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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28일 01시 36분 등록
풀 먹인 듯한 빳빳한 호청, 정결한 흰 색의 순면 베개커버, 갓 세탁한 향긋한 시트..이런 것들만이 숙면을 제공해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더 자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어리광 섞인 투정이며 불면증의 원인을 대라고 할 때 말을 막히게 하는 가벼운 핑계거리이기도 하지만 바이러스 침투로 인한 전쟁이 신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에는 눈꺼풀을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만드는 약물만큼 침대로 이끄는 것이 없다. 그것은 결벽증이라고 가끔 내뱉는 그 주인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자동차 안에서도, 줄이 비뚤어지게 깔려있는 침대매트에서도 강하게 유혹을 하며 수면의 세계로 안내한다. 절대 뿌리칠 수 없다.

오랜만에 겨우 원하는 사이클의 원점에 돌아와 있다. 아니 시작인지도 모른다. 눈을 뜬 것은 아침 네 시 반. 어제 잠자리에서 쓰러진 건 9시경이다. 모닝커피를 마시고 책장을 넘기는 시간은 뿌듯하지만 한 시간 남짓에 또 다시 졸음이 밀려온다.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커피와 카스텔라를 먹어서인가? 더 자야 할 잠이 남아있단 말인가? 갑자기 길어졌다는 낮 시간은 그렇다고 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들만이 남아 있는데 복병이 찾아와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 넌 누구지? 하며 뒤돌아 본 순간 낭패로 가득 찬 그녀의 표정. 이런,이런….. 유행성 감기라는 천연덕스러운 녀석이 머뭇거리며 서 있다. 급작스런 방문의 흔적은 먼저 집 안의 크리넥스를 평소 몇 배 이상 사용하게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여자의 삶에서 보자면 급할 때는 시계만 보는 습관이 있다. 24시간의 가장 효율 높은 시간 분배와 절대 낭비하지 않는 일분 일초의 정확한 배치, 그리고 늘 스스로 탄복하는 배팅. 급하지 않을 때에는 올해가 몇 년도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헷갈리는 정도이지만..

요즘 내 몸이 단순히 내 몸이 아니지 하며 평소엔 멀리하던 약이라는 것도 먹어보고 며칠 정도는 푹 쉬어주는 것으로 합의하고 침대랑 사이 좋게 지냈음에도 여전히 녀석은 더 머물고 싶었던지 이번엔 장소를 옮겼다. 염소아저씨 같은 헛기침이 성대를 번거롭게 하는지라 할 수없이 해결사를 찾았더니, 무리는 금물 무조건 푹 쉬라는 국가면허증 가진 이의 말씀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잠이었는데 수면장려 약물까지 투입이 되다 보니 몸의 모든 기관이 오랜만에 일제히 복종자세를 취하는 데, 멀쩡한 고양이만 간식시간 부재로 야옹거리고 휘청거리며 화장실을 찾는 주인은 간만에 보는 스스로의 약한 모습에 비상시 대책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심각하게 마음 먹는다. (저기 가끔 내 컴이 이상한데 위의 “약한 모습”에라는 부분에서 정말이지 계속 오타가 나서 혼났다…기역자가 자꾸 빠져있는 것이다,)

이번 주의 책은 참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책이었다. 살다 보면 자칫 잘못해 그리 명석하지 못하면서 논의에 끼어들게 되지만 될 수 있으면 무조건 그냥 저 없습니다 하고 빠지는 대회가 정치나 종교, 그리고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이다. 빠진다는 이유로는 그 분야의 일천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니 저러니 말에 끼어드는 게 우습고 모르는 게 많으니 할 말도 없고 그냥 조용히 경청할 밖에.. 또 다른 이유로는 나와 같은 레벨의 사람의 변을 들어야 한다는 괴로움도 있었을 듯하다. 확실하게 탁월한 이의 주장이라면 배우는 자세로 앉아있겠지만 목소리만 큰 이가 보여주는 표정의 움직임은 저녁식사 메뉴까지 바뀌게 할 정도이니 대부분 사양하게 된다.

머리와 코가 붕붕거리는 와중에 그래도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물이 차야 넘친다는…… 달도 차야 기운다는.
그래야 변화가 일어나고 그 순간들이 터닝포인트가 되며 그것이 잘 되었을 때 계속 기억된다는 것들이다. 살아 남아서 그것들은 때론 어떤 굉장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고 때론 영웅으로 위인으로 대가로 호걸로 경국지색으로 일컬어지게 된다.

영웅은 스스로 불리우지 않는다. 맛있는 포도주를 만드는 토양이 있듯이 영웅의 탄생은 그것을 필요로 했던 사회가 있다. 그 속에는 이데올로기나 사람의 원망(願望), 부의 재분배와 같은 인간의 이기가 숨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백 년도 못사는 삶 속에서 있었다면 그 짧은 생의 수많은 인간들 중에 그래도 기억 되어진 몇 사람들. 정말 웬만큼 탁월하던가 널리 남을 이롭게 했던가 아니면 정반대이던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오래도록 이름 지워져 남아있지는 못하리라.
영웅이라 명명되는 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극복하고 이윽고 타인을 바라보는 자리로 옮겨 간 사람들........

코에서 시작한 유행성 감기는 머리로 허리로 요즘 취약지구가 된 어깨로도 그리고 목으로 와서 염소기침에서 시작되더니 절절한 기침으로 성대를 한번씩 훑어내고 있다. 이렇게 한 번 다 돌고 나가 줄 것인가?

한국에서의 싱글 여성의 삶은 늘 언제나 한결같이 멋지고 폼나게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거 감기 몸살로 콜록거리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며칠 동안 벌인 녀석과의 전쟁의 상흔이 즐비한데 빨리 휴전협정을 맺던가 원군을 청하던가 획기적인 소탕작전을 벌이던가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다.
분명 확실하게 숙면으로 가게 해 줄 약물과 포도물 두 종류가 있는데 어떤 것을 먹어야 확실하게 이 녀석과 대적하는지 오늘 밤은 그것을 고민하련다.
IP *.48.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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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
2007.05.28 15:40:01 *.92.200.65
달도차야 기운다. 너무 좋아하는 말입니다.

아들에게 읽어주는 그림동화 중에 <아빠, 달을 따주세요>를 읽을때 마다 감동이 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달을 따러 올라간 아빠는 너무 커서
기다립니다. 손에 들고 내려 올 수 있을만큼 작아 질때까지요.

아직 아기는 그 안에 든 메세지를 알지는 못하겠죠.
그러나 저는 속으로 많은 마음을 혼자 전달합니다.
아가야! 이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이렇게 쉽지가 않단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방학 후에 연구원님 글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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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5.28 21:57:24 *.99.241.60
감기가 환경에 적응하는단계라고는 하지만
요즘 감기 너무 독한 것 같습니다. 항생제 남용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덧 12권째 책을 읽고 있습니다.
대략 3개월 100여일이 지나니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지낸
곰 설화가 생각이 나는군요.
100여일만 지나면 몸이 적응을 할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건강하세요.

이번주말에는 팔팔한 모습으로 뵙기를 바라며..
글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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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6.04 03:20:32 *.48.34.49
인애님 너무 인사가 늦었네요.늘 변변치 않은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영훈씨, 지난번에 만나서 좋았어요. 정들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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