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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7일 11시 56분 등록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 이번에도 또 빠진 거야? 얼마나 힘든지 너무나 잘 알기에 어떻게든 피해보겠다고 그리 애를 썼건만 또 같은 함정에 빠진 거냐구? 대체 뭘 어떻게 더 대비해야 안전하게 이 지점을 통과할 수 있는 거냔 말야?

 

그랬다.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 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8년전 스승을 따라 여행하며 꼼꼼하게 남겨놓은 표시 덕분에 지형을 복기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여행을 떠날 때와 돌아올 때의 느낌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을까?’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던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다 보니 점점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그런 기능을 했던 그 과정이 함께 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했을까? 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같은 경험을 재생산 할 수 있게 한 원리는 뭘까? 왜 이 부분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걸까? 이 같고 다름의 원인은 뭘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연구와 실험을 통해 물음표를 지워나가는 과정에서 지도는 점점 정교해져 갔다.

지도 1.png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내 삶은 이 질문과 답 사이의 시간이겠구나! 고통에서 평화에 이르는 치유와 성장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체험하는구나! 유난히 통증에 민감한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꼭 해내고 싶은 것이 이 일이구나! 적어도 나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정도는 도우며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렇게 나는 내 길을 만들어가겠구나!’


 

익숙한 것들의 저항

 

삶이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모두들 잘도 참아내고 있구나. 그들이 하고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이 정도는 아픔도 아니지. 그러고 있을 때 이곳을 만났다. 생각이 자라는 곳이었다. 스스로 뻗어가야 할 방향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런 곳도 있구나.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내 자리를 갖고 싶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과정도 너무 좋았다. 순간순간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생전 처음인 것 같기도 했다. 다시는 놓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뭐가 문젠가?

 

이 느낌을 알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가 너무나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나는 태생이 이기적인 사람이다. 얼마나 치밀한 인간인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 얄미우리 만큼 내게 이로운 선택들을 해 왔고 그 결과가 지금 나의 자리다. 농담 삼아 운이 좋았다고 말하곤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과거 어떤 시점으로 돌아가 다시 여기까지 오라고 한다면 난 그냥 주저앉아 버릴지도 모른다. 썩 행복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했지만 그건 어리광이었다. 자꾸만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고 새로움이 침투한 영역만큼 옛것들이 휘발해 간다.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파서 정신이 없다.

 

첫 번째는 직장. 즐거운 편은 아니었다. 답답한 조직인 건 맞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의 최종 결과물이자 최고의 결과물이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적응능력이 그리 떨어지는 편도 아니었다. 문제는 욕심이었다. 남의 돈 받는 노동자가 감히 일 안에서 자아실현을 꿈꾸었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다. 그 허황된 욕심만 버리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만한 직장이 또 어디있으랴?

 

육아휴직, 잠시 쉬는 거다. 별 문제 없다. 열심히 수련하고 돌아가면 더 수월하게 적응할 수도 있다. 그래주면 좋으련만. 자꾸만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연구원 응시를 결정하던 시점에서 '휴직'이란 단어를 단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나를 괴롭힌다. 돌아가지 않으면 당장 뭘 해서 이만큼의 생활수준을 유지한단 말이냐? 1년은 버티겠지만 그 이상도 그럴 수 있을까? 만약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복직을 해야한다면 나는 또 얼마나 더 비참해져야할 것인가?

 

조급할 것 없다고? 좋다, 다 좋다. 어차피 시작한 일이니 1년 아무 걱정도 없이 철저히 즐겨보자고? 어떻게 될지 담담히 지켜보자고? 남 일이니? 이건 내 인생이잖아? 계획이 안 선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나타날지 통 감을 잡을 수 없다. 내가 언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인생을 방치한 적 있었던가? 나는 그게 안 되는 인간형이다. 계획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두 번째는 가정. 사실 이게 제일 무서운 부분이다. 3개월 전 연구원 지원서를 쓸 때만 해도 가정은 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런 척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한꺼풀 벗겨놓고 봤더니 완전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별안간 새로운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특별히 남편이 싫어졌다거나 아이들이 속을 썩인다거나..뭐 이런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즐거움보다 책임이 너무 많다. 나는 어쩌자고 이런 구도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 왔단 말인가? 아마 가정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탐났다기 보다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은 미혼으로 살아가기엔 부담스러운 나라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기왕에 결혼할거라면 더 늦출 것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서둘렀고, 말도 안 되게 서둘렀던 것 치고는 운이 좋았다. 남들이랑 비교하면 그런대로 괜찮은 편에 속하는 결혼이라고 믿었기에 자부심 리스트에 과감히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어쩔 수 없는 구도 안으로 들어와 있는 지금 새삼스럽게 비교적 좋은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좋은 무엇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 채 버린 것이다.

 

아직은 희미한 느낌이다. 그런데 만약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든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天福의 느낌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좋을지 모르지만 나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나를 지탱해준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건 어쩔 것인가? 왠지 나는 확 저질러 버리고야 말 것 같아 걱정돼 죽을 것만 같다.

 

늦지 않았다고 한다. 나보다 훨씬 진행된 삶의 주인들도 당당히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나만 유난을 떠는 것일까? 연구원 수련 1, 내가 인정하던 아니던 고스란히 내 천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처럼 계속 말로만 길을 가는 걸로 나머지 45주를 다 써버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굳이 찾아 들어온 이 여기에서 나는 왜 대신 길을 정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일까?

2010.5 연구원 칼럼 중에서

 

 

어쩌면 이리도 같은 패턴을 그릴 수가 있는 걸까? 4월 한 달 무의식의 원형이라는 신화 속에 빠져들면서 내 안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내심 걱정하던 욕망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을 땐 얼마나 감격했던지.


나를 너무 믿었던 탓이었을까? 방심했던 대가인걸까? 아니면 이 시점에 응당 올 것이 찾아온 것일까? 너무나 평화로와 지루할 정도였던 내 안 여기저기에서 별안간 솟구쳐 오르는 욕망의 불기둥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어떻게 만들어 놓은 일상의 평화인데,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건 아니잖아. 8년 전 나를 힘들게 하던 두 개의 두려움 중의 하나가 이미 현실화되었다는 것이 내 숨통을 조여 온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딱 '집' 하나 뿐인데, 이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치루고 여기까지 왔는데. 天福이든 ‘블리스’든 그게 뭐라고 불리든 내 가정을 위협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 평화를 깨트리는 것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게 재미있게 읽던 책들도, 어떻게든 잘 해보고 싶어 욕심을 부리던 일들도, 가만있던 나를 들쑤셔서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그 모든 것들에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미 문턱을 넘어버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치우고 싶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깨질 듯한 머리를 붙들고 괴로워하던 그 때. 나도 모르게 펼쳐 들었던 내 영혼의 지도.


지도 2.png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처방과 자기면역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충분히 회복된다. 엑셀을 밟아야 하는 시점에는 두려움 없이 밟아라. 왜냐하면 너는 네가 필요할 때 멈출 수 있을 테니까. 갈 때까지 가 봐라. 떨어지지 않는다. 걱정마라.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다.

2010.5 오프수업 스승의 코멘트 중에서

 

! 그랬던 거구나. 나도 모르게 해오던 그 작업들은 자기면역력을 얻기 위한 나만의 처방이었던 거구나.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지고 다져지기를 거듭하는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던 거구나. 8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잖아. 붙들고 싶다고 붙들 수 있는 것도, 내던져 버린다고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만나야 할 일은 만나게 되어있고 그렇지 않은 일은 그렇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그 시간과 공간에 온 마음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것도. 숨통이 확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던 두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신기한 일이었을까?


좋아, 그러면 지옥에 가자!

나는 그 모든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어. 그리고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했지. 그것이야말로 내 성미에 맞아떨어지고 나는 원래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짐을 다시 훔쳐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거야. 그리고 혹시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생겨나면 그 일도 할 거야. 이왕 발을 들여 놓은 이상 끝까지 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중에서


두려움의 격랑이 잦아든 자리, 설레임의 물결이 다시 춤을 춘다. 모험의 오월이 이렇게 흘러간다. 그래서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나 보다. 






IP *.130.1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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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22:26:38 *.48.44.227

치열한 자기 탐색, 모험과 자기 면역력으로 더욱 더 아름다운  영혼의 지도를 완성해 나가는 모습~~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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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19:46:25 *.130.115.78

그 길 위에서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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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12:12:21 *.143.63.210

좋아! 그러면 지옥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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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19:50:38 *.130.115.78

뉘신지 궁금했습니다.

언젠가 얼굴 뵐 날도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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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19:34:31 *.39.102.67

자전거에게 '쉼'을 주는 카페.

카페장님. 안양에 가면, 함 마실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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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13:44:09 *.103.3.17

치열한 내면의 투쟁을 뛰어넘어 건승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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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19:50:06 *.130.115.78

건승과 평화에 이르는 그 날까지~ ^^


근데 말이죠. 저 투쟁을 쫌 즐기는 것 같기도 해요.

내면을 현장삼지 않았더라면 필시 저자거리에서 머리끄댕이라도 잡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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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19:36:11 *.39.102.67

감수성이라는 녀석이 행간마다 듬뿍 담긴 글쓰기.

그래, 그냥 끝까지 가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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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20:23:41 *.130.115.78

나 물귀신인뎅~~

같이 가줘야 해, 가줘야 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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