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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0일 16시 58분 등록
인문학 몰라도 개발하고 밥먹는 것에 아무 지장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개발자이기때문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따위는 없다. 그냥 개발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 인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개발자들은 자신이 사람이 아닌 무슨 로봇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기도 한다. 컴퓨터와 더불어 일한다고 자신이 철저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개발자들 역시 비효율으로 점철된 예측불가의 감정덩어리에 불과하다. 사람은 디지탈화될수 없다. 첨단 디지탈기기도 내부 하드웨어 구성을 들어가보면 결국 아날로그다. 디지탈신호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0과 1이라는 두가지 전기적 신호(Electrical Signal) 상태를 아날로그적으로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탈은 직선이고, 아날로그는 곡선이다. 순수한 자연의 어떠한 모습에서도 우리는 직선을 찾을수 없다. 다시 말해 직선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직선은 단절이지만, 곡선은 연결이다. 직선이 발달할수록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진다. 디지탈 혁명으로 탄생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었다고 보는가? 메신저로 손주들 사진과 부모님의 용돈을 손쉽게 보낼수 있지만, 그것이 손편지나 공중전화에서 전하는 그리움보다 더 애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돌이들에게 인문학이 더 필요한 오직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평소에 보통사람들보다 더 직선과 디지탈에 시달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개발자들은 강하게 항변할지도 모른다. 디지탈화된 세상에서 시달리기는 커녕 그 이로움들을 향유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고 말이다. 근시안적으로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문명의 이기들은 편리하다.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그것들이 없던 옛날보다 지금이 더 행복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인류 전체의 부의 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지만, 행복의 크기는 그다지 변한게 없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효율과 속도를 미덕으로 여기는 공돌이들에게 랩탑과 스마트폰을 뺏는다면 아마 그들은 살수 없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문명의 이기들을 주체적으로 사용한다기보다는, 그 이기들에 길들여져 속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개발자에게만 인문학이 꼭 필요한 이유는 없다. 다만 개발자에게도 인문학은 필요하다. 그 이유를 대기 위해 기술과 인문학을 통섭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거대 담론까지 갈 필요는 없다. 또한 그 이유가 스티브잡스가 대학시절 캘리그래피와 다양한 인문학을 접한 것이 IT분야의 선도적 창조를 가능하게 했음을 기억해서도 아니다. 단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인문학은 필요하다. 상사와의 갈등에 대해 기술은 어떠한 해답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애인의 변심에 대해 스마트폰은 어떠한 분석결과도 보여주지 못한다. 웅장한 자연과 불멸의 예술작품 앞에서 프로그램의 버그 따위는 사소한 일이다. 빌게이츠에게도 코드를 이해하는 일보다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다.

물론 인문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살다보면 밀려오는 회의와 후회를 감당치 못하는 날들이 올지도 모른다. 삶은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운명을 선사해줄지 모르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좌절의 날들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때론 죽도록 힘든 날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인문학을 공부하고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런 날들을 100% 막을수 없다. 아니 어쩌면 하나도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을 공부하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힘든 날이 닥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될 때를 위해서다.

"왜 이렇게 사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녕 나는 누구인가?"

위와 같은 질문들이 또아리를 틀며 자꾸만 자신을 괴롭힐때 다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내릴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절대적인 정답이 아닌 최선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다. 나자신을 전보다 더 빠르게 구원하여 다시 기운 내서 일상을 살아가도록 고무하는 것이 가능하다. 평소 좌뇌만을 사용할 뿐, 우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개발자들은 외부에서 발생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닥치지 않는 이상,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불가항력적 상황에 마주했을때 충격이 더 클수밖에 없다. 닥쳐서 사용하지 않던 우뇌를 돌려보려 애쓰지만 굳어버린 우뇌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있을 턱이 없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고난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뇌를 자극해서 창조적 개발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공돌이스러운 이유라도 믿어보자. 

마지막으로 인문학은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길 위에 있고, 옆자리에서 거북이목을 하고 코딩에 열중하고 있는 동료의 가슴속에서도 있다. 말했듯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 삶의 촉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기 위한 통찰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통찰은 영어로 insight, 즉 내부를 보는 힘이다. 무엇보다도 그 내부에 대한 탐구의 시발점은 스스로의 내면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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