 모른다.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들이 겹겹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재희

안에 헤더와 연우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가출을 해 보고서야 비로서 깨닫게 될지도 모른

. 그 안에 그 많은 자신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재희 이야기 ---------------------------------------------------------

그저 튀지 않고 마음이 편하게 살고 싶을 때, 내 이름은 재희.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그저

사회가 정해 준 ‘28살 전문직의 여자의 가면과 옷을 입고 잘 살아간다. 이럴 때 이 사회가 정해

정상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멋진 것인지. 그 어떤 것이든 정상이라는 기준 중에 가장 가운데

있는 것을 골라서 하면 만사가 형통이다. 여느 전문직 여성들이 입는 것처럼 유행이 약간 가미된

검은색 치마 정장 그리고 리본이 달린 페라** 정장 구두는 외양으로 나를 정상의 수준에 올려

주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또, 나를 정상이라는 기준에 올려준 것은 나를 둘러싼 타고난 배경들이다. 사실 이것들은

내가 선택을 했다기 보다는 많이 타고났다. ‘정상을 약간 웃도는 기준에 속하는 아버지의 직업 ?

변호사 ? 그리고 그에게 합격점을 받아 그의 부인이 된 우리 어머니, 그리고 이 두 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지방의 명문 외고와 명문대 영문과를 거쳐온 나의 학력. 그리고 내가 거쳐온 학교에서

만나온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아주 정상적인 친구들.   

 

나의 학력, 외양, 그리고 가족 외에도, , 이재희에겐 걸 맞는 게 하나 또 있다.

 

남자 친구. 그는 내가 자란 지방 도시에서 내가 거쳐왔던 수많은 명문 학교들을 거쳐 왔다. 명문

유치원, 명문 사립 초등학교, 명문 중학교에 명문 외고. 그가 하나 인생에 거치지 못한 명문이 있

다면 그건 서울의 명문 의대였다. 대신 그는 지방의 명문의대에 진학해서 지금은 레지던트 중이

.

 

우리는 요샛말로 롱디스턴스다. ? 원거리 연애를 일컫는 말 ? 이 롱디스턴스의 형태의 연애에서

도 우리가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동질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은 공유한

.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지방 도시의 한 켠과 평범 이상의 정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명

문 학교들을 두루 거친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 우리 사이는 불꽃 튀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연인들

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이런 동질감에서 오는 안정감이 자리를 잡았다. 아주 오래된 그림 같은

평화로움이 우리 사이에는 흐른다.

 

그와 나 사이에는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것만이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온통 미스터리 이기 때문이다.

 

---------------------------------------------------헤더, 그 자유의 이름 ---------------------------------

어깨를 다 드러내어 놓은 화려한 민소매에, 색색으로 수를 놓은 긴 치마가 살랑 거린다. 나는 얼

른 커다란 썬그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긴 치마 아래로 엿보이는 발가락에는 분홍색의 페디큐어가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 빛을 낸다. 공항을 나서면서 담배를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습하고

뜨거운 열대의 공기 중에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 낸다. 후욱, 이 마법의 향기는 자유로운 공기를

몰고 와서 내 몸을 휘감는다.

 

이십 몇 년 간이던가 나는 한 번도 이재희외에 다른 존재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지 못했었다. 어쩌면 영원히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낼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여름,

자서 그 바닷가에만 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한참 공부 중인 남자 친구에게 방해가 될 수 없어서 값이 그리 비싸지 않았던 동남아 행 비행기

에 몸을 실었던 것은 4년 전의 일이었다. 배낭 하나에 간단한 옷가지를 넣어 등에 매고서 싸구려 유스 호스텔에 도착했을 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 안의 이 자유로운 영혼과 조우를 하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히피 배낭 여행객들과, 약간은 지저분한 유스 호스텔 내에서의 몇 일 간은, 내 안의 자유로운 영혼을 꺼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토미와의 만남이 더욱 그랬다. 토미는 그 바닷가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쳐주던 강사였다. 내가 그가 일하는 가게 앞에서 쭈뼛쭈뼛 스킨스쿠버 다이빙수업에 등록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첫눈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망설이던 나의 등을 떠밀어 기어이 그 수업을 듣게 하고 말았다. 몸에서 모범생의 기운을 빼지 못하고 온 몸 근육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나에게 그가 가르쳐 준 것은 바로 힘을 빼고 즐기는 것이었다. 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장난기 어린 눈으로 그가 내게 말했다. “자아, 이제 몸에 힘을 빼.” 처음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느껴지는 강한 수압도, 바다 속으로 깊이 내려갈 때마다 강도가 더해지는 수압의 압력도,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약간은 무서운 침묵의 바다도 모두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즐기기 시작해야 모두 내 것이 되는 거라고.

 

그의 말처럼 나도 즐기고 싶었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순간에 몰입을 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이 순간을, 완벽하지 않는 내 자신을, 새로 접한 바다의 신비를, 토미와의 교감을, 그리고 그와의 우발적인 사랑을. 그 때 내 안의 히피가 고개를 들이 밀었던 것이다.

 

, 아직 안 죽었어. 안 죽고 여기 있었거든.’

 

-------------------------------진아를 찾아 헤매이는 연우 ----------------------------------------------

그것은 죄책감 때문인지, 열등감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답답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마

음 속의 찌꺼기를 비워 주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배 속에 가득한 배설물을 내 버리듯

이 잔뜩 채운 나를 비워주어야 한다. 볼 일을 다 본 후 화장실 물을 내리듯이 쑤욱 더러운 것을

버려 주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철야정진을 하는 것이 나 연우에게는 그런 의미다. 매주 토요일 저녁 8 30분쯤 회색 승복 바지를 입고, 화려한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머리를 질끈 묶은 나는 **사 언덕길을 올라간다. 이럴 때는 재희나 헤더의 얼굴은 내 얼굴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돌아가려는 이상한 관성이 이럴 때는 내게 작용한다.

 

정각 9시가 되면서 나는 조금씩 사라진다. 두 손을 모으고, 두 무릎을 굽혀 바닥 위에 내 몸을 내려놓는 행위가 한번, 또 한번 반복이 될 때마다 머리 속의 찌꺼기들이 한 덩어리씩 빠져 나가는 느낌이다. 마음 속의 미움, 증오, 고통, 연민 온갖 감정의 찌꺼기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12시가 넘어가면서 마음 속엔 당장의 육체적인 고통만이 자리를 잡는다. 비 오듯 흐르는 땀과 함께 관절 마디마디의 통증 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올 자리는 없다. 어디선가 울음이 터져 나오고 몇몇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린다. 12시가 넘으면서 부터는 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 세상을 덮으려 하고 잠을 이기지 못한 몸이 자꾸 옆으로 무너지려고 한다.

 

1초가 하루 같고 1분이 일년 같은 밤은 긴긴 터널 같기만 하고 온 몸에 통증은 세상 무엇보다고 더 무서운 고통이 되어 다가 온다. 그러나, 항상 그 어두운 터널 같은 시간의 끝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새벽 4시가 되면 이 무섭고 고통스러운 싸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히피적인 기질의 헤더와 철야정진을 하는 연우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

은 모두 나 이재희의 몸 속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 어느 것이 진짜냐구? 모두 진짜다. 가짜 같

은 것은 없다. 단지 이재희의 모습이 다른 둘 보다 자주 존재하는 것뿐이다. 단지 그 뿐이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는 초록 고양이 -----------------------------------------

오늘도 나는 저녁 먹을 시간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배가 고픈 김에 허겁지겁 입 안으로

저녁거리를 밀어 넣은 후에, 물도 한 대접 마셨다. 느른하게 졸음이 밀려 오기 전에 얼른 얼굴을

핥아 세수를 마치고 길게 누워 있을 작정으로 침대로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신발장 옆에 길게

세워둔 거울이 눈에 띄었다. 저녁 먹은 배가 불룩하게 나온 초록 고양이, 내 모습이 얼른 눈에 들

어 온다. 길다란 꼬리와 등허리를 지나 동그란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지금 거울 앞에 보이는

내 모습이 진짜 초록 고양이내 모습이 맞을까? 아까 낮에 본 그 빨간 색 그림에서처럼 내 안에

또 다른 영혼이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록 고양이 안에 정열의 빨강 고양이와 음침한 검

은 고양이가 함께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희의 몸 속에 히피 헤더와 부처를 담고 싶은 연

우가 공존했던 것처럼. 

IP *.129.19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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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
2009.02.01 21:23:29 *.129.197.237

프리북 페어를 앞두고 수정고들을 올려봅니다. 피드백 주시면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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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9.02.02 10:08:39 *.209.32.129

그림의 강렬함에 발이 묶여, 몇 글자 적어요.
팔을 세 개씩 뻗어 무언가를 갈구하는 저 몸짓은 내게도 익숙한 것이니까요. ^^

현정씨의 에너지와 필력을 인정하고,
좋은 것을 더 좋게 해 보자는 '변경연의 우정'이니
내 말의 핵심을 읽어주기 바래요.

1. 그림의 역할과 비중에 대해 의문이 생기네요.  위 글만으로 보아서는 그림에서 가출 - 자아성찰이라는 키워드만을 가져 왔거든요.  그림의 비중이나 스토리와의 연결고리가 약해 보입니다.

2. 스토리텔링 방식은 반드시 필요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지만 읽는 사람으로서는 호흡이 끊기는 감이 있어요.  또 본격적인 구라의 본산인 문학동네와의 경쟁력도 생각해 봐야 할 꺼구요.  오히려 현정씨의 경험담으로 직접 가는 것이 진솔하고 설득력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상상력도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면서요? ^^

3. 나는 독자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결국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인 것 같아요.
좋은 책은 두 가지나 세 가지가 아니라 딱 한 가지만 말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말이 참 좋더라구요.

보통 그림과 매칭한 글의 경우, 작가론이나 작품론을 저자의 인문적인 향기로 재해석하여 소개하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현정씨는 무엇을 독자에게 주고 싶은가요?

독특한 작품의 소개?
인생의 어떤 고비에서 이 작품이 내게 힘이 되어 준 것?
그림을 일상생활로 끌어들이는 방법?
그림을 읽는 방법?
내 청춘의 그림?


생각의 실마리가 되었기 바라면서,
북페어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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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
2009.02.02 15:01:18 *.128.98.93

역시 선배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고민하는 부분들을 정확히 집으셨네요..
좋은 말씀 고려해서 많이 수정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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