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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7일 01시 25분 등록
회사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방을 챙겨서 나선다. 화실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다음번 리뷰로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몽땅 베끼면서 그림공부할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어느새 명동역에 도착했는지 도무지 정신이 없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데 길이 낯설다. 잘못 들어선 것 같다. 늘 가던 출구가 아닌 듯 하다. 찬찬히 살피니 맞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질까. 머리 속에 온통 그림을 일주일 안에 어떻게 베껴 그릴까 하는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느낌이 색다른 공간에 들어선 것 같아, 그 황홀은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전화를 걸었다. 낮에 통화하려다가 연결이 되지 않은 지인.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걸으면서 통화를 한다. 휴가를 내는 것 때문에 조언을 얻고 싶었는데 잘 해결되었다는 것을 먼저 전하고, 느낌이 새로워서 전화하고 싶었다는 말도 전한다.

화실, 바로 코 앞이다.
이야기를 전하느라 화실 특유의 기름냄새를 맡지 못했다. 송진처럼 코를 콱 찌르는 시원하면서도 고상한 냄새.

안으로 들어서 아트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화구를 챙긴다. 수채화 반 학생들이 많다. 지난주에는 색상 혼합을 하더니 이제는 정물 연습이다. 이젤을 펴고, 지난주에 그리다 멈춘 화판을 건다. 색연필을 찾는다. 아뿔싸! 없다. 지난주 집에서 그림 그리겠다고 가져갔는데, 아침에 정신없이 나오다보니 챙기는 것을 까먹었다. 총알없이 전장에 나갔다는 것을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선생님, 색연필을 안가져왔어요.”
“그럼 다른 르로잉해요.”

화구가방 속에서 검정색과 흰색 파스텔연필을 찾았다. 흑백으로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마침 그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다. 베티의 미술교실2『눈으로 보고 눈으로 그리기』읽으면서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거 하면 되겠다. 우리는 유추하는 능력이 있어서 눈으로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그림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온 그림이 있는데 해보고 싶었다.

기법은 종이에 연필심을 갈아서 떨어뜨리고 둥글게 문지르면서 회색톤으로 전체를 덮는다. 그리고 지우개를 사용해서 책에서 예시한 그림을 보고 밝은 부분만을 지워가면서 그리는 것이다. 나중에 어두운 부분은 연필로 검게 칠해도 된다고 했다. 지우개를 연필처럼 쓴다는 것에 흥미가 있었고, 책에서 설명하는 대로 보이지 않는 부분은 보이지 않은 채로 그대로 그린다는 것에 흥미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아하’, ‘아~’를 연발했었다. 자세히 보이지 않은 부분은 그것대로 그림을 완벽하게 만든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빛과 그림자로 만들어지는 환상. 빛 속에 모자를 반만 보이고 나머지 반쪽을 어둠속에 감추어두면 완벽한 모자의 형상을 본다고 한다. 문득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도 사람들의 그런 성향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른 사건을 풀었던 것이 떠올랐다. 지도의 한쪽이 불에 타서 길이 끊긴 부분을 볼 수 없었는데, 피해자는 그 길을 계속 이어진 길로 여겨 막다른 그 길로 들어섰다는 것 말이다. 사람들은 보이다가 보이지 않으면 연장해서 본다고 한다. 그것도 가장 완벽한 선으로 연장해서.

미술교실 책에서도 그런 것을 얘기는 하는 듯 했다. 그러니 보이는 부분은 보이는 대로, 희미하게 정보가 없는 부분은 없는 채로 그냥 그리라고 했다. 일부러 없는 정보를 거기에 추가하여 그리지 말라고 했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손을 자세하게 그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그림이라면 내가 가진 검정색과 흰색 연필 뿐이라도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

책에서 제시한 화가의 자화상 그림은 너무 작아서 보기 불편해서 지난번에 보았던 영화배우가 가득한 사진집에서 적당한 것을 골랐다. 내일 색연필 세트를 가져오면 지난주까지 하던 것을 계속 할거니까 오늘 2시간 이내에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골라야 했다. 흑백으로만 그린다면 독특한 분위이가 날 사진들이 아주 많았지만, 2시간 이란 제약 때문에 단순한 것으로 골랐다.



이 정도면 1시간이면 되겠다 싶었다. 책에서는 화가의 자화상을 따라 그리는 데는 30분이면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다리선이 무척 아름다운 사진이다. 단순해서 더욱 아름답다.

사진에서 연필로 가로와 세로의 비율을 쟀다. 세로를 먼저 반으로 나누고 그 반토막에 해당되는 부분만큼을 연필에 엄지손가락으로 꼭 쥐고는 가로에 갖다가 대고는 2개를 넘어서고 얼마나 남은지 재었다. 세로가 10이라면, 가로가 12 정도가 되었다. 종이에 ‘세로:가로’의 비율이 10:12인 테두리를 만들어야 했다. 책에서 테두리가 무척 중요하다고 해서 일부러 테두리를 만들었다. 테두리 선이 기준선이 되기 때문이다. 벚꽃 그림을 그릴 때도 제대로 바깥쪽 경계를 정하지 않아서 둘쭉날쭉 한 것이 안타까웠던 게 생각났다.

종이에 위를 살짝 남기고 아래를 살짝 남기고 좌․우는 싹뚝 잘라내려던 참이었다. 사진과 종이가 비율이 터무니 없이 맞지 않으니까. 오른쪽에 선을 그은 후 반을 나누었다. 그리고는 오른쪽 귀퉁이부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45도의 대각선을 그렸다. 정확하게 45도 대각선을 그리면 중앙에 그어둔 선과 만나는 지점에 세로선을 그리면 정사각형이 된다. 대각선을 연장해서 만나지는 지점을 표시해서 세로선을 그었다. 커다란 정사각형을 그린 후에 가로에 2만큼쯤 되어 보이는 지점에 세로선을 그었다. 나는 꼼꼼하게 비례를 따지는 편이 아니다. 대충 눈짐작으로 ‘이 지점쯤’하는 부분에 선을 긋는다. 10:12의 비율로 테두리선이 그어졌다. 그 테두리선을 따라서 종이를 화판에 종이테이프로 붙였다. 준비가 다 된거다.

종이에 검정색을 촘촘히 칠한 후에 문질서로 골고루 매끈하게 회색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지우개를 연필처럼 사용했다. 아무데서나 먼저 시작해도 되었다. 앞쪽으로 세워진 다리선부터 지우내고 뒤쪽의 다리는 첫 번째 다리와의 관계를 고려해서 지웠다. 여인이 앉은 것, 바위인지, 소파인지 구분이 잘 안되는 둥그스름 한 것을 지웠다. 손을 지우고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지웠다. 그리고는 주변을 더욱 검게 칠하고 또 지웠다. 칠하고 주변은 검게 칠하고, 먼저 번에 지웠던 데는 더욱 선명하게 지우고를 반복했다. 매끈한 다리를 다 표현하려면 흰색 연필을 써야 하나를 고민했다. 하얗게 지워지지 않았고 왼쪽으로 치우친 경계들이 뚜렷하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인의 다리선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 다리가 가늘어 보인다며 (다리의 밝은 부분 말고) 어두운 부분을 더 늘리라고 하셨다. 다리를 한참 고쳤을 때 보시고는 ‘옷을 더 진하게 하세요’라고 일러주셨다. 옷. 사진 속에서 정말 검어 보인다. 여인은 아마도 검은 미니스커트를 입었을 것이다. 흑백사진이니 검은색인지 빨강인지 초록인지 나오지 않지만 왠지 검은색일 것 같다. 소매의 검은 부분 어두운 그림자 부분임에도 희미하게 보이고, 머릿결에서 등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역광 때문에 살짝 드러난다. 계속 쳐다보니 앞쪽 발목 아래의 하이힐의 높은 굽이 보인다. ‘세상에 그게 보이다니! 나중에라도 보이다니 다행이다.’



여인은 금발일 것 같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교차하는 머릿결이 밝은 부분이 많은 까닭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머리의 컬이 역광 때문에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머리카락을 표현하려면 흰색을 써야 되지 않을까?’

흰색을 쓰기 전에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사진을 담아두려고 하는데, 마크 선생님께서 보시고 흰색 연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셨다. 그게 더 분위가 살 것 같다고. 늘 이런 그림을 그릴 때는 하이라이트를 흰색 연필을 사용해서 처리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흰색을 써야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또 고정관념 하나가 깨졌다. 책에서는 연필과 지우개로도 충분했었는데, 그걸 까먹고 있었다.

마크 선생님께서 카메라를 들고 오셨다. 아, 화실 마칠 시간인가 보다. 끝날 무렵에 학생들이 연습한 그림들을 디지탈 카메라로 찍어서 모두 cafe(화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신다.
나도 사진을 찍는다. 그날 배운 거, 연습한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여기에서 그리기를 멈춘다. 2시간 이내에 그림 하나를 그렸다는 것이 무척 만족스럽다. 단순한 것을 택하기는 했지만, 하루에 하나를 다 그렸다는 기쁨.

사진을 찍으시는 마크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그림을 본다. 이때 아니면 다시 볼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원본으로 보고 싶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때 물어야지 나중에 물어볼 기회도 없다. 화실에 배우로 오는 학생들이 모두 cafe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 또한 cafe 활동을 하지 않으니.

그림은 한쪽에 세워둔다. 정착액 뿌려야 한다. 몇 달전부터 집으로 가져간 정착액 가져온다고 하고선 여전히 집을 나설 때마다 까먹는다. 정착액 안 뿌린 그림이 뭉개질까봐 벽에 달아두고 화판 째로 세워두고 한다.

화구들을 치우고 마감하려고 바쁜 마크 선생님 붙들고 ‘그리드’ 사용법을 묻는다. 오늘 낮 점심시간에 OHP 필름에 정사각형 모눈으로 그려서 인쇄하고 복사해서 만든 것이다. 월간지에서 인물사진 보고 비례연습하고, 다른 사람 그림 베껴 그리는 연습하려면 투명 그리드가 꼭 필요할 것 같다. 마크 선생님은 그리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아트 선생님께 여쭈어 보라고 하신다.
“제가 비례를 못 맞춰서 월간지 사진 보고 옮겨 그릴 때 쓸려고 하거든요 이거 어떻게 쓰는 거예요?”
아트 선생님께서는 칸을 세어보시더니 6:8로 그리드를 제대로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냥 A4사이즈에 맞게 인쇄하느라 그렇게 했는데, 6:8에 뭔가 의미가 있나보다.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들고 ‘어디 보자, 8등신인지...’ 하신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6.5등신이나 7등신이라고 덧붙여 일러주셨다. 나는 가지고 있던 책위에 인물사진 위에 그리드를 놓고는 "이거 이렇게 쓰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먼저 사진의 경계에 선을 맞추고는 묻고, 다음은 얼굴의 특정 부위에 선을 맞추어야 되는지 물었다. 테두리 비율을 일치시켜야 하는지, 눈에 선을 일치시켜야 하는지, 코로부터 위 아래로 뻗는 선을 중앙선에 놓아야 하는지 몰라서다. 얼굴의 중앙선에 일치시키는 게 좋다고 하셨다.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뭔가가 먹고 싶다. 허기진다.
그리드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보며 어떻게 그릴까를 생각한다. 전철 안에 광고지가 눈에 띈다. 그 위에 그리드를 대고 비례를 재보고 싶은데, 사람을 이목이 많아 참는다. 전철문 까만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 그 위에 그리를 댄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다. 거울에다 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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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사진 정리하면서 보면 화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그릴 때 보였으면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그래도 나중에 사진으로라도 보여서 다행이다.

'난 역시 거친 선을 쓰는 구나'.
'여인이 고개를 더 숙였잖아.'
'오~, 오른쪽 발... 하이힐 굽이 이제야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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