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ggumdream
  • 조회 수 90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8년 2월 12일 09시 50분 등록

#35. 손편지의 추억

손편지를 마지막으로 받은 것이 언제였나를 문득 생각해보았습니다. 언뜻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행복하게도 매일매일 손편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7살난 딸아이의 손편지입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늘 종이에 아빠그림을 그리고 옆에는 아빠, 사랑해요를 잊지 않고 적어서 전해줍니다. 거의 매일매일 받는 것이고 같은 내용이라 때론 기쁨이 반감되기도 하지만 딸아이의 진심이 느껴져 늘 행복하기만 합니다.

시계를 조금 되감아 보니 첫째 아이를 낳고 생일에 와이프에게 받은 손편지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가지고 있어 서랍 정리를 하다가 한번씩 읽어보면 자연스레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합니다. 그때의 힘든 시절과 와이프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일겁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면 가슴 한켠에 묻어두었던 와이프에 대한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곤 합니다. 이제부터는 그 편지를 코팅해서 부부싸움이나 감정이 안 좋을 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시계를 조금 더 감아봅니다. 연애 때 받아보았던 편지가 생각납니다. 그러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순간이 언제였나를 되짚어보니 역시 군대였습니다. 그 때 가장 많은 편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사귀었던 여자들을 비롯해, 친구들, 누나와 가족들의 편지 등 정말 다양하게 받아본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훈련을 마치고 내무실로 들어왔을 때 책상위에 놓여진 손편지. 누가 보냈을까 궁금해서 기분이 좋았고, 그것이 누구이든 그 내용을 읽을 때 행복해서 좋았습니다. 이처럼 손편지는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 다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같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손편지라는 말은 왠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언제부터 편지를 손편지라고 불렀을까요. 내가 학생인 시절까지 굳이 손편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편지하면 당연히 손으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손으로 쓰는 편지보다는 이메일이라는 강력하고 편리한 수단이 생겼기 때문에 그 이후로 전자편지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쓰이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메일을 십수년 쓰고 있지만 이메일을 잘 열어보지 않습니다. 언제나 포털 홈페이지를 접속해보면 항상 이메일함에는 +999라는 숫자가 적혀져 있습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메일은 누가 자료를 보낸다는 말을 듣지 않는 이상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습니다. 열어봐야 대부분 광고메일이 90%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지우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번 싹 정리를 하고 난 뒤 며칠 지나면 또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이젠 지쳐 잘 열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손편지를 누군가에게 받아보면 나에 대한 그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설사 그것이 그 사람의 고도의 영업전략인 걸 알지만 이 정도의 열정이라면 그에게 뭘 하나라도 살 것 같습니다. 그만큼 손편지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언제 손편지를 쓰게 될까요? 정말 소중한 사람이 아니면 힘들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나만 돌아보더라도 와이프의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정도 되어야 펜을 들고 카드에 몇 자 적습니다. 그 때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처럼 손편지를 쓴다는 것은 나에게 차지하는 위치가 절대적이지 않는 한 선뜻 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끔 이벤트로 손편지를 적곤 합니다. 문자나 카톡으로 주고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 과도 역시 또다른 감정이 생깁니다. 그녀를 생각하며 편지지 위에 펜을 들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경건하게 됩니다. 그녀를 생각하며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끌어올려 한자 한자 정성들여 적게됩니다.

우리 남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언제 손편지를 가장 많이 쓸까요? 역시 군대입니다. 요즘 군대역시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손편지를 쓰는 것이나 받는 것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연인이 보낸 손편지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입니다. 거기다가 센스있는 여자라면 온갖 종류의 과자를 같이 보내서 내무실 동료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받는 것이 좋다면 주는 것 역시 특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연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군 생활이 아니면 부모, 연인, 다른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 것입니다. 과연 내 집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집주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요.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집 주소도 알아야 합니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본 적이 있나요? ‘에이 남자가 무슨 편지, 말로 하면 될 것을이란 말로 넘겨버리곤 합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가 자신이 원하는 값싼 중고책과 고서를 찾기 위해 먼 바다 건너 영국의 채링크로스에 있는 헌책방인 마크스 서점에 보낸 20년간의 편지를 묶어 출판한 책입니다. 책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판본과 장정, 번역자까지 꼼꼼히 따지는 작가 지망생 헬렌의 까다로운 요구를 맞춰주는 곳은 오직 이 서점 밖에 없었던 거죠. 책 주문을 위해 시작된 편지가 20년간(1949~1969)이나 지속됩니다. 처음에는 편지를 보냈던 서점 담당자인 프랭크로 시작해 서점 동료, 이웃집 어르신, 프랭크의 가족까지 모두 친구가 됩니다.

헬렌은 2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드디어 책으로 출간하게 되고 뜻밖에 이 책이 그녀를 스타작가로만들어 주게 됩니다. 책은 전세계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영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져 장기 공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헬렌은 모처럼 찾아온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독자들과 그녀다운 방식으로 소통을 합니다. 전 세계에서 날아온 편지에 답장을 쓰느라 인세를 몽땅 우표 값으로 쓰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군대 생활은 2년이며 104주의 기간입니다. 1주에 2~3통만 쓰더라도 208~312통의 편지가 되고, 받는 것까지 합치면 그것의 2배가 될 겁니다. 그런 편지가 헬렌처럼 책으로 엮어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사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젊은 날 개인의 역사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기억은 사라지거나 왜곡이 됩니다. 사라지거나 잊혀져야 할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야 하는 것들까지 같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이것을 바로 잡아줄 것은 기록의 힘이며 글쓰기입니다. 글쓰기의 한 종류인 편지는 편지를 쓰게 되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사고의 폭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과 인간관계 역시 깊어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군대, 편지든 일기든 글쓰기를 통한 사고와 성장의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P *.106.204.231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132 칼럼 #18 약속_윤정욱 [3] 윤정욱 2017.09.11 911
5131 #19 - 소원을 말해봐(이정학) [5] 모닝 2017.09.18 911
5130 이해와 오해 [3] 박혜홍 2018.07.09 911
5129 어쩌다 남중생 수업풍경 - 복수혈전 [3] 지그미 오 2020.08.15 911
5128 #5 나의 이름은..._이수정 [5] 알로하 2017.05.15 912
5127 나쁜 상사에게서 배웁니다 [5] 송의섭 2017.07.24 912
5126 [칼럼 #14] 연극과 화해하기 (정승훈) [2] 정승훈 2017.08.05 912
5125 #15 - 목적지만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 가는 길이 목적인 여행 [5] 모닝 2017.08.14 912
5124 #16 - 우리에게 허락된 특별한 시간, 제주 - 여행의 뒤에서(이정학) file [5] 모닝 2017.08.21 912
5123 <뚱냥이칼럼 #19> 뚱냥이 에세이 - '마당 넓은 집' 외 1편 [4] 뚱냥이 2017.09.18 912
5122 9월 오프모임 후기_이수정 알로하 2017.09.26 912
5121 <뚱냥이칼럼 #24> 뚱냥이 에세이-'담다' 등 2편 [1] 뚱냥이 2017.11.13 912
5120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912
5119 10월 오프 수업 후기 정승훈 2018.10.23 912
5118 또 다시 칼럼 #25 소년법을 폐지하면...(두 번째) 정승훈 2018.11.12 912
5117 모든 나뭇조각은 진짜 [3] 불씨 2020.06.14 912
5116 오쌤의 수업풍경- 상처는 자기가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3] 지그미 오 2020.07.20 912
5115 쑥스러움을 딛고 스스로를 표현하기 [4] 송의섭 2017.08.07 913
5114 #17. 주택이 주는 즐거움 file [6] ggumdream 2017.09.04 913
5113 <뚱냥이칼럼 #18> 뚱냥이 에세이 - '한 걸음 더' 외 1편 [2] 뚱냥이 2017.09.11 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