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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1일 00시 51분 등록

BR. 28 음식의 위로

에밀리 넌

2020, 마음산책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위장에 깃들어 사는 게 아닐까. 유난히 힘들고 쓸쓸한 날이면 포근포근한 감자국을 끓여 밥 한 숟가락을 말아 먹어야 하루를 견딜 수 있다는 선배가 있었다. 나도 그런 음식이 있다.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이 외롭고 고단한 하루는 따끈한 누룽지 한 그릇에 잘 익은 김치라야 텅빈 속을 달랠 수 있다. ‘음식의 위로’라는 단순한 제목은 그러니까 의식하든 아니든 많은 이들이 이미 체득한 진리이고, 책의 내용 또한 예상대로 흘러가리라 짐작했다. 


“에밀리, 우리는 비슷해. 우리는 원하지 않는 게 뭔지는 아는데 정작 뭘 원하는지는 몰라.”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위로음식에 대한 그의 대답에서 단서를 찾았다. 

컵에 차가운 우유를 붓고 오래오 예닐곱 개를 부수어 넣는다. 스푼으로 먹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선 먹지 않는다. p.82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먹을 수 없는, 나만의 위로음식(soul food)이란 어떤 의미일까. 저자 에밀리 넌은 이 솔직한 제목 그대로, 음식이 어떻게 곤경에 처한 그녀를 구원하고 위로하는 매개체가 되어 주었는지를 담담히 써내려 갔다. 저자는 뉴요커, 시카고 트리뷴 등 유수의 매체에 관련 칼럼을 써온 화려한 경력의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가정요리전도사다. 하지만 그런 저자의 약력을 보고 이 책을 최고급 레스토랑을 섭렵하는 미식방랑기 내지는 트렌디한 음식 에세이로 상상했다면 댓츠노노. 사실을 말하자면 나부터가 맛있는 음식 소개와 멋진 문체가 어우러진 가벼운 에세이를 기대했다가 ‘그런 책 아니거든!’이라며 달려드는 저자에게 멱살을 잡힌 듯한 기분이었다.   


저자는 음식의 추억을 빌어 가문의 내력 같은 알코올 중독과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 방황의 시간, 그리고 그녀와 가족들을 파국으로 이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이를 딛고 일어서기까지의 과정을 돌려 말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찬찬히, 아프게 고백한다. 


“에밀리, 피클은 내 위로음식이 아니야.“ 하긴 피클이 마사의 위로음식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마사가 덧붙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잼과 젤리를 만들고 피클이나 청을 담그는 등의 집안일을 강제로 해야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우리 집의 하녀였어.” 마사의 어머니는 평생 딸에게 혹독했다…. “어머니는 내가 요리나 청소를 할 때만 곁에 있게 했어.” 마사가 말했다. p.112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우리 가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의지하고 싶을수록 더 멀리 밀어내고 결국은 상처만 입히고 마는 파괴적인 가족 관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저자는, 그 모든 상실과 회복의 여정 곳곳에 가족, 친척, 친구로부터 얻어낸 귀중한 레시피들로 이정표를 만들어 둔다. 정확한 지명과 거리 표시 대신 친절한 레시피들이 곳곳에 등장하는 지도책이랄까. 목적지도, 가는 방법도 모르지만 연필로꾹꾹 눌러쓴 애틋한 레시피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꼭 도착해야 할 그 곳에 와 있음을 알게 되는 그런 책. 


믿음이 없을 때조차 음식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놀라움을 안겨주며, 우리를 달라지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준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열린 마음으로 나눠 먹으라. 그러면 똑같은 선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위로받았다.p.365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위로와 치유로 이끌어 주는 음식의 힘은 세다. 그리고 그 음식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더욱 더 힘이 세다. ‘음식의 위로’는 음식과 친구,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가장 다정한 두 존재가 당신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Soul Book, 위로 책이 되어줄 것이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


“에밀리, 우리는 비슷해. 우리는 원하지 않는 게 뭔지는 아는데 정작 뭘 원하는지는 몰라.”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위로음식에 대한 그의 대답에서 단서를 찾았다. 

컵에 차가운 우유를 붓고 오래오 예닐곱 개를 부수어 넣는다. 스푼으로 먹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선 먹지 않는다. p.82


‘최고의 샌드위치는 누군가 당신에게 만들어주는 샌드위치다’라는 말은 진리 중의 진리다. P.83


“에밀리, 피클은 내 위로음식이 아니야.“ 하긴 피클이 마사의 위로음식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마사가 덧붙인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잼과 젤리를 만들고 피클이나 청을 담그는 등의 집안일을 강제로 해야 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우리 집의 하녀였어.” 마사의 어머니는 평생 딸에게 혹독했다…. “어머니는 내가 요리나 청소를 할 때만 곁에 있게 했어.” 마사가 말했다. P.112


그 모습에 나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다시 기쁨이 찾아왔다. 내 심장에서 화살 하나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P.151

토니 덕분에 나는, 내가 결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죄 많고 실패한 멍청이가 아닌, 힘든 과정을 겪고도 운좋게 살아남은 새존자로서 정상적이고 강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진정한 네 가족인지 생각을 다시 정리하기만 하면 돼.” 토니가 여러 번 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자책 대신 ‘빵을 구울 시간’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P.162


자랄 때 우리가 욕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심상치 않은 말을 하면 엄마는 “네 입을 네가 때려!”라고 명령했는데, 나는 그게 우습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나한테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언젠가 저녁 식사에서 올리버 오빠가 그 명령을 받고 장난으로 자기를 너무 심하게 때리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사랑과 결별, 굴욕, 숨 막힘…., 이 모든 일이 저녁 식사 시간에 일어났다.p.170


‘…. 존재할 이유를 만들어.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야지. 다시 도전하라고.’ 그러나 생각들은 날 짓누르기만 할 뿐,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날마다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오르락내리락 사방을 헤메다가, 결국은 저녁 식사에 돌아와 멈추었다. P.185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둘이 포옹을 하고 나니, 교류 없던 20여 년이 무색할 만큼 곧바로 예전의 편안하고 가까운 친구 사이로 돌아갔다. 각자 많은 일을 겪었고, 그만큼 많이 변했어도, 사람은 자신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다. P.207

알고 보면 내내 아무 탈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P.243


나는 자꾸 휘청거렸다. 도트가 내 팔을 잡고 휴대전화 손전등 기능을 작동해 길을 비췄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나를 위해 앞길을 비춰주는 친구 덕분에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안전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고통의 원인만 되란 법은 없다.p.254


내가 가졌던 가족이, 세상에서 차지할 내 자리의 유일한 기준이 될 필요는 없었다. 세상은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우리 가족이나 그들의 어리석은 싸움과는 상관없는 일로 가득하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들, 형제자매를 위해 희생하는 곳이 또한 이 세상이다. 그 사람들은 원래 가족이 그러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든 서로 끈을 놓지 않는다. 

이제 나는 가족을 놓아버리거나 끌려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P.265


다행스럽게도 나는 인생이 연희가 아니라 포틀럭 파티임을 깨달았다.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도 환영받는 파티. 각자 지닌 것을 마음 편하게 들고 오는 곳. 너무 피곤하거나 돈이 모자라면 핫도그를 가져와도 좋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성을 듬뿍 담은 음식을 가져와도 되며, 많은 양의 음식을 가져온 사람도 편의점 콩 샐러드 하나 들고 온 사람과 나눠 먹을 수 있는 그런 파티. 

사람들은 언제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거만 기억하면 된다. P.360


사람들은 살면서 좋은 시간보다 나쁜 시간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 나는 운이 좋다. 많은 추억이 음식과 연관돼 있어서 그 덕분에 트라우마에서 치유로, 비통함에서 희망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또한 음식은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데 기준이 되어 주었다. 

음식의 가장 좋은 점은? 음식으로 마음이 한결 느슨한 상태가 되면 사랑을 주기가 더 쉬워진다. 음식은 생기를 불어넣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작고 단순한 몸짓으로도 기적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수프 너 주려고 가져왔다.’ P.364


믿음이 없을 때조차 음식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고, 놀라움을 안겨주며, 우리를 달라지게 하고, 강하게 만들어준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열린 마음으로 나눠 먹으라. 그러면 똑같은 선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위로받았다.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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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4 05:04:08 *.215.153.2

글을 읽는 동안,  예전에 읽었던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주는레시피" 책이 생각납니다.


현대인들은 돈벌이 직장생활로 바빠서 음식을 만들어서 나누어먹는것 보다는 맛있는 식당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를 위로하나 봅니다.  저에게 소울푸드는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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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7 13:35:50 *.46.128.249

나의 쏘울 푸드는 무얼까 생각해보게 되네요. 저는 갓지은 맨 밥. 엄마가 새로 해 주던 그 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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