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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4일 14시 08분 등록

(2008.8.7 목요일)

시간이 다 되어 그리던 그림을 정리하려 하는데 화실 선생님이 다음주부터는 휴가라고 하신다. 금요일은 원래 휴강이었고, 이번 주말에는 쉰다고 하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정식으로 화실 선생님들 휴가이다. 보니 당장 내일부터 계속 화실 쉰다. 다음주 금요일 15일부터는 화실의 멤버들의 여름캠프이다. 한주를 몽땅 빠지는 구나 휴~. 내 휴가까지 하면 2주를 내리 빠지는 거다. 에구.

화실도 쉬는 데, 만화책 리뷰를 계획했던 것 화실 안하는 날 하면 되겠다 싶었다. 화실에서 만화를 베껴 그리고 싶다며 말을 꺼냈다. 아주 어렵게 물었다. 만화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만화를 안 그리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쭈어 봅니다.’ 그렇다. 여기 말고는 따로 또 물어볼 데도 없는 형편이지 않은가.
선생님께서는 자기도 만화가 좋아서 많이 그렸었다고 말씀하셨다.
‘아~ 그렇구나.’
책을 보여드리며....
“만화를 베껴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나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어떤 방법을 묻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어떤 종이에, 어떻게 ...이런 것이 전혀 없는, 구체성이란 게 전혀 없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일러주신다.
“펜으로 그리세요. 연필로 밑그림을 스케치 하고 그 위에 펜으로 그리세요. 펜은 민감해서 그걸로 연습하고 나면 나중에 연필로 그려도 선의 강약 조절이 가능해요. 여기 배경이 있잖아요. 배경도 모두 그리세요. 이런 데는 붓으로 찍어 그리고요. 되도록이면 똑같이 그리세요.”
“예. 그럼 종이는요~. 제가 비례를 잘 못 맞춰서 그러는데, 모눈종이 써도 될까요? 그건 어떻게 써요?”
“모눈종이는 쓰지 마세요. 그냥 종이에 그려요. 처음에 그릴 때는 어려운데 하다보면 그게 더 나아요.”
‘아, 이건 어떻게 하지. 전혀 감을 못 잡겠는데, 비례는 어떻게 맞추나?’
그 비례라는 게 뭔지. 내 얼굴에 걱정이 다 드러났을거다. 하다보면 될거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정확히 뭐라고 하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딴 생각을 했거나, 모르는 말을 들었던 거 같다.

작년에 마크 선생님이 만화를 베껴 그린 친구가 그림 실력이 늘었다고 얘기해준 게 생각났다. (그동안 까먹고 있었었다.) 방법은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다 베낀다고 했었던 것 같다. 어려운 거, 쉬운 거, 이상한 거, 가리지 않고 차근히 모두 다 따라 하다보면 어느새 늘어 있다고.


(2008. 8. 8 금요일)

금요일 저녁 퇴근하는 길에 문구점에 들렀다. 마크 선생님 추천으로 펜을 사용할 결심을 하고 펜촉과 잉크를 사러 갔다. 문구를 파는 곳에 입구에 보이는 것은 만년필을 파는 매장이다. 만년필보니 하나 쓰고 싶다. 요즘 쓰는 것에 재미들렸다. 손글씨라고, 손으로 운동하는 기분이다. 운동을 하고 나면 상쾌하다. 30~40분씩 아침에 무조건 3페이지씩 쓰다보면 어느새 상쾌하다. 불필요한 것 빼낸 기분이다. 계속 쓰다보니 한달새에 60매짜리 노트를 2/3나 썼고, 볼펜을 벌써 2개를 썼다. 몇 일 빼먹은 거 아니라면 노트도 이미 다 썼을 텐데, 뭔가를 써서 없앤다는 거 기분이 좋다. 만화 책 리뷰를 하다보니, 거기에서 맹인의 손에 닳아 없어진 지팡이가 나왔는데 손이 무쇠도 녹일 만하다고 했었다. 손에서 닮아 없어지는 것이라니....., 내 손에서 닳아없어지는 볼펜, 펜, 종이가 무쇠 녹이듯이 쌓였으면 좋겠다. 주로 중성펜이나 싸인펜(플러스펜)을 쓰는데, 종이에 잘 미리지 않는 약간의 저항감이 나는 좋다. 그래서 일부러 갱지 스타일의 거친 표면의 종이에 중성펜으로 갈겨서 쓴다. 약간은 큼직하게. 내 기분에 따라서 힘이 들어가기도 하고 졸려서 꾸물거리는 글씨로 써지는 손글씨가 좋다. 예쁜 글씨를 쓰고 싶으면 미끄러지듯 잘 나가는 볼펜보다는 저항감이 있는 연필을 쓰라고 권한다. 그래야 손에 힘이 붓는다고들 한다. 손으로 느끼는 저항. 그게 요새 느끼는 손맛이다. 종이를 채우는 맛도 좋다. 손맛. 손맛. 만년필로 쓰고 싶었다. TV광고 중에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었다고 명품이라고 차를 광고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광고 문구를 손(만년필로)으로 써가며 했다. 펜이 종이 위에서 노는 소리, 슥슥 지나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광고 때문에 그런가 만년필로 쓰면 더 잘 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만년필, 여기 이거 써 볼 수 있나요?”
“잉크가 안 들어 있어서요.......”
‘아~, 쓸 수 없다는 말이구나. 디자인을 혹은 만년필을 쓴다는 명예(뭐라고 하지 정확히 무슨 말이지 옮기기가 애매하다. 고급 제품을 쓴다는 우월감?)를 파는 거구나. 손맛은 아니네.’
그런데도 약간은 서운했다. 써보고 싶었는데, 비싼 제품이니까 하면서. ‘저걸로는 그림 그리기 곤란할거야.’ 신포도라고 맛없을 거라고 포기하는 여우처럼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늑대와 춤을’ 중에 펜으로 쓴 일기와 삽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옛날 화가들은 펜으로 그렸다는 것도. 처음부터 그리는데 사용하려고 구경하던 것은 아니었으면서, 못 써본다고 하니 엉뚱한 핑계를 댄다.
‘젠장. 비싸고, 써볼 수 도 없고. 젠장.’

펜이 손에서 노는 감이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은데 아쉽다. 혹시나 또 모르지 펜이 좋아서 마구 쓰고 싶을지도. 지금 내가 모닝페이지가 필기감이 좋아서, 낙서하는 기분으로 생각나는 대로 마구 써대는 것처럼 펜이랑 종이가 한몫을 할 수도 있지.

잠시 동안의 구경을 마치고 본래의 쇼핑 목적으로 되돌아 온다. 붓 중에서 세필을 고른다. 세필용 수채화 붓은 대가 짧다. 섬세한 작업을 해야하니 짧은가 보다 한다. 집어 들고 통로를 나오는 데 한국화 붓이 보인다. 한국화 세필용 붓. 수채화용보다 더 가늘고 길다. 털 자체도 길고, 붓대도 길다. 그것도 하나 집어 든다. 먹물도 한통 집었다가는 그냥 되돌려 놓는다. ‘먹물말고 그냥 잉크로 먹칠하자.’

“저기 펜촉과 잉크는 어디있죠?”
안내에 따라 들어간 구간. 한국화 세필붓을 집어든 바로 옆이다. 코 앞에 두고 못 봤던 거다.

펜촉에 대한 설명이 작은 사이즈로 적혀 있다.
‘G-펜 : 굵은 선 용
스쿨펜 : G와 Z의 중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
Z-펜 : 가늘고 긴 선을 그을 때’

G-펜촉은 꼭 만년필 끝을 닮았다. 끝을 보니 뭉뚝하다. 스쿨펜은 따로 스쿨펜이라고 안써있고 대신 회사명이 써있다. 예전에 써봤던 것과 모양이 같다. G와 스쿨펜은 보이는데, Z-펜촉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씩 집어들고 펜대도 집어 들고 나오려는데, 눈에 띠는 이상한 대.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물건들을 따라서 둘러보다가 가는 빨대 모양이 끝에 창처럼 뾰족한 것이 잔뜩 들어있는 작은 접시를 발견했다. 끝이 아주 뾰족했다. Z-펜촉이었다. 꼭 작은 창인 듯 보였다. 펜대에 꽂으면 이건 창이 되겠구나 했다. 폭이 좁은게 일반 펜대에는 꽂아 쓸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쓰지? 아, 아. 먼저 내 눈길을 띄였던 이상하게 생긴 대는 Z-펜촉을 끼우는 대였다. 이것도 하나 집어 들었다.

잉크도 집어든다. 만화용 잉크. 빨리 마르고 번지지 않는다고 씌여있다. 제도용 잉크도 있다. 대체 어느 것을 써야 하지. 제도용 잉크도 하나 집어든다. 만화 종이도 한권 집어 들었다. 장당 50그램?, 50매? 잉크가 빨리 마르고, 두꺼워서 펜 촉에도 종이가 잘 상하지 않는다고 설명이 쓰여 있다. 만화 칸처럼 칸이 쳐진 것과 무지가 있는데 무지를 골랐다.

펜촉 3가지, 가는 붓으로 3가지, 펜대 2가지, 종이. 재료비가 2만원 약간 넘는다. 몇 일간 행복할 건데 싼 것 같다. 수채화나 유화용 재료는 엄청 비싼데 비교된다. 몇 일간 행복하겠구나. 흐흐흐.


(2008. 8. 9. 토요일)

아침부터 푹푹 찐다. 땀이 무릎접힌 뒤쪽부터 쪼록 흘러 장단지를 타고 내려와서 뒷꿈치 지나 톡 떨어진다. 덥다. 덥다. 덥다.

시원한데를 찾아가야지. ‘몇 주 전에 같던 그 커피숍 테이블이 높아서 거기다 펴 놓고 그리면 되겠다.’ 가방에 지난밤에 그림 골라서 딱지 붙여둔 만화책 2권, 줄이 모눈처럼 쳐진 노트, 만화용지, 필통, 책받침, 어제 사둔 펜촉과 펜대들을 챙겨 넣는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마을버스 타고, 한참을 걷는다. 시청앞 분수. 아이들이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엄마들은 아이들 갈아입을 챙긴 가방같은 것을 옆에 두고 양산을 받쳐들고는 한쪽 길가에 앉아있다. 아이들은 바닥 분수를 깔고 앉거나 물을 튀기거나, 분수 사이를 뛰어다니거나 한다. 쳐다보기만 해도 신이 난다. 그렇지만 아이들처럼 물놀이 하고 싶다. 잠깐 보는 사이 분수물에 바지끝이 다 젖었다. 바지 젖으면 안 된다. 아이들처럼 놀 수 없는거다.

신호등을 건너 들어간 커피숍. 시원하다. 커피숍 테이블이 바뀌었다. 한쪽 모두 낮은 것으로 교체 되었다. ‘시원하긴 한데, 여기서 바닥에 주저앉아 그릴 수는 없고 어떡하지.’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을 둘러봐도 높은 테이블은 없다.
나와서 다른 커피숍을 찾아간다. ‘거긴 높은 탁자가 있어야 하는데.....’ 조금 걸어 들어간 다른 커피숍. ‘앗싸. 여긴 높다.’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는 가방에 든 것을 꺼내 놓는다. 테이블 위에 놓은 메뉴판, 설탕단지는 한쪽으로 치워둔다. 커피숍엔 조금 미안한지만 ‘나도 이곳에 내 비즈니스 때문에 온거니까. 내 비즈니스는 그리는 거니까.’ 라며 스스로 남을 의식하지 않을 힘을 준다. 옆 사람들은 커피를 앞에 두고 펀드 이야기, 정치 이야기를 한다. 의식하지 않는다, 않는다 하면서도 테이블 가득 펼쳐 둔 것 때문에 걸린다. ‘나도 일하는 거야. 이게 오늘 내가 할 일이라구.’

표시해둔 만화책에 몇일 전 만든 투명 그리드를 얹고서 얼마나 크게 그려야 할지 가늠한다. 한 장 찢어낸 노트에 칸을 세어가며 일정 간격으로 줄을 긋는다. 가로로 5칸, 세로로 3칸 반. 칸의 위치를 찾아서 연필로 그 칸을 채운다. 이렇게 채우는 것이 그리는 것인가 의심한다. 사람 몸의 일부가 사람 몸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직 칸에 들어 있는 선으로만 보인다. ‘혹시, 마크 선생님이 이런 것 때문에 모눈종이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나?’ 한칸 안에 선은 옆 칸의 선과 연결되지 않는다. 일부러 내가 쳐둔 선을 무시한 채 긴 선을 사용할 때만 연결되어 보인다. 만화책에서 보이는 선을 노트로 옮길 때, 어깨라던가 턱선이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그렇게 보이지 않고 그냥 선일 뿐이니까. 비례를 맞춘다고 일부러 만든 선에 의해서 선을 쳐두었더니 선만이 보이는 것인가 하아-. 그러는 중에 먼저 그려둔 옆선과 나중에 그리는 선이 어울려서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부분에 집착하던거 시야가 조금 커졌다. 큰 것을 그리고 나서, 조무래기를 그린다. 멀리 원경에 뻥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는데 연필이 너무 뭉뚱하다. 선을 여러차례 긋다보니 어느 선이 최종선인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조무래기들이다. 그런데 이 조무래기들에도 표정이 있다. 에구 연필로 그린다면 하나도 안나오겠다. 비워두자.



‘나무는 나중에 펜으로 따로 그리자.’
만화가들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후에 나중에 한꺼번에 펜으로 그리고 먹칠도 하고 연필로 그린 것을 지우고 그런다는데... 몇장 더 그리고 한꺼번에 펜으로 그릴까, 한 장씩 연필과 펜을 번갈아 그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바로 펜으로 덧입히기 시작했다. 펜이 원하는 데로 잘 나가지 않는다. ‘에구 그냥 싸인펜으로 할 걸 그랬나. 그것도 강약 조절이 되잖아. 이거 두께가 왜 이래?’ 만화책의 선의 굵기만큼 안된다. ‘펜으로 그린게 아니가? 붓으로 그렸나?’ 선 굵기가 내 마음대로 안되는 거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놀랐다. 펜의 민감도를 느껴보라고 펜으로 그리라고 한 마크 선생님 말씀이 다시 떠올랐다.

조금 그리다 보니 그었는데, 선이 안그려졌다. 다시 쥐고 그으니 그어졌다. 잉크가 거의 다 된 모양인데 어느 각도로 그으면 그어진다. ‘한번 찍으면 어느 정도 그어질지도 알아야겠구나 아후, 왜 이리 복잡해.’ 계속하다보니 잉크가 상당히 빨리 마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촉이 까맣다. 잉크가 펜촉에 엉켜 붙어있다. ‘잉크, 펜,.... 잉크, 펜...’ ‘만화용 잉크, 빨리 말라서 번지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런거였나?’ 답답하다. 긋는대로 계속 나오는 게 아니다. 잉크는 빨리 말라서 펜촉에 엉겨붙어 버리고, 긋다보면 종이에 잉크없이 자국만 남기고. 몹시 더딘 작업이 될 것 같다.

나무는 뭘로 그리지, 이 굵은 부분 부분은? 붓으로? 가는 붓에 잉크 찍고 물을 찍어서 그린다. 물을 찍어가며 희미한 가지를 그리는데 가지가 자꾸 휜다. 붓의 부드러움, 그리고 손이 곧은 손을 그를 때까지 일직선으로 뻗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손을 일부러 가지처럼 곧게 움직여도 곧은 가지가 그려지지 않는다. 중간에 떨림이 그대로 종이에 반영된다. 천천히 그린 선은 굵은 가지를 만들어 낸다. 가는 선이 많이 들어간 나뭇가지 인데 붓으로는 안될 것 같다. 붓은 놓고 다시 펜으로 바꿔 쥔다. 빠른 선과 느린 선을 역시 손의 속도가 종이에 선으로 나타난다. 붓으로는 빠르게 선을 긋지 못한다. 펜으로 가는 선을 슥슥 긋는다. 붓보다는 속도가 빠르니 나뭇 가지가 휘는 것이 덜하다.

웬만큼 형태를 따라 온 것 같은데, 많은 부분을 놓친 것 같다. 인물의 섬세한 표정에 나타나는 인물의 특징을 약간의 차이로 놓쳤다. 그저 비슷한 형태를 따라한 것 뿐이다. 원경의 작게 그려진 사람들의 세부 묘사도 놓쳤다. 나무들의 무성함도 놓쳤다. 내가 따라 그린 그림은 만화의 첫 장면이다. 한눈에 독자를 확 사로잡아야 하는 첫대면 장면이다. 만화가가 자기가 가진 솜씨를 다 넣어서 그렸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페이지의 그림이다. 흰색으로 인쇄된 만화책에는 색이 나오지 않지만, 중간중간 얼룩덜룩하게 보이는 것들은 분명 한가지 톤으로 하지 않고 색을 넣은 것들이리라. 사람 얼굴선 주변이 약간 번졌고, 또 까맣게 보이는데 얼굴에 가무잡잡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약간 어두운 색을 칠했나 보다. 멋진 장면을 따라 그렸는데, 별로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알지만 그래도 속상하다. 손에 힘조절을 할줄 알아야 하고, 재료의 특성도 파악해야 한다. 어느 펜을 어느 때 쓰는지도 감을 잡아야 하고, 엷은 그림을 그리려고 물 섞을 때도 물을 얼마나 섞어야 되는지도 감으로 익혀야 하고, 잉크가 쉬이 말라버리는 것도 오늘 알지 않았는가.

두 번째 장을 그린다. 여전히 그리드를 놓고 모눈종이에 다시 몇 칸마다 줄을 그어서 자리를 잡아 둔다. 선생님께서는 모눈종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까지 하지 않으면 완전 엉망이 될 것 같다. 연필로 그리고, 다시 펜으로 그린다.

사람의 동작을 보기 위해서, 스토리를 가진 장면 같아서 선정했는데, 이 장면도 만만하지 않다. 원본의 사람 얼굴이 너무 작다. 물론 원본은 완벽한데, 내가 그리기에 말이다. 작은 그림을 섬세하기 그리는 것 너무 어렵다.

두장을 그렸을 때, 몇시간이나 걸렸나 시간을 계산해 보니 한 시간에 한 장 꼴로 그렸다. 1권당 20컷으로 선정한 거 다 그릴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에휴 여행가기 전엔 다 못하겠구나 어쩌지.’ 그 전에 다 한다고 했는데,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시작하기 전에 계획을 짜길 20분이면 한 컷을 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시각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렇게까지 걸릴 줄은 몰랐다. 화실에서 마크 선생님께 만화 그린다고 얼마나 걸릴까요라는 질문에 ‘그건 알 수 없다’고 대답하신 것을 실감한다. ‘초보자니까 얼마나 걸릴지는 예상할 수 없다.’ 고 이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정말 그렇다. 안해보면 예상시간을 낼 수 없다. 전에 다른 그림을 그렸을 때도 실제 예상보다 완성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2~3배 걸렸었다. 만화도 그런 것 같다.

에구 어쩐다니. 어쩐다니. 만화 리뷰를 기대한다던 친구에게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어떡해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빨리 그려야 할 이유가 있어?’라는 답신이 왔다. ‘그렇네. 빨리 그리려다가 제대로 그림을 뜯어보지 못할거라면 빨리 그리는 것은 좋은 게 못 되네.’ 그리려고 세부까지 보다보니 이전에는 슥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야 할 곳에서는 정확히 만난 선, 벗어나지 않아야 할 곳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선, 어깨선 하나에서도 굵기가 변하는 선, 그림자가 사람 윤곽을 따라서 그 모양으로 진 것이라든가 이런 것들 말이다. 농담이 3단계로 되어있다고 보았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4단계, 5단계로 그려진 것. 이런 것들은 놓치고 싶지 않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속도를 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화가가 그린 속도 비슷하게라도 해야 비슷한 분위기가 날테니까.

세 번째 장을 그린다.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빗금 그림자로 처리된 나무들, 선의 조밀한 정도로 굵기 정도로 원근을 나타낸 풍경이 절묘하다. 원본은 가는 선으로 촘촘하게 그렸는데, 나는 굵은 펜을 썻나보다 얼굴 그리는 것이 힘들다. 그렇게 굵은 선으로는 얼굴 안에 눈코입을 그릴 수 없는데, 힘을 주면 너무 굵고 덜 주자니 잉크가 안나온다. 얼굴을 버리고 나서야 가는 펜을 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는 빗금이니까 괜찮겠지 했다. 그런데... 나무에서도 역시다. 가는 선을 써야 하는 곳은 가는 선을 써야한다.
에구, 에구, 에구.

만화책에 표시해 두었던 부분들을 다시 본다. 다시 선정할까? 바람을 그려보고 싶다고 선정한 풀이 바람에 날리는 들판은 5~6시간은 걸릴 것 같다. 풀잎을 하나하나 그려야 하니까. ‘사람들이 뒤엉켜서 싸우는 장면을 뺄까, 그대로 둘까?’ ‘인물 얼굴 위주로 한 것과 동작 위주로 한 것, 풍경이 들어간 것으로 분리해서 다시 선정 할까?’ ‘빨리 그릴 수 있는 것으로 다시 선정할까?’ ‘사람에 대해서 공부하는 셈 치고 사람이 주가 되는 것을 다시 뽑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친다. ‘아, 이래서 선생님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베끼는게 좋다’고 하셨구나! 피해가고 놓치는 게 있을테니까.’ 배워야 할 게 너무 많다. 대부분이 몸으로 직접 익혀야 하는 것들이라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빨리 익혔으면 하는데... 그건 욕심이다. 내가 시도하는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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