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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5일 17시 24분 등록

"산 마루에 석류 껍질 같은 붉은 색의 해가 걸쳐져 있고 그 빛이 세상을 찬연히 비추는 꿈. "
오늘 좋은 일 있을 것 같은데.. 커피를 한 잔 진하게 마시며 음악을 걸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아침 풍경처럼 피아노 소리가 모처럼의 산뜻한 일요일 아침을 느끼게 하는 그런 날이었다.

형제들이 많은 집에는 묵묵히 희생하거나 때론 큰 소리쳐 가며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꾼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요리조리 꾀돌이나 꾀순이가 꼭 있다. 나는 어릴 적에는 무수리를 천직으로 알고 집안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는데 사춘기 들어서면서 반항이랍시고 몰라라 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 때는 직업이 늘 짐 싸고 떠나는 직업이라 미루고 그 후 유학이랍시고 못한다는 핑계를 대다가 지금은 일이 바쁘다는 구실로 여전히 꾀순이의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이런 모습은 다른 형제에게도 학습되어 집안에 일만 생기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동류항 꾀순이들이 또 몇 명 나타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정의감 강하고 마음 씀씀이가 어진 동생이 엄마의 주변을 건사하고 있는 데 다행히 제부도 성격이 넉넉한데다가 손재주까지 탁월해 집안의 일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까다로운 오여사의 빈번한 호출에도 그러려니 하며 화장실 물 새는 것을 비롯해 여타 자질구레한 애로사항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곤 한다.

늘 내 대신 시간과 공을 들여주니 이들 부부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둘 다 직업을 가지고 있어 실은 누구보다 바쁨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남들이 일 주일씩 걸리는 것을 하루면 해결을 하고 효율적인 머리 쓰는 일에 어떤 이보다 탁월하니 미안해 하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맡기게 되는 것이다.

천하에 게으른 언니의 바쁘다는 핑계를 매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니 그 지조있는 꾀순이도 털끝만큼은 양심이 있는지라 가끔은 몸으로라도 때울 거 없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면 밥 한 번 사라는 게 고작이다.

주말 저녁에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있는 건 내가 더 신나는 일이니 흔쾌히 뛰어가 엄마와 조카들에 둘러싸여 저녁을 먹는데 그럴 땐 마치 시어머니 모시는 큰 며느리보다 어쩌다 와서 용돈 주고 가는 둘째 며느리처럼 혼자 생색만 그럴듯하다. 게다가 그런 날은 외려 밑반찬 같은 것들을 가지고 오니 오히려 내 손에 주어지는 게 더 많은 것이다. 복 많은 꾀순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던한 사람이라도 소위 시쳇말로 뚜껑이 열리는 날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전화가 걸려 오는 데, 점잖게 “바빠?”하고 묻는다. “아니, 괜찮아” 대답과 동시에 톤이 바뀌며 그야말로 속사포처럼 오늘 내가 이래서.. 저랬어..하며 줄줄이 쏟아내곤 한다. 같은 기질임을 아는 지라 “그러니..그랬구나.” 하며 일단 들어준다. 그리곤 그녀가 말하는 또 다른 종류의 꾀돌이 꾀순이를 같이 성토하는 것이다.

경험상 상대가 흥분했을 때, 섣부른 충고는 화를 더 키우니 무조건 동조해 주는 게 좋다. 더 좋은 건 맞장구를 치면서 “증말, 다들 왜 그런다니~?”하다가 기회를 봐서 듣는 쪽이 더 강성으로 가는 것이다. 가끔 내가 더 흥분하면 동생은 “아니 그렇게 까지 흥분할 껀 아니구..” 하면서 슬슬 목소리 톤이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이제 어느 정도 화가 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다 보면 비로소 천천히 현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은 꾀순이 엄마인 오여사가 이사 가는 날이었다. 빌빌거리는 나는 걸리적거리기만 하니 올 꺼 없다는 말에 안심을 하고 다산문선을 읽고 있는 데 마침 어머니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몹시 따끔따끔한 것이 영 걸쩍지근한 기분이 들면서 페이지가 안 넘어 가는 것이다. 귀가 얇은 한 인간이 오랜만에 효에 대해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도 얼마나 슬펐던가, 엄마한테 잘 해줘야지 마음 먹고 있는 데 전화 벨이 울렸다.

동생이다. 어제까지는 이사 진두지휘에 신경이 날카로워 있더니 오늘은 그래도 다 끝났다며 엄마가 좋아한다는 보고를 하는 것이다. 윗사람이랍시고 꼭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해 준다. 나는 미안한 마음, 새 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저녁에 가겠노라 하다가 “내가 뭐 해 줄 건 없겠지?” 하고 정말 그냥 지나가는 말로 슬쩍 던져 봤다. 아파트 앞 동에서 옆 동으로 하는 이사에다 신혼집도 아니고 살림살이는 이미 다 있으니 정말 내 눈에는 필요할 게 없는 것이다.

처음엔 없다고 하더니만 “근데~ 엄마가 사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더라구…… 너무 비싸서 얘기하기가 쫌……. 저어기 침대 사고 싶다더라구…” ,
언니: 응? 침대.. 있잖아..,
동생: 아니 그거 말구…..뭐 돌 침대라나..
언니: (허걱) 그거 엄청 비싸잖아..
동생: 그러게..그래서 우리가 그거 전자파 나온다고 마음 돌려 놨어……
언니: (살짝 놀란 가슴 쓸어 내리며 휴~) 그간 우리 어머니가 참 통이 많이 커지셨구나.
동생: 깔깔…..그래서 그냥 퀸 사이즈 침대로 바꾸는 것으로 했어..언니가 사 줘도 좋겠지만 가격이 좀 그렇지?….

이 상황에서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감성적인 발언이 튀어나오고 만다. 동생에게 미안했던 마음, 다산 선생의 알았으면 실행하라는 가르침, 엄마에 대한 측은한 마음들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어찌 아시고 지름신께서도 잰 발걸음으로 강림하신 것이다. “으응, 그래. 내가 사드리지 뭐…”

홀린 듯 멍한 상태로 전화를 끊자 순간 어제 밤 꿈이 떠 올랐다. 이것이 어찌된 것이냐..분명 그럴듯한 꿈을 꾸었다고 오늘 내심 뭔가 기대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거액이 지출되는 상황 발생이다.

충동 구매후의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가만이 생각해보니 내가 동생을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으로 동생도 나를 잘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약한 언니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는 녀석이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래, 어쨌거나 나는 효를 행한 것이 되고 동생은 사주고 싶은 짐을 벗은 것이 되고 엄마는 횡재한 셈이 되었구나.

이사간 새 집을 구경하러 주차장으로 가는 데 동생한테 문자가 왔다.
“누구, 누구…이렇게 있거든, 큰 케익 사오면 좋겠다는 생각임.ㅋㅋ”
조건 반사적으로 쉬펀 케익으로 할까, 초콜릿 케익이 좋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어리버리 언니를 그래도 제 구실하게 만드는 사악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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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칼럼을 안 올렸었는데 이것으로 대신합니다.
IP *.48.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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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6.26 01:04:36 *.209.121.43

3기 연구원들의 글이 한 주가 다르게 화려해져서, 잘 읽고 있습니다. 각자의 개성과 일상이 손에 잡힐듯해요.
특히 일상적이고 유머있고 매끄럽게 읽히는 은남씨의 스타일이 자리잡은 것같네요.
행복해 보여서 더욱 좋구요.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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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6.26 11:06:03 *.227.22.57
ㅎㅎ 역시 은남누나~ 내가 요즘 들어 칼럼 소재를 찾는게 아니라 생활에서 만들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을 누난 진작부터 실천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근데 이렇게 하니까 생활이 온통 다 드러나 버리네. 어머니 이사한 것도 나오고 주말에 점심으로 뭐 먹었는지도 드러나고... ㅎㅎ 침대 매트리스는 라텍스가 좋다는데, 너무 비쌀라나? ㅋㅋ

그리고 한선생님~ 3기들에게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고 끊임없이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작 본인들은 나아지고 있는지 혹은 아닌지 잘 느낄 수 없거든요. 요즘 행복하시죠? 책준비는 잘 되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곧 좋은 소식 있겠죠?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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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6.26 23:08:32 *.48.41.28
행복해 보인다니 행복해지네요.
제 유머가 여기서는 통하나 봅니다.
제가 원래는 진지한 사람인데..ㅎㅎ

글감 찾다보면 정말 일년 지나면 완전히 뽀롱으로 갈듯..
벌써 밑천 떨어져가고 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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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6.27 11:11:49 *.99.120.184
향인님은 꾀순이는 아닌 것 같은데...
지난번에 못했던 칼럼도 이렇게 올리고 매번 댓글로 응원도 해주시고.
더욱 중요한 점은 점점 글 내용이 재미있고 세련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꾀순이의 모습은 아닙니다.
글감 밑천이 떨어져간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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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27 11:20:47 *.75.15.205
울 엄매는 뭐라더라 슈퍼아저씨가 언젠가 '빠꼼이' 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80이 거진 다 되신 노인분이 시장보다 비싸면 슬그머니 내려놓으시며 어차피 운동삼아 라는 구실로 둘러서 둘러서 걸어서 무거운 짐을 지거나 들며 억척스레 다녀오시는 걸 아마도 처음엔 모습으로만 보아, 먹고 사실만 한 분이 왜 저리 억척이실까 했던 모양이다. 오래 살다보니 경우 바른 양반인 것은 다 안다.

그러다 얼마 전 정말 처음으로 할머니들이 노상 잘 가는 동네 의료기 체험장에서 전자제품을 하나를 사셨다. 그걸 얼마나 벼르고 벼르셨는지...
내가 요즘 형편이 못하니 당신께서 사셨는데, 결국에는 최고로 싼 걸로 그걸 사가지고 오셔서 밤마다 내게 밀어 주신다. 공부는 커녕 놀기 바쁜 딸년이 컴퓨터 앞에 앉았는게 무에 대수라고 허리를 지지면 좋다고 하시며, 얼마나 좋아하고 이틀도 못되어 후회를 하시며 너 하라고 산 거라며 내게 밀어 주신다.

물건에 욕심이 나는 거, 사고 싶은 게 생기는 거, 이제는 더 미룰 수 없어 사야겠는 거, 그게 당신 스스로가 당혹해 하며 혼란스레 느끼는 늙어감의 증거다.
참을 낙보다 휘어지는 허리가 더는 의미를 주기보다 무언가를 준비해야하는 마음을 스멀스멀 파고드는 징조일 것이다.

당신 것을 사보지 않아서 당신 몫을 챙기는 가 싶으먼 어느덧 불편한 마음이 생기고, 스스로가 대면하는 낯설은 당신 모습과 처신과 흐려지는 듯이 생각되는 판단 앞에서, 한낮의 땡볕 세레를 받은냥 휘칭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워하신다.

서로의 체질을 닮아 서로가 이해되는 애물단지 딸년을 말년의 말 벗으로 삼아 당신 삶의 희노애락 늘 나누신다. 때로 치열하게 부딪치고 더러 내 서방보다 당신 남편보다 진하게 이해를 나누기도 하면서... 서로를 후벼파듯 상채기를 주기도 하고 내 속으로 나왔으나 언젠가 싶기도한 세월의 간격이 주는 관계 앞에서 울기도 웃기도 미치기도 펄펄 뛰기도 하며 살았다. 여자의 삶을 ...

요즘에 울 어매가 바짝 늙어 가신다.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세월은 잰 걸음으로 백발을 재촉하고 철없는 나는 아직도 게걸음만 하고 있다. 삶이 이래서야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개갈이 안 나는 것은 또 무슨 연고인가?
어매의 잔소리가 줄어가는 것이 더러 덜컥 겁이난다.
아무일이 없어야 될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나마 이 만큼 나를 지탱하게 한 원천이 부모님이시다. 내 어머니 그 쭈굴하고 구부러진 어깨 허리 다리 손 바래진 눈 동자 목소리 느린 발걸음이다. 엄마... 그리고 아버지...

그 어머니의 아직 고울 꿈과 애착과 낭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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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6.27 22:13:24 *.48.41.28
여해님, 밖에서는 살살이, 집에서는 꾀순이..ㅎㅎ

써냐,,또 뜨끔거린다.울엄니한테 전화 한 통 걸어야겄다..에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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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06.28 10:04:45 *.231.50.64
우리도 곧 이사하는데, 나도 엄마에게 무언가를 해드려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드네.
사실, 아직도 나는 해드리는게 아니라 해달라고 조르고 있거든.
쑥쓰럽구만.. ㅋㅋ..
내 수준에 맞는 재미있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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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6.29 22:58:02 *.48.41.28
엄마와 나는 지금 따로 사니깐 그러는 거지..
소라는 몸으로 때우는게 제일 낫지 않을까?
아니면 예쁜 수건을 사서 목욕탕 분위기를 바꾸던가..
(나는 이런 생각이었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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