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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9일 22시 03분 등록

가을이 코앞에 있었다. 퇴근길에 가로수가 늘어서있는 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면 가을이 바로 앞에서 웃고 있었다. 조금 힘을 내서 뜀박질을 하면 순식간에 가을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릴 것 같은 그런 때였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다가 조금 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파랬다. 정말 파랬다. 파란 하늘이 거기 있었다. 언제 보았는지 기억하기도 힘든 파란 하늘이 거기 있었다. 그날부터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이 신기했고 파란 하늘이 너무 예뻤고 그 파란 하늘이 그리웠다. 올려다 볼 때마다 하늘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하늘은 파랗고 예뻤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가을에서 겨울까지 아주 오랫동안. 작년 가을의 하늘이 그랬다. 그 하늘은 어린시절 이후 보지 못했던 싱그럽고 눈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이었다. 그래서 작년은, 2008년은 하늘이 정말 예뻤던 해로 기억되었다.

후배들과 어울려 술을 먹으며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1945년 하면 8?15로 기억되고, 1980년 하면 5?18로 기억된다. 그것은 역사의 기억이고, 너의 1980년은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기억되는 게 없다면 이제라도 한해에 하나씩 삶의 중요한 기억을 만들어라. 어느 해를 떠올렸을 때 그 해를 대표적으로 기억나게 하는 흔적을 만들어 놓아라. 그것이 쌓이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삶이 텅 빈 창고 같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술이 꽤 취했고 그래서 그런 말도 나왔으리라. 평소에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데도 그런 말을 한 것은 그 당시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이었다. 내가 그냥 지나쳐 온 세월을 후배들은 알차게 메웠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후회하고 있지만 후배들은 똑같은 과정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나마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 소리를 했을 것이다. 술 취해서 하는 소리를 누가 마음에 담아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술자리는 만취해서 끝이 났다.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게다. 이렇게 멍하니 한해 한해를 보내면 나중에 뒤 돌아보았을 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래서 생각한 게 해마다 무언가 뚜렷한 기억이 남을만한 일을 하나씩은 하자는 거였다. 그렇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순간순간 무언가 해야지 하면서도 시간은 그냥 흘렀다.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이렇게 하자고 말은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무런 성과 없이 지내는 인간이 안 되어 보였는지 하늘은 파란 하늘로 기억의 끈을 되살려 주었다. 그래서 작년은 하늘이 정말 푸르고 아름다웠던 한해로 기억되었다. 작년이 푸른 하늘 하나만으로 기억되지 않는 것은 변경연에서 시작한 연구원 활동이 있어서이다. 작년은 그렇게 적지 않은 기억을 남겨준 해가 되었다. 예년과 많이 달랐던 한해였다.

한해에 한가지씩은 선명한 기억이 떠오를만한 일을 하자는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대단한 일들로 기억을 채워 가면 좋겠지만 사는 게 어디 그리 마음대로 되던가. 마음만 먹고 있었던 것들을 한다든지, 미루어 놓기만 했던 것들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도 충분히 선명한 기억이 된다. 그러한 기억들이 쌓여 가면 자신도 모르게 삶의 창고가 충실히 채워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할일은 항상 파도처럼 밀려오고, 시간은 항상 파도처럼 밀려간다. 지나고 보면 중요한 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 한해가 지난다. 한해가 다 지나갈 즈음이면 생각한다. 올해도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구나. 그렇게 몇 십번이 지나면 삶은 끝난다. 올해는 올해만의 선명한 기억을 쌓아놓자. 또 한해가 그냥 스쳐가게 버려두지 말고.

IP *.163.6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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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0 00:00:56 *.180.129.160
난 말야, 형아가 맨 처음 정했던 컨셉대로 내리 써 봤으면 좋겠어. 암 생각도 하지 말고 지금 이글 쓰는 것처럼.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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