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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5일 17시 55분 등록
2010년 이맘때쯤 언론을 통해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한 여자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는 뉴스였다. 그 여자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행복전도사 최윤희씨였다.

"자살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돼요. 절망 속에 희망을 찾으세요”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그녀의 말이다. 우리에게 행복을 역설했던 그녀의 자살소식은 그녀의 행복강좌를 통해 힘을 얻었던 많은 대중들에게 허탈감을 불러 일으킬수밖에 없었다. 자살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녀는 앓고 있던 지병인 홍반성 루푸스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다 했고, 그들 부부 서로가 삶에 있어 절대적 존재였다는 것이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에 숨겨진 배경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결국 절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마지막 수단에서 희망을 찾아야 했던 그녀의 아픔이 전해오는 듯 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게 결국 택할 수 있는 최후의 행복은 삶의 마감이였단 말인가. 이런 극단적인 이유외에 다른 어떤 삶의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이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자살을 감행하고 있다. 누구는 그들을 이해한다 하고, 다른 누구는 그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행복하지 않았기에 죽음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우리 중 어떤 누구도 그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자살을 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이 상대적인 개념이라면, 그리고 꼭 행복이 삶에서만 느껴야 있는 것이라고 규정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삶이라는 불행을 마감하고 얻은 것은 '죽음이라는 행복'이 될 수 없는 것인가?

자살을 결코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삶을 마감했던 그들의 심정을 100분의 1이라도 이해하지 못 할 것이기에 어떤 단언도 할 수 없다. 다만 삶의 자발적 마감이라는 극단적인 행태를 통해 과연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작은 단서라도 찾을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죽은 정승이 산 개(犬)만 못 하다'는 속담은 과연 살아있는 강아지가 죽은 정승보다 행복하다는 말인가?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질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보면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다. 최대다수의 행복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했던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덤은 행복을 계산하기 위한 행복 계산식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벤덤이 만든 행복 계산식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1) 강도(intensity)
2) 지속도(duration)
3) 확실성(certainty)
4) 근접성(propinquity)

단어들을 통해 그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가옵션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다산성(fecundity) - 새로운 쾌락 내지 고통을 낳을 가능성
불순도(impurity) - 고통이나 쾌락이 반대로 바뀔 가능성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effect on others)

이 인자들을 가지고 복잡한 계산식을 통해 특정한 상황에서의 개인의 행복수치를 계산해 내는데, 사실 결과로 나오는 수치는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결국 행복계산식이라는 것이 각 인자별로 개인별, 상황별로 다른 상수값(constant)을 곱한 다음에 그것들을 다 더하면 최종 행복값이 나오는 것인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의 유무가 아닌 양의 개념이라고 봤을때 수치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니 다 쓸데없는 짓이다. 행복을 결정짓는 요인들을 나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노력 정도만 존경스럽게 인정해주면 될 것 같다.

행복을 정의하기 위한 무수한 시도가 이루어져 왔고, 여전히 그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많은 이견이 있을수 있겠지만, 행복이라는 것은 단편적인 하나의 그 무엇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수많은 행복의 물방울들이 있고, 사람에 따라 그 양과 그 색깔이 다를 뿐이다.

많은 이들에게 행복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원하는 것들 사이에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느냐에 달려있다. 가지고 있는 것과 바라는 것의 차이에 행복은 비례한다. 대부분의 경우 한쪽이 늘어나면 다른 한쪽도 늘어난다. 다시 말해 가지고 있는 것이 늘어나면 바라는 것도 늘어난다. 거꾸로 바라는 것이 늘어나면 보통 가지고 있는 것들도 어느 정도는 늘어나게 된다. 대부분 바라는 것의 증가속도가 가지고 있는 것의 증가속도보다 크다. 이것이 바로 탐욕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고질적인 문제들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탐욕을 구분하지 못한다.

삶의 비애는 가지고 있는 것이 줄어든다고 해서 바라는 것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가지고 있는 것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바라는 것이 줄어드는 속도는 현저하게 느리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포인트가 있다면 바라는 것이 줄어든다고 해서 가지고 있는 것들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바라는 것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이는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위의 논지를 계속 이어나가서, 행복에 대해 양의 개념으로만 접근해 보자. 가지고 있는 것에서 바라는 것을 뺀 것이 행복의 양이라고 한다면, 바라는 것을 그대로 가질때의 행복의 양은 0이다. 정말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지게 될때 만족감은 순간적으로 치솟지만, 결국 행복의 양은 0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욕망이 등장하면서 행복의 총량은 마이너스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소유가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 유행하는 신조어 - '소확행'은 사실 '큰 행복'을 포기한 젊은 세대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소확행은 어쩌면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행복일 것이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닌, 순간순간의 발견과 주어짐이다. 하지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여전히 소유와 소비의 개념일 뿐이다. 작은 것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기뻐하는 것인데, 이는 매우 쉬운 인스턴트식 행복 접근법으로 변질될 수 있다. 소확행이라는 태그를 달아 SNS에 무엇인가를 올리는 사람들 중 많은 경우가 적당한 소비에 셀프 만족이라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 비본질적인 의미부여와 말초적인 자기만족의 처연함으로 흐르고 만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일상을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벗어난 특별함에 '소확행'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색하고 억지스럽지만, 일상안에서 이루어지는 소소한 일탈은 가끔 확실한 행복이 되기도 한다. 

난 5남매중 넷째로 누나가 셋이다. 내 남동생은 나와 두살 터울인데 막내라서 그런지 유난히 덤벙거려서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어릴적부터 간간히 꾸지람을 받곤 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일이다. 어느 여름 토요일 대학생이였던 둘째 누나가 학교를 마친 동생과 함께 집에 와서 한참을 웃더니 가족들에게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둘째 누나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오니, 동생이 빈 껍데기만 남은 쭈주바를 손에 든채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더라는 것이었다. 누나를 만난 동생이 얼굴에 화색을 띄며 말하길 버스비가 없어서 정류장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왜 차비가 없냐는 누나의 말에 동생은 정류장 앞 슈퍼마켓의 쭈쭈바가 너무 먹고 싶어서 집에 갈 버스비로 쭈쭈바를 사먹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누가 올지도 모르는 기약없는 2시간을 정류장에 그렇게 앉아있었던 것이다(참고로 그당시 우리집은 그 정류장에서 20여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가끔씩 엉뚱한 짓을 하는 동생이지만 그날 동생의 해맑은(?) 행동에 가족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쭈쭈바를 먹는 동안 동생은 행복했을 것이다. 쭈쭈바와 맞바꾼 기다림의 시간 역시 행복했을지는 의문이지만, 동생의 성향상 충분히 감내할 만한 행복의 댓가였으리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철부지 동생은 그렇게 삶을 경험한 것이다. 기다림의 고통보다 쭈쭈바의 행복이 더 컸다면 그 이후에도 동생은 또 버스비로 쭈쭈바를 사먹는 일을 감행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반대로 행복의 댓가에 대해 뼈저리게 깨달았다면 다시는 버스비를 남용하지 않았을테고 말이다.

행복은 일상에서 온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행복을 찾기는 어렵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란 없다. 행복이 바로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던지간에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을 긍정하지 못하면 행복은 없다. 죽지 않은 이상 누구든 영원히 한 길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다른 길들과 만나고 결국 인생은 끊임없는 경로탐색과 그에 이어지는 경로선택의 과정이다. 어떤 길 위에서는 더 크고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다른 길에서는 정말 행복을 느끼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은 언젠가는 다른 길로 이어진다. 우린 항상 길의 끝을 보지만, 모든 길의 끝은 죽음일뿐 결코 승자에게 꽃을 뿌려주는 결승선의 하얀 테이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너무 힘들어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때론 인생의 폭풍우에 휘말리어 길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아닌지 모르는 대혼란의 과정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럴땐 어쩔 수 없다. 다른 이정표가 보일때까지 계속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어니 젤린스키가 말한대로 많은 행복들은 그것들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상실된다.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가능한 행복하게 반응하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 방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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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 18:10:25 *.48.44.227

동생이 나와 닮았네요. 어릴 때 아이스케키가 넘 먹고 싶어 차비로 아이스케키 사먹고 집까지 걸어온 적이 있어요. 발바닥에서 불 났던 경험이 있어요. 그 때 행복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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