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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1시 55분 등록

글발, 글 위에 발자국을 찍자

 

하얀 공백 속에서 까만 커서가 깜박거리며 압박감을 주고 있다. 소위 글발이 서지 않는 어느 날이었다. 고작 2페이지의 글도 한달음에 달리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책을 쓰겠다고 깜박거리는 커서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가.

 

네가 채우지 못하는 이 공백이 네 마음에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마음의 공백을 채워봐.’

 

깜박이는 커서가 내게 화두를 던지는 것만 같다. 모니터 명상이라 이름하여도 좋겠다. 커서가 던지는 화두에 키보드에서 손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내가 채우지 못하고 있는 내 마음 속 공백은 무엇일까. 그 공백을 채울 수 있을 때 나의 삶도 채워지고 그것이 글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이 생기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해왔고 그런대로 실천해왔다. 그런데 그 대상은 어린이와 어르신에 국한되어 있었다. 어린이와 어르신에게는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마음을 다해 도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돕는 대상에는 빈 공간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그 빈 공간을 애써 외면해왔다. 부모 없는 십대 청소년들이 그 공간에 있었고 내가 외면함으로써 내 마음 속 그 아이들은 투명인간으로 존재해왔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부모형제 없이 끈 떨어진 연처럼 이 세상에 놓여진 아이들, 그나마 일정 연령이 되면 고아원이나 시설에서는 지금까지 그들을 느슨하게나마 지켜줬던 울타리를 걷어낸다. 그렇게 사회로 내몰린 아이들은 정말이지 막막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고아원에서 소년원으로, 그것이 아이들이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울타리가 되는 것인데, 나를 포함한 사회의 시선은 그들을 비행청소년, 위험한 아이들이라 하여 경계하고 마음의 빗장을 채운다. 그 아이들과 인연이 되었다가 언젠가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의식 중에 있었다. 사실은 몇 년 전 열심을 다해 도왔던 누군가로부터 불지르겠다는 소리를 들은 후 어떤 트라우마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마음의 빈 공간을 알아챈 이상, 그 공간에 채워져 있는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장을 풀고 이 공간을 채우자. 깜박이는 단순행동으로 바로 그거야!’하며 응원해주는 까만 커서. 커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노트북 전원을 꺼버렸다. 지금은 글을 쓸 때가 아니다. 그저 부지런히 몸을 놀릴 때다.  

 

마침 위기의 청소년들을 돕는 소년희망공장조호진 시인이 생각나서 연락을 드렸다. 그 분을 통해 하늘이(가명, 18)를 알게 되었다. 부모 없는 청소년으로 현재 고시원에서 혼자 살며 검정고시를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여느 십대가 그러하듯 이 아이도 욕망이 있을 것이고, 나는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을 그 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브랜드 옷이나 신발 같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비록 그게 허세이고 허영일지라도 왠지 그러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런데 조호진 시인이 말씀하시길, 하늘이가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하다 보니 식습관이 좋을 리 없고 그래서 최근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 중이라 하였다. 한약을 먹어본 적은 없을 것이니 한약이 지원된다면 좋겠다며 조심스럽게 제안하셨다. 아마 그 분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늘이의 증상에 맞게 한약을 달여 차에 싣고 부천의 소년희망공장으로 떠났다.  

 

부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손이 신나서 까닥거리고 있었다.

 

그래, 무슨 놈의 글이야.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발로 뛰는 게 좋겠어. 쇼펜하우어도 그랬잖아. 책보다 삶이 먼저라고. 아직은 펜이 아닌 핸들을 잡아야 해.’

 

소년희망공장에서 하늘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가 처한 상황, 예를 들면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등을 묻는 것은 의미 없을 것 같았다. 그 아이에게는 일상적인 것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이 그 아이 인생의 극적인 단면에만 흥미를 가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폭력일 수 있겠다 싶었다. 한약 먹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애써 미룬다. 밥을 먹고 한약을 먹겠다, 조금 있다가 먹겠다, 나중에 먹으면 안되겠느냐 등등 미루고 미루다 결국 사약 받듯이 한약을 먹은 하늘이.

 

이거 드셔보셨나요? 맛이 어떤지 아세요?”라고 묻는데 눈은 이게 사람이 먹는 게 맞나요?’라고 묻는다.

 

그냥 브랜드 옷이나 신발을 사줄 걸. 살짝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늘이와 같이 일하는 목사님께 매일 한약 먹을 수 있도록 챙겨달라고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내 마음은 은근하게 데워졌다. 내가 직접 달여서 배달까지 한 한약을 먹고 그저 하늘이의 불편한 증상이 나아져서 지치기 쉬운 여름을 잘 보내고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다시 한번, 책보다 삶이 먼저이고 글보다 경험이 먼저임을 깨달으며 돌아왔다. 나의 경험을 내면의 창고에 쌓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마음의 빗장을 풀고 내 마음 속 빈 공간에 하늘이를 데리고 왔다. 몸으로 뛰며 경험하고 만나고 부대끼는 속에서 그 발자국만큼의 경험의 페이지를 만들자.

 

글 위에 발자국, 글발은 그렇게 길 위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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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2:18:31 *.124.22.184

"우리도 편의점 많이 털었지.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되잖아. 돈 없으면 훔쳐서라도 먹는 게 다 살려고 그어는 거야. 근데 사람들은 '나쁜 짓 하지 마라'고만 하잖아. 그렇게 얘기하기 전에 이 사람의 환경에 도움을 준 것도 아니면서 존가락질만 하고 욕만 하잖아. 근본적으로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는지 세상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를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보는 안 좋은 시선을 바꾸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어느 가출 청소년의 말이래요.

 

리아씨는 도움을 주려고 적극 나서는 사람이네요.  리아씨같은 어른이 많아야 하는데 마음만있지 실천을 안하게 되는 게 보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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