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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7일 18시 03분 등록

내가 외로움을 적으로 삼기 시작한 이유는 단지 외로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정체 모를 공포를 수반해 와선 걸핏하면 우울함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면서 나란 인간의 존엄을 슬슬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비상하게 머리를 회전시키면서 녀석의 경이적인 펀치를 피할 궁리에 몰두했다. 멍해진 틈을 노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주먹의 위력은 그 찰나의 순간에서 공기 마찰로 인한 뜨거움을 통해 진하게 전달되었고 때론 시퍼런 멍까지 남겨 얼굴을 들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녀석의 후각은 예리하게 발달돼 있어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는다. 나의 아킬레스건을 파악한 녀석은 정확하게 그럴 즈음 방문을 두드리고, 그러면 원치 않는 방문객임에도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마치 투명인간처럼 걸어가선 문을 열어주곤 했다. 특수 자물쇠를 이중으로 잠가도 경계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존재임을 이미 경험했기에 늘 패배로 이어지는 무모한 항거는 그만두자는 양해가 한 쪽에서 있었던 듯 하다. 그래도 녀석은 수 분 동안은 신사처럼 문 앞에서 얌전히 기다려 주곤 했다.


그 날도 녀석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굴욕과 타협하는 욕망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며 더더욱 그 뜬 구름 같고 이내 흘러가버리는 그런 잔인한 사랑에 목숨 걸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날이었다. 여자는 발톱을 세운 교활한 이리처럼 굴었고 남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하이에나처럼 숲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그런 하루였다.
동반자는 없다. 나는 혼자서 나의 길을 찾아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목숨 걸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사랑 앞에서 서성거리지 않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날, 나는 처음으로 문을 활짝 열고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대했다.


의외로 겁먹은 눈이었다. 늘 방어하던 상대가 아무 몸짓 없이 고요하게 앉아있는 모습에서 녀석은 전의를 상실한 듯 보였다. 소파를 권하자 가만히 앞에 앉아선 주인의 환대가 뜻밖이라는 몸짓을 했지만 그 평온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세를 바꾸며 더욱 더 깊게 몸을 의자 속에 뉘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없이 와인을 가득 따라 그의 앞에 놓았다. 잠시 경계하는 눈빛을 하더니 이윽고 손을 뻗쳐 조심스레 잔을 집곤 나를 쳐다본다. 얼떨결에 나도 잔을 들어 무언의 건배를 했다. 기억해 보자면 그 날 그 순간이 내가 녀석과 친구가 되자고 마음 먹었던 날이다.


생각보다 이 친구의 장점은 많았다. 황금박쥐처럼 휘날리며 입고 온 망토 안에는 컴플렉스라는 수 많은 주머니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지만 그 곳을 건드리거나 하는 시시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고, 또 다른 편의 분노라는 호주머니 또한 불룩한 채 얌전히 녀석의 의중을 따르고 있었으며 무력이나 좌절 같이 늘 익숙했던 풋내기 녀석들의 모습 역시 드러나지 않게끔 감추고 있었다. 불청객이었지만 보기보다 괜찮은 손님이다.


우린 그 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의 주머니 속의 아이들도 가끔 생각난 듯 말을 거들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와인을 각자 한 병씩 비우는 동안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들었던 녀석의 말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솔직한 호소였다. 지구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 목마르게 시달리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그런 욕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그 날 비로소 알았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 날 나는 그를 받아들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보기보다 스마트한 게 소통은 물론 공감까지 있지 않은가? 또 툭하면 난폭해지기 일쑤인 녀석을 건드려 좋을 것은 하나도 없고 생각보다 의외의 매력도 있는 듯 하여 사이 좋게 지내자는 쪽으로 급속도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늘 떠돌아 다니는 그를 위해 먹을 것을 차려주고 비좁지만 방도 하나 내어 주고 이불도 깔아주었다. 그러자 그렇게 으르렁거렸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이 녀석이 그 녀석인가 할 만큼 온순한 표정을 짓는다. 거친 짐승처럼 포효 하던 녀석은 그 곳이 마치 제 집인 것처럼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깊은 숨을 내쉬며 잠을 자기 시작한다.


아킬레우스 장군이 한 발의 화살에 무너진 것처럼 나도 녀석의 급소를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비겁한 공격은 하지 않는다. 술 한 잔의 의리라면 우습겠지만 나는 그의 처절함을 알았고 그가 나를 신뢰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편안한 숙면을 위하여 불을 꺼주고 씨디의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굶주렸을 녀석을 위해 싱크대를 열고 아침 쌀을 불렸다. 침대에 누워서는 내일 쇼핑센터에서 이런저런 것을 사야겠다는 생각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녀석과의 동거가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다는 느낌에 마음이 바쁜 것이리라.


네가 나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했을 때 내가 어떻게 했지? 나는 숨죽였거나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한강을 봤거나 반포대교 푯말을 봤지. 그래, 철철 흐르는 잠수교너머 한강을 바라 보면서 나는 그저 강물이 너무나 아름답다고만 느끼려고 했지. 너는 그때 어디 있었나? 그래도 그대를 떠올리며 가슴 한 편이 싸늘해진다는 건 알았다네. 네가 울었다고 메일을 보내온 날. 나는 내 몸의 세포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았지. 왜 그대가 울었을까? 그저 당신이 운다니 나도 같이 울었다네.


녀석과의 동거가 시작된다. 외출은 같이 하는 것으로, 가끔씩 필이 모자랄 땐 도와주는 것으로, 또 다른 적이 쳐들어오면 같이 대항하는 것으로..
든든하다. 운전은 잘 못하지만, 짐을 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가끔 내가 말하고 싶을 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한다고 말해준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그의 모습은 늘 세상 앞에서 머뭇거리는 내게 이제 힘을 가져다 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나는 녀석을 기꺼이 거두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오랜 기간에 걸친 우리들의 전쟁은 평화협정을 맺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덕택에 비교적 나쁘지 않은 매일매일의 일상은 녀석으로 기인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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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07 04:13:40 *.72.153.12
오늘도 와인을 앞에 두고 그녀석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 글을 쓰신 건가요?
그런 날은 녀석을 잠깐 몰아내고 이쁜 저를 불러주세요.
제 옆에 있는 녀석 집에다 떼어 놓고 얼른 뛰어깔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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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7.07 04:44:50 *.48.41.28
앗, 아직까지 안잔건가, 일찍 일어난건가..휴~놀라라..

오늘은 와인이 아니랍니다.ㅎㅎ
언제든지 환영이고 올때는 그 집 녀석도 환영.
애들끼리 같이 놀게하면 좋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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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7.07 11:03:29 *.118.101.76
저도 아직 그녀석 싸움은 힘든것 같아요.
레이더에 감지가 된다면 즉각 공습경보가 울리죠
외로움의 천적은 가족인것 같아요.
지지고 볶고 하다보면 그 녀석이 멀리 달아난 느낌
겹겹의 방어막을 뚫고 가끔 오는 녀석은
소주로 달랜답니다. 한방에...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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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7.07 11:50:28 *.211.61.248
재미있다. 연구원의 재능 알아맞추기.

사람이든 동물이든 추상적이든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으로 봐서
소전이 파악한 재능에서 빠진 부분이 <공감>이 아닐지? 맞나요?

향인님의 향기에 반해서 친구가 많은 것은 아닌지?
점점 뼈속까지 내려가서 글을 쓰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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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7.07 18:07:41 *.48.41.28
소전님이 파악하신 재능은 전부 아니었음.
여해님이 말씀하신 공감도 제것이 아님.ㅎㅎ
뼛속까지 내려가서 쓴 부분도 있는 것 같네요. 내장도 포함해서..

영훈씨를 달래주는 소주, 맛이 어떤지 한번 먹어봅시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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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7.08 01:50:53 *.70.72.121
부지깽이님께서는 왜 휴가를 허락치 않으시고 침묵하실까?
둘 이랍시고 절대 싱글 딱지붙은 이들에게 선처(?)조차 말하지 않는 더불이상 들이란 실망 가득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원 한솥밥 먹는 식구라 할 수 있겠는가. 에잉~

저렇게 혼자가 아닌 복잡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사느라 고단하고만.
하나는 하나가 아니다. 둘이 둘만이 아닌 것처럼. 그러나 셋 이상은 역시 어렵다.(?)
고독이, 슬픔이, 외로움이, 기쁨이, 철딱선이, 가관이, 깐깐이, 샐쭉이, 심통이, 떠벌이 .... 그 집 완전 대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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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찬
2007.07.08 12:42:46 *.140.145.80
여해형님과 영훈이가 감지한 재능을 주목해 보세요.. 약속..ㅋㅋ
재능해석은 오프에서 해드릴께요.. 시간 괜찮으실때 전화 한번 주세요.
참고로 다음주 연구원 오프수업때 저 참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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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07.08 17:36:56 *.86.55.231
향인님 재능 나름대로 찾아 나의글속에 녹여 놓았는데.
좀 더 깊이 관찰하고 인사이동 시켜주겠음당. 기다리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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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7.09 00:01:14 *.48.41.28
써냐. 냥이도 있어. 얘꺼도 꽤 될껄..ㅎㅎ
기찬씨. 꼭 부탁해요. 궁금..
우제님. 물 좋은 부서로 부탁해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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