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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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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5일 13시 10분 등록
한국성은 내게 보이지 않는 산과 같았다. 특히, 기업이나 경영과 한국성을 연결시키면 그 정체가 더 모호해졌다. 어려웠다. 출발점이 보이지 않았고 좋은 사례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얼마 전 구본형 사부가 연구원들 모두에게 ‘내가 아는 한국성과 사례’이라는 과제를 주었다. 과제를 받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긴 고민 없이 내 머릿속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고, 다른 장면은 또 다른 장면으로 이어졌다.

지금부터, 그 장면들을 그려볼까 한다.


* 나의 경험
2001년 7월이었고 나는 대학생이었다. 아는 교수님이 자신의 책을 바탕으로 온라인 경영교육 컨텐츠를 제작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좋았고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한 사이버교육 업체와 함께 컨텐츠를 제작을 시작했다. 나의 일은 책으로 된 일차 컨텐츠를 압축하여 '스토리 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기간은 한 달이었고 20개 정도의 스토리 보드를 제작해야 했다.

원본의 내용을 깊이 이해해야 정리도 잘할 수 있는데, 당시 내 능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하고 첫 번째 스토리 보드를 완성하는 데 15시간이 어렵다. 잠자는 것 빼고 하루를 다 써야 했다. 이래서는 약속한 기간 안에 만족할만한 컨텐츠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계속 작업을 해나갔다. 그런데 작업을 해나가면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작업 속도가 빨라지고 동시에 스토리 보드의 품질도 향상되는 것이다. 작업에 익숙해져서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나는 불과 10일 만에 모든 스토리 보드를 만들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작업은 7일 만에 마무리되었고, 나머지 3일은 사이버교육업체의 담당자와 미팅을 하고 수정하는 데 소요됐다. 사이버교육업체의 책임자는 내가 만든 결과물에 대해 ‘기대 이상’이라며 매우 만족해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할 것을 권유했다.

무슨 마법이 일어났던 걸까? 몇 일만에 내 지능과 지식 그리고 컴퓨터 활용 능력이 일취월장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은 몰입과 어떤 흐름의 힘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신바람’ 효과였다. 당시 나는 하루에 12시간을 그 작업에 쏟았고 스토리 보드를 3개씩 만들어 냈다. 내가 왜 이렇게 이것에 몰입했을까? 처음 그 일은 어려움이었고 도전이었다. 내가 판단할 때, 목표를 달성할 확률은 50% 정도였다. 그런데 하다 보니 작업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내 마음에 꽤 괜찮아 보였다. 난 신났다. 한 번 신나자 아무도 아무 것도 나를 멈출 수 없었다. 내 마음이 시들해지지 않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 팀의 경험
지금은 2005년 9월이다. 내가 우리 회사에 입사한지 2년 3개월 정도가 지나는 시점이다. 회사는 컨설팅 회사이지만 나는 교육 사업부에서 기업 및 경영 교육 컨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그것이 내 주요업무다. 교육 사업부의 상근직원은 4명이다. 올해 우리 부서에는 큰 일이 1가지 있었다. ISO 품질 인증을 획득한 일이 그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 부서는 이 큰(?) 일을 기대 이상으로 해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ISO 품질 인증을 획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돈과 시간의 문제다. 돈을 많이 쓰면 아주 쉽게(?) 인증을 취득할 수 있다. 돈이 많이 없으면 부족한 돈은 시간으로 대신하면 된다. 성실히 오래 준비하면 딸 수 있다. 그렇다면 돈과 시간이 없다면 어떡해야 할까? 바로 우리 부서가 이런 상황이었다. 회사에서 정책적으로 ‘ISO 품질 인증을 획득한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ISO 인증을 준비하려면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인증의 요건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고, 인증의 요건대로 준비해야 인증을 취득할 수 있다. 인증의 요건을 숙지하고 그에 맞춰 준비하는 것은 인증 획득의 기본이자 핵심이었다. 기본 교육은 품질 인증 심사를 받을 인증기관을 통해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외부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준비하기로 했다. ‘준비는 우리 손으로 다하고 인증 심사만 받겠다는 것’이 사장님의 방침이었다. 사장님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회사의 컨설턴트들 중에서 ISO 인증 심사관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활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팀은 사장님의 생각에 찬성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준비를 하다 보니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컨설턴트들이 바빴다. 그들에게 이 일은 늘 두 번째 일이었고 자신들의 업무만으로도 벅찼다. 둘째, ISO 품질 인증이 2000년대 초반에 변경되었다. 따라서 바뀐 품질 인증요건을 알지 못하면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심사관으로 활동했던 컨설턴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일을 관둔 상태였다. 새로운 인증 요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컨설턴트 중 한 명이 우리를 지원해줬다. 그 컨설턴트는 없는 시간을 쪼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지원은 부족했다. 우리 팀에서 경영학과를 나오거나 경영에 대해 아는 사람은 1명뿐이었다. 바로 나였다. 동료들은 인증 요건에 등장하는 용어들도 잘 몰랐다. 안 배운 것이니 당연했다. 시간도 부족했다. 팀장인 이사님은 다른 일 때문에 인증 준비에 참여할 수 없었다. 3명이서 해내야 했다. 우리가 인증을 획득하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1달 후에 있을 노동부의 ‘훈련기관평가’에서 좋은 평가 등급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우리는 노동부로부터 교육비 지원을 받는 훈련과정을 운영한다). 훈련기관평가는 중요했다. 낮은 등급을 받으면 노동부로부터 지원이 작아지거나 아예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사업을 할 수 없다. ISO 인증을 획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기업 규모나 상황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3개월 정도는 예상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30일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시간의 압박과 미비한 지원 속에서 인증 획득을 준비해 나갔다. 처음부터 실수 연발이었고 속도는 나지 않았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업무 시간 중 70% 이상을 인증 준비에 쏟아 부었다. 2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우리 입에서 ‘어렵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실제 상황이 그랬다. 남은 시간은 2주일, 준비는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어쩔 것인가?

여기서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불과 10여일을 남긴 어느 날, 우리는 각자가 맡았던 부분에서 자료를 하나씩 만들어냈다(ISO 인증은 페이퍼 작업이 80%다). 우리는 서로의 것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네!’, 이것이 신호탄이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이 맞으며 몰입하고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매일 밤늦게 퇴근했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그야말로 팀이었다. 인증 심사일 바로 전날에도 우리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밤을 세워서야 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심사관은 우리가 한 것을 보고 놀랐다. “따로 어떤 교육을 받았냐”, “솔직히 누가 준비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가 아주 잘했냐하면 그건 아니다. 새로운 인증 요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여 지적사항도 여러 가지 있었다. 그 중에서는 인증 획득을 위해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흐름을 탔으니까!


* 사회적 경험
기억할 것이다. 2002년 여름을 가득 메웠던 붉은 물결을! 또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한 달 동안 축구에 미쳤던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작은 축구공 하나에 미쳤던 것일까? 애국심일까? 축구에 대한 열정일까?

6월 25일 독일 전, 전국적으로 750만이 넘는 길거리 응원단이 모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응원단 수가 이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개막을 보름 앞두고 스코틀랜드에 4대1 대승을 거뒀다. 스코틀랜드는 강팀은 아니었지만 월드컵 통산 4승을 거둔 바 있어, 1승도 하지 못한 우리나라보다 못한 팀도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전에서의 대승으로 국민의 기대는 커졌다. 월드컵을 열흘 앞둔 5월 21일 한국은 우승후보 잉글랜드와 붙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1대1 무승부를 기록했다. 초반에는 다소 밀렸지만 후반에는 대등한 경기를 벌여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조금씩 국민들의 피가 뜨거워져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26일 세계 최강이자 우승후보 1순위였던 프랑스와 싸웠다. 경기결과는 2대3으로 패했지만 경기내용면에서 우리 팀은 세계 최강 프랑스보다 더 좋은 경기를 했다. 국민들의 피는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래의 표에서 대표팀의 경기 추이에 따라 증가하는 길거리 응원단 수를 살펴보라. 대표팀이 폴란드를 잡았을 때 우리의 피는 활활 타올랐다. 월드컵 첫 승이었다! 세계적인 강호 포루투칼을 이겼을 때, 우리는 폭발했다. 환호 그 자체였다!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월드컵에서 3번이나 우승한 이탈리아에 극적인 역전승을 올렸을 때, 우리는 거의 미쳤다! 이탈리아를 넘고 8강에 오른 것이다. 스페인 전의 승부차기에서 홍명보 선수의 골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국민 모두가 붉은 악마였다! 대표팀이 승리를 거듭할수록 우리는 더욱 열광했다.

<2002 한일월드컵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결과와 길거리 응원단수의 변화>

날짜 / 상대팀 / 경기 결과 / 길거리 응원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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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 대한민국 : 폴란드 / 2 : 0 승 / 52만명
6월 10일 / 대한민국 : 미국 / 1 : 1 무승부 / 77만명
6월 14일 / 대한민국 : 포르투칼 / 1 : 0 승 / 278만명
6월 18일 / 대한민국 : 이탈리아 / 2 : 1 승 / 420만명
6월 22일 / 대한민국 : 스페인 / 승부차기 5 : 3 승 / 50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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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전을 앞두고 길거리 응원에 참여한 인원이 750만이다. 서울시청 앞은 붉은 물결로 가득 찼다. 경기장과 자신의 집이나 친구 집에서 응원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아기들이나 중환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응원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 2002년 6월,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였다. 나이, 남녀, 빈부, 장소, 종교, 지역의 구분 없이 우리는 하나였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누구나 태극기를 들었고 붉은 옷을 찾아 입었다. 부대, 경찰서, 교회와 절에서도 ‘대~한민국’이 터져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온 국민이 붉은 옷을 입고 박수를 치며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연호할 때 우리는 전율했다.

외국에도 열광적인 팬들과 응원전이 있다. 그러나 월드컵 때 우리처럼 온 국민이 함께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또한 우리의 응원전이 차별적인 이유는 한 달 내내 경기장은 물론 길거리를 온통 붉은 물결로 뒤덮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머문 자리는 평화로웠고 깨끗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부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질서 질서’를 외쳤다. 쓰레기는 함께 손수 치웠고 나무와 꽃들은 온전했다. 거스 히딩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청 앞 잔디가 그대로인 것을 보고 전율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마도 월드컵 기간 중에 발생한 범죄율을 평소와 비교하면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응원전을 바라본 외국 언론의 시각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처음에는 관심있는 눈길로 ‘붉은 악마’를 주시하던 외국의 언론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 국민이 참여하며 분위기가 폭발하자 경악하다가 마침내 경이감을 나타냈다. AP통신, NHK 등 외국 언론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감동적인 장면”이라며 “하나되어 응원을 벌이는 모습도 놀랍지만 수많은 인파들이 흥분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었다고 찬탄했다. 멕시코 민영 TV 아스테카는 “지금까지 수많은 월드컵 경기를 관전했지만 이처럼 수준 높은 질서의식을 보기는 처음이며, 한국국민에게 존경심을 보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건 자화자찬이 아니다. 아마 모두 동의할 것이다. 수십, 수백만의 인원이 벌이는 응원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응원단이 빠져 나간 거리의 뒷모습에 외국인들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우리는 난폭하지도 무질서하지도 않았다. 열광의 현장은 경기가 끝나면 이내 평온으로 돌아갔으며, 태극전사들이 경기에 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서 쓰레기를 줍고 뒷정리를 했다. 우리의 질서는 획일적이지 않았다. 모두가 붉은 색 옷을 입었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과 패션은 모두 달랐다. 태극기 치마와 바지, 반팔 티와 모자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였지만 그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은 빛났다.

어떤 이는 이것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해석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2002 월드컵 전, 그러니까 월드컵 예선전이 열린 경기장은 쓰레기 더미로 가득했다. 축구장, 야구장, 유원지, 해수욕장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다른가. 독일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 중 하나였던 우즈베키스탄과 대한민국의 경기가 끝난 서울 상암 경기장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쓰레기로 가득했다. 뉴스를 보면 올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유원지와 해수욕장도 전년과 다르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고 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월드컵 기간 한 달 동안에만 성숙한 시민이였단 말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디서? 촛불 시위에서다. 촛불 시위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월드컵 기간 중에 미선과 효순이가 주한민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는 소식이 널리 퍼진 것은 월드컵이 끝난 직후였다. 월드컵의 응원전은 촛불시위로 이어졌다. 하루 최다 20만 여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시간과 장소만 알고, 서로는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비폭력 평화의 시위를 벌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시위는 질서였고 시위 후는 평화로움이었다. 인도의 간디가 살아 돌아와 이 장면을 봤다면 그도 감동하지 않았을까.

2002년 월드컵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2002년 월드컵 기간 동안, 우리 모두는 붉은 악마였다. 동시에 우리는 천사였다. 계급도 지위도 없었다. 비윤리적이지도 않았다. 길거리 응원은 한바탕 축제였다. 즐거운 혁명이었다. 승리에 환호하고 골에 미쳤지만 쓰레기는 치워졌고 불상사는 없었다. 그것이 축구 때문인지, 애국심 때문인지, 승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리고 느낀 것은, 우리가 몰입하고 긍정적 흐름의 파도를 덩실덩실 타고 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신났다. 즐겼다!”



우리는 기억한다. ‘한국인은 모래알이다. 개인적인 능력은 뛰어나지만 모아 놓으면 싸우기 바쁘다’, ‘조선 놈은 맞아야 한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나중에는 한국 사람들의 입에서조차 이런 말이 나왔다. 과연 그런가? 과연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수동적인가?

천만에!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하나가 되었다. ISO 인증을 준비했던 우리 팀은 팀제의 교과서였다. 길거리 응원은 자발적으로 이뤄졌고 촛불시위의 주인은 누구 한 명이 아니라 참여한 모두였다. 세계 최고의 제철소를 건설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업을 만들어 낸 것은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1990년 대 말, 국가 위기에서 우리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 모은 금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그 개인의 힘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노사모’가 있었다. 노사모의 가치나 당위성은 여기서 논할 주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사모의 자발성이다. 노사모는 국내 정치인 최초의 팬클럽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작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몇 명이었다. ‘붉은 악마’의 시작도 다르지 않다. 축구를 좋아하는 몇 명의 젊은이가 경기장을 찾아 신명나게 응원한 것이 시작이었다.

촛불시위나 붉은 악마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주장한 몰입의 가장 좋은 증거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이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정리한 물입을 이끌어내는 요소만으로는 우리의 아름다운 장면을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고민했다. 어려웠다.

그저 나는 그 장면들을 돌아보면서,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계였다. 이 요소들이 결과와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과관계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내 사고력이 떨어진다.

내가 발견한 특성은 이런 것이었다. ‘몰입, 자발성, 승리, 목표, 어울림, 신바람, 이심전심(以心傳心), 흐름, 역동성, 즐거움’. 이런 것들이 결합하면 강렬한 에너지를 창출해낼 수 있다. 확실하다. 그 열기, 함성, 땀, 그리고 노력을 기억해보라. 뜨거움 속에서도 우리는 윤리적이었다. 그것이 우리를 더 눈부시게 한다. 우리가 만들어낸 장면들은 아름다운 혁명이었다. 즐거운 혁명이었다.


* 한국식 경영에 대한 이코노믹리뷰의 설문조사(2005년 5월)
마지막으로, 한국식 경영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싶다. 한국식 경영은 있는가? 있다면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는가? 어려운 주제지만, 나는 한국식 경영의 강점과 약점을 어설프게나마 정리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 둘 간의 관계를 알아보고 싶다.

‘이코노믹 리뷰’는 외국계 기업인들이 한국식 경영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울에 있는 28개 외국계 기업의 경영진과 고위간부 50명을 대상으로 한국식 경영의 장점과 단점을 묻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외국계 기업인들이 한국식 경영의 장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한 것 3가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공동체적(가족적) 조직문화’,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장기투자’였다. 그렇다면 한국식 경영의 단점은 무엇일까? ‘조직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가장 많이 지적했고 두 번째로 ‘오너 1인에 의한 전제’, 세 번째는 ‘투명성의 부족’, 네 번째는 ‘전략의 부재’였다.

나는 한국식 경영의 장점과 단점을 보면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장점과 단점이 쌍둥이처럼 보였다.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장점으로 연결됐다.

이번 조사에서 외국계 기업인들은 한국 기업의 가장 큰 장점으로 ‘공동체적(가족적) 조직문화’를 꼽았다. 전체 50명의 응답자 가운데 31명(복수응답 포함)이 꼽았다. 한국 기업의 ‘공동체적 기업문화’에 대해 많은 외국계 기업인들이 “구성원간의 동질성과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단합이 잘 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매진할 때 최대의 역량을 발휘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처럼 구성원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을 이끌어 내 조직의 팀워크(Team Work)를 극대화시키는 바탕으로 ‘가족적인 조직문화’를 들었다. 이에 대해 한 외국계 기업의 외국인 사장은 “한국의 기업들은 단일민족이라는 바탕이 있기 때문인지 회사를 가족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국계 기업인들도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기업들은 이 같은 조직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고 분석했다.

‘구성원간의 동질성과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단합이 잘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질적인 구성원이나 조직에 배타적이고 별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서로 끈끈하게 맺어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외부보다 내부 중심적이다. 이코노믹 리뷰의 조사에 참여한 한 경영자는 “한국 기업만큼 단합대회나 야유회가 많은 조직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공동체적(가족적) 조직문화’와 ‘조직의 폐쇄성과 경직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보인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장기투자’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오너십 경영에 있을 것이다. 삼성이 반도체에 뛰어든 것, 현대가 전례 없이 조선업과 자동차 사업에 달려든 것, LG가 ‘우리 손으로 라디오를 만들겠다(가전 사업 진출)’고 선언한 것 등은 모두 창업자의 의지의 산물이었다. 한국 기업은 소유주(창업자)가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하며 기업을 이끌어 왔다. 오늘 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가는 추세이지만 이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도 많은 기업에서 오너의 힘은 막강하다. ‘황제경영’이라는 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한 명의 오너가 잘 못된 선택을 하여 망한 기업이 어디 한 둘인가. 외국계 기업인들이 한국식 경영의 단점으로 ‘오너 1인에 의한 전제’를 꼽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투명성의 부족’은 ‘공동체적(가족적) 조직문화’, ‘신속한 의사결정’, ‘과감한 장기투자’, ‘오너 1인에 의한 전제’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결과물로 보인다. 이심전심으로 알면 되는 것을 모두 다 밝히는 것, 이미 서로 통한 것을 굳이 끄집어 낼 필요가 있을까. 빠른 의가결정과 과감한 투자 결정을 중요시한 경영 스타일에서 투명성은 늘 시급하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제 투명성은 기업이 놓치면 생존하기 어려운 화두가 되었다.

“한국의 기업은 사업 전략을 세울 때 계획 및 위험요인을 저평가하거나 때때로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한 외국인 경영자의 말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 반도체 산업, 조선 산업, 전자 산업 등이 우리의 성장 엔진이 될 수 있었다. 정주영 회장의 ‘안 된다고? 당신 해봤어?’라는 말이나 포스코(포항제철) 설립 당시의 ‘우향우 정신’은 치밀한 전략이라기보다는 실행이었다. 삼성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성공을 믿은 사람은 삼성 내부에서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사업에 투자한 것은 그야말로 먼 미래를 바라본 과감한 것(과감한 투자 결정)이었다. ‘빠른 의사결정’이 ‘전략의 부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빨리하려 하면 할수록 놓치는 것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우리 속담은 이래서 있는 것이다. 잭 웰치는 ‘전략의 실행’을 강조했다. ‘빠른 의사결정’ 없이는 ‘전략의 실행’도 어렵다. 한국식 경영의 장점과 단점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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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5.09.05 11:51:53 *.118.67.80
참 좋은 글입니다.
이제는 글의 내공이 쌓여감을 느낄 수 있군요.
많은 부분이 공감대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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