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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8일 05시 37분 등록
"으아~앙"

속옷 차림으로 작은 방의 책상 머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난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안방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늦은 시간에 쿵쾅거리지는 못하고 발끝으로 뒤뚱거리며 달려 안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속을 시커멓게 태웠을 아내는 못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못 일어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꾹 참고 모른 척 하는 건지, 침대에 곤하게 잠이 든 채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아기 침대의 난간이 너무 낮아서 자칫하면 아이가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질 수도 있는 지라 서둘러 아이를 안아 올렸다.

벌써 며칠째 아이의 몸상태가 좋지 않다. 온몸에는 불같이 열이 나고 코도 콱 막힌데다가 기침이라도 한번 터지면 아예 꼴딱 숨이 넘어간다. 의례히 태어나고 첫 번째 생일이 지나면 엄마의 몸에서 타고 나온 기운이 약해져서 잔병치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딱 거기에 걸린 모양이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침을 토해내던 아이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가슴을 파고든다. 땀이 홈빡 젖은 몸에서 갓 빼낸 백열 전구의 그것처럼 뜨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내 어깨에 힘없이 머리통을 얹고 있던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울음 섞인 목소리에,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날 부른다.

"아빠…"

눈꼬리가 시큰해지는가 싶다가 명치 언저리가 싸~한 것이 어딘가가 말랑말랑 녹아 내리는 것만 같다. TV에 나와서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눈물을 줄줄 흘리던 아픈 아이를 둔 엄마들의 진심이 그제서야 내 가슴에도 절절히 느껴진다. 급한 울음은 일단 멈췄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반쯤 눈을 감은 아이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발을 동동 구르고 마루를 이리저리 오가기를 삼십여 분. 팔은 떨어질 듯이 저리고 어깨는 빠지는 것처럼 아프더니 이젠 허리까지 쿡쿡 아파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신 아파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리를 잡고 좀 앉았으면 싶은 생각이 구차하게 고개를 든다. 아이는 지쳤는지 스르르 눈을 감는다. 이때를 놓칠세라 얼른 소파로 무거운 엉덩이를 조준한다. 혹시라도 깰까 싶어 잠자리 잡듯이 천천한 동작으로 쭈그리고 앉는데, 엉덩이가 소파에 채 닿기도 전에 이 녀석이 눈을 번쩍 뜨고는 벼락같이 울어대기 시작한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서서 처음부터 다시 아이를 어르기 시작한다. 등도 두드리고, 쓸어도 보고, 노래도 불러 주며 거실을 서성이길 또 십여 분. 다시 살포시 눈을 감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좀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몸을 소파로 내린다. 아뿔싸!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을 뜬 녀석은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청껏 울어댄다. 별수 없이 또 주섬주섬 일어난다. 이젠 살짝 야속하다는 생각도 든다. 온몸이 쥐가 날 것처럼 아프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그러고도 똑같은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니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서질 않는다. 이러다가 정말 눈물이라도 쏟아질 판이다.

똑같은 자세로 안고 그저 몸만 낮춰 소파에 앉는 걸 아이는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혹시 내가 몸을 낮추면서 아이의 몸이 기울어지는 건가. 눈을 뜨고 있는 것도 아닌데, 분명히 잠든 것을 확인했는데, 어떻게 내 엉덩이가 소파에 닿기도 전에 알아채고는 불편함을 호소하는 걸까.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이번 주 과제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조사를 위해 인터넷을 온통 뒤지고 다니던 중에 '역자가 중요하다'고 하신 선생님의 주의 사항이 떠올랐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길현모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기 시작했는데, 이 일이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비슷비슷한 짧은 약력 외에는 도무지 별다른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 포탈 사이트의 유료 인물검색 서비스에서 길현모 선생님의 정보가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인터넷에서 무슨 유료정보냐고 콧방귀를 날렸겠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핸드폰으로 요금, '천원'을 후딱 결제하고 서둘러 유료정보보기 버튼을 클릭했다.

'길현모, 서울대학교 서양사 학사'

이게 전부였다. 정말 이 한 줄이 유료정보의 전부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기 기저귀 세 개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클릭 한 번에 날렸다는 억울함과 함께 서비스를 제공한 포탈 회사의 무성의한 상술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부실한 서비스에 대해 항의하고 돈을 환불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영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액수의 크기는 이제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사태 파악에 들어갔다. 유료정보 하단에 보니 인물검색 서비스는 포탈 사이트에서 제공하지만 그 자료의 책임은 신문사에 있다고 한다. 당장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연결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걱정과는 달리 첫 시도에서 담당자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근데 이 담당자의 비꼬는 듯한 말투와 어처구니 없는 반응이 아주 가관이다. 유료정보는 개인에 따라 가치가 다른 것이므로 일단 환불이 어렵고, 혹시 환불을 결정한다고 해도 그건 포탈 사이트에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환불해줄 권한도 없는 신문사와는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이번엔 포탈 사이트의 고객 센터로 전화를 걸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연락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이트 어느 곳에도 고객 센터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번호는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초대형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전화상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니… 그저 전화 대신 상담게시판을 통해서 환불신청이 가능하다는 글귀만을 어렵사리 찾아낼 수 있었다.

이쯤에서 포기할 법도 했는데, 오기가 생겼다. 연구원 과제하면서 단련된 '저자 탐색' 노하우로 포털 사이트의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터넷과 관련 자료를 뒤적이던 끝에 유료인물검색을 결제한 내역이 날아온 메일의 구석에서 포털 사이트의 것인지 결제 대행업체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전화번호를 하나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거니 포털 사이트 고객 센터가 맞았다.

쌓였던 화가 터져 나오는 걸 꾹꾹 누르며 상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환불을 요청했다. 처음에 그럴 수 없다고 완강히 버티던 상담원은 내가 슬슬 화가 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어느 순간 환불을 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돈을 돌려주겠다니 보상금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닌 바에야 더 이상 할 말이 궁했다. 그렇지만 그냥 물러서기엔 너무 억울했다.

포털 사이트의 고객 센터 연락처가 이렇게 감춰져 있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었다. 이렇게 전화번호를 찾기가 어려워서야 어디 고객 센터라고 할 수 있겠냐고 따졌다. 그런데 그 상담원에게서 쏟아진 대답에 난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고객 상담 게시판이 있는데, 전화가 왜 필요하냐는 이야기였다. 이번엔 내가 상담게시판으로 환불을 요청하는 것과 전화로 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이번엔 그 쪽에서 답이 궁해졌다. 더 이상 무언가를 바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그래도 천원은 환불 받았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그렇게 전화를 끊어야 했다.

'다름'의 기준은 주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름'은 받는 사람의 기준을 넘지 못했을 때 불만이 된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주었으니 이쯤에서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고객은 부족하다고 울고 있는데 기업은 이미 줄만큼 주었다고 소리치는 것은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름'의 기준을 새롭게 이해하고 눈높이를 맞추는 자세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고객이 말하는 부족함을 이해하고 먼저 가득 채우는 기업이 아니고서는 가까운 미래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다.

한참 동안 아이와 씨름을 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잠이 깬 아내가 나와서 아이를 넘겨 받는다. 아내가 하는 말이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주원이는 소파에 앉는 것을 싫어한단다. 그리고는 아이를 안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책상에 딸린 의자, 아이가 깨어나기 전까지 내가 졸고 있던 바로 그 의자에 편하게 털썩 앉는다. 내가 그토록 조심스레 앉을 때에는 경기라도 일으킬 듯이 울던 녀석이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맥이 탁 풀린다. 눈높이를 맞추고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는 대신 똑같은 방법만 되풀이 하는 아빠의 방식이 아니라 아이의 소리를 듣고 소파와 의자의 차이를 이해하는 엄마의 방식에 '다름'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저절로 걸린 병이
저절로 낫지 않을 리야 있겠냐마는
네 눈에는 내 눈이
내 눈에는 네 눈이
그리고 눈물엔 꽃이 약이다.
- 석철수


주원아~ 아프지 말고 씩씩하게 자라주렴. 아빠 가슴이 몽땅 녹아 내리지 않게 말이야.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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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5.07 20:18:57 *.60.237.51
하하하, 종윤이형.. 저도 당했어요!

형과는 지극히 다른 나의 반응! 천원 지불하고, 어! 한번 놀라고, 에이~ 실망하고, 그냥 포기^^...

아버지의 마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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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5.07 21:20:07 *.70.72.121
아빠의 소파와 엄마의 의자는 아빠는 자신이 더 편하고자 앉는 것이고 엄마는 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불편함을 감수한 차이가 아닐까요? 아빠가 안고서 앉았다면 아앙~ 해버렸을 것 같아...

환절기라 주원이가 고생하겠네요. 나도 갑자기 비염이 심해지면서 졸리고 코나오고 근질거려 정신이 없는데... 주원이 감기 뚝! 떨어져라.

천원 진짜 질기다. 종윤 승부근성 화이팅!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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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5.07 22:28:31 *.142.243.106
대단한 정성과 오기.
그리고 '다름'의 연결.

아.. 전 자꾸 오그라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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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5.08 05:56:03 *.109.96.31
도윤~ 하하하~ 반갑네그려. 동지가 있었구나. 딱 유료정보 페이지를 확인한 순간 당황스러워서 말이지. 그냥 넘어갈까 생각했었는데 계속 똑같은 피해자가 생길거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더라고...

써니누나~ 뭐, 아빠도 꼭 자기만 편하자고 소파에 앉았다기보단 둘 다 같이 좀 편해보자고... 윈-윈하자는 뭐 그런... ㅡㅡ; 주원이 감기는 많이 나았구요. 내가 질긴건가? 난 남들도 다 그러는 줄 알았지~ ㅎㅎ

호정님~ 그러게요. 저도 자꾸 써나갈수록 오그라드네요. 힘 빼고, 편하게, 오래 쓰자고 마음 먹는데, 잘 되지 않네요. 점점 나아질거라고 믿읍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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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언
2007.09.14 12:27:04 *.239.150.60
두가지 사건의 절묘한 조화...와..감칠맛납니다. 볼때마다 숙연해지고 맙니다. 전하려고 했던 말도, 마음에 와닿는 느낌도...너무 신선하고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주원이, 얼마전에 보았을 때는 건강해 보이던데...아프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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