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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7일 12시 49분 등록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다 
- 장 폴 샤르트르

이전글에서 '나'라는 존재가 무수한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선택은 본질적인 나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구요. 이번에는 '나'라는 존재에 본질에 대한 사색은 잠시 접고, 그보다 외부에 위치한 선택의 프로세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수많은 선택들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하는 방법론 같은 거죠.

저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입니다. 공대를 나왔고,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 들어간 이후 계속 같은 직종에 몸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의 일을 하게 된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보면, 결국 고등학교 시절 한문이 싫어서였습니다. 한문선생은 대나무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걸핏하면  회초리로 학생들의 손등을 내리치는 늙은 여자였습니다. 한자 하나 못 읽으면 앞으로 불려 나가 교탁에 가지런히 양손 올려놓고 손등을 맞아야 했습니다. 왜 손바닥이 아니라 굳이 손등을 때려야 했는지 지금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문도 싫고 한문선생도 너무 싫어서, 그만큼이나 싫어하는 수학이 버티고 있는 이과계열을 택했고 이제껏 계속 공돌이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네 적성은 문과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춘기 소년의 고집이 지금의 공돌이를 만들고 말았네요.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은 대학교를 지원할때도 있었습니다. 지방에 살고 있던 저는 입시원서를 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 점수로 지원할 수 있는 몇몇 학과중 두 개를 골랐습니다. 결정을 못 해서 결국 입시원서를 두개 사서 둘 다 작성을 했습니다. 그 전공 둘 다 사실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들은 아니였습니다. 엄밀히 말해 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다 제 시험 점수가 결정해준 겁니다. 시험 몇 개 맞고 틀리느냐에 따라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소프트웨어 개발이 아닌 건설사무소에 있었을수도 있고, 화학비료제조회사에 다니고 있었을수도 있다는 거죠. 

어쨌든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어떤 원서를 제출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도 테이블 한쪽에 원서 두개를 펴놓고 선택을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식사로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는데, 제가 찌개를 뜨다가 실수로 원서하나에 빨간 국물이 튀었습니다. 그 순간 고민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김치찌개 국물이 튄 원서로 지원할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제 전공이 결정되었습니다. 제 미래가 결정된 거고요.

사실 제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평균보다는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위에서도 인정하구요. 하지만 이제껏 제가 했던 선택을 되돌아보면 어이없는 것들이 많더군요.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중요한 무엇인가가 홀라당 빠진 결정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했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인 선택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선택의 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종이를 반으로 나눠서 왼쪽에는 장점과 오른쪽에는 단점 리스트를 나열하는 것도 한 방편이었지만 그렇게 해도 결국 감정이 결정한 바에 따르게 되더라구요. 

댄 히스와 칩 히스 형제가 쓴 <자신있게 선택하라>에서 저자들은 5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의시결정의 경우 프로세스에 따른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직관이 필요한 선택의 영역은 존재하지만, 체스의 명인이라면 자신의 직관을 믿어야 한다는 거죠. 이미 수천 시간 수를 연구하고 연습한 내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업을 인수하거나 직원을 채용하는 의사결정권자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개인의 선택영역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돈이 움직이는 기업인수시장에서도 선택의 오류는 곧잘 일어납니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알려진 투자가 워렌 버핏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인수에 굶주린 많은 경영자들이 어릴 적에 읽은 동화, 즉 공주의 키스를 받아 왕자로 변하는 개구리 이야기에 취해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도 자신도 동화 속의 공주가 될 수 있다고 믿는지, 기업이라는 개구리에게 키스할 권리를 얻기 위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한다. 마법같은 변신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키스는 수없이 일어났지만 기적이 일어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자신있게 선택하라>에 저자들은 최고의 선택을 가로막는 4가지 악당과 그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번째 악당은 선택에 직면했을 때 나타납니다. '편협한 악당'이라고 불리우죠. 양자택일만 고민하는 겁니다. 제가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원서 두개를 놓고 고민했던 것과 같습니다. '편협한 악당'을 막으려면 '선택안은 정말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두번째 악당은 선택안을 분석할 때 나타납니다. '고집스러운 악당'이라고 불립니다. 마음은 이미 정해놓고 고민하는 시늉만 하는거죠. 다시 말해 확증편향에 따른 증거만 수집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악당과 친하게 지냅니다. 이 악당을 물리칠수 있는 방법은 '검증의 과정을 거쳤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세번째 악당은 이제 선택을 할 때 나타납니다. '감정적인 악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감정적인 악당'과  '고집스러운 악당'이 함께 작당모의를 했기 때문이겠죠. 이 둘은 붙어다닙니다. 감정적인 악당이 나타나면 갈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성적으로는 맞지 않는데, 감정적으로는 끌리는 거죠. 대부분 그 감정이라는게 본질적인 자아나 깊은 내공에서 우러난 직관이 아닌, 게으름과 타협이라는 뇌의 관성이 빛어내는 착각이라는 것이 함정입니다. 이성과 감정의 충돌로 머릿속은 혼탁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런때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거리두기가 필요한 거죠. 코로나라는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충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듯이, '감정적인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악당은 선택이 끝나면 나타납니다.  바로 '확신에 찬 악당'입니다. 고민해서 결정했다고 해서 내 선택이 꼭 정답일수는 없습니다. 위험요소에 대한 분석과 대비가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아예 자신도 모르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실패의 비용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 역시 선택의 일부인 것입니다. 

선택의 과정에 이상의 프로세스를 적용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스스로의 선택과 그 이유에 대해 자문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해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모르는 선택의 상황에 직면하면 회피할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선택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한 선택이였다면,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얼렁뚱땅 회피할수록 인생의 괘도는 엉뚱한 곳으로 틀어지게 됩니다. 

인생은 초콜릿상자에 든 초콜릿과 같다.
어떤 초콜릿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듯이
우리의 인생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영화 포레스터검프 중에서

IP *.70.22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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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6 13:33:53 *.247.149.239

와.. 인생은 B와 D사이의 C 저도 언젠가 써먹고 싶을만큼 멋진 문장이네요...ㅎㅎ 몇 번 잠깐씩 뵐 때마다 천상 이과로 보이셨는데, 사실 속마음의 결은 저와 같은 문과를 고민하셨다니.. (그래서 저희가 변경연에서 만나 같이 글을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ㅎㅎ) 역시 사람을  겉만 봐서는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네요 ㅋㅋㅋ 소개해주신 선택의 과정도 요긴하게 잘 써먹을 요령이라고 생각되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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