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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6일 16시 14분 등록
 철썩..솥뚜껑만 한 인사계 모 상사의 손바닥을 정면으로 받아낸 볼이 얼얼하다. 뺨에 얼얼한 기분을 느낄 사이도 없이 고막을 파고드는 심한 욕설들.. 1990년 5월 대구 인근의 모 공병부대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나의 일상중의 하나이다. 제대를 하고 15년이 훌쩍 지나 다 잊혀진 기억인줄 알았는데, 군대 전역을 하면서 부대 정문을 나서며 나쁜 기억을 다 버리고 맹세를 했었는데, 다시 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바로 그 겨자씨란 단어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105인 사건으로 치하포 사건 때 복역했던 인천형무소로 다시 이감된다. 거기에서 일본 경찰들의 혹독한 고문이 자행되던 하루에 백범은 홀연히 일본경찰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해져서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백범일지 상권 238p)


  군대의 하루는 인사계가 출근하여 행정반에서 한 바탕 포효가 끝이 난후, 중대 막사앞 공터에서 전 부대원이 모인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특별한 훈련이 없는 날이면 인사계의 한 마디에 하루 일과가 정해진다. 공사장으로 가는 사람, 부대 주변 정리하는 사람, 조립교 정리하는 사람, 등등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전역을 앞 둔 고참들도 꼼짝할 수가 없다. 자연 휴가나 외박이 끝나고 복귀할 때에는 인사계의 선물이 들려있게 된다. 이 선물의 양에 하루하루 일과가 결정이 되고, 다음 휴가나 외박이 결정된다. 군 생활 편하게 하는 것이 대충 이러한 방식인데, 나는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군대는 그냥 몸으로 때우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그러한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특히 인사계와 서무계의 사이는 떡과 고물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대부분 인사계의 지시를 받는 서무계는 인사계가 모든 업무에 대한 최종 결재권자이자, 중대 내 사병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된다. 서무병은 부대의 살림살이에서부터, 신병 관리, 부대일지 등 서류정리, 공문처리로 늘 잔일이 많았다.거기에 봉급지급 등 돈과 관련된 업무 때문에 툭하면 나오는 상급부 감사에 많았고, 감사 준비로 밤을 꼴딱 새우는 일이 많았다. 인사계와 업무적인 특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고분고분 일하는 것이 상책이건만, 이것은 복종하지도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돌아오는 것은 뺨을 맞는 것이고, 툭하면 완전군장에 뺑뺑이였다. 특히 37도를 오르내리는 대구의 폭염에 군장을 지고 운동장을 도는 것은 물먹은 스펀지를 한 지게 지고 백사장을 달리는 것과 같다.

  아마 내가 더 심하게 당한 이유가 있다면 교육계로 같은 행정반에 근무하는 모 상병 때문이었으리라. 서울 왕 뺀질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참은 부모를 잘 만나 늘 풍족한 돈을 쓰면서 인사계한테 갖은 아양을 부리며 호화스러운 군 생활을 한다. 외박 때 서울 집에 가지 않고 대구에서 인사계와 한잔 진하게 펐다는 소리를 직접 들은 적도 있었다. 속은 쓰렸지만, 이 고참도 화가 나면 늘 갈구어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내가 외박 조에 들어도 나갈라치면 감사에 대비하라며 일을 한보따리 주고 모 상병과 바꿔치기도 하였다. 외박 못나간 주말에 고참들한테 당하는 얼차례는 정말 참기 힘들었고 우울했다.

  이렇게 저렇게 깨지고 터지고 하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행정병으로 들어온 지 1년이 지나고 상병이 되고 나니 약간 요령이 생기게 되었다. 호랑이의 포효 속에서 그냥 묵묵부답하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었고, 눈치를 봐서 좀 터질라 싶으면 자리를 비우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는 인사계란 사람에 대하여 20년 높게 나라를 사랑하고 투철한 군인정신의 발로라는 존경심과 일처리가 FM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관리가 뛰어난 사람이 괴팍한 성격 때문에 그런 것이고 깨지고 터지는 것이 제대할 때까지 계속 지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호랑이 인사계가 고양이도 아닌 겨자씨로 변하는 사건이 있었다. 후방부대의 특성상 방위 병이 현역의 절반정도 배속되어 있었다. 인사계가 방위병 보직을 핑계로 청탁으로 재미를 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방위 병들의 편한 자리가 계속 바뀌는 것을 보니 그 사실이 궁금하게 되었고, 방위병 한명을 조용히 불러 추궁하니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다행히 그 사건이 비화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다른 면을 보게 되니 호랑이가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 때리는 힘과 포효는 계속되었지만, 받아들이는 나에게는 그리 아프지 않았고, 모멸감도 들지 않았다. 인사계와의 관계가 이렇게 변하게 되자, 고참들도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인사계가 근무하는 날은 고참들이 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묻곤 하였다.

  백범 선생님과 나의 군 생활을 비교한다는 것이 우습다. 죽음과 맞바꾸며, 늘 긴장을 하고, 집과 가족의 따뜻함을 잊으며 머나먼 타향에서 동가숙 서가식 하는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범선생의 삶을 따라다니다 보니 변곡점이 많았다. 변곡점에서 선택을 할 경우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버렸고, 곧 바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용기를 가졌다. 그러다가 실패하여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살아나오기도 힘든 인생의 밑바닥에서 신학문과 대부분의 지혜를 배웠다.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과 바로 실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제를 쉽고 빠르게 해결하는 열쇠인 것 같다. 나의 꿈, 내가 넘어야 할 산들이 어느날 갑자기 겨자씨로 변하는 날을 고대하여 본다.
IP *.118.1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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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16 00:00:39 *.70.72.121
음... 그런 겨자씨!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볼까, 꿈이란 겨자씨다! 그런데 말야, 겨자씨 자라서 큰 나무 되지. 우리들의 꿈도 역시 큰 나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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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06.16 06:05:19 *.128.229.230
영훈아, 이 글이 좋구나. 두 개의 사건이 만나고 바로 여기 내 속에서 합류하는구나. 이윽고 일상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며 내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되는구나. 그리하여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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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6.16 07:08:34 *.72.153.12
저번에 해준 얘기 오~ 이렇게 쉽게 풀어쓰는 구나.
그때 그 소재 붙들고 전 지금 헤메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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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6.16 07:52:30 *.211.61.242
재미있는 구절이었는데 연결을 잘했네.
그리고 점점 부드러운 이미지가 드러나고 있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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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6.16 11:40:49 *.209.121.43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특히 군대에 간 아들을 둔 내게는 흥미있고도 걱정되는 소재이군요.

따로따로 떨어져 있던 것들이 문득 연결될 때의 기분, 정말 최고이지요. 이런 쾌감을 맛보면서 우리의 글쓰기가 커나가는 것이겠지요.
우리 모두 이런 즐거움을 자주 접하게 되기를 바라며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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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6.18 09:21:40 *.99.241.60
충무공 이순신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읽으면서 내내 기분이 편칠 않았습니다. 요즘의 제가 파견업무가 복귀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해야하고
대학 동기들의 승승장구에 내가 뒤떨어지지 않는 자책감도 들고,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을 냉정하게 돌아다 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두분은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런 분도 있었는데. 너는 뭐냐고..뭐하는 것이냐고..계속 물어왔습니다.

써니누나 : 커다란 꿈이 겨자씨처럼 보이는 날..그 꿈은 이룬것이고,
그때는 더 큰 꿈을 찾아가야겠지.

사부님 /이렇게 좋은 책과 감동을 주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교정 / 지난번 공주에서 오는 32번 국도 얘기처럼 풀어쓰면 좋을 텐데

여해형님 / 점점 부드러워지다가 갑자기 우직해질 수도 있음을 알아주세요.

명석님 / 아마 요즘 군대에 저런 일이 있다면 큰 사건이 되었겠지요.
아드님의 안전한 군생활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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