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박노진
  • 조회 수 463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2월 16일 13시 00분 등록

노동과 경영 연재 2회 - ‘노동의 종말 2’ 편

연재 첫 회를 쓰고 나서 왜 이렇게 하는 거지? 하는 의문 속에서 한동안 서성거려야 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나만의 전문분야를 가지고 싶은 것이기도 했지만 과연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하는 점이었다. 나의 관심 분야를 죽 나열해 보았다. 변화 - 시간 - 사람 - 하루 - 만남 - 관계 - ···. 이 중 사람의 문제가 이 분야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문제, 결국 이를 노동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1인 기업가라 부르기도 하고, 전문가로 부르기도 하고, 말없는 다수 대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사람들 말이다. 시기와 질투, 원망이라는 경쟁의 아이콘 속에서 스스로의 욕망이 부르는 대로 쫒아가 하고 싶은 일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가 꿈꾸던 일이다. 이것이 변화고 시간관리이고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고 사람들을 만나 네트웍을 잘 형성하는 것이다. 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변화와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을 연결하는 요소가 하루라는 기초 단위속에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이것을 개별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풀어낼 것인가 아니면 집단적인 과제(또는 범 국가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지만)로 시각을 넓힐 것인가이다. 나의 관심사는 어찌 되었던 사람과 변화라는 두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노동과 경영이라는 연구 주제는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잡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였다. 일단 이 분야로 들어가 보자. 100회의 연재가 성과적으로 마무리된다면 나는 이 분야의 괜찮은 전문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것이 중심축으로 해서 여러 가지 비즈니스 모델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 때 가서 천천히 고민해 보기로 하였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연재는 시작했으니 끝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고민이었다.

근검 절약은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 있어 초석이었고 자신의 자식 세대에게 좀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주기 위해 새로이 도착하는 이주민들에게 있어 닻의 역할과 미국의 세대들을 이끌어 주는 푯말의 역할을 한 초기 양키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가자! 아메리카로’라는 책을 볼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미국의 초기 문화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개척과 도전, 그 내면의 상처와 아픔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20세기 초입의 미국은 청교도적인 문화가 경제 대국으로의 역할에 맞는 소비문화로 자리잡기에는 너무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기업인들은 그들의 무한정 생산되는 상품들을 소비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생산성 향상은 원가를 낮춰주는 효과까지 가져다 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상품을 소비해 줄 소지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전통적인 문화는 자력갱생의 문화였다. 대부분 필요한 생필품은 자체 제작과 소모였다. 기업가들은 이를 바꾸지 못하면 공멸할 위기에 다다른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25년 미국 상원의 교육 및 노동 위원회는 청문회를 통하여 기술 향상으로 일자리를 잃은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아주 오랜 기간 계속해서 실업 상태로 남아 있고 일자리를 찾았을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저임금의 일자리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과잉생산과 과소 소비자의 문제였다는 것도 나타났다. 기업가들은 아직까지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많은 구매와 더욱 더 작은 저축을 확산시켜 자신들의 창고와 진열대를 비우게 하여 미국의 경제가 돌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이른바 십자군 운동으로 불리는 소비의 복음 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국의 기업계는 미국을 건설해 온 그와 같은 정신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이는 미국의 다수 노동자들을 미래에 대한 투자가로부터 현재의 소비자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 경제학자인 갈브레이스가 말한 ‘기업의 새로운 사명은 기업이 만족시키려는 욕구를 창출’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처럼 그 당시 경제 번영의 핵심은 불만족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내는 데 있었다. 새로운 소비복음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순전히 기업과 기업가들의 생존전략이었다. 경제학에 있어서는 1920년대 ‘소비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기업의 영역에서는 주변적 역할을 해온 마케팅이 기업활동의 중심부로 들어왔다. 생산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탈바꿈을 시작하였다. 경제활동의 중심은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의 노동자를 지위 의식이 강한 소비자로 전환하는 것은 급진적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대개 물품을 가정에서 만들어 쓰고 있었다. 광고인들은 이용 가능한 수단과 기회를 사용하여 집에서 만든 제품을 격하하고 상점에서 팔고 공장에서 만든 품목의 판매를 촉진하였다. 특히 젊은이들이 목표 대상이었다. 광고 메시지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집에서 만든 제품을 입거나 사용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최종 소비자의 중요성이 20세기 초에 인식된 이유는 생산자 중심의 기업문화로 인하여 늘어나는 상품의 양이 팔리지 않고 재고로 쌓여감에 따라 소비자가 구매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기업인들이 이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노동으로 인한 가사시간의 부족으로 소비 증가가 일어났다는 이론은 이런 점에서 진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의 기업홍보업계는 마케팅 전략을 신분의 지위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지위의 원천은 더 이상 물건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능력이라고 말함으로써 갈수록 가속화되는 생산성에 맞추기 위해 소비의 속도를 빠르게 하려는 기업계의 의지를 반영했다.

이 격변의 시기에 나타난 소비자 신용만큼이나 미국 임금 소득자들의 구매 습관을 재정립하는 데 성공적인 것은 없었다. 소비자 신용은 불과 10여년 만에 열심히 일하고 검약했던 미국인들을 새로운 순간적인 만족을 찾는 소비중심문화로 만들어 버렸다. 대량 소비 심리를 교모하게 이용한 20세기 최대의 판매아이디어중의 하나가 됐다. 이제 미국은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던 개척과 도전의 나라에서 쓰기 위해 벌어야 하는 만족을 위한 소비중심의 문화가 미덕인 나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은 자국 기업가들의 잇속을 위한 제국주의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 대공황이 터지고 미국인들은 순식간에 길거리에 나앉은 거렁뱅이가 되 버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공황의 와중에서도 상품 소비의 60% 이상이 할부 구매 등의 소비자 신용에 의해서 팔려나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의 증가와 실질 구매력의 감소, 일자리의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반성과 대안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이 글에서는 그러한 몇 가지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많은 수의 경제학자들은 대공황과 같은 침체의 원인을 재화 및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창출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생산성과 산출량을 증대시켜 놓은 1920년대의 기술 혁명에서 찾았다. 이미 50년 전(1880년대)에 엥겔스는 ‘시장의 확대가 생산의 확대 속도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지금까지 근 80여년을 지나올 동안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국가별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과 이로 인한 생산성 향상, 그리고 그로 인한 실업의 증가 사이이의 관계’가 21세기 가장 중요한 노동과 경영의 과제가 되었다.

이른바 기술 실업이란 노동력의 사용을 경제화하는 수단의 발견이 노동에 대한 새로운 용도를 발견하는 속도를 능가하여 발생하는 실업을 의미한다. 노동계는 ‘악화 일로의 경기 침체에 발목을 잡힌 많은 회사들이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원가를 계속 절감하여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어 버리는 위기에 대한 공평한 해결책으로서 근로 시간의 단축을 위한 정치적 주장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노동자들은 새로운 노동 절약 기술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몫을 공유할 권리를 갖는다고 강조함으로써 더욱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노동운동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 새로운 노동절약 기술에 의한 생산성 향상으로 인한 노동의 대체와 실업증가라는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도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미국 내에서.

이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기술 실업을 ‘능률향상과 경제적 과잉 및 제한적인 시장의 자연적인 결과’로 인식하고 국가가 광범위하고 영구적인 실업을 피하려 한다면 기업계가 근로 시간의 단축이라는 형태로 생산성 향상을 노동자와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시간의 재분배만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되버린 것이다. 기업가들이 희망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충분한 구매력을 갖고 적절한 소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근로 시간을 줄여야만 모든 사람들이 생산성을 흡수할 수 있는 일자리와 적절한 수입을 가져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업가들은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늘어나지 않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근로시간의 단축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케이스는 켈로그Kellogg이다. 1935년 켈로그는 보고서를 통하여 노동자들이 고임금과 근로 시간의 단축을 향유함으로써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음을 실제로 확인시켜 주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 6시간 근로제를 5년간 운영한 결과( 그 전에 이미 임금을 평균 12.5% 인상함으로써 매일 2시간의 근로 시간 손실을 상쇄해 주었다.) 25%의 단위 원가(혹은 간접비)가 절감되었고 노무비는 10%, 사고율은 41% 그리고 1929년에 비해 39%의 고용증가가 발생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론에 불과한 것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5년 동안의 실제 경험으로 그것을 입증했다. 근로시간이 짧을수록 우리 종업원의 능률과 사기는 너무나 올라갔고 사고율과 보험율 역시 개선되었으며 단위당 생산비 역시 낮아져 예전의 8시간 근무에서와 똑같이 6시간 근무 하에서도 임금을 줄 수 있었다.’ 켈로그의 철학은 노동자의 능률 향상 및 실업의 감소라는 개념 이상의 것이 되었다. 당시 사장인 브라운의 말은 70년 후 한국의 유한킴벌리 문국현 사장의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산성 향상의 목표가 이윤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미국 노동자에게 여가 시간을 주는 것이라면 노동자들은 가족과 지역 사회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새롭게 하는 한편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유를 넓힐 수 있다.’

이미 1932년 경에 노동운동은 근로 시간의 단축에 대한 주장을 삶의 질을 높이고 고용 확대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1933년 모든 사업체는 주 30시간 근로를 준수해야 한다는 블랙 법안이 상원을 통과했을 때 전국 산업 부흥법으로 무마한 루스벨트 행정부의 저지가 없었다면 이 획기적인 사건은 미국경제의 영원한 특징이 되었을 것이다. 이 당시 사회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뉘만 바뀌었을 뿐 사람을 위한 사회의 노력과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IP *.118.67.206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72 전략적 인적자원관리 1 [1] 박노진 2005.10.11 12755
5171 전략적 인적자원관리 2 박노진 2005.10.16 10226
5170 인적자원관리 부문의 향후 과제 박노진 2005.10.27 6343
5169 한국인과 숫자 3 [1] 오세나 2005.10.27 8577
5168 직장의 미래 모습 박노진 2005.10.28 5860
5167 직장인의 미래 모습 [1] 박노진 2005.10.28 6916
5166 디지털 시대의 인재상 박노진 2005.10.28 6221
5165 핵심인재가 되기 위한 방법론 박노진 2005.10.28 6028
5164 최강 노동자가 만든 도요타 박노진 2005.11.30 6995
5163 노동과 경영 1 박노진 2006.02.16 4842
» 노동과 경영 2 박노진 2006.02.16 4630
5161 노동과 경영 연재 3회 - 생산성 향상으로 나타난 시장의 현실(3) 박노진 2006.02.17 5259
5160 노동과 경영 연재 4회 - 노동절약기술의 발전과 노동운동의 아이러니한 동거 박노진 2006.02.17 5309
5159 노동과 경영 연재 5회 - 자동화에 대한 미국노동운동의 대응과 결과 [1] 박노진 2006.02.19 4941
5158 노동과 경영 연재 6회 - 포스트포디즘 [1] 박노진 2006.02.19 6535
5157 노동과 경영 연재7회 - 블루칼라의 종말 박노진 2006.02.20 5794
5156 노동과 경영 연재 8회 - 서비스부문의 현실 박노진 2006.02.20 5193
5155 노동과 경영 연재 9회 - 첨단 기술의 승자와 패자 박노진 2006.02.21 5206
5154 노동과 경영 연재 10회 - 린 생산방식에 대한 상반된 평가 박노진 2006.02.21 7649
5153 노동과 경영 11회 - 노동시간의 리엔지니어링(1) 박노진 2006.02.22 5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