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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일 08시 17분 등록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이 되지 못하는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라는 플라톤의 말은 '실천에 대한 이론의 우위'를 따끔하게 꼬집는다. 차범근은 가지고 있는데, 신문선에게는 없는 것이 바로 '경험'이고, 이 차이는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사이에 넘볼 수 없는 선을 긋는다. 빈말과 잔재주만으로는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릴 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하도록 독려할 수도 없다.

총 40여권의 책을 저술한 세계적인 학자, 자크 아탈리의 주장은 그가 온몸으로 실천해온 삶을 딛고 그 위에서 빛난다. 그가 현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플래닛 파이낸스는 그런 의미에서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라민 은행 그리고 플래닛 파이낸스
그라민 은행의 총재였던 무하마드 유누스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세계 각지 '도우미'의 노력과 헌신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그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인사는 바로 20년지기인 자크 아탈리였다.

"가난은 무지를 부르고 무지한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가 폭력적으로 변해간다"며 "결국 유누스가 해온 가난 퇴치사업이 사회의 폭력을 제거하고 평화에 한 발 다가서는 일"이라고 평소 생각해왔던 자크 아탈리는 유누스가 노벨 경제학상과 평화상을 공동 수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아탈리가 노벨상을 두 개나 몰아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만큼 유누스를 지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누구든 그를 만나고 나면 빈민들에게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라고 아탈리는 말한다.

아탈리는 88년 큰 물난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방글라데시에서 유누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 아탈리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내각에서 경제고문 생활을 막 끝마치고 국제무대로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었다. 당시 그라민은행 총재로 일하고 있던 유누스는 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아탈리를 맞았다고 한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수해복구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가 은행장이라는 사실에 놀란 아탈리는 "독재정권이 통치하고 있는 데다 태풍과 폭풍이 시도 때도 없이 밀어닥치는 방글라데시에서 유누스 박사는 한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며 "그의 카리스마가 깃든 연설을 듣고 나면 누구든지 빈민운동가가 되어버린다"고 말했다.

유누스를 만나고 마이크로 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아탈리는 그 후 가난을 퇴치하는 운동에 여생을 바치게 됐다, 89년 방글라데시 구호기구를 설립한 그는 동유럽 경제를 살리고 동서 유럽간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91년 유럽개발은행(EBRD)을 설립하기도 했다.

아탈리가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을 본뜬 '플래닛 뱅크(PlaNet Bank)'를 세운 것은 97년으로, 플래닛 뱅크는 유럽지역에서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을 하는 비정부기구(NGO)였다. 1년 후 은행 이름을 '플래닛 파이낸스(PlaNet Finance)'로 바꾸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한 아탈리는 오랜 친구인 유누스를 이 은행 이사회 의장으로 영입했다.

그 후 10년 동안 은행은 점점 커져 현재 전 세계 60여 개국에 지점을 두고 무담보 대출을 하고 있다. 플래닛 파이낸스는 전 세계 어디서든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글로벌 뱅크로 성장한 셈이다.

다음 그림에서 녹색 부분은 플래닛 파이낸스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지역을 나타내는데, 이 그림만으로도 플래닛 파이낸스의 규모와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은 거의 세계의 절반 이상에 퍼져 있는 플래닛 파이낸스가 어째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의 최신 작인 '미래의 물결' 한국어판에 별도의 글을 써서 보낼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정작 그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플래닛 파이낸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쉽기까지 하다.(내가 모르는 무언가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플래닛 파이낸스의 웹사이트(http://www.planetfinance.org) 를 방문하면 플래닛 파이낸스의 설립과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크 아탈리가 애스펜 재단(Aspen Institute)에서 1997년 11월에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여 발표했던 'The PlaNet Bank : A new approach to the challenge of world poverty'라는 제목의 연설은 플래닛 파이낸스의 빈곤 퇴치를 위한 기본 이념과 아탈리의 사상을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11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글이므로 원문을 첨부합니다. 첨부한 PDF 파일을 다운 받으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자크 아탈리 그리고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는 “자크 아탈리는 재기와 상상력, 추진력을 겸비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지식인이다.”라고 평했다. 아탈리는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이야기한 심층 기반 중 '시간'과 관련해서는 그 희소성과 중요성에 전적으로 같은 의견을 보이지만 '지식'과 관련해서는 '지식', 그 자체보다는 '창조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가진 '창조적 계급'만이 살아 남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두 학자 모두, 한국에 대단히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아탈리는 10년 후에 한국이 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번 저서 '미래의 물결' 한국어판을 위해 특별히 별도의 글을 전해온 것을 보면 그의 한국에 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일본어판에는 일본에 대한 글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한편, 한국의 저조한 출산률, 외국인에게 폐쇄적인 사회 구조 그리고 북한의 위협 등에 대해서 조치가 필요하다고 경고한다.

자크 아탈리의 작품들
《영원한 삶》, 《미로(지혜에 이르는 길)》, 《21세기의 승자》, 《21세기 사전》, 《합리적인 미치광이》, 《인간적인 길 : 새로운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호모 노마드 : 유목하는 인간》, 《마르크스 평전》,《미테랑 평전》, 《미래의 물결》 등 40여권의 저서 중 10여권이 국내에 출판됐으며, 전세계적으로 600만부가 판매되었다.

자크 아탈리 작품 리스트(네이버)
자크 아탈리 작품 리스트(YES24)
(워낙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책들이 있는 관계로 각 책에 대한 설명은 위의 링크로 대신하겠습니다.)

'미래의 물결'에 실린 자크 아탈리의 이야기
(이 내용은 '미래의 물결' 표지 날개에 담긴 자크 아탈리에 대한 설명글로 다른 책을 선택하신 분들을 위해서 옮깁니다.)

"시간은 그가 예측한 대로 흘러왔고, 미래 또한 그의 예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정보기술력이 선도할 미래 사회 신인류의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e)'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이다. 자크 아탈리는 인문학, 경제학, 정치학, 문화, 철학, 공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깊고 방대한 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 사회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해 왔다. 특히 그는 국제 사회를 전망하는 담론들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이전부터 세계의 지정학적 중심이 태평양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으며, 기상 이변, 금융 거품 현상, 공산주의의 약화, 테러리즘의 위협, 노마디즘의 부상, 휴대폰과 인터넷을 비롯한 유목민적 상품(Object nomade)의 만능 시대를 예고했다.

1943년 알제리의 알제에서 태어난 자크 아탈리는 알제리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열네 살 무렵,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왔다. 파리공과대학(Polytechnique), 파리고등정치학교(Science Po), 국립행정학교(ENA) 등 프랑스 명문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위의 대학'이라 불리는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그랑제콜을 네 군데나 거친 그를 두고, 시험 성적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단연 자크 아탈리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농담이 프랑스인들 사이에 회자되기도 했다.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의 특별보좌관(1981~1989)을 거쳐, 유럽발전은행(BERD)을 설립하여 총재직(1990~1993)을 맡았으며, 1998년부터는 인터넷을 통해 소액대출 전문가를 양성하고 소상공인들의 자립을 돕는 비영리기관 플래닛 파이낸스(Planet Finance)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40여 권의 저서를 펴냈으며, 《21세기 사전》 《인간적인 길》 《합리적인 미치광이》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 《미테랑 평전》 등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2050년의 세계가 어떠한 모습일지 결정되며, 2100년의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준비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녀 세대와 손자 세대가 좋은 세상에서 살지, 아니면 우리에게 증오를 퍼부으며 지옥 같은 세상에서 허우적거리게 될지 정해진다. 그러므로 후손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미래가 어디에서 오며 미래를 맞이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역사는 예측 가능하며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p. 6)

미래를 예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미래와 관련된 고찰이라는 것은 대체로 현재를 이리저리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초기부터 거론되어 온 미래에 대한 담론이란, 결국 천체의 회귀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수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국한되었다. (p. 10)

그래서 자크 아탈리는 앨빈 토플러나 제레미 리프킨과는 다른 방법으로 미래를 이해하는구나.

새로운 경제, 이른바 관계의 경제relational economy라고 하는 경제 활동, 즉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제가 한동안 시장경제와 병행해서 발전하다가 궁극적으로는 시장경제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다. (p. 19)

이 책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미래상을 보여 주는 데 있지 않다. 나는 미래가, 내가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지금 이 순간에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멋진 잠재적 가능성들이 충분히 발휘되어야 한다. 이를 돕기 위해서 이 책을 쓴다. (p. 19)

…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사실 '내 생각'이라는 게 완전한 형태를 갖춘 채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미래에 관한 모든 예언이란 것이 무엇보다도 현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듯이 이 책 또한 오늘을 이야기하고 있다. (p. 20)

자신의 생각이 불완전하다는 점과 이전과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순순히 시인하는 모습은 매력적이다.

언어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시장은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p. 37)

개인이라는 개념은 왕자들과 더불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유에의 꿈을 일깨워 준 것도 역시 왕자의 독재였다. (p. 41)

오늘날까지도 역사서들은 여전히 상인들보다는 왕들에게 훨씬 관심이 많고, 수천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의 흥망성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제국의 흥망이 아닌 다른 곳, 즉 개인적인 체제, 인권을 절대적인 이상향으로 삼는 체제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체제는 앞서 존재한 다른 어느 체제보다도 확실하게, 스스로 세운 이상향을 쉴 새 없이 바꾸어 가면서 지속적으로 부를 생산할 것이다. (p. 47)

스파르타인들은 주로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들로, 노예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체제를 강화시켰다. (p. 49)

자유는 궁극적인 목표이며, 윤리적 규율을 준수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되었다. 부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며, 가난은 일종의 위협이다. 개인적 자유와 상업적 체제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이 두 가지는 오늘날까지도 함께 발전하고 있다. (p. 50)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p. 51)

중국의 노자는 행복은 행동하지 않는 데서 찾을 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 뿐이라고 설파했다. (중간 생략) 아시아에서는 인간을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하는 반면, 서구는 인간에게 자신이 가진 욕망을 자유롭게 실현하라고 부추긴다. (p. 52)

초강대 세력이 경쟁자의 공격을 받으면 제삼자가 어부지리를 얻는다. (p. 54)

종교적 교리가 제아무리 영향력이 크다고 해도 개인적인 자유를 향한 발걸음을 늦추지는 못한다. (p. 57)

최초의 은행가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는 유대교만이 유일하게 돈놀이를 허용하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p. 60)

시장과 민주주의는 경쟁의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경쟁은 곧 새로움과 엘리트 선발에 직결된다. 뿐만 아니라 자본의 축적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기업이나 하나의 집안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나 집안은 지나치게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축적은 하나의 도시, 즉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며 자본주의를 조직하는 '거점'에서 이루어진다. 경쟁이란 언제나 전쟁을 내포한다. 따라서 시장과 민주주의, 폭력 사이에는 언제나 연속체가 생기기 마련이다. (p 67)

'거점'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각각의 '거점'은 지출 과다로 파산 지경에 이르면 경쟁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경쟁자는 '거점'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경쟁이 계속되는 동안 창조적인 계급, 새로운 자유, 새로운 잉여 수입원, 에너지나 정보통신과 관련한 신기술, 오래 지속되어 온 서비스를 대량생산 가능한 산업제품으로 대체하는 등의, 다른 종류의 문화와 다른 종류의 성장 동력을 창조해낸 제 3자일 경우가 많다. (p. 69)

다른 모든 '거점' 역시 베네치아처럼 자신의 결점을 뛰어넘음으로써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p. 75)

타지의 엘리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조건이다. (p. 83)

권력의 중앙집권을 용이하게 하리라고 믿는 새로운 통신기술이 실상은 그와 반대로 기존 권력을 분산시키는 막강한 적이다. (p. 86)

제노바에 안착한 상업적 체제는 자신이 태어난 지중해를 떠나는 일에 아직 미련이 많은 것 같았다. (p. 89)

캬~ 이거 참 문장이 색다른 맛이 있네. 미래 예언서에 등장하는 표현치고는 은근 멋지네.

13세기부터 벌써 제노바의 사업가들은 정치 권력이란 그저 모든 골칫거리의 씨앗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들은 비스콘티와 스포르차라고 하는 두 집안을 선정해서 이 성가신 정치 권력을 맡긴 다음 무역과 금융에 집중했다. (p. 90)

상업적 체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너무 단순화 해버리니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모름지기 철학이란 찬성과 반대를 재는 기술이듯, 회계란 이익과 손실을 재는 기술이다. (p. 90)

1598년 중국이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조선을 점령하지는 않았을 무렵(이런 상황은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미래에 대한 규칙이 정해지게 된다.), (p. 92)

유럽의 학자에게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은 이런 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입맛이 쓰다. 서양 학자들 대부분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이지만 동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듯.

이렇듯 세상이 바뀌는 방식은 언제나 같다. 상업적 공간이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그에 따라 산업화의 장도 넓어지고, 이렇게 되면 금융과 기술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에 따라 새로운 부류의 창조적 계급, 즉 자유로우면서도 통제적인 집단이 광대한 농지와 해양 산업지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현대적인 항구도시에서 해군력과 상선들을 지휘해서 권력을 잡게 된다. 이들은 금융가, 선박 제조업자, 상인, 혁신가, 모험가들을 도시로 끌어들인다. 이 도식에 따르면, 서서히 봉급생활자들의 권익이 향상되며 강제 노동은 사라진다. 또한 천연자원과 시장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관리된다. (p. 93)

그 어떤 제국도, 겉보기와는 달리,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p. 99)

누가 신기술을 발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문화적,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다. (p. 105)

19세기 초만 해도 영국인들의 소비 지출 중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90퍼센트가 넘었으나, 1855년에는 식비 지출 비율이 3분의 2로 떨어졌고, 대신 피복비 지출이 2배로 증가했다. (p. 108)

역사가 일천한 미국은 수공업 전통이 전무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 없이 대량생산에 필요한 연속조립공정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p. 114)

1880년부터 1914년 사이에 1천 5백만 명, 즉 유럽 대륙 인구의 5분의 1이 미국 이민 길에 올랐으며, 전 세계 저축액의 3분의 1 역시 미국으로 이동해 갔다. (p. 115)

모든 전쟁의 승리는 전쟁을 하지 않은 자 혹은 적어도 자기의 영토에서는 전쟁을 치르지 않은 자에게 돌아간다.

일본은 전세계의 엘리트들을 일본 영토로 끌어들이지 못했으며,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개인주의를 진작시키지도 못했고, 결정적으로 승전국 미국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p. 129)

이제까지 이룩한 수많은 발명은 다른 연구를 위해 공공 기금을 지원받은 학자들이 부수적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p. 137)

상업적 체제의 아홉 번째 형태가 빚어낸 결과는 한마디로 놀랍다. 1980년부터 2006년 사이에 전 세계 국민총샌산(GNP)은 3배가 증가했으며, 제조업 무역액은 25배로 불어났다. 지구 전체의 GDP는 40만경 유로에 달하며 해마다 4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증가세다. 1985년 이후 수출은 다시금 GDP의 13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런 비율에 도달한 것은 1913년 이후 처음이다. (p. 141)

20년 전만 하더라도 은행가들은 가계 수입의 30퍼센트가 빚은 갚는 데 쓰인다고 불평이 심했는데, 2006년에 들어와서는 이 수치가 50퍼센트 정도가 될 때까지는 괜찮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p. 147)

기나긴 인류의 역사는 몇 가지 아주 단순한 법칙을 따르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이 출현한 이래로 모든 진화는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요컨대 세기를 거듭할수록 정치적 자유가 일반화되며, 욕망이 상업화한다는 사실이다. (p. 158)

인도는 영국의 식민통치 시대에야 비로소 통일된 나라로 구실해 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 168)

제국주의자들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런 이야기는 정말...

한국이 이 같은 성공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재앙 시나리오를 슬기롭게 피해 갈 수 있어야 한다. 두 개의 재앙 시나리오란 첫째, 북한의 갑작스러운 체제 붕괴로 말미암아 예상보다 통일이 앞당겨짐으로써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이 발생할 경우다. 둘 째, 십중팔구 북한 체제가 붕괴에 앞서 최후의 수단으로 핵무기를 통한 무력 전쟁을 도발할 경우로써, 이 경우 반세기 동안 이룩한 경제 발전의 신화는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p. 169)

지속적인 세계 경제성장과 더불어 세계화는 가속화될 것이며, 시간을 상품화하는 추세 또한 강화될 것이 확실하다. (p. 173)

정보의 비물질화 현상이 가속화됨에 따라 자료의 소유에서 자료의 이용으로의 전환이 용이해지며, 이로써 문화, 교육, 정보로의 접근성이 훨씬 높아진다. 따라서 지적 재산권은 점점 더 보장받기 어려워질 것이다. (p. 178)

한국의 경우, 2015년까지 각 가정마다 가사를 전담할 수 있는 로봇을 한 대씩 갖춘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있다. (p. 184)

하하~ 우리나라에 다녀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간 걸까?

교토의정서는 사실상 상황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북부 선진국들이 이 상황의 위급함을 인정하고, 남부 지역 국가들이 에너지 소비량을 감축할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북부 지역으로부터의 투자가 현저하게 줄어들 것임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이 가능해질 것이다. (p. 203)

미국은 빠진 교토의정서가 새로운 형태의 파생상품으로 후진국을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도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이동 시간은 동시에 소비와 노동의 시간으로도 활용된다. 이동 중에 통신을 즐기고 정보를 수집하며 영화를 보기도 하고 게임을 즐기기도 하며 공연을 관람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가 이를 반영한다. (p. 209)

2025년 무렵이면 라틴 아메리카나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지역 같은 곳에서는 캘리포니아식 모델에 의문을 제기하고 미국의 지배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시장민주주의식 모델 역시 성공을 가져다준 기반에서조차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소규모 독재국가가 완벽하게 성공하게 될 것이며, 시장민주주의는 더 이상 경제적 성공이나 생태적 효율성의 독점적인 동의어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p. 216)

자본주의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생동감 있고 역동적이며 미래지향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헛수고만 한 셈이 될 것이다. (p. 230)

자동차나 세탁기 등의 가전제품, 유목민적 상품들의 뒤를 이어 또다시 새로운 상품들이 출현하여 성장 동력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때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상품들이란 주로 감시용 상품들이 도리 것이며, 이들 상품은 내가 '감시자의 기능'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수많은 기능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p. 241)

무지하거나 스스로를 위험에 자주 노출시킨다거나 낭비를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환자로 간주될 것이다. (p. 244)

보험회사가 제시하는 규범은 결국 사회적으로 적절하다고 통용되는 행동 양식의 기준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p. 245)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모든 것이 투명하기 때문에 후회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밀이라는 토양이 있었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호기심 역시 곧 사라져 버릴 것이며, 이와 더불어 선정적인 기사들을 주로 다루던 언론 매체들도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유명 인사'들마저도 종적을 감출 것이 자명하다. (p. 247)

초기 얼마 동안은 의사와 교수들(이들은 이 같은 자가 감시 기구들을 생산하고 실험하는 데 직접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이다)만이 이 같은 기구들을 사용할 자격을 부여 받을 것이다. 그 후 이 같은 물체들이 점점 소형화되고 사용법도 간소화되며 저가로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일반인들과의 경쟁을 우려한 일부 전문가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 248)

각 개인은 자기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의 간수가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개인의 자유는 절정에 도달한다. 적어도 그렇다고 상상할 수 있다. (p. 249)

본질적으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은, 본질적으로 한 지역에 국한도리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법칙을 서서히 무시하게 될 것이다. (p. 252)

과거에 그다지도 큰 위력을 떨쳤던 정치는 별로 인기 없는 배우로 전락한 정치가들이 벌이는 맥 빠진 볼거리의 뼈대 정도로만 명맥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 (p. 262)

시장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불법적 해적 기업들은 와해 직전의 국가가 지니고 있는 모든 권한, 즉 통신망, 천연자원 채집권, 무기 거래 등의 권한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빈민층을 유혹하고 이들에게 자금을 대 주기 위하여 돈 세탁을 거친 자금들로 소액 금융체계를 장악하려 들 것이다. 또한 해적 기업들은,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미래의 두 번째 물결, 즉 하이퍼 분쟁의 주역이 될 것이다. (p. 268)

언젠가는 실연에 대비한 보험, 성 불구, 지력 부족, 모성 결핍 등에 대비한 보험도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p. 274)

'자가 치료기'에 의해 제공되는 화학적, 생물학, 전자기기적 마약은 법도 없고 경찰도 부재하는 서계에서 대중적인 소비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무법 세계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하위 유목민들이 될 것이다. (p. 277)

시장은 모든 권력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함으로써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며, 장기적 관점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기후 이상화를 가속화하며, 희소성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무료 서비스를 개발하여 그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긴다는 비난도 면할 수 없다. (p. 302)

교회들은 점점 더 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미국 의회를 비롯하여 정부의 정책 결정에도 막강한 입김을 불어넣을 것인즉, 현재 미국 대통령의 언행은 벌써 이 같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기묘한 의미의 전이를 통해 서방사회가 수호해야 할 가치는 민주주의적인 가치라기보다 기독교의 가치라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여자들은 가정으로 돌아가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독려한다. (p. 307)

한국의 통일교나 중국의 파룬궁, 미국의 사이언톨로지교처럼 다양한 문맥에서 생성된 많은 사이비 종교들도 하이퍼 제국의 생성과 더불어 생겨난 영적, 윤리적 공백을 틈타 세력을 불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현재 이미 파룬궁(파룬궁의 지도자 리홍즈는 80개의 세계를 구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회원의 수가 공산당원 수보다 많다. 이들 사이비 종교의 일부는 무장도 마다하지 않고 가장 저질스러운 조직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p. 316)

아탈리가 정말 통일교나 파룬궁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을까?

무기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무기는 언제든 처음 목표물과 다른 목표물을 얼마든지 겨눌 수 있기 때문이다. (p. 328)

과거에도 그랬지만, 일부 국가들은 자기들의 체면과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민심을 국내 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또는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웃 나라에 전쟁을 도발하기도 할 것이다. (p. 337)

인류가 이렇듯 자기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기 전에, 하이퍼 제국의 실패와 하이퍼 분쟁의 위협을 감지한 인류는 민주주의 세력들로 하여금 해적들을 물리치고 자살 충동을 억제하라는 이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p. 343)

Dixi et salvavi animam meam
나는 오로지 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카를 마르크스, 고타강령 비판)

내가 여기서 하이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미래의 세 번째 물결은 당당하게 이와 같은 미래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야 마땅하다. 벌써 적지 않은 세력들이 물밑에서 하이퍼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고 있다. 앞으로 몇 십 년 후, 이것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게 만드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p. 348)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선한 의도만으로 견고한 무엇인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한 선례가 없다. (p. 349)

재앙은, 언제나 그렇듯이, 변화를 불러오는 가장 효과적인 변호인이 될 것이다. (p. 350)

역사는 오직 모험심 많고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쓰며,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중요성을 앞세울 때에만(이 일은 대체로 이들을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든다) 방향을 튼다. (p. 353)

한 집단의 집단적 지능은 그 집단 구성원의 지식을 더한 것이 아니며, 그 집단 구성원들의 사고하는 자세를 더한 것도 아니다. 집단적 지능은 고유한 지능으로, 집단 구성원 각자가 독자적인 방식으로 사고할 때 얻어지는 지능이다. (p. 367)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재산은 뭐니 뭐니 해도 '좋은 시간'일 것이다. 좋은 시간이란 각자가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사는 시간을 말한다. (p. 371)

인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삶을 행복하게 느낄 때 전체적으로 행복해진다. (p. 372)

… 그때가 올 때까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며, 그 사건들은 내가 상상한 사건들보다 더 참혹할 수도 있고,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을 묵묵히 겪어내는 동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인류의 마지막 남은 불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보호할 것이다. 문필가들은 훌륭한 글을 남겼을 것이고, 미술가들은 걸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을 것이고,, 음악가들은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서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이다. (p. 375)



대학교 1학년을 다 보내도록 면허증을 따두라는 어머니의 성화를 그냥 한 귀로 흘리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다가 막상 겨울이 되어서야 마음이 동했다. 마음만 먹으면 단박에 딸 거라고 큰소리를 빵빵 쳤는데,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았다. 필기시험에서 세 번째 실패를 맛보던 날은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길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딴 면허증을 들고, 옆자리에는 어머니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처음으로 도로 연수를 나갔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난 양 손으로 핸들 위쪽을 가깝게 잡고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린 땀에 티셔츠가 흠뻑 젖었다. 시야는 차의 보닛 바로 앞 쪽에 두고 차가 차선에서 비뚤어질까 싶어 핸들을 이리저리 정신 없이 돌리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저만치 앞을 봐야지. 좀 멀리 봐야 해. 바로 눈 앞에만 신경 쓰면 자꾸 핸들을 움직여야 하거든……"

시선을 조금 앞으로 던지자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바로 코앞의 차선만 들여다보고 운전할 때는 알 수 없었던 큰 화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눈 앞에서 펼쳐지며 내 신경을 온통 사로잡던 차선들은 순식간에 의미가 사라졌다. 운전이란 것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질 무렵 일이 생겼다. 갑자기 옆 차선에서 차가 튀어 들어왔다. 속수무책이었다. 내 첫 도로주행은 결국 견인차의 도움을 받고서야 끝낼 수가 있었다.
멀리 보며 운전하는 요령을 깨닫는 데는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자크 아탈리는 저만치 앞을 바라보며 거침 없이 달린다. 코앞의 자잘한 사건에 신경 쓰는 대신 큰 틀과 창을 들고 다양한 시대를 폭넓게 가두고 하나씩 날카롭게 찌른다. 그야 말로 베테랑 운전 기사다. 저만치 앞을 내다보며 무서운 속도로 내지른다. 중간에 잠시 이정표를 확인하거나 감시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도무지 거칠 것이 없다. 38억년 전, 지구에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자본주의를 이야기하기 직전까지 수십억 년의 역사를 훑어 내리는 아탈리의 시선은 거침이 없고 힘차다. 고대의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나 이견이 있을 법도 한데, 다른 가능성 같은 것은 남겨두지 않고 과감하고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 아탈리의 시선은 한층 빛을 발한다. 오늘날의 '역사서들이 여전히 상인들보다는 왕들에게 훨씬 관심이 많고, 제국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아탈리는 '상업적 체계'라는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살핀다. 이런 그의 접근 방식은 새롭기도 하거니와 '브루게'에서 '로스엔젤리스'에 이르는 아홉 개의 세계적인 '거점'의 흥망을 정확하게, 그리고 대단히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또한 '거점'의 흥망을 다루면서 그가 이야기하는 역사의 규모는 유럽대륙과 아시아 그리고 미국 대륙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지만 그 사이를 오가는 아탈리의 시선은 단호하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상업적 체계'가 '거점'을 결정하는 원동력이라는 기본 전제하에 교통, 배후 농업지 및 공업지, 인재 등과 같은 거점의 필요 조건을 분석해낸다. 아홉 개의 거점을 차례로 살펴 가는 과정에서 그는 시대 별로 거점을 세우고 무너뜨린 구체적인 사건과 증거들을 찾아내서 조목조목 설명한다. 이를 읊어내는 그의 언어는 토플러나 리프킨의 그것과는 달리 부드럽고 낭만적이다.

아홉 개 '거점'의 흥망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추려내는 '미래를 위한 교훈'은 대단히 단정적이지만 때론 적절하고 현실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세계적 '거점'의 흥망이 아닌 개인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곱씹어 보는 재미가 있다. 그가 '상업적 체제'의 출현에 따른 '거점'의 이동을 설명하면서 보여준 농노나 노예를 대치한 봉급노동자에 대한 집착은 그의 사회주의자적인 성향을 잘 드러낸다.

미래를 예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p. 10)

그래서인지 '미국이라는 제국의 종말'로 들어서면서부터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펼쳐내는 미래는 어딘지 모르게 뒤숭숭하다. 아시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며 그가 꺼낸 '일레븐(일본, 중국, 인도, 러시아, 인도네시아,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멕시코)' 카드는 그가 과거를 이야기할 때 내밀었던 '아홉 개의 거점'에 비해 이야기의 구도 자체가 허술하다. 중국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분석을 제외하면 나머지 나라들이 '일레븐'에 진입하게 되는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이 아시아 최대의 경제국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고맙긴 하지만 왠지 한국어판을 의식한 서비스의 냄새가 난다. 세계 경제대국과 아시아 경제대국을 모호하게 구분한 점이나, 세계와 아시아로 나눠서 경제국의 순위를 매긴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은 세계 제 2의 경제 세력이 되고, 한국은 아시아 최대의 경제국이 된다면 한국이 세계 제 1의 경제국이 된다는 의미인가? 베트남이 아시아 3위가 되고 일본이 세계 경제대국 5위안에 들게 되면 베트남은 세계 몇 위가 될까? 양과 질의 기준이 혼재된 채로 경제국의 순위를 매기는 시도 자체가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의 선전과 도약을 예언하는 유럽학자의 응원에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세계 경제의 주도권이 아시아로 넘어오게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만, 책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그의 단편적이고 서양중심적인 아시아에 대한 견해들은 나를 이런 불편한 생각으로부터 놓아주지 않는다. '정유재란'에 대한 그의 해석이나,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 통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그저 수박 겉핥기로 동양의 역사를 바라본 일반 서양인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나친 생각일수도 있겠으나 책의 중간중간에 드러나는 그의 쇼맨십은 '일레븐' 국가들을 향한 마케팅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리게 된다. 마치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 한중일, 세 나라를 각각 별도의 장으로 구성한 것처럼 말이다.

'하이퍼' 시리즈로 넘어가면서 아탈리가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은 불편하다. 아니, 불편을 넘어 공포스러운 미래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하이퍼 제국'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감시'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이미 그 징후의 일부가 현대에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퍼 분쟁'에서 다루어진 일촉즉발의 세계 상황은 그냥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기에는 너무나도 위태롭다. 세계 도처에서 무수히 많은, 국지적이거나 세계적인 전쟁이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이 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래도 마지막 장, '하이퍼 민주주의'가 남아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 그때가 올 때까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며, 그 사건들은 내가 상상한 사건들보다 더 참혹할 수도 있고,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을 묵묵히 겪어내는 동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인류의 마지막 남은 불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보호할 것이다. 문필가들은 훌륭한 글을 남겼을 것이고, 미술가들은 걸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을 것이고,, 음악가들은 아름다운 노래를 작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서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이다. (p. 375)

아탈리는 절망적으로 보이는 '하이퍼 분쟁'의 재앙 속에서 나타나게 될 '하이퍼 민주주의'와 트렌스휴먼에 희망을 싣는다. '역사는 오직 모험심 많고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쓰며,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수호하기 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중요성을 앞세울 때에만 방향을 튼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에게 갈 길을 찾을 수 있다.

급하게 닫히는 차창 사이로 마지막 할 말을 급하게 던지는 사람처럼 그가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는 절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쉽다. 저만치 앞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차를 몰던 베테랑 운전수는 막 내리려는 내게 행복하라고, 그리고 사랑하라고 이른다. 그저 그것만으로 정말 괜찮은 것인지 문득 궁금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좋은 점…
미래를 이야기하는 예언서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문체와 따뜻하고 희망적인 마무리는 미국식 예언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빠른 템포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토플러나 리프킨의 책이 엄청난 양의 객관적 참고자료와 주석으로 읽는 이를 압도하는 것과는 달리 다분히 주관적인 목소리로 읽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쉬운 점…
1. 책의 앞부분에 다루어진 '아주 긴 이야기'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게 대두된 배경을 설명하는 이야기로는 너무 길고 장황하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차라리 이 부분의 비중을 줄이고 마지막 장 '하이퍼 민주주의'에 대한 비중을 조금 더 늘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 4월 동안 만난 다른 책들이 '예측'을 담고 있다면 자크 아탈리의 책은 '예언'을 담고 있는 듯 하다. 별다른 참고자료가 없이 줄줄이 쏟아지는 수많은 '~될 것이다'들은 읽는 이가 저자의 생각에 동조하고 호흡을 같이 하는 동안은 깊은 몰입을 제공하지만, 중간에 한번 의견이 어긋나면 다시 박자를 맞추기가 힘들어진다. 이때 적절한 자료가 뒷받침되었더라면 잃어버렸던 길을 찾고 저자의 생각을 쫓아갈 수 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객관적인 이정표는 제공되지 않는다.

3. 토플러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전 작품들과의 중복이 많다는 불만을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떠나서 지난 작품과 많은 부분이 중복되는 것은 읽는 이에게 묘한 실망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일한 분야의 책을 쓰면서 중복을 없애는 방법은 전혀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것 뿐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매번 전혀 다른 주제로 책을 펴내는 제레미 리프킨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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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5.01 08:17:47 *.115.162.108
향산!
정말 로 자네는 천재적인 글꾼이다. 왜냐하면 어조사,접속사, 마침문을 잘 활용하여 글이 더욱 매끄러워 졌고 읽으면 눈이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조금 문장이 길다. 그래도 좋다.

나는 자네가 아탈리의 한반도 통일정책을 논할 줄 알았는데 작은 실망이다. 현재의 노무현 정부가 실행하는 중국식개방을 이북에 유도하여 자연스런 통일로 유도하는 아탈리방식의 통일론을 노무현이 실행하는 걸 찬 반을 논했으면 했는데...

수고했네, 계속 써가면 더욱 훌륭해 질 것이다. ~ 그러나 글이 잘못된것을 고쳐주는 기획자는 출판사 마다 있고, 없는 출판사는 하청을 준다. 그러나 창작은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다느점을 명심해야한다.~
잘읽고 나가네, 고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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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山 신종윤
2007.05.01 08:33:35 *.109.101.126
선생님~ 그날 강연회 끝나고 좀더 남아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선생님께서 쓰신 글에 댓글을 달고 싶었으나 이리저리 망설이기만 하다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탈리의 통일정책에 대해서 쓸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다만 어느 방송에 출연해서 북한을 고립시켜서 정권 자체를 쉽게 붕괴시킬 수 있다는 미국식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조금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좋게 적으려던 리뷰가 또 삐딱선을 타버렸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밤을 새는 것으로는 재미를 느끼가 쉽지 않아서, 정말! 습관을 바꿔보려고 생각중입니다. 더욱 열심히 즐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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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용
2007.05.01 15:06:33 *.99.120.184
사부님이 "저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책을 읽어라"는 말에 의미를 종윤님의 글에서 알수 있어요.
저자에 대한 조사가 잘되어 있어 매번 복습을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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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5.02 05:34:38 *.72.153.12
저자조사 플래닛 파이낸스 보면서, 자크 아탈리에 대해 하나 더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은 어디서 시작되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미래의 물결]은 사회 교과서이기도 했습니다. 중고시절 배운, 집단과 갈등 그리고, 인간 존중, 경제라는 것을 생각해볼 시간을 주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보았던 것도 같이 꿰어가며 여기저기 같다 붙이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1984', '유토피아','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과 로봇들, '대망'에서의 상인과 여자, 영화 Load of War의 주인공, 그리고.....

예전엔 이해 되지 않았던 것이 이해되기도 하고 그럽니다.
종윤님의 리뷰 읽으면서도 여러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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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9.05 18:15:13 *.134.133.157
내가 저자라면,의 내용이 정말 탁월하네요. 책을 꼼꼼히 읽은 듯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며, 분석과 비평 역시 제가 보기에 정확한 것 같습니다. 형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전혀 거부감이 없는 것은 논리적이고 정확한 형의 주견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글을 쓰시다니.. 우와 부러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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