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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2일 16시 37분 등록

역마살 - 출장 그 고단함에 대하여


소프트웨어 개발자임에도 신입사원 1년차부터 뺀질나게 해외 출장을 다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해외영업직인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년 내내 해외 출장 한번 가본적 없는 다른 사업부 동기 녀석은 매번 해외출장 나가는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출장 한번 가지 않고 출퇴근만이 직장생활의 전부인 그녀석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동기녀석의 로망과는 달리 해외출장은 해외여행과 같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에너지가 고갈되는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모르는 곳에 처음 보는 사람과 일을 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밥을 먹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내겐 고역이었다. 몇 주는 기본이고 몇 달씩 같은 곳에 체류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가장 심했던 해는 일년의 반 이상을 해외에 나가 있었다. 가족의 생일을 함께 하지 못했고, 출장을 나갔다 올때마다 부쩍 커버린 아이는 아빠를 낯설어했다. 향수병에 걸렸고, 가족이 그리웠다.  

내 별명은 집돌이다.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보다 편안한 내 집 안방이 더 좋다. 내향적이고, 천성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먹는 밥은 잘 소화가 되지 않는다. 낯선 곳에 던져지면 나의 두뇌는 잘 동작하지 않는다. 지독히 외로움을 잘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체력도 저질이다. 덕분에 가족여행은 내 고집에 의해 매번 휴양지로 결정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허리디스크에 혈액순환도 안 좋아져서 좁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 한다. 요즘 공황장애가 흔해졌는데, 난 출장을 위해 인천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주위의 소리가 잘 안들리는 증상이 있다. 일명 '공항장애(Airport Disorder)'다. 출장의 괴로움을 예감하고 있는 몸은 체크인을 하기 전부터 시차적응모드로 들어가려는지 급 피곤해진다. 신체는 나름 준비를 서두르지만 심신을 압도하는 긴장감이 더 크다. 현지에 도착하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몇 년전 심하게 앓았던 불면증은 외국에 나오면 여지없이 재발되는 중증이다.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채 낯선 곳에서 꼭 해결해야 하는 업무들은 그 자체로 내겐 형벌이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사주 보는 것을 좋아하던 막내누나가 어느날 받아온 내 사주에는 역마살이 심하게 끼어 있었다.  살(煞)’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가리킨다. 출장은 나를 죽이고 있었다. 의미있는 시간은 오직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그 날이었을뿐 출장지에서의 시간은 모두 죽은 시간들이었다. 출장지에서 일을 하지 않는 시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의미없는 시간들이었다. 난 시간을 빨리 보내는 법을 익혀야 했다. 일터에서는 아무런 생각없이 일에 몰입했고, 주말에는 아무데도 나가지 않고 호텔방에 처박혀서 잠만 잤다. 자다가 지치면 먹다 남은 패스트푸드로 허기를 채웠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가속시키기 위해 허무한 PC게임에 매달렸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kronos)는  대지의 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신으로 제우스(Zeus)를 비롯한 올림포스 신들의 아버지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여 그를 제거하고 최고신의 자리에 오른다. 크로노스는 자신의 과거 탓인지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모두 잡아먹는다. 도망친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 크로노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승리한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에 의해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두에게 균등한 일률적인 시간으로 이 시간 속에서 개인은 오직 결과로만 인정받는다. 파괴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제우스의 승리는 결국 시간에 대한 승리였다.

카이로스((kairos)는 그리스어로 '기회'를 의인화한 남성신으로 제우스의 막내아들로도 알려져 있다. 카이로스의 앞머리는 길지만 뒷머리는 대머리다. 앞에 왔을 때 그를 잡을 수 있지만, 그가 지나치고 나면 그를 결코 잡을 수 없다. 기회로도 알려져 있는 카이로스는 연속적인 선이 아닌 한 곳의 점, 다시 말해 지금이라는 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시간이며, 각 개인의 경험만큼 확장될 수 있는 4차원의 시간이다.

내게 있어 출장은 오직 크로노스의 시간들이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여행지에서의 일상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외국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일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고, 모르는 식당에서 끼니를 위해 밥을 먹고 피곤함에 쩔어 호텔방에 쓰러져 자다가 아침이 오면 다시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그 곳의 일상에 참여하는 것이 힘들었다. 기질적인 측면, 그리고 그로 인해 힘든 일상은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 그 시간 속에서  나만의 특별한 순간의 시간 - 카이로스를 찾아 나서야 한다. 통제할 수 없는 크로노스의 시간들 대신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주목해보자. 분명 이곳에서도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기쁨은 존재할 것이다. 눈 덮인 담벼락 밑에도 봄을 기다리는 한송이 꽃은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낯선 타국의 밤, 호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의 서치라이트가 눈에 반사되고 있었고, 그 불빛이 지나가면 다시 창에 비친 내 모습이 드러났다. 십 몇년의 지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의 삶과 수십번의 출장의 기억들이 무성영화의 순간순간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내게 있어 지난 그 시간들은 단순한 크로노스의 시간들이었던가? 지난 시간들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아낼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의 존재 역시 무의미로 쌓아진 허무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을 살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처럼>에서 고 신영복 선생은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의 추억을 돌이켜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지난 내 모든 기억과 과거가 서려 있다. 과거를 긍정하지 않고서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작은 봄꽃 한송이에 기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져야 한다. 그 이유는 신영복 선생이 이야기 한대로 "현재에 대한 과거의 위력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증폭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장은 개발자의 삶의 일부일 뿐이지만 또한 그 강렬한 축소판이기도 하다. 

출장, 그 고단함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들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내 삶의 의미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제 그 질문들에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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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16:19:44 *.48.44.227

변화를 좋아하고 체력도 좋고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출장할 일이 없고

변화를 싫어하고 체력도 약해 여행을 싫어하는 불씨는 출장할 일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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