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연구원

연구원들이

  • 김도윤
  • 조회 수 3477
  • 댓글 수 7
  • 추천 수 0
2007년 5월 16일 09시 20분 등록
사람을 만나다. 사랑을 보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승오의 번개! 순간, 모든 생각은 정지됐고, 온 마음은 사부님 댁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열일 다 제쳐두고 상명대 앞으로 향했다.

그날 밤은 달빛이 휘영청 밝은, 맑은 봄밤은 아니었다. 달은 흐린 밤 하늘 사이로 아주 가끔씩 수줍은 듯 얼굴을 드러냈고, 사부님 댁에서 훤히 바라다 보이는 인왕산 자락은 어둠 속에 늠름한 자태를 감춘 채, 조용히 몸을 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최고의 봄밤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따뜻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고, 돌구도 목청껏 짖어대며 반겨주었다. 우린 와인을 마시며,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컵라면을 끓여 먹고, 갓 내린 원두 커피를 마시며 봄날 밤의 향취를 마음껏 즐겼다. 신나게 놀았다.

우린 사부님의 서재에서 창 밖 풍경을 내다보며, 책장을 들여다 보며 일상의 흔적을 살폈고, 사부님은 즐거워하시며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셨다. 안경을 머리 위로 올려 쓰시고선 한 명, 한 명에게 사진기를 갖다 대며 ‘이렇게 (사진을 찍을 때) 긴장하는 바보들이 너희들의 진짜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하시며 우릴 놀리셨다.

그날 밤, 그 곳에서 난 사부님의 일상을 느꼈고, 진솔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따뜻한 사랑을 보았다. 이 글은 그날 밤 만났던 3가지 사랑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사부님과 해언

연구원 생활을 막 시작하면서 고생했던 이야기,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와 책을 읽으며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며 한참 웃음꽃을 피우다, 사부님께선 둘째 딸이 왜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전화기를 드셨다. 걱정하는 듯 하셨고, 목소리는 조금 엄해지셨다.

우리는 잠시 조용해졌고, 사부님은 둘째 딸과 통화를 하셨다. 아마 집으로 오다 버스 안에서 잠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중인 듯 하다. 우린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사부님께서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책 속에서는 누구나 근사해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바로 일상이다. …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자신이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게 어려운 일이 된다. 가족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날 밤 처음 본, 사부님의 딸, 해언은 참 맑은 표정의 아이였다. 밝은 아이였다. 풋풋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의 향기를 품고 있었고, 넘치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의 당당함이 엿보였다. 사부님께선 우리를 한 명씩 해언에게 소개시켜 주셨고, 해언도 우리 ‘신입생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마음이 깊은 아버지와 영혼이 맑은 딸. 참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2. 승오와 귀자

그날은 3기 연구원들의 모임이었다. 그런데 두 명이 조금 안절부절이다. 바로 승오와 민선 누나. 민선 누나가 승완이 형을 불러도 해도 되냐고 사부님께 여쭈자 껄껄, 웃으시며 우리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신다. 웬걸, 제대로 묻지도 않고 바로 오라고 문자를 보낸다. 그것도 은남 누나 핸드폰으로.

그날 민선 누나는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고, 배터리가 다 된 관계로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은남 누나의 핸드폰은 졸지에 두 사람의 만남을 연결해주는 임대폰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게 바로 ‘접속의 시대’라며 웃어댔다. 조금 뒤, 승오도 조용히 자리를 뜨더니 귀자를 불러냈다.

승오와 귀자, 민선 누나와 승완 형은 참 다른 풍경으로 앉아 있었다. 그래, 그날 밤 승오와 귀자는 조금 다툰 뒤인 듯, 같이 있지만 조금은 떨어진 듯한 느낌으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니, 둘은 원래 그렇게 앉아 있는 게 어울린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온전한 공간을 유지한 채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조용한 나무와 자유로운 바람이 어울리는 여유로운 풍경.

그날 밤, 귀자의 팬 플룻 소리는 승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담은 듯, 조금 떨렸고, 힘이 들어간 듯 조금 벅찼다. 그래, 남녀의 사랑이란 그렇게 떨리는 거고, 조금씩 넘치는 거다. 그렇게 힘이 들어간 감정들이 서로 맞부딪혀 가끔은 다투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거다. 그렇게 깊어져 가는 거다. 투명한 팬 플룻 음색이 봄날, 밤 공기 속으로 젖어 들었다.

순간, 푸른 나무 한 그루, 밤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번쩍, 하고 맑은 눈을 뜬다.

#3. 승완 형과 민선 누나

승완 형은 까불고, 민선 누나는 조용히 웃고 있다. 반대 편에 마주 앉은 세 사람들은 승완 형의 어수룩한 자문자답과 코믹한 행동에 잠시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어찌 이런 사람이 그렇게 진중하고 사람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는 것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많은 사람이 모인지라, 와인 잔이 조금 부족하다. 덕분에 나중에 온 승완 형은 우리가 마시고 있던 큼지막하고 예쁜 와인 잔이 아닌, 네모나게 각진 조그만 잔이다. 우리는 그 잔이 승완이 형을 꼭 닮았다고 놀려댄다. 그래도 좋단다. 둘은 쉴 새 없이 티격태격하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날 밤, 오윤은 잔에 얼굴이 빠질 것 같다며 분위기에 흠뻑 취했고, 소라 누나는 2층 난간에 위험천만하게 걸터앉아서, 정작 본인은 여유로운 듯 인왕산 밤 풍경을 맘껏 즐겼고, 은남 누나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행간에서 발견한 영국 신사, E. H. 카를 논하며 즐거워했다. 선이 누나는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고, 사진을 찍을 땐 소녀 같은 포즈를 취하기도 했지. 정화누나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따면서 어린 아이처럼 신나 했고, 사부님께선 자신의 중국어 이름 ‘부지깨이’로 우리 모두를 실컷 웃게 하셨다. 그날 밤은 그렇게 웃음이 넘치는 밤이었다.

‘생각이 부족한’ 돌구의 인사를 뒤로 한 채, 배웅 나오신 사부님께 아쉬운 작별 인사를 드렸다. 행복한 기억을 품은 채 언덕을 내려가다, 우연히 앞서 가던 승완이 형과 민선 누나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모습을 본다. 웃음이 머금어졌다.

승완이 형은 가방 두 개를 든 채 앞장 서서 쭐래쭐래 걸어가고, 민선 누나는 점잖게 그 뒤를 따른다. 어딘가 어색한 듯 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나중에 둘이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늘 티격태격하지만 누구보다도 알콩달콩 잘 사는 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참 행복한 풍경이네.

돌이켜보니 그날 밤은 참, 향(香)이 좋은 따뜻한 봄날이었다.


p.s. 아쉽게 그날 밤 번개에 참석하지 못한 3기 연구원들에게 봄밤, 행복한 풍경 속의 기억 한 조각을 띄워 보냅니다. 하늘과 산이 만나는 풍경 속에서 모두가 한데 어울리는 달 밝은 밤을 부푼 가슴으로 다시 기다려 봅니다.
IP *.249.167.156

프로필 이미지
송창용
2007.05.16 10:10:12 *.99.120.184
도윤님의 세밀한 묘사로 그날 분위기와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어서 고맙고
이번 금요일날 제대로 한번 놀아봅시다.
프로필 이미지
종윤
2007.05.16 11:29:28 *.227.22.57
고맙네. 너무 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많이 허했거든... 속이 좀 든든해지는 것이 꼭! 보약 먹은 기분이야. 다음 기회는 놓치지 않기를~

그래도 도윤아~ 아직 신혼인데, 신부를 너무 속상하게 하지는 말아라. 나중에 다 돌려받는다. - 결혼 4년차 선배가. ㅎㅎ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07.05.16 13:06:16 *.75.15.205
하나 빠뜨렸다. 승완은 민선에게 하도 드리밀어서 A자로 파고들고
옹박과 귀자는 황혼의 노부부마냥 V자라고 도윤이 마구 놀렸다.
선배 승완은 그녀 앞에만 서면 귀염둥이가 되고 옹귀는 오히려 느긋하게 점잖다. 사랑의 다채로운 모습이다. 디기 부럽지롱~

종윤은 우리 모두에게 밥사야 하는 서약 잊지마아~ 녹음 했음매. 흐드러지는 봄 밤 희뿌연 달그림자와 허벌나게 조잘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밤이었다. 다음 기회를 기대하시라....두구두구둥~

참, 그리고 그날 소라 넘 이뻤다. 사랑해~
프로필 이미지
한정화
2007.05.17 00:19:30 *.72.153.12
사부님은 달이 뜨면 더없이 좋다고 하셨다. 다음번엔 달을 따러 술과 잔을 들고 산에 오르자.
프로필 이미지
옹박
2007.05.17 10:06:08 *.55.53.163
아.. 고마워요. ㅋㅋ 그날밤 돌구의 울부짖음이 다시 들려오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형은 참 좋은 눈을 가졌어요. 말을 아끼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그 동안 사진을 찍고 있었구나.
프로필 이미지
귀한자식
2007.05.17 12:07:09 *.149.20.230
다들 왜이렇게 멋진거죠?
프로필 이미지
도윤
2007.05.18 08:37:53 *.249.167.156
아쉽게도 비가 오네요. 그래도 기상청 예보로는 오후부터 비가 갠다고 합니다^^ 모두들 저녁때 뵙겠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