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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7일 08시 41분 등록
  경복궁을 갈 때마다 역사의 오랜 향기와 편안함을 느낀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멋스러운 전각들과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닌 현판들, 그리고 경복궁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이 떠오른다. 끝이 뭉특해진 섬돌, 마당의 굳은 흙, 담에 놓여있는 벽돌 한 장, 이 모든 것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베어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살았을까?

  아마 가장 바빴던 사람은 정도전이었을 것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상소하였고, 태조 2년부터 새로운 궁궐을 건축한다. 2년의 공사가 끝이 난 태조 4년(1396년) 10월 6일, 판삼사사의 직위를 가지고 있던 정도전은 200여개가 넘는 전각들의 이름을 짓는다. 경복궁은 시경에서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의 만년을 빛나는 복[景福]을 빈다.’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였다. 각 궁궐의 작명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고, 7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지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0년후 인 세종 28년(1446년) 10월9일에 세종대왕은 한글을 반포한다. 법전이나 국가의 공식문서들이 중국의 한자를 사용하고 있고, 지배층도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덕분에 나는 한글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법전의 정비, 군대의 편성등은 조선을 든든한 기반위에 올려놓게 된다.

  안타까운 일은 경복궁이 불타버린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4월에 일본군에 힘없이 무너진 선조는 한양까지 내어주고 도성을 버리고 멀리 피난길에 오른다. 일본군에 의하여 200년 동안 쌓아온 소중한 역사와 흔적들이 없어져 버리고 만다. 다시 역사 속에서 살아나는 것은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건의로 시작된 경북궁의 복원이 시작되면서이다. 없어지고 다시 생겨나고 그것이 역사의 진정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국제 열강 들 속에 조선을 생존의 몸부림을 친다. 조선을 회생시키려는 변화의 순간도 있었다. 1884년 일본에서 수학한 김옥균, 서재필, 박용효, 서재필 등이 혁신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혁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기록만 남긴 채 3일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변화의 씨앗은 역사 속에 숨어 있다가 새로운 혁명을 잉태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궁궐이 불타 없어져버린 것보다도 더 가슴 아픈 일이 다시 일어난다. 명성황후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러시아와 손을 잡고 정권을 잡는다. 반대파인 흥선대원군과 친일 세력간 권력다툼이 커다란 사건을 불러온다. 명성황후는 1894년 10월8일 새벽, 건천궁에서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한나라의 궁궐 안에서 왕과 왕세자가 보는 앞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가 있으며, 한 나라의 국모를 처참하게 유린한 것을 국가간 힘의 논리로 풀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후로 경복궁은 안 마당 앞에 조선총독부가 세워져 식민지의 선봉기지가 되었고, 일제의 야욕에 의하여 광화문의 위치가 바뀌는 등 수난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복궁에 서보면 조선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근대 역사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장면을 마주치게 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보게 되고 비극적인 사건도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이 당쟁과 사화의 역사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쇄국정책을 탓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살길을 찾아 나라를 배신한 사람도 있고, 죽음으로 소중한 유산을 남긴 영웅들도 있다.

 Will Durant는 역사속의 영웅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악을 향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가르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업적과 우리가 물려받은 장엄한 유산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23p)”

 오늘의 경복궁은 다시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일제에 의하여 뒤틀려진 광화문의 위치가 다시 복원되고 있고, 경복궁 내부도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뒤틀려진 위치와 복원되는 건물은 아니라고 본다. 역사속의 영웅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그 소중한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다시 그 유산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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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5.29 09:34:36 *.99.120.184
소전과는 사회적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역사에 조예가 깊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역사를 공부하는 5월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고 있지.
그동안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도 부끄럽기도 하고.
좋은 글 잘 읽었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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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29 12:36:02 *.99.241.60
지난번 사무실에서 궁궐박사이신
명지대 홍순민 교수님의 강연과 답사를 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와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 바로 경복궁이었습니다.
열심히 정리해서 다음에
경복궁 답사를 한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사는 저 역시도 깊이 공부해야 할 부분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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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5.29 13:45:06 *.249.167.156
언젠가 형님께서 말씀하신 경복궁 안의 좋아하는 풍경이 생각납니다. 아는만큼 보인다죠.

영훈 형님은 그 텅 빈 궁궐 풍경 안에서 시간의 먼지를 툭툭 털고 있어선 옛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궁금하신 질문을 선문답처럼 주고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게 이번 달의 화두는 '대화'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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