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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5일 17시 39분 등록
대화 (책, 풍경, 마음 사이의)

이번 달은 뒤를 돌아보는 달이다. ‘역사’라는 주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걸어온 길, 우리가 걸어온 길,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는 달이다. 그에 걸맞게 꿀맛 같은 일주일의 깜짝 휴식이 주어졌다.

지난 토요일, 사부님과 연구원, 꿈벗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새벽 늦게 돌아온 나는, 거의 정오까지 늦잠을 잤다. 아내는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고, 혼자 남은 나는 씻는 둥 마는 둥 잠옷 바람으로 마음껏 빈둥거렸다. TV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책을 읽으면서 뒹굴거렸다.



그렇게 실컷 게으름을 부리다 창 밖을 내다보니, 눈이 부셨다. 따뜻한 햇살이 아까웠다. 더 늦기 전에, 책 한 권과 물 한 병, 디카를 백팩에 집어넣고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5월의 햇살 아래, 하늘과 나무들이 푸르다. 완전한 절정에 다다르기 전의 힘찬 가능성이 담긴 푸른 빛이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연둣빛 초록색 공원을 걸으면서, ‘역사 속의 영웅들’에 등장했던 르네상스의 천재들, 다빈치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그림과 조각 속에 담아내려 했던 빛나는 영혼과 풍경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하얀 구름이 몽실거리는 푸른 하늘과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그 위대함의 실마리를 살펴본다. 나무 사이를 오가는 어린 참새들의 서툰 날갯짓에 웃음이 절로 나오는 오후의 공원에서, 모두들 참 여유롭게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다.



호수 옆 빈 벤치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수면은 고요하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잠시 자신을 되돌아 본다. 연구원을 지원한 후, 쉴새 없이 달려온 3개월 남짓한 시간과 변화 경영 연구소를 통해 만난 따뜻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책과 동료들, 스승님과 선배들과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 나는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진 듯한 느낌이다.

진심으로 하고 싶어했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고, 진정 가고 싶은 길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안에만 갇혀 있던 좁은 자신을 넘어, 세상을 향해 그 경계를 넓혀 나가고 있는 듯 하고, 세상의 다양한 가능성들에 마음의 문을 하나, 둘 열어 젖히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한걸음씩, 나아가자.’ 마음의 조급함도 많이 누그러졌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그 뿌리의 깊이를 더해간다.



그런 생각들에 잠겨있는데, 호수의 수면이 웅, 하고 흔들리더니. 툭, 하고 놓쳐버린 풍선처럼, 들판 가득 뻗어 오른 새파란 보릿대들처럼 물줄기가 쭈욱, 돋아난다. 5월의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시원한 분수를 뿜어 올린다. 나른한 오후의 풍경에 생기가 더해지고,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즐거운 물의 춤사위와 함께 공원엔 음악이 넘쳐 흐르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엉덩이를 흔들어 대고, 어른들도 얼굴 가득 머금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이렇게 물이 빚어내는 작은 몸짓 하나에 세상의 풍경이 바뀌는구나. 물과 하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사라지는구나. 그래, 우리들도 이렇게 상쾌한 분수의 물줄기처럼 신나게 한번 놀아보자. 고정된 관습의 경계를 허물고, 무거운 중력의 법칙을 뛰어넘어 흐릿한 세상에 투명한 물줄기를 쏘아 올려 보자. 사람들의 가슴을 무장해제시키고, 그들을 마음껏 꿈꾸게 하자. 잠시나마 가볍게 날아오르게 하자. 비록 다시 물 속으로 떨어지는 헛된 시도에 그칠지라도, 그 유쾌한 몸짓과 참신한 도전이 즐겁지 않더냐, 상쾌하지 않더냐!

이렇게 작은 영혼들의 영원을 향한 거대한 외침들이 한데 모여, 시내를 이루고, 강이 되어 끝없는 바다에 가 닿았겠지. 어느덧 구비구비 넘쳐 흐르는 유장하고 가슴 벅찬 역사가 되었겠지. 그러고 보면 끝이 있다는 게, 세상이 온통 한계 투성이라는 게 참, 가슴 뛰는 일이다. 우리가 이처럼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이 어찌 보면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일이다. 가끔 인간의 보잘것없음에, 그 한없는 나약함에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만의 꽃대를 뻗어 올리고, 모두를 향한 꽃을 피워내는, 유한한 삶 속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의 이야기들이 봄날의 햇살처럼 눈부시다.



그렇게 봄날 오후의 몽상과 함께, 호숫가 벤치에 앉아 분수의 춤을 즐겼다. 햇살을 즐겼다. 해질녘까지 책을 읽었다. 해가 천천히 기울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신선해지고, 늦은 오후의 눈부심은 점차 맑고 선명한 풍경으로 바뀌어갔다. 하늘은 더욱 푸르러졌고, 나무는 짙은 초록색으로 또렷해졌다. 따뜻한 대기는 새로운 바람으로 상쾌해졌고, 새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한결 차분해졌다.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악과 선,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을 뒤섞은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거나, 혼돈에 질서를, 사물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을 부여하는 지적인 의지를 보면,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삶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느낌을 얻는다.” *

나는 책과 풍경과 마음 사이의 대화를 조용히 음미했다. 낮과 밤의 경계, 땅과 물의 경계 사이에서 모든 것들은 말을 아낀 채 그 곳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어느덧 태양은 자신의 존재를 반짝, 하고 알리고는 저물었다. 그리고 밤이 다가와 서서히 어둠의 커튼을 드리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하루를 잘 보내면 그 잠이 달다. 그렇듯이 인생을 잘 보내면 그 죽음이 달다.” **



그날 밤은 새끼 손톱 같은, 참 이쁜 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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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영웅들’, p. 371
** ‘역사 속의 영웅들’, p. 321
IP *.249.16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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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5.25 10:05:34 *.211.61.245
휴가는 잘 보낸 모양이네.
다시 도윤의 생기있는 마음이 푹 녹아있는 글을 처음으로 올린 것을 보니. 참 좋다. 사진도 글도 마음도 참 좋다.
지난 금요일날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조금 아쉬웠는데.
아날로그 세대여서 그런지 난 오프모임이 더 좋아.
다음 연구원모임때 더 많은 대화를 나누어보자.
한 주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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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5.25 10:15:08 *.180.46.120
몽촌토성 올림픽공원의 아이는 완전히 햇살이다.

책속에서 자연과 세상에 폭 파묻혔던 사람들을 보면서 이생각 저생각 하게된다. 자연을 만나면서 그 안에서 신을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신과 만나고 있는 자신을 찾은 사람들, 과거의 철학자의 문헌 속에서 철학자를 만나면서 자신을 찾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 나를 만날지 궁금해진다.
이번 책은 내게 그걸 묻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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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5.25 14:10:08 *.249.167.156
모두들 잘 지내시죠^^

한 주 쉬었을 뿐인데, 지난 주말에 얼굴도 뵈었는데, 한참 동안 어딘가 다녀온 것 같네요~ 다시 여러분들의 글로 풍성해질 주말이 기다려집니다!

(사실은 부담 반 기대 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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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5.29 00:34:25 *.86.55.214
끝이 있음매 삶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언어 하나하나들이 모여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은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소우주를 만들어 갑니다. 글이 향기를 뿜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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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6.01 11:46:26 *.249.167.156
아직 글에 향기를 뿜기에는 공부가 많이 부족합니다. 막상 작정하고 쓰려고 하면 번번히 막히기만 하니, 욕심을 낸다고 되는 일이 아닌가봅니다.

천천히 가야겠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끝이 있는 여행이니,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면서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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