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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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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9일 11시 36분 등록
 화실일기 20081001 - 과일을 그려라


물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 에피소드 1

“저 오늘 스케치북 준비 못해왔어요. 죄송해요. 종이 좀 주세요.”

“인터넷으로 주문 한 거 안 온건가요?”

“했는데요, 회사에서 청소하시는 분이 버렸어요.”

“예?”

“포장이 지저분하게 보여서 버리는 건줄 아셨나봐요.”


월요일에 배달되어 왔다. 아마도 금요일에 주문했으니 토요일에 회사로 배달이 된 듯 한데, 로비에서 맡아두었다가 월요일에 찾아가게 한 모양이었다. 내 책상 파티션에 앞쪽에다가 곱게 세워두었다가 점심시간에 튿어보았다. 주문한 수채화패드와 화판, 그리고 작은 수채화패드가 덤으로 끼워져 있었다. 눈에 띄어서 괜한 질문을 받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포장에 다시 담아서 세워두었다.

스케치북이 없어진 것을 알았던 것은 수요일 저녁이었다. 바쁘게 업무를 마치고 화실가려고 스케치북을 챙기는 데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것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어 옆 파티션들도 둘러 보았다. 없었다. 짐작은 이미 쓰레기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못쓰는 박스로 오인하여 버려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안쪽에 들어 있는 화판의 딱딱함 때문에 분리할 때 옆으로 치워두웠지 않을까하는 한 가닥의 희망을 품어보았다. 회사 전체 쓰레기를 모아서 분리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포장 박스들을 거의 없었다. 차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허탈했다.


주인인 나야 그게 지류를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 한 포장이라는 것을 알지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그게 무엇인지 구분이 안되었을 것이다. 직원들도 그게 무엇이냐고 궁금해 했었으니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스케치북이 없어진 것을 안 것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침에 쓰레기통을 비우면서 치우셨을 텐데, 오늘은 화요일, 수요일, 벌써 이틀의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대체 뭘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일까. 그 앞을 하루에도 열두번도 넘게 그 앞을 왔다갔다하면서도 못 알아 채다니.......



화실일기 20081001

#. 

지난번에 연습하던 것을 계속했다. 부드럽게 색을 이어가는 것을.

여러 가지 모양을 그려서 그 안에 물을 칠하고 그 후에 색을 칠했더니 엄청 물이 많아 보이고, 전체적으로 연하게 색이 나왔다. 색을 칠한 후 한참 후까지 마르지 않았다.


20081001-2.JPG 


종이에 물을 듬뿍 바른 탓인지 번지는 것이 멈추었으면 하는 시점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칠하지 않고 남겨둔 부분이 많았다고 여겼는데 자꾸 안으로 파고들어 버린다.


20081001-3.JPG 


#. 과일 그림을 찾아라

선생님께서 책에서 과일을 찾아서 여러 가지 과일들을 그려보라고 하셨다. 지난번 배운 방법을 이용해서이다. 책을 한참을 뒤적거렸는데 참고할 만한 책이 없다. 수채화로 그려진 과일이 있었으면 하는데 그런 그림은 눈에 띄지 않는다. 유화 화집 2~3권, 수채화와 유화가 들어간 작품집 1권, 파스텔 전시회 작품집 1권, .... 레몬, 천도 복숭아, 피자두, 키위. 유화로 된 것들 뿐이다. 

“그림 찾아요?”

“예, 과일 찾아요. 그런데 없네요.”

“저도 한참을 찾아도 없네요.”

과일 찾느라 책을 뒤적이는 내게 참고할 그림을 찾으러 온 아저씨가 말을 건낸다. 아저씨가  얼마전에 유화 정물화 작품을 보고 수채화로 그리는 것을 보았는데 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수채화로 된 과일을 찾는 것은 무리일 듯 하다.


#. 사과를 그린다 - 번지기 기법 연습

파스텔 화집에서 사과가 많이 나온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사과가 여러 각도로 여러 개 나와 있다. 화집에 나온 것처럼 과일들의 위치를 잡아두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사과에서 눈에 띄는 색은 노랑, 붉은 색, 그리고 약간의 초록색, 그림자가 들어간 어두운 곳에서 자주색이 들어간 고동색.

먼저 노란색을 칠하고 약간의 주황색을 칠했다. 한 개를 다 그리고 난 후에 다른 것들을 그리려고 한 내 의도는 현실에서는 여지없이 깨진다. 물칠이 많이 되어서 다 그리고 확인한 후에 두 번째 것에 그것을 반영하려 한 의도대로 하려면 아주 많이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옆에 그려둔 사과들에도 노란색을 찍고 주황색을 찍는다. 서둘러서 모든 사과에 붉은 색 기운까지 더해버린다. 그리고 나서는 바로 어두운 부분까지 찍어버렸다. 사과의 꼭지가 있는 움푹 패인 부분은 조금 더 마른 후에 좁은 구역에 찍어야 할 것 같은데도 나는 성미가 급하다.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감을 진하게 해서 찍었다. 많이 번진다. 5개의 사과를 순식간에 그렸다. 참고한 그림의 사과들은 파스텔로 그려진 것들이라 번짐이 없어 색이 또렷하다. 내가 그린 사과들과 대조된다.


20081001-11.JPG


먼저 진도를 나간 아저씨께서 한 말씀 하신다.

“사과를 이렇게 그리면 되나? 내가 하나 그려볼께.”

그린 나도 과연 이게 사과인가 갸우뚱이다. 파스텔 화집이 없으면 사과 보고 그린 것인 줄 모를 지경이다. 아저씨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 아저씨는 원 안을 엷은 노랑으로 모두 칠했다(6번 사과). 노란색을 모두 칠했기 때문에 희게 보이는 빈틈이 생길 우려는 없을 것 같다. 노란색에 주황색을 섞고, 그리고는 붉은 색을 조심스럽게 색 부채를 만들었던 것처럼 색을 조금씩 노랑에서 붉은 색 쪽으로 섞어가며 조금씩 아래쪽으로 칠해나가셨다. 자연스럽게 색이 연결되도록 했다.

20081001-8.JPG
 

“색깔 연습한 것을 여기에 활용해야지.”

아저씨가 말씀하시기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번 연습과는 별개라고 여겼었다. 칸을 나누어 둔 것과 그 경계를 없애버린 것만 다를 뿐 역시 색을 점층적으로 쓰는 것은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둘을 분리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자신이 그린 사과를 자랑스러워하셨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이어진, 어찌 보면  말랑한 고무공처럼 보이는 사과였다. 책에 나온 그림을 참고하여 그리는 것을 멈추고 아저씨가 옆에 그려준 사과를 보며 둥근 공을 그리는 것처럼 몇 개의 사과를 그렸다. 그것은 어쩌면 사과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과이길 바라는 동그란 어떤 것’ 그것이었다.


20081001-9.JPG 


#. 물이 너무 많아서, 너무 적어서 문제


20081001-6.JPG 

<차순승 작가의 작품집에서 ‘양배추가 있는 정물’을 보고 찍은 사진>


유화 작가의 전시회 작품집에 몇 개의 정물 작품이 있어서 그것을 교본 대신 활용한다.

빨간색 과일이 아닌 특이한 색의 과일, 자주색의 자두의 매끄러움에 드러나는 광택, 자두가 생긴 모양대로 홈에 있는 흰 빛. 자두에 끌린다.


책에 3개의 자두가 배치된 대로 3개의 자두를 그린다. 사과 그릴 때 전체적으로 물을 칠하고 그 위에 색을 점차적으로 진하게 찾아갔던 아저씨의 기술을 따라한다. 전체에 물을 발라두면 색을 칠할 때 부드럽게 전체로 번져갈 것이다. 청색계열의 물감을 엷게 타서 물칠 대신 자두모양 전체에 칠한다. 물감을 좀 더 진하게 섞어서 그 다음으로 밝은 부분을 칠한다. 책에서 광택으로 보였던 부분은 남겨둔다. 먼저 번 보다 더 친하게, 청색뿐 아니라 브라운 계열의 어두운 색도 섞어서 더 진하게 하여 칠한다. 책과 비교하니 내가 그린 자두는 터무니 없이 색이 엷다.

20081001-13.JPG 


다시 자두를 하나 그리고 색칠을 한다. 3개를 그리면서 매끄러운 자두가 제멋대로 번져버린 것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좀 더 진하게. 그런 중에 마크 선생님께서 번지기가 좋다고 하신다. 나는 잘 모르겠다. 이전에 경험들을 떠올려 본다면 번지는 게 무섭기까지 하다. 내가 의도하지 못한 것들이 물감이 마르기 전에 종이에서 마구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 화실에 오기 전에 수채화라고 그려본 것들은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캔트지(흡수성이 수채화 용지보다 못하며, 잘 번지지 않음)에 붓자국이 그대로 드러나게 그려본 것이 전부다. 그땐 번지지 않게 하려고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었다.

“너무 늦게 마르거나, 너무 빨리 말라요.”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기, 여기 와서 보세요.”

나는 네 번째 자두를 반쯤 그리다 말고 일어선다.

마크 선생님께서 번지기 기법으로 과일 그리는 것을 설명하시려나 보다. 수채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 그런데 설명은 거의 없다. 번지는 것과 마른 다음에 그리는 것, 붓으로 물감을 빨아내서 탈색시키는 것 등이 있다는데 그건 나중에 배우게 될 거라고 말씀 뿐이다.  선생님의 붓이 파레트 위에서 헤맨다.

“자기의 파레트가 아니면 헛갈려요. 여러 색깔을 섞어쓰니까 어느 칸에 무슨 색이 있는지 알 수 없죠.”

파레트가 지저분하다. 주인인 나도 찍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칸이 있는데 마크 선생님도 그러시겠지. 선생님은 그런 중에도 원하는 색을 찾아서 찍어내신다. 널찍하게 먼저 바른 물감이 마르기 전에 좀 더 진한 색을 더한다. 그 위에 또 더 진한색을 더해간다. 전체적으로 색깔이 진하다. 부드럽다. 먼저 칠한 것과 나중에 칠한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것이 놀랍다. 순식간에 자두가 생겼다.

색깔이 진한 선생님의 자두를 보면서, 번지게 한다고 해서 물을 너무 많이 전체적으로 색이 연하게 만들어도 안되고, 그렇다고 물이 없어 보이게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적당하게’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 ‘너무 빨리 마르거나 너무 늦게 마른다’는 문제는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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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레트>


20081001-12.JPG
 <내가 그리다 만 자두(위), 마크 선생님이 그린 자두(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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