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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2일 23시 56분 등록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사랑을 준다는 것이 그처럼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늘은 잉태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자들을 훈련시키는 것 같다.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중에서

 

분명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엄마가 되면서 훨씬 좋은 사람이 된 것이 맞습니다. 궁금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되지 못했더라도 온 몸의 세포가 노래를 부르는 듯한 행복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라는 명사에 호응하는 동사는 당연히 받는다로 알고 있던 제가 줄수록 더 받게 되는 사랑의 비밀을 깨우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4년 휴직을 마치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의 막막함이 떠오릅니다. 엄마로서의 효능감이 밑도 끝도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던 무렵. 아이들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은 나의 욕심일 뿐이라며, 아이도 결국은 돈 벌어오는 엄마를 더 좋아할 거라며 스스로를 다그치던 시간들. 세상이 무너져버린 것만 같던 나날들. 그나마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작가'로 살고 싶다는 희미한 희망 덕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냥 '회사'라는 공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왠지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내 가장 건강한 에너지를 쓰고 싶다.’그냥 그저 그런 아줌마로 늙어 가겠다로 자동번역하는 두뇌구조를 가진 제게는 다른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궁리 끝에 찾은 것이 작가였습니다. 제게 글쓰기는 어떻게든 그냥 아줌마로 분류되는 것을 피해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셈입니다. 고백하건데 당시의 제게 아줌마는 결코 비슷해져서도 안 될 루저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요.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나는 다르니까.’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주문처럼 중얼댔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쩐지 한 줄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저는 말 그대로 두려움그 자체. 쓰지도 못할 거면서 컴퓨터 앞에 하릴없이 앉아있느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의 질도 점점 낮아만 지고 있었습니다. 그쯤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는 나를 지키려고 붙들고 있던 글이 오히려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요.


예전의 우리는 멀리 구름 위까지 날아올라야만 비로소 성공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는 침대에 누워서 말도 못하고, 또 하나는 휠체어에 않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강인하며 열정적인 포부를 가졌던 그 때보다 더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줄 알게 되었다.

위지안의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중에서


 구름 위를 날 듯한 성공을 눈 앞에 두고 온 몸이 암덩어리로 변해버렸음을 알아차린 엄마 위지안은 말합니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건 추억을 함께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아이에게 사랑의 체험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엄마'의 가장 큰 의무이자 최고의 권리라는 것, 그리고 이 권리만 제대로 누릴 수 있어도 그 삶은 충분한 성공이라는 것을요. 서른이라는 너무나 짧은 생을 살다간 그녀 덕분에 비로소 저는 제 마음의 소리와 당당히 마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기란 퇴사를 결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도전이었습니다. 퇴사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었다면 글을 떠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체념과 같은 의미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보같다구요? 그러게요. 이제와 다시보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 생각에 어떻게 그리 오랜 시간을 붙들려 있었는지가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입니다


 제 꿈은 '엄마'입니다. 앞 뒤로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는 그냥 '엄마'. 그럼 '작가'는 완전히 포기하는 거냐구요? 그게 말이죠. 어쩌면 '작가''일터''가정'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워킹맘'이라는 불타는 갑판위에서 제가 발견한 구명보트같은 것 아니었을까요? 그 구명보트가 아니었더라면 감히 갑판에서 뛰어내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테니까요. 하지만 보트가 아무리 고맙기로서니 언제까지 어깨에 짊어지고 다닐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야 어렵게 찾은 신대륙을 제대로 즐기기 어려울테니까요. 게다가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편지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아쉬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힘겹게 메고 다니는 그 보트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언제쯤 보트를 내려놓고 이 아름다운 신대륙 탐험에 동참하실 예정이신가요?

 

더 이상 작가를 꿈꾸지 않는 해피맘CEO 올림

 

 

 


작년 8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이 편지를 쓰고나서 그야말로 몇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해방감을 경험했다.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매여 정작 매일매일 주어지는 진짜 삶을 누릴 여유를 잃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애처로움이 견딜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던 무렵이었다. 2010년 '작가'라는 목적지를 정한 이후 처음 맞는 영혼의 휴식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어도 늘 묵직하게 따라다니던 강박을 떠나보낸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별안간 삶은 새털처럼 가벼워졌고, 매 순간 날아오를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진짜였다.


그리고 일년이 채 흐르지 않았건만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작가 따위는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포도를 향한 비겁한 체념이었던 걸까? 나는 다시 또 어깨에 무거운 보트를 지고 휘청거리며 일상을 벼텨내야하는 걸까? 결국 이 지독한 형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걸까?  '엄마' 하나만 감당해 내기에도 온 몸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데 여기에 다시 무언가를 더 치뤄내야 한다는 걸까?


너 정말 왜이러니?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아직도 포기가 안 되는 거니? 제발 쉽게, 편하게 좀 살아주면 안 되는 거니? 너 하나만 모른 척하면 모두가 다 편할 수 있는 거 알잖니? 그래도 꼭 해야겠니? 그렇게 모두를 힘들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나도 알아. 그런데...그런데...처음엔 정말 좋았는데...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 이제는 알겠어.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거. 그 과정이 아무리 고되고 부대낀다고 해도 그런 시간들 속에 있는 나를 사랑한다는 거.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아이에게 사랑의 체험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엄마'의 가장 큰 의무이자 최고의 권리라고, 이 권리만 제대로 누릴 수 있어도 그 삶은 충분한 성공이라고 했다. 훌륭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여름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딱 9개월분의 용기가 쌓인 오늘, 그 날엔 차마 할 수 없었던 고백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나는 엄마다. 그리고 아내다.

하지만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엄마'도 '아내'도 아무 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배워 익혀 얻은 깨달음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고자하는 열망의 표현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고자 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열망이 어디 있겠는가? 이 근본적인 욕망을 제거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일까?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엄마가 아이에게 무슨 수로 사랑의 체험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엄마로서 성공을 꿈꿀 수 있단 말인가?


엄마라 불리운지 14년차를 맞는 봄날 새벽,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내 가장 건강한 에너지를 쓰고 싶다.’ 라는 선언에 '아이들'을 지우고 '나'를 채워넣는다. 그 시간이 모이면 다시 만나게 될 '내 아이처럼 웃는 나'를 기다리며. 온 몸의 세포가 노래를 부르는 듯한 희열을 나를 통해 재현하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IP *.130.1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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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3 06:46:45 *.48.44.227

문턱을 넘어서,  다시 나를 다잡고,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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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 16:53:43 *.130.115.78

태아가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보금자리인 엄마 뱃속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


우리가 익숙한 일상을 떠나 여정을 시작한 이유와 다르지 않을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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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4 12:12:29 *.103.3.17

미옥선배님! 5000번째 연구원 칼럼 작성자이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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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7 16:54:12 *.130.115.78

글차나도 혼자 맥주 한캔 따들고 자축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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