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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1일 16시 46분 등록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하면 언제나 두려움이 먼저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두려움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화구를 펼쳐두고는 화실에 그림책들을 뒤적거린다. 연습해보고 싶은 그림을 한 장 고르는 일이다. 연필파스텔을 사용하니까 그것에 맞는 그림을 찾고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틀어진 일이지도 모른다. 책으로 나온 그림이라고 해봤자 커봐야 A4 사이즈이고, 대부분이 손바닥만한 사이즈이다. 그렇게 작은 그림(그림의 실제 사이즈는 크고 연습하는 종이는 작다)을 두꺼운 연필로 세밀하게 그려야 한다는 게 시작도 하기전에 두통거리다. 내 기질로는 거부감이 일게 당연하다. 유화집을 뒤적거리고, 누구누구의 전시회 화집을 뒤적거리고 국내에 유명 갤러리에서 크게 했던 전시회인... 인상파전 도록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마땅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음을 끌리는 것도 몇 개 있었는데, 들여다보다가는 하나씩 이유를 달아서 퇴짜다. ‘이건 딱 내 스타일인데, 마음에 쏙 드는데 여러 가지 색이 안들어 갔잖아. 연습하긴 곤란, 실격’ ‘휴~ 이건 너무 복잡한 걸, 작은데에 어떻게 그리냐. 탈락.’ ‘이건 사람 얼굴이 일그러져있어. 똑같이 그린다고 해도 이상할거야, 탈락.’ ‘오~ 이건 수채화 느낌이 좋은데. 그런데 파스텔은 안 맞을거야.’ 대체 그리고 싶다는 건지 아닌건지, 그림 하나씩에 다 투덜대고 있다. 몇 개는 너무 멋있어서 내가 못 그릴 거라고 미리서부터 아웃인거고, 대부분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까만 종이에 그려보고 싶은 것은 젊은 날의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리고, 또 한두 가지 색이 가득 들어있는 강렬한 단색의 유화 그림, 벚꽃인지 매화인지가 흐르러진 북한화가의 풍경화 한점.

벌써 한시간이 넘게 화집을 뒤적거려도 적당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는 화실동료들이그리고 있는 것을 구경했다. 옆에는 중세의 유화를 8절 종이에 파스텔연필로 옮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복잡한 유화이다. 나 같으면 시도 조차하지 않을 그림이다. 다시 또 화집을 뒤적거린다. 적당한 그림을 찾지 못해서 이번에는 월간지까지 들춰본다. 미술월간지에서도 신통한 것을 찾지 못했다. 뒤적거리는 동안 날 위로했다. ‘그래도 화실에서 노는 거잖아. 딴데 안가고 그림보고, 그림 생각하면서 시간 보내는 거잖아. 보는 것을 즐기라구.’

2시간 동안 그림보고, 사람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화실 문닫을 시간이다. 나름대로 위로하긴 했지만 아쉬움이 와락 밀려온다. 어떻게 저사람들은...???? 옆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그림 되게 복잡해 보이는데, 몇 시간째 그리고 있는건가요?’ 6시간. 반 정도 진행한 것 같다. 그래서 또 물었다. ‘이 그림 본인이 고른 건가요, 선생님께서 연습하라고 골라주신 건가요?’ 본인이 선택했다고 한다. 그 옆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겨울 풍경을 파스텔로 그리고 있는 아저씨에게도 물었다. 이번이 세 번째 그리는 거라고 하신다. 물론 이 아저씨도 지금 연습하는 그림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 한다. 그냥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중세의 풍경을 베껴 그리는 친구는 나보고는 너무 복잡한 것 말고 풍경화 하나 선택해서 그리라고 한다. 어렵게 보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 막상 그려놓고 나면 색감이 풍부해서 마음에 들거라고 다른 것도 하나 추천해 주었다. 꽃이 만발한 정원 그림이다.

펼쳐 두었던 화구는 다시 제자리로 모두 정리하고 화실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내게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그려야한다는 부담이 먼저 작용했나보다. 손보다는 머리를 썼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잘 못하니까 거부가 심하지. 그러니까 연습이란 것을 하지.’ 그리는 데 몇 시간 걸릴지, 복잡한지, 어려운지 그런 것은 연습할 그림을 선택하는 데 기준이 아닌 듯 하다. 열심히 몇 시간을 아무말없이 그리고 있었던 이들을 보면서 먹먹했다. 배우는 데는 머리보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될지 안될지는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다.

(2008.7.9 수요일 - 화실에 가긴 했으나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회사에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 쪽에 엘리베이터 앞쪽에는 정기 간행물을 꽂아두는 대가 있다. 왔다가는 하는 길에 하나씩 집어들어서 사진을 살핀다. 거기의 내용은 별로 관심이 없다. 기술분야나 행정부의 정책에 관련된 것들이어서 딱딱한 홍보자료다. 관심없다. 사진만 후르륵 본다. 화장실 들어갈 때 집어들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꽂아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후르륵 넘기고는 다시 꽂아둔다. 다 못본 것은 다음번에 화장실 갈 때 또 집어다 보면 된다.

그렇게 해서 찾은 사진. 어제의 경험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무작정 그리자로 마음이 바뀌었다. 올해 4월에 나온 잡지의 표지가 마음에 든다. 이 잡지는 계절별로 하나씩 나오나 보다. 4월의 꽃사진... 그리고 중간에 벚꽃사진, 샤갈의 결혼식 그림이 마음에 든다. 벚꽃. 좀 복잡해 보이는데, 복잡한 것을 그냥 시도해 보자고 마음이 바뀐 상태니까... 잡지를 가져다가 가방에 집어 넣는다.

아름답다. 사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은 앞섰는데, 어떻게 그려야 할지는 모르겠다. 화실 선생님께 드리밀고는 ‘이거 그려보고 싶은데 어떤 색지를 쓰는 게 좋아요?’라고 다짜고짜 묻는다.
흰색의 꽃을 살리기 위해 검은색 종이에 그리는 게 낳을까, 선생님께 여쭈어 보자. 선생님은 좀 진한색을 선택하는 게 좋다고 하신다. 진한 초록?, 고동색 쪽에 가까운 겨자색? 나는 꽃이 전체적으로 붉어질 것을 감안하여 붉은색이 많은 보라색이나 분홍색이 적당할 것으로 여겨지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색지가 낫다고 할지 궁금하다.

진한 색지는 화실에 없을 거라 하신다. 선생님이 골라주신 색지는 하늘색 색지이다. 내가 보기엔 진해 보이지 않는다. 아주 진한 빨강, 남색, 그리고 아이보리 색 색지가 있다. ‘남색에 붉은 꽃을 그리면 차가울 것 같고, 아이보리에는 흰 꽃을 올리기 어려울 거고.... 그래도 빨강이 나을 듯 한데....’ 또 머리를 쓰고 있구나.

종이 사이즈는 8절 종이가 괜찮을 거라고 하셨는데 내 마음대로 한다. 4절지 사이즈로 잘라서.. 그중에 우측과 아래쪽에 여백을 두어서 사진의 크기보다 크게 그린다. 작게 그리다가 갑갑증 나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결국은 내 마음대로 선택한 셈이다.

진한 색지에 흰색을 올리려고 했는데.... 진하지 않은 색지에 흰색을 올려야 한다. 막막하다.
어떻게 하면 흰 꽃잎이 드러날까 황토색이나 자주색으로 밑에 깔아둔다. 그리고 거기에 흰색에 가까운 누런색을 섞는다. 걱정된다. 드러날 것 같지 않다. 흰색 위에 노란 색...수술. 막막하다.

사진에 바짝 다가 앉아서 얼굴 가까이 들이대고 보니 너무 복잡해 보인다. 초점이 뒤에서 맞은 사진이다. 이전에는 너무 자세하지 않아서 답답해 했다면, 이번에는 그와 반대다. 상당히 자세한 것이다. 벚꽃가지 중에 중간에 있는 것에 초점이 맞아서 앞쪽과 뒤쪽이 흐리게 나온거다. 뚜렷한 형태도 아니고, 뚜렷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다. 경계에 모호함을 넣어야 분위기가 난다는 건데... 대체 어떻게 집어넣지?

흰 꽃잎이 드러내기 위해서 결국 배경에 남색을 칠했다. 엷게.
꽃잎들이 촛점이 맞지 않은 상태로 드러나는 것을 표현하려면 배경을 칠하지 않고는 어려울 듯하다. 배경과 주제가 색과 선이 뭉게지면서 모호해져야 흐린효과가 날 것 같다. 꽃잎을 하나씩 따라그리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배경으로 초점이 전혀 맞지 않은 꽃잎들이 가득하다. 여지껏은 또렷히 하려 애썼다면 이번 것은 또렷한 것과 흐린 것을 같이 넣어야 하는 거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방법을 뒤집어야 할 것 같다. 그때 그리던 그림은 대부분이 수채화였다. 밝은 색에서 시작해서 어두운 색으로 마무리를 했었다. 그런데... 이번 것은 반대로 되어야 꽃잎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둡게 시작해서 점점 밝은 것을 뽑아나가는 과정. 뚜렷하게가 아니라 색은 넣되 경계는 넣지 않는 것. 일부에서는 배경과 주제의 경계가 허물어져야 한다.

화실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는 선생님이 내 뒤에 와서 그림을 보실 때 긴장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최종적인 그림의 모습이 머릿 속에 잡히지 않는다. 어떤 분위기가 될까 짐작이 되질 않는다.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질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선생님은 지금 잘하고 있다고 분위기가 괜찮다고 주셨다. 시작한지 2시간 반이 지났다. 어느 정도 형태가 나와야 하는거 아닌가.... 선생님 말씀에 안심하면서도 이상하다.
내게 최종적인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반은 그렸을까? 내가 반이라고 생각하면 1/3쯤 진행한 건데... 이건 대체 어느 정도 선에서 윤곽이 드러날까? 내 마음 속에 먼저 이미지를 잡고 싶다.



화실 마칠 시간. 화구를 접기 위해 일어섰을 때, 사진(잡지)이 앉아서 보는 것과는 달리 보인다. ‘아아~ 부드럽다.’ 이전에는 이렇게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꽃들이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앉아서 보는 것보다, 꽃들이 훨씬 더 풍요로워보인다. 앞쪽(아래쪽)에 초점이 맞지 않은 꽃잎들이 있어 전체가 풍성해 보인다. 앉아서 사진을 보았을 때는 꽃잎들이 무더기로 뭉쳐있고 복잡해 보였는데, 뒤로 물러서서 보니 어느 꽃이 앞쪽이고 어느 꽃이 뒤에 있는지 은근한 명암으로 드러난다. 가까이서 볼 때는 개별성에 집착했는데, 물러서서 보니 전체가 보인다. 다음 시간에는 지금 본 것을 반영해야겠다. 꽃잎에서의 개별적인 명암 뿐 아니라 전체의 명암, 전체의 분위기... 이것이 복잡한 대상에 대한 막막함을 한 겹 벗겨줄 것 같다.

‘부드러우면서도 화사하게’
이 그림 전체의 분위기는 ‘꿈꾸는 듯하게’ 만들어야겠다.

(2008년 7월 10일 벚꽃 그림 기초를 잡다.)
IP *.247.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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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7.16 11:33:04 *.244.220.254
한여름 화사한 사쿠라 그림이라~ 대단한데.........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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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8.07.18 10:13:36 *.193.194.22
절벽이 보이는 음식점 정원에 심긴지 십년된 나무들... 눈부셔 흐린 날씨에도 형광처럼 빛을 켠 돌배 꽃이 온통 하얗게 빛나던 뜰.
자신만의 뜰이 있는 선생님들이 만드는 조각정원들이
하늘에 펼쳐진다.
혼자 공상속으로...

정화의 마음속에 흐르는 몸짓언어들이 손에 잡힐 듯.
의식의 흐름을 짚어내서 들려주는 솔직함을 드러내는 표현들.

날이 흐리더니 개이나하고 15층 창밖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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