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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일 01시 11분 등록
2008.08.28. 화실일기 - 전쟁 그림 계속

이 그림 솔직히 막막하다.
막막하지 않았던 그림 연습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하하하. 몇 번 연습하지도 않으면서 그 수를 헤아리는 것도 우습다. 그림 보기만해도 착잡하다. 머리 속에서는 연출에 대한 생각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화구를 펼쳐두고 그 앞에 앉는 것까지는 빨랐지만, 연필을 들어서 시작하는 것은 아주 느리게 하고 있다. 머리 속에서 구상되지 않는 것을 손으로 옮긴다는 것은 뭔가? 그러니까 해 놓고 나중에 엎어야 할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잘하건 못하건 시도하고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결론으로 다시 뭔가를 하겠다고 한 다음이 얼마전이었던 것 같은데....... 매번 그림 앞에 앉으면 마음이 여러갈래다. 이 그림은 그리는 것 자체를 즐기기에는 너무 벅차다.



명암이 단계로 나뉘어야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뭉뚱한 것으로 그린단 말인가. 한참을 손에 색연필을 든채 들여다 본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사진은 섬세하고 내가 그린 것은 뭉뚝하다. 형태. 형태. 형태, 아, 대체 어떻게 나타낸단 말인가. 내가 막막해 하는 사이 선생님의 머리 속에는 그림이 그려지나 보다.

선생님께서는 전에 다리긴 여인을 그린 그림을 보고 같은 방식으로 그리면 분위기가 날 거라고 이걸 추천하셨는데, 도저히 그것과 같은 기법으로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건 단순했었고, 이건 복잡하지 않은가. 뭉뚝한 색연필, 뭉뚝한 지우개로 ...... 내 상상력은 거기에서 막힌다. 선생님은 될거라고 하시는데, 선생님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이 내 머릿속에서는 없으니 지시를 할 수 없어 손이 계속 헛일을 한다.

내 진도는 안나가고 옆사람들 이야기 소리가 크게 들린다. 손은 여전히 연필을 들고 있지만 정신은 분산되어 있다. 화실에 도우미가 한 명 새로 온 모양이다. 아트 선생님께서는 화실 운영에 대해서 설명하신다. 새로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둥, 화실에 등록하고자 하는 사람은 상담할 때 어떻게 안내라는 둥, 몇 번 들어본 이야기다. 다닐까 말까를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3개월을 미리 등록하게하라고 하신다. 1개월 하고 그만두는 학생이 많다며. 그럴 것이다. 처음에 1개월은 무척 재미없다. 3개월까지도 재미 없지. 내 옆에서 가로선과 세로선을 긋고 있는 사람에게 그 과정이 필요하냐고 재밌냐고 물어본다면 뭐라 대답할까? 그림 앞에서 막막한 나도 재미없긴 마찬가지다. 이 그림을 그만 그리고 싶어도 이 과정을 내가 거쳐야 할 과정인거 아니까 계속하는데 과연 옆사람도 그럴까?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고 배우고 싶어하지만 1개월이면 손들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 또한 등록했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다. 잘 그리고 싶다와 자신이 그 수준에 도달하는데 어렵게 느껴진다가 일치하면 화실을 휙하니 빠져나가 버린다. 그림교실을 열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책을 낸 화가 베티 아주머니는 대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지속하게 할 수 있었을까가 궁금해진다.

그림 진도가 안나가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속으로는 어떤 소리를 궁시렁 댄다 해도 그림은 그려져야 한다. 오늘 그림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 참으로 모순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진도는 나가지 않으면서도 얼른 마치고 싶다는 생각.

세부로 천천히 살핀다. 조금씩 고쳐 나가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세로로 한참을 길어진 것은 대대적인 공사라 그대로 둔다. 실제 보이는 것보다 세로로 길게 그려버린 것은 지금 와서는 고칠 수 없다. 마크 선생님께서는 ‘처음에 그릴 때는 다 그래요.’하고 위로해 주시는데, 정말 처음에 그릴 때만 이랬으면 좋겠다. 내 특성으로 이게 굳어지면 안되는데. 배우는 과정에 있는 나는 세로로 길쭉하게(날씬하게) 그리는 것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그려지지 않길 바란다.

대대적인 공사는 제쳐두고 참호-앞쪽의 군인들이 엎드려 있는 조금은 아래쪽으로 언덕진 것처러 보이는 것-를 만든다. 지난번에 아트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참호라는 느낌이 드러나게 하라고 하셨다. 그 말씀 이전에는 난 참호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단지 복잡하다는 것 때문에 안보였던 것이다. 내가 쓰는 명암의 단계는 대충 4단계 인 것 같은데, 그걸로는 부족할 것 같아, 차분히 왼쪽에 명암의 단계를 해본다. 내 손으로 가능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때의 명암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칸은 많이 나누어 두었지만, 실제로는 그 칸의 수만큼 분화시키지 못한다. 명암을 더 세분화시킬수록 형태가 잘 나타날 거란 생각이 드는데 그정도까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섬세하게 해야겠지. 색연필로 조그만 부분을 그릴 수 있게 칼로 심을 간다. 가장 왼편의 사람은 처음부터 안 그리기로 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괜시리 그곳에 사람을 그릴까를 생각한다. 내가 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회피할 궁리는 하는 것 같다.

아트 선생님께서는 흰색을 쓰지 않고 흑색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가 날거라며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는데.....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고 싶어요.’라는 말이 속에서 맴돈다.

끼적끼적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내게 마크 선생님은 질문을 하신다. “문질러서 표현할 건가요?”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그리고, 먼저 잘못해서 지우고 다시 칠한 부분이 옆과 차이가 나요.” 종이 틈새로 흑연이 끼어서 더 부드럽게 퍼져 버린 것이 구분이 된다. 마크 선생님도 흰색 사용을 반대하신다. 대신 지우개로 지워서 밝은 부분을 잡으라고. 지우개를 연필처럼 쓰라고. 전에 했던 그림처럼. “이렇게..... ” 지우개를 쓰시다 말고 잘 지워지지 않고 딱딱한 것을 느끼신 모양이다. “문방구에서 파는 일반 지우개로는 안 돼요.” 딱딱해서 날카로운 선을 그릴 수 있겠다 싶어 쓸려고 일부러 집에서 가져온 지우개다. 흑연을 뒤집어 쓴 채 지워지지는 않고 밀리기만 한다. 이 지우개는 밀릴 때는 그림을 망치고, 밀리지 않을 때 가늘게 지워낼 수 있다. 오늘은 밀리기만 한다. 전에 잘라 놓은 다른 지우개로 시범을 보이신다. “너무 많이 지운 부분은 다시 연필로 채워 놓고, 얼굴은 너무 섬세하게 하지 마세요.” ‘섬세하게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화실에 구비해 놓은 소묘할 때 쓰는 부드러운 지우개를 하나 구입한다. 화실 저금통에 돈을 넣으며 멀리서 보는 내 그림. 아-. 아주 묘하다. 그림 앞에 바짝 앉았을 때 보던 거와는 다르다. 100m 미인, 죠르주 쇠라 만세-. 거칠어서 보기 흉하다 느꼈던 것이 좀 떨어져 보니 분위기가 좋다. 이래서 화실 선생님께서 흑색으로만 분위기를 살리라고 하셨구나 하는 짐작을 해본다.

좀 떨어져서 볼 때 느낌이 이렇다면 어쩌면,.....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진과 같은 괜찮은 분위기가 날 것도 같다.

가운데 사람의 총을 손질하면서 그와 연결된 엎드린 사람을 자꾸 고치게 되는데, 총의 위치의 따라서 뒤쪽에 엎드려 있는 사람의 크기가 커졌다 작아졌다한다. 앞쪽의 사람들에서는 진도가 안나가는 것을 보시고는 마크 선생님께서 뒤쪽의 희미한 인물들을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종이 색이 원래 회색이니까 흰색으로 사람이 아닌 부분을 칠해서 사람을 드러나게 하라고 하셨다. 호오- 그것도 막막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작은 부분을 섬세하게 그려야 하는 것에서 무척 답답해 하는 것 같다. 시간을 많이 끌면서 차분히 해야하는 것들 말이다.

흰색으로 뭉뚱하게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을 때, 마크 선생님은 또 다른 연출을 일러주신다.
회색을 더 진하게, 사람들 어두운 부분을 위쪽은 조금 더 어둡고, 아래쪽으로 흰색으로 연결되어 뿌옇게 되도록 형태를 더 잡아보라고 시법을 보여주셨다. 그 지도에 따라서 사람들을 어둡게 하면서, 배경으로 칠한 흰색까지 손을 대면서 자연스럽게 뭉뚱하게 그려진 사람들의 형태를 조금씩 더 다듬어 갔다. 그러고 보니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이제야 마크 선생님이 머리 속으로 그리던 것을 화면에다 만들어낸 것 같다.
이런 그림은 이런 분위기로 연출하라고 의도하시고 지도하신 모양인데, 처음부터 여기까지 올 동안은 그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걸 하는 동안 세세한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해서 결론적으로는 전체의 분위기를 살리는 선택이 된 것이다. 윗부분에 전진하고 있는 병사들은 심한 명도차를 이용해서 형태를 잡아낸 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인데. 선생님의 지시대로 하고 보니 묘한 분위기가 난다.



그림 그리기는 가속이 붙었다. 전체적인 형태와 분위기가 눈에 보이니 손에 속도가 붙었다. 그런데 너무 아쉽다. 시간이 다 됐다. 화실 문닫을 시간.

그리는 동안 헛짓을 하지 않았고, 배고프다고 밖으로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오늘 다 끝냈을 거란 아쉬움이 있다.

내 경우는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 길게 걸리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이번처럼 어떻게 그려야할지 보이지 않을 때 말이다. 막막해 할 때에 워밍업해서 가속도가 붙을 때까지 30~40분이 걸리는 경우가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고. 머리 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혹은 너무나 복잡하게 생각해서 어떻게 그려야 할지 선택하지 못할 때 워밍업은 길어진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단지 연필을 들고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손을 대어야 하나? 물러서 보기, 앞에서 세부적으로 보기?

글쓰기에서도 그렇다. 원하느 것을 쓰는데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같이 공부한 연구원 중 하나는 글을 쓰려고 할 때 잘 안써지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혹여 1시간이고 1시간 반이고 계속되더라도 그렇게 밀어붙이며 계속 쓰라고 했었다. 글쓰기를 펌프의 물과 비교해 주었는데, 만약 펌프질을 해서 나온 물이 녹물이라면 그 녹물을 빼어나야 한다고. 그런데, 그 녹물을 빼내는 시간이 30분이 걸린지, 1시간이 걸린지 혹은 1시간 반이 걸린지 모른다고. 2시간 동안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혹시 1시간 반 동안 원하는 것을 쓰지 못하고 있더라고 계속하라고.

2시간. 그 중에 워밍업을 하는데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단축시키는 방법은 뭘까.

그림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가속도 붙어서 한참 신이 난 상태에서 멈추고, 글을 쓰다가도 한참 신이 난 상태에서 멈추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워밍업 시간이 줄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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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면서 현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전에 그림에 대해서 생각했던 막연한 것들이 하나씩 실체로 다가온다. 마땅히 거쳐가야 할 뭔가를 거치는 느낌이다. 그것은 매우 더디게 다가온다. 빨리 그것들을 알고 얼른 도달해버렸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조금씩 쌓여서 내 스스로가 경험해 보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더디게 가더라도 거쳐야 하는 것이라서.... 포기할 수는 없고(아무런 배움도 없다면 일찍이 접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시간을 단축시켜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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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평생에 운동을 취미로 삼아서 그것으로 자신을 단련해 가며 즐거움을 찾는다.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을 즐겁게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글을 쓰거나 읽는 것으로....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이 좋았기 때문에 그림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을 했었다.

요즘 그림 그리는 과정과 그림에 대한 생각을 화실일기로 쓰면서. 어렸을 적에 그림을 마음을 닦고, 세상과 소통하고, 신을 찬양하는 도구와 내가 스스로 즐기는 취미로 쓰겠다고 막연하게 나마 나름대로 정하여 둔 것을 지금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먼 훗날에나 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주 먼 훗날에 그럴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그림은 나를 들여다 보는 것이 되는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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