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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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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15일 09시 47분 등록

대망의 21세기 초에 나는 그토록 싫어하던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동경도청이 가까운 신주꾸였다.

월세는 엄청나게 비쌌지만 내 짧은 양팔을 뻗으면 곧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집이었다.

어떤 때는 양쪽 벽이 좁혀오는 느낌이 들 정도여서 나는 틈만 나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가면 新宿공원이었다. 동네 공원이지만 버스 정류장으로 두 정거장을 가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원이다.

그 공원은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더운 여름에도 촘촘한 그늘이 있고, 가을이 되면 여름 내내 달궈진 태양을 견딘 나뭇잎이 주홍빛으로 변하는 곳이다. 아름다운 오방색으로 물들은 낙엽이 떨어지며 휘날리는 그 사이사이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누비곤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지인의 소개로 취미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성함도 잊어버린 선생님 댁은 中野區에 있었다. 버스타고 전철로 갈아탄 뒤에도 약 15분가량 걸어야 했다.

게다가 우리나라와 달리 버스비, 전철비를 따로 내기에 왕복으로 꽤 비싼 차비가 들어서 자전거를 타고 선생님 댁으로 갈 용기를 내 보았다 무엇보다 자전거 타는 재미에 폭 빠진데다 오가며 일본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컸기 때문이었다.

또 자전거는 내가 원할 때 멈출 수 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빠른 속도로 갈 때 못보던 것을 자전거를 타고 가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자전거로 35분쯤 달리다 浪漫通(낭만길)라고 크게 써 붙인 길로 들어가 골목길을 사이사이로 들어가다보면 선생님 댁이 나왔다.

도무지 낭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게들만 즐비한 긴 골목을  낭만길이라고 명명한 그들이 의아했다.

야채가게, 과일가게, 잡화점이 쭈욱 늘어서 있었고  끌리지 않는 오종종한 물건들이 많았다.

외국인인 내가 모르는 낭만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걸까 궁금해 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낭만 길을 오가던 어느 날이었다.

무심코 눈길을 준 과일가게 바닥에 바구니 한가득 담긴 홍시무더기를 발견했다.

카바이드로 마구 익힌 그런 홍시가 아니었다  무슨 보물을 발견한 양 가슴까지  뛰었다.

얼마 만에 본 자연 그대로의 홍시인가? 게다가 한 바구니의 홍시는 편도 차비도 안 되는 100엔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맛볼 수 없게 된 그 맛있는 홍시를 버리다시피 100엔에 팔아서 낭만인가?

놀람과 기븜으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바닥에 놓인 홍시를 샀다.

 

자전거 앞에 달린 바구니에 홍시를 넣은 비닐봉투를 갓난 애기 다루듯 조심히 올리고 느린 속도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닿아서 자전거가 털렁거릴 때 마다 살짝 살짝 놀라면서 바구니 속 홍시를 걱정했다.

서슬 퍼런 인생을 사랑으로 견디어 주홍색 결실을 이룬 홍시!

파란 하늘 아래 다른 잎은 다 떨어져도 사랑의 손길이 닿을 때 까지 수줍어 붉게 기다리고 있는 홍시!

그 아름다운 광경을 떠올리며 비단결 같이 부드럽고 달달한 홍시를 먹을 요량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흥분하며 비닐을 풀었더니

아아... 

주홍빛 바다가 질펀하게 비닐 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비닐의 청결여부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숟가락으로 주홍빛 바다를 헤쳐 가며 속살만 살살 건져 먹었다.

이제까지 먹어본 적이 없는, 설명할 수 없고 황홀하기까지 한 맛이었다.

순수하고 진정 달콤하고 부드러운 그런 맛이  자연 그대로의 맛이다.  아기를 만지는 행복감이었다.

태양빛을 듬뿍 받고 밤의 달빛과 별빛으로 성숙해가서 그토록 부드러운 결실을 이룬 것이다.

백화점에 랩으로 꽉꽉 포장돼 비싼 값을 부르며 나열된 과일들 중에서 그 어떤 것이 이 맛을 낼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는 기쁨을 혼자 맛본양 음미하며 다 떠 먹었다.

내가 사랑하는 홍시를 만나게 해 준 그 거리야말로 낭만의 거리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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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06:49:45 *.120.7.31
'자연스러운 절정'의 빛깔이 주홍이었군요. 그 빛깔을 알아차리신 시선이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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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21:44:41 *.121.156.75

홍시의 주황빛 속살이 눈에 그려지는듯한 감정묘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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