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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11시 36분 등록

단어채굴자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낯선 시공간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다른 시공간이라도 사람 사는 모습엔 큰 변화가 없음에 새삼 놀라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과 다르다는 것을 환기해주는 것은 책에 쓰여진 단어. 단어는 그 책이 쓰여진 시대를 살고 있는 저자에 의해 선택되는 까닭이다. 여행 할 때 간판의 외국어를 보며 다른 나라에 온 것을 실감하듯, 독서 중 만나는 낯선 어휘들은 ! 내가 지금 다른 시대의 저자가 쓴 책을 읽고 있구나!’라는 것을 환기해준다.

 

낯선 단어를 만나게 되면, ‘문맥상 대략 뜻을 짐작하면 되지’하며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중에라도 사전을 찾아서 그 뜻을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채만식의 <탁류>를 만나기 전 나는 전자였고, 탁류를 만난 후에는 후자가 되었다. 원래의 나는 문맥과 흐름을 중시하고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직감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서습관이 있어서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그냥, 넘어가’하는 스타일이었다.

 

언젠가 군산에 놀라가서 소설 <탁류>의 배경이 군산임을 알게 되었다. 여행지를 가면 해당 여행지를 배경으로 한 책을 읽어보는 여행습관 역시 갖고 있어 <탁류>를 읽어봐야지 하던 차, 마침 군산이 고향이라는 친구한테 채만식 선집을 선물 받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책을 읽으려니 이건 정말이지 언어박물관이 따로 없었다. 1930년대의 어휘를 이 시대에 읽자니 낯선 단어의 돌멩이에 눈길이 채여 읽는 흐름이 매끄러울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하나찌두 일이 오분눈데 쓰나찌나 세나찌나 무슨 일이 있냐?"같은 글귀와 마주치면 이건 읽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1930년대 어휘는 이랬구나 싶은 가운데 나름 국제적인 것에 또한 놀란다. 조선어에, 일본어에, 사자성어에, 영어에, 독일어까지 등장한다. 채만식의 소설을 읽는 것은 과거의 어휘를 구사하는 인물들을 만나면서 언어박물관 투어를 하는 듯한 색다른 느낌의 독서였다.

 

그렇게 마주한 30년대 조선인의 삶은 지금 한국인의 삶과 다르지 않음에 놀라기도 했다. 당시 아이들의 꿈 중 조선총독이 되어 월급 많이 받겠다는 대목이나 아현이니 애오개니 등의 지명이 나오면서 '애오개 땅 백성들의 바쁘기만 하지 지지리 가난한 생활'이라는 표현이 그러하다. 사서삼경 공부하다 시대가 바뀌어 보통학교 가서 신학문을 공부했어도 자식들 쫄쫄 굶기는 정주사의 묘사와 그를 보는 막내아들이 '공부를 잘한다거나 좋은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것과 돈을 번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깨달았다는 대목이 또한 그러하다. 기생집에 팔려간 아이를 다시 사서 농촌에 시집이라도 보내는 게 어떠냐는 승재에게 기생팔자가 어때서 그러냐며 한 페이지 가득 쏟아 붓는 기생집 주인의 대사도 읽을 만하다. “이도령도 아니고 그깟 일부종사!”라며 한 페이지 가득 토해내는 장면에서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탁류>에서 마주치는 낯선 옛 단어들과 표현들 중의 상당수는 인터넷 사전에는 나오지 않아 집에 있는 국어대사전을 펼쳐 들고 그 뜻을 살펴 보아야 했다. 세월의 흔적과 함께 배어버린 특유의 묵은 종이 냄새를 풍기는 사전을 뒤적이며 30년대 쓰여진 소설을 읽자니 마치 옛 단어를 파헤치는 채굴작업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탁류>에 담긴 단어들의 뜻을 알게 되니 이후 그의 책을 읽는 것은 막힘 없이 읽혔다.

 

그래,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귀찮아 하지 말고 단어채굴자라 생각하자!’ 이렇게 탁류를 기점으로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와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투덜대지 않고 애써 그 단어의 뜻과 뉘앙스를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채굴하며 알게 된 옛 단어를 그대로 글쓰기에 적용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단어를 골라 쓸 나만의 단어광산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간 내가 써왔던 글들을 읽어보면 자주 쓰는 단어들이 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문득 나의 단어광산이 빈약하여 쓰던 단어만 계속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을 들으며 자란다’는 어른들의 옛 말이 있다. 나의 단어광산도 사전을 뒤적이는 나의 손놀림과 부지런한 호기심을 먹고 자랄지도 모른다. 내가 쓸 단어들을 생각하며 책을 읽으면 낯선 단어를 마주칠 때 오히려 광맥을 발견한 양 기쁘다. 낯선 단어가 눈길에 걸릴 때면 오랜 세월 묻혀 있던 화석을 채굴하여 보석으로 가공하는 과정 중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단어 광산에서 채굴한 옛말과 순수 우리말, 토속어, 사투리 등에 재미가 들어, 한국어 검정 시험을 보고, 내친 걸음에 달인이 되면 3천만원의 상금을 준다는 ‘우리말 겨루기’를 향하여 ‘돈 되는 도전’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말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본방 사수하시고, 단어채굴과 채집에 취미를 들이시면 됩니다” 달인이 되어 인터뷰할 거리도 준비해 놨다. 어느 분야든 위대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일만(一萬)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던데, 즉 하루에 세 시간씩 10년을 하거나, 여섯 시간씩 5, 혹은 10시간씩 3년을 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부터 하루 3시간씩 10년 후라니, 내 나이 53. 그 때까지 그 프로그램이 있을까.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구나. 입 닥치고 그저 손가락을 놀려 오늘도 단어를 채굴하는 단어 광부가 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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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3 06:26:43 *.41.5.100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거 같아요! 그걸 잊었을 때 우리에게 새로운 것은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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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17:48:41 *.18.187.152

네, 맞아요, 호기심! 낯설음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끌어오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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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4 05:41:42 *.106.204.231

단어채굴자! 어휘자체가 굉장히 고급스럽네요. 이미 업계에서 알아주는 단어를 보유하고 계시면서 얼마나 더 끌어모으실려는건지.

그 단어들 좀 풀어서 나눠주세요.  ㅋ 행복한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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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17:49:45 *.18.187.152

단어광부라 할까 하다가 ㅋ 같이 단어광산 파헤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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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15:47:49 *.44.153.208

글을 써보니 어휘가 역시 부족함을 느끼네요 ^^;; 나도 좋은 단어들은 기록해 놓고 활용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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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17:51:50 *.18.187.152

매주 칼럼 쓰다 보니 아무래도 어휘밑천 떨어지는 게 보이더만요. 다른 사람들의 글도 많이 읽으면서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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