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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8일 05시 46분 등록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었다.

갑신정변과 임오군란이 일어날 즈음 중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이 나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저 나라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 가운데 시기적으로 어디에 들어가냐고?
갑신정변과 임오군란이 일어난 연도는 알고 있다.(지금도 기억난다) 그러나 다른 곳과의 횡적 연결이 안 되었다. 그 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어떻게 안담.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적 특징은 무엇 무엇이 있는가?
1번 무엇, 2번 무엇, 3번 무엇, 4번 기억 안남.
그런데 이게 교과서를 펼쳤을 때 왼쪽 페이지 상단부 사진 밑에 받아 적은 기억이 난다. 도대체 네 번째가 뭐였지?

중국 왕조를 나열하면 ?
은-주-진-한----송-원-명-청
이게 다가 아닌데. 분열과 통합의 시기가 여러 번 있었는데... 어디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변화한 거지?

고등학교 까지 나에게 역사는 이런 것이었다. 그저 외워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복잡한 외우기였다. 그리고 또 기계적인 외우기였다. 시대 순 일렬 세우기였으며, 각 사건과 시대의 특징들 외우기였다. 시험에 나올 법한 것들을 찍어서 그것만 외웠다. 어려운 암기과목의 대표 주자였다. 한 과목도 아니었다. 국사도 있고 세계사도 있었다.

나는 역사라는 과목에 엄청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내 머릿속 구조와 맞지 않는 외우기 과목이라 여겼다. 스토리에 스토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독립된 무엇이 없었다. 여기저기 얽히고 설켰다. 실제로 시험을 보면 평균 깎아내리는 몇 과목 중 하나였다. 역사가 재미있다는, 역사를 좋아한다는 이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학교 때였다. 나는 ‘중국 고전문학사’라는 과목을 들어야 했다. 나는 ‘문학’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취약 분야인 역사와 문학의 결합이라니. 거기에다 학습할 양은 왜 이리 많은지. 도대체 어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전공 필수라 안 들을 수도 없었다. 기말고사 때 문제를 받고 답할 만한 것이 없어 백지를 냈었던 씁쓸한 기억도 있다.

무조건 외워서는 안 되었었다. 시험 문제 자체가 긴 서술형의 답을 요했다. 전체의 맥을 짚고 있어야 했다. 재수강을 하면서 나는 다른 눈으로 내가 공부할 것들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해, 그저 외우는 것이 아닌,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각각을 느끼는 방향으로.

나는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내 눈 앞에 직접적으로 펼쳐지는 것은 문학이나 그 뒤에는 역사라는 조류가 흐르고 있음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위기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지도층의 생각이나 서민의 애환을 담고 있음을 읽었다. 그들은 때로는 즐겼으며 때로는 도피했으며 때로는 아파했다. 그들은 유연하기도 하고 경직되기도 했다. 문학과 역사와 사회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반영하고 영향을 주었다.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도 이름일 것이다.

쓰고 보니, 대단할 것도 없는 학습법을 무슨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떠든 것 같다. 그러나 나 역시 암기 위주의 입시 교육에 찌들어 있던 사람이었다. 역사나 문학에는 흥미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누가 조언해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방법을 그렇게 시도하고 바꾸어보았다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커다란 일이었다.

물론 그 때 그 과목에 대한 방법의 재시도라는 것만으로 전 학습법이 전부 그렇게 바뀐 것은 아니었다. 큰 흐름을 파악하고 덩어리로 사고하고 이미지를 읽고 느낀다는 것, 그리고 이면을 읽어낸다는 것. 연관된 것을 끌어내어 함께 들여다본다는 것, 멀리서 보기도 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느낀다는 것. 그렇게 한 번 물꼬를 트니 내가 접하는 다른 것에도 조금씩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음악을 들을 때, 사진을 찍을 때, 외국어를 공부할 때 등등 나는 점차 다른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알았다. 전부터 이렇게 했더라면, 학교 때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던 역사나 문학이나 어학이 훨씬 흥미로웠을 것임을. 수학이나 과학이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 것임을.

이번 달은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달이다. 흥미 차원에서 대강 훑고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역시 깊이 몰입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를 앞두고 긴장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나의 취약 분야에 나를 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처럼 두려움을 느끼거나 무관심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넘어야할 큰 산처럼 부담감으로 오지도 않는다. 처음 책인 <역사는 무엇인가>를 읽었다. 전 같았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책이었다.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뿌듯했다.

나는 이들을 기꺼이 맞을 것이다. 다른 눈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느끼고 즐길 것이다. 이는 이 달이 끝나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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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5.08 13:44:48 *.198.108.152
민선씨, 편안한 도입과 한결 편해진 자세가 느껴져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역사'에 대해 관심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 교육제도의 최대 맹점이 '동기유발'이 안된다는 거고, 기초가 없는 데다 주입암기로 폼만 잡다가, 심하면 거대한 낭비로 끝나기도 하는 것같아요.

내 경우 여행가서, 현지인에게 우정을 느꼈을 때, 세계사에 대해 흥미를 느낀 적이 있지요. 여고시절 그 지겨웠던 세계사 수업을 떠올리면서요. 아, 이럴 때 공부해야 하는데... 하면서요.

역사의 달은 물론, 그 뒤로도 맘껏 즐기는 연구원 생활 되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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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5.09 00:44:50 *.48.42.253
혹 시 글이 잘 안 써지면 말을 해봐요.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느낌을 가지면 더 잘 쓸수있을지도... 그래도 그대의 노력이 느껴지는 좋은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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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5.09 07:43:38 *.244.218.10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요샌 하루하루 제가 다른 사람인 거 같아요. 엄청 왔다갔다 합니다.
글 쓴 바로 다음 날인데도 다시 보면 내가 저런 걸 다 썼나 싶기도 하고.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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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5.09 09:16:04 *.222.214.32
그 기분 내가 알 것 같아서 보태보자면,
왜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고 흔히 말하잖아요.
백프로 맞는 것같지는 않아요.

나탈리 골드버그가 말했듯, '글은 나를 빌려 표출된 위대한 순간'이라는 관점이 더 맞는 것같아요.
내 속의 최선의 자아가, 성찰을 통해 반짝 하는 거지요. 그런데 계속 그 성찰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글쓰기의 맛인듯 싶어요.

내 속에서 무언가 끄집어내려는 고민과 성찰, 낯섬과 승화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무의식까지 들여다보게 되고, 스스로를 치유하고, 표현에 거침이 없어질 때, 아! 이것이 자유라는 건가 싶을 때도 있어요.

부지런히 써요. 열심히 읽어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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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2007.05.09 13:32:25 *.47.187.34
향인 누나와 한 선생님께서 격려해주셨으니, 난 비판 좀 해볼까 한다.

좀 더 치열하게 써라. 때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하게 써 볼 필요가 있다. 그런 글을 쓰기에 적기가 연구원일 때다. 내가 보기에 자신을 사로 잡는 글이라면 좋다. 그런 글은 다른 사람의 머리와 가슴으로 잘 뛰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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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5.09 14:57:21 *.244.218.10
그래,,, 다른 분들은 비판하기가 아무래도 좀 조심스러울테니, 그대는 비판하렴. 기꺼이 들으마. 다만 과하진 말고...^^

난 잘 하려고 욕심내고 힘 들이다가 자기 소모전만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도 안좋고. 오히려 편하게 뱉어낸 글이 더 나았었지.
그런데 쉽고 편하게 쓰려 하다 보면 나태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힘들이고 몰아붙이는 게 곧 치열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겠지.
치열함에도 방향성이 있어야하겠어..

지금의 나는,,
쓸 데 없이 쥐고 있는 것들을 놓기도 함과 동시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이야. 그게 책이던 나 자신이던..
그럼 자신을 사로잡는 글에 더 가까이 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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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5.10 15:04:46 *.134.133.53
누나.. 희석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유머스러운 글이 아닌데도 웃으며 글을 읽었네요. 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고서 베시시 웃었답니다.

"한 과목도 아니었다. 국사도 있고 세계사도 있었다."

"나는 ‘문학’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취약 분야인 역사와 문학의 결합이라니"

하하하.. 옮겨 적으면서도 제 상황과 비슷하여 슬그머니 미소짓게 되네요. 저는 누나 이 글에서 솔직함과 편안함이 묻어나서 좋았어요. 그리고,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뿌듯했다."고 말한 누나의 뿌듯함을 저도 느끼고 싶네요. 과제 작성에 치열함을 쏟아붓지 않은 이에게는 '과업완료의 기쁨'이 없음을 [미완의 역사] 이후로 매주 월요일마다 느끼고 있답니다. 다음 주에는 누나처럼 뿌듯함을 느끼고 싶네요.

누나의 행진을 기대합니다. 이번 달이 지나도 역사 공부가 진행되듯이, 연구원이 끝나도 영원히 지속될 누나의 행진을 말이죠. ^^

근데, 승완이형, 치열하게 쓰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요? 형 말을 들으니, 저도 치열함이 없는 것 같아요. 정말 모르고 있는 동생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형이 말한 치열함이 없는 글이 어떤 것인지 너무 너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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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2007.05.10 16:36:32 *.47.187.34
치열한게 뭐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라는 뜻이다. 더 이상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 때, 한번 더 고치라는 말이다. 더하고 빼고 고치라는 뜻이다. 그 한 걸음이 차별화이고 진짜 노력이다.

마음에 품고 살라는 말이다. 칼럼 주제에 대해 매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틀 생각하고 하루에 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더 기진맥진한다. 생각이 내 안에 녹아들면 치열함이 즐거움이 된다. 치열하고 즐겁게 쓴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이와 같다.

희석아, 내가 보기에 글쓰기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를 때 어디서 시작하는가?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 준비하지 않고 오를 수 있느냐? 오르고 싶은 만큼 오를 생각이면 연구원 할 필요가 없다. 그건 나중 일이다. 극복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

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길이 있다. 새 길을 트고 만들어낼 수도 있다. 글쓰기도 그렇다. 언젠가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여러 방식으로 써봐야 한다. 1년 후면 알게 되겠지만 그때보다 지금 아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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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5.11 08:10:29 *.244.218.10
마음에 품고 살라. 하루에 쓰려고 하지 말라. 생각이 녹아들어 치열함이 즐거움이 되게 하라...... 이게 좋구나.
난 솔직히 지금 그렇게는 못하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는 느껴.

그런데...뭐 한 두번 느끼는 거 아니지만...
그댄 글과 말이 분위가가 어쩜 이렇게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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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5.11 09:02:29 *.55.55.206
ㅋㅋ 그게 승완형의 매력 아니겠어? 가벼움 속의 번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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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5.11 12:26:11 *.248.117.3
그러치, 그걸 전문용어로 모순이라고 하지.ㅎㅎ 까칠함 속의 다정함. 싸가지 없음 속의 예의갖추기. 남자 속의 여자. ㅎㅎ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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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5.11 12:53:08 *.244.218.10
^^
남자 속의 여자.
여자 속의 남자.
ㅋㅋ 저두 일백퍼센트 여잔 아닌 것 같아요..무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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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5.12 11:06:19 *.134.133.91
승완이형. 마음에 품고 살지 못했던 저였습니다. 이틀이 아니라, 두시간도 마음에 품지 못했던 저의 불성실함을 모두 들춰내는 듯한 조언입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순간에 제 자신의 게으름과 타협했던 저였습니다. 형의 이 송곳같은 조언으로 반성하게 됩니다. 승완이형.. 고마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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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5.14 14:28:58 *.249.167.156
지난 주가 바쁘긴 바빴나보다. 난 이 곳에서 이렇게 치열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진행된 줄, 오늘에서야 알았네. 댓글들이 막 살아 움직이네. 튀어 오르네. 숨 좀 고르고 다시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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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한정화
2007.05.14 23:45:59 *.72.153.12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 덕에 여러사람들 조언들을 보네요.
호정 곰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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