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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1시 51분 등록

저자 연구

고운기

1961년 전남 벌교 출생. 시인이자 국문학자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96년부터 1999년까지 3년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부임했으며 일본 게이오 대학교 문학부 방문연구원,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의 연구원을 역임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문학부 객원 교수를 지낸 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국학에 대한 관심이 역사서 특히 <삼국유사>를 해석한 책을 많이 썼다. 이런 종류의 책으로는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일연을 묻는다>, <길위의 삼국유사> 등이 있다.

또한 시인으로서 시작 활동도 지속해서 시집으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구름의 이동 속도>,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 등이 있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들어가며

2 초등학교 학생 때 나는 <삼국사기><삼국유사> 그리고 김부식과 일연을 연결하는 시험 문제를 틀리곤 했다. ~ 자연스럽게 극복했다 했더니 산은 또 가로막고 있었다. <삼국사기>史이고 <삼국유사>라는 사실은 중학교에 올라와서 틀리는 문제였다. ~ 그러나 이렇게 틀렸던 까닭은 한번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세계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데 있으며, 그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인 결함에 원인이 있다는 데서 문제는 심각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저자를 묻는 시험 문제를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는 모두 맞았던 것 같다. 그냥 외우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두 책에 관해 지금은 전혀 기억이 없다. 안 읽어 봤으니까책을 읽는 것과 시험 문제를 맞는 것은 크게 관련이 없다. 우리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인 결함에 원인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고 재미있어 하면서도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을 읽을 생각은 못하고 그냥 쉽게 풀어서 쓴 소프트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책만 즐겨 읽었었다. 확실히 개인의 문제이기는 하다.

 

5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12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로 쳐지는 시대에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적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으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글을 쓰는 것이 목숨과 바꿀 무게라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 년 전이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불온문서라고 분류되는 도서를 쓰는 것은 물론 읽거나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지 않았었다. 이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안 그래도 되지만 상징을 사용하는 연습도 하고 싶다.

 

16 그가 추구한 궁극의 이상은 한마디로 잘 나타나 있다.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의 생각을 보여 주는 말이다.

 

고구려와 북방계

35 우리가 한민족이라 하지만 사실 여러 경로를 통해 여러 부족들이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에 자리잡은 다음 한 가지 문화와 생활습성으로 하나되어 나가지만 말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의 특성 장점 중의 하나로 단일민족을 꼽았었다. 그게 왜 장점인지 제대로 설명도 못 하면서지금은 단일민족을 강조하면서 다른 민족을 배척하기 보다는 다른 민족과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방향으로 교육 방향도 바뀌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43 <삼국사기> <고기>의 신이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인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4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영웅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체로 이 같은 유형으로 지어지는데, 아마도 그 원조는 주몽의 이 이야기가 아닐까?

비범한 탄생과 고난을 극복하는 영웅 여정을 거친 후에 영웅으로 재탄생. 영웅 이야기의 기본 구조는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52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신라와 남방계

66 갑자기 산 개울이 비도 오지 않는데 넘쳐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 그 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짝이 될 인연을 만나려 오줌을 눈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 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마고할미 신화와도 비슷한 것 같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79 탈해가 동악(東岳)에 올라 돌아볼 때였다. 하인에게 마실 물을 찾아보게 하였다. 하인은 물을 길어오던 길에 먼저 입맛을 보고 바치려 하자, 그 물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보고 꾸짖자 하인은 이제부터는 멀건 가깝건 감히 먼저 입맛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서하였다. 그러자 떨어졌다. ~

이런저런 일이 겹치자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큰 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는데,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86 머나 먼 이역(異域),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와 입신양명(立身揚名)한 탈해. 우리는 여기서 탈해가 비록 왕위에 오르고 그 후손들이 석()씨 성으로 몇 차례 더 왕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기존의 세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 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은 분명하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92 그러나 한번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이슨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 된다.

요즘 흔히 말하는 국뽕.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심하게 도취되어서 무조건으로 우리나라를 찬양하는 행태를 비꼬는 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대중문화나 스포츠 영역에서 심하게 나타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과거 역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심했었다. 저자가 언급하는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이란 말이 딱 맞는다. “국뽕이란 말로 대표되는 자긍심도 사실은 건강한 자긍심이 아니라 불안감과 열등감과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96 영일은 한자어로 뜻을 풀었을 대 해를 맞는 고장이다. 동네 이름에서부터 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 신라와 일본의 교통에서 영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연히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자연스레 결합되어 나온 것이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다. 해와 달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느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102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쳔 년을 이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116 이런 이야기 끝에 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그의 딸은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는 결말 부분은 그저 심상하게 읽힌다. 나라의 일이며 충성이 중한들, 목숨을 내놓은 값은 무엇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는 왜도 고대 왕권 국가의 틀을 확실히 갖추고 비록 지금의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히로시마 지역에 한정하지만 중앙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어렸을 때 박제상의 위인전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인들의 잔인한 고문과 이에 굴하지 않는 그의 충성심을 극적으로 대비해서 썼던 글이었던 것 같다. 무슨 생각으로 어린 아이들이 읽을 글을 그렇게 잔인하게 그린건지그런 글을 읽은 후에 내 느낌은 어땠든 위인의 대단함과 충성심에 감동받았다는 답도 정해져 있었던 시대였다. 불과 30년쯤 전이다.

 

119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고려가 자원하여 벌인 것이 아닌, 몽고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고려는 개국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해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舊怨)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120 설화 문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 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탄생한 인물은 흥미가 떨어져서 인가? 요즘 드라마에서도 가장 극적이고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가 출생의 비밀이다. 작가들이 그냥 쉽게 갖다 쓰는 소재가 아니었다. 몇 천년을 이어오는 흥미 요소다.

 

121 그런데 이 유형의 이야기들이야말로 삼국시대의 비극적 영웅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우리는 거기서 당대 사람들이 기이한 인물의 탄생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많이 들어본 소리다 했더니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었다.

 

144 “서천축국(西天竺國)의 아육왕(阿育王)이 황철 5 7,000근과 황금 3만분()을 모아 석가 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

아육왕은 야쇼카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인도에 최고의 불교 국가를 세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신라까지 배로 왔다니요즘 같아도 몇 달은 걸리는 거리이다. 그 사이에 수십개국이 있었을텐데더구나 인연있는 나라에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며 신라에 도착했다고 하니 요즘말로 국뽕의 최절정이라 하겠다.

 

149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나한테 하는 말 같다. 힌트가 있는데도 보는 눈이 없어서 못 보고 있는

 

150 다만 한 가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그러나 신라의 경우,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있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국가뿐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말 같다. “늦되다는 말도 있다. 늦게 시작함, 깨달았음을 핑계대지 말자. 늦게 시작해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면 된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161 일연이 [기이] 편에 59조를 배치하면서 오직 그 이름 하나로 제목삼기는 김유신조가 유일하다. ‘수로부인조가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일 뿐 역사의 인물과 견주기는 어렵다. 무언가 특별한 대우가 김유신에게는 따른다.

특별한 대우는 <삼국사기>에 가면 더 심해진다. [열전]김유신조로 시작하거니와, 전부 열 권 중에 세 권이 김유신에게 바쳐져 있다.

삼국시대를 정리한 두 권의 책에서, 김유신은 그렇게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명한 왕들이 많았고, 충성스런 신하가 끊이지 않았건만, 그에게 맞춰지는 역사의 서치라이트는 밝기만 하다.

 

170 하지만 유신의 생각은 달랐다. 춘추의 왕위를 포기하자는 것도 문희의 결혼을 말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이루고 싶었다.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평소 나의 생각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이다. 그래서 현명한 선택을 하고 선택한 것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이 나의 모토다. 그런데 김유신은 두 가지 모두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두 가지가 모두 이뤄져야만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뤄냈다. 맞는 방법을 찾는다면 두 가지 모두 이루는 것도 가능하다. 역사가 증명했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184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189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쪼개지기도 하고 오므라지기도 하니, 어쩐 일입니까?”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 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으로 제사를 드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189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이런 것이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신화의 힘인가 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그렇게 보면 적절한 신화를 잘 만드는 사람이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 같다.

 

권력의 끝

204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국가간의 전쟁뿐이 아니다. 기업에서도 다른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쟁의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고 평화의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 프로젝트에 최적화된 사람이 있고 BAU(Business As Usual)에 최적화된 사람도 있다.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에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적응의 노력을 하든가 아니면 프로젝트만 따라 다니든가. 그렇지 않으면 토사구팽 될 수 밖에 없다.

 

212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가 버린 봄을 돌이키자니 울고 싶을 따름이다. 더불어 심신을 수련하고, 죽을 각오로 누비고 다니던 전장의 피비린내와 말없는 산천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226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감정에 훨씬 솔직하고 과감했다는 생각이 드는 문학들이 간혹 있다. 계산 없이 순수해서, 잃을 것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아니 시대를 초월해서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인간 관계에서 한번도 그렇게 계산 없이 순수했던 적이 없었던 나는 때로 그런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228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예전에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이 글이 <삼국유사>에 있었구나. <논어>를 읽으면서 나의 무식을 깨달았던 일이 떠오른다.

 

232 꽃을 사랑하는 여자 수로부인, 그리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던 여자 수로부인, 그가 잡혀 들어간 바다 속은 바닷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발을 굴러야 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용이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부인이 자원해 살겠다고도 했을 법하다. ~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즐겁고 아름다운 여행이 된다. 수로부인이 그런 사람이었다니…. 본인의 재능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동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말인가…?

 

첫 성전환증 환자

240 첫째, 월명사의 정체다. 그는 자신을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다. 화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승려가 된 것은, 통일 후의 화랑들이 신분 변화를 보이는 예 가운데 하나다.

둘째, 월명사는 산화공덕에 필요한 노래를 향가로 밖에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화랑이 향가를 지어 부르는 주 작가층이었다는 사실과, 승려가 된 다음 굳이 인도식 염불을 외우지 않고도 승려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240 어쨌건 해 하나가 사라져, 왕이 좋아하며 좋은 차 한 바구니와 수정 염주 108개를 주었다. 문득 모습이 깔끔한 어린 아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차와 염주를 받더니, 궁전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월명은 궁 안에서 일하는 아이려니, 왕은 스님이 부리는 아이려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왕은 매우 이상스럽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따라가 보게 했다. 아이는 궁안 절의 탑으로 들어가더니 숨어버렸다. 차와 염주는 미륵보살을 그린 남쪽 벽 앞에 두었다. 그제야 월명의 지극한 덕과 지극한 정성이 미륵 보살을 불러 모셨음을 알았다.

 

241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이것도 고등학생 때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향가, ‘제망매가. 그 때는 시와 해석을 외우기만 했지 그게 의미하는 게 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그 때보다 삶에 이런저런 경험이 많아져서인지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작년에 나의 죽음을 생각하며 동생에게 유서를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 평소에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아도 가족은 가족. 죽음을 앞두고 가장 먼저 떠오르고, 제일 많이 미안한 사람이 남동생이라는 게 놀라웠었다. 가족은 그런 것 같다.

 

247 충담사는 왕을 아버지, 신하를 어머니, 백성을 어린 자식에 비유한다. 고대 왕권 국가였기에 나올 법한 비유였으나, 왕과 신하 곧 권력을 잡고 잇는 자들이 백성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부모처럼 자애로운 존재라는 설정은 미덥기만 하다.

구물거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백성이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249 어린 왕은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 좋아하였다. ~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건대 이는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증세다. ~

혜공왕은 성전환증 환자였을 것이다. ~ 혜공왕의 성전환증은 신라 왕실이 오랫동안 근친혼을 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한 직계가 6대에 걸쳐 8명의 왕을 내었으니 할만큼 했다고도 하겠다.

 

왕이 되는 자

255 얼마되지 않아 선덕왕이 돌아가셨다. 사람들이 주원을 왕으로 삼고자 궁안에 맞이하려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와 즉위하였다. 주원의 부하들이 모두 다 와서 복종을 하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축하 인사를 드렸다. 이 이가 원성대왕이다. 이름은 경신이고 김씨인데, 대개 좋은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될 사람은 어떻게든 되는 것 같다. 심지어 날씨도 도와준다.

 

261 경전을 읽고 공부해 그 성취도에 따라 상..하의 3급으로 나누어 관직에 임명하는 이 제도는, 나중 고려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행한 과거제의 출발이나 다름없다. 골품제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는 집안의 신분에 따라 품계가 정해지고 관직에 나갔다. 그렇지 않으면 활 솜씨 하나로 사람을 선발했다고, <삼국사기>에서는 말한다. 이러한 체제가 기득권 층의 자기 이익에 따라 흘러가다 보니, 관직에 있는 자들은 갈수록 무능해질 뿐이어서, 왕은 제도의 혁신 없이 나라가 바로 설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이 독서삼품과는 그다지 널리 활용되지 못하였다. 역시 기득권 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를 고려조에 와서 공민왕, 조선조에 와서 영.정조 같은 이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신라의 원성왕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왕이었다.

책을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성취도에 따라 사람을 선발하고 우대하는 건 요즘의 일이 아니라 천 년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재 선발 방식이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겠으나 다른 방법에 비해 효과가 입증되었으니 그 오랜 세월을 이어 온 것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그 효용성이 없어 보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의 장점, 효용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아닐 것이라고 예상되니 핑계대지 말고 열심히 하자.

 

267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269 “둥근 달은 가득 찬 것입니다. 찼으니 이지러지지요. 새로 돋는 달이라는 것은 차지 않은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점점 차 오르지요.”

왕은 화가 나 그를 죽였다.

아무리 세상 없는 진리라도 알아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말하면 화를 입을 뿐이다.

 

271 한 왕조가 들어서서 천 년 세월을 보냈다면 이제 끝을 보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럴 징조를 수없이 보여 주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권력자가 애꿎은 목숨만 앗아갈 때,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276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완도.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 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 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더욱 안타깝다.

인재들이 죽어 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인재들이 죽어 나가는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죽어 나가는떠나는으로 대치하면 요즘 사회에도 딱 맞는 말이다. 역사는 과거의 잔재가 아니다.

 

284 여기서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

 

285 52대 효공왕 때인 광화(光化) 15년은 임신년(912)인데, 봉성사 바깥문의 동서쪽 21칸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이 즉위한 지 4년 된 을해년(915), 영묘사 안쪽 행랑에는 까치집이 34개요 까마귀 집이 40개였다. 3월에 서리가 다시 내리는가 하면,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 간이나 서로 싸웠다. ~

54대 경명왕 때인 정명(貞明) 5년은 무인년(918)인데, 사천왕사의 벽화에 그려진 개가 짖었다. 3일간이나 경전을 읽어 겨우 물리쳤으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또 짖었다.

7년은 경진년(920)인데, 2월에 황룡사 탑의 그림자가 금모(今毛) 사지의 집 정원에 거꾸로 서 있기를 열흘 간이나 했다. 10월에는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고, 벽에 그려진 개가 뜨락으로 나와 달리다가 벽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말도 안된다. 그냥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라고 하고 싶지만요즘의 기상 이변 경주의 39.8, 집중 물벼락, 한여름의 우박, 지진, 4월의 눈등도 20~30년 전이라면 믿기 어려운 일들 이었을 거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인지 세상이 망하는 징조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징조는 분명하다. 기미를 읽어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한 때다.

 

지는 해 뜨는 해

28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288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302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외려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왕조 사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백성의 힘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한 국가에 속했던 백성을 다른 새로운 국가의 위정자나 백성이 탄압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나라 6.25 전쟁 때 북한군이 점령하냐 남한()군이 점령하냐에 따라 서로 죽이고 죽었던 시기를 떠올리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303 신라는 사라졌고 새 나라가 섰다. 하지만 농사짓고 고기잡으며 살아가는 백성들이야 어느 왕이 통치하건 별반 상관없는 일이다. 눈비 피할 집 한 채 있고, 자식들과 하루 세 끼 밥 먹고 지내는 데 불편함만 없다면 말이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307 정녕 충분한 자료가 갖추어졌다면, 고구려에 관련해서는 대륙 중국과의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백제에 관련해서는 이웃 일본과의 교류를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그러게.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고려였는데, 정작 고려시대 때 쓰여진 삼국의 역사에 고구려의 역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삼국을 통일한 게 신라였다고 해도 그렇지. 고구려 전성기의 땅이 남의 나라에 속해 있으니 자료 부족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311 백제가 한강 유역에다 도읍을 두었을 때는 북부여로부터 출발한 북방계 민족일 뿐이었다. 그 외교 관계의 중심점도 북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일본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고구려로부터 가중되어 오는 압박을 견디기에 백제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의 천부적인 이동솜씨를 발휘해, 어느덧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일본열도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한강 유역을 고집하지 않을 바에야 일본에 이르기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웅진으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속내로 보인다.

 

320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청동거울이 나온 지 거의 60여년 만에 사마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고, 그로서 계체왕이 무녕왕과 형제간임을 밝히는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무녕왕이 즉위한 것은 501, 2년 뒤에 아직 중앙 정부의 왕으로 오르지 않고 지방의 왕으로 있는 아우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보낸 청동거울이었다. 무녕왕이 이토록 아우를 배려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무녕왕 자신이 일본의 왕실에서 아우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인 동성왕의 뒤를 이으려 고국으로 돌아왔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멀리 떨어져 고절(孤絶)한 세월을 보내야 할 형제였기에 우의는 두텁기만 했다.

그렇다면 6세기 들어서서 즉위한 일본의 왕들은 줄줄이 백제 왕실과 한 집안이었음을 알게 된다. 백제 왕실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조차 왕실의 권력을 한 손에 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홍교수는 곤지왕자로 보고 있다.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 왕자는 일찍이 일본 왕실에 건너가 있다가, 자신의 형인 문주왕과 조카인 삼근왕 둘 다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자, 아들을 보내 동성왕으로 손자를 보내 무녕왕으로 올리고, 그로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마지막 의자왕까지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에 앉을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더욱이 다른 손자인 계체왕은 일본에서 왕으로까지.

복잡하고 길게 말했지만 결국 6세기경 백제의 왕가와 일본의 왕들이 한 집안, 형제 간이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해도 백제와 일본이 같은 민족이었다는 설에는 경계한다. 왕족이 같았을 뿐이지 일본에는 원래 거주하던 원주민들도 있었고 다른 민족이 있었기에 우리가 같은 민족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325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차츰 중국의 말을 익히더니, ()라는 명칭을 싫어해 국호를 일본으로 고쳤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신당서>의 제 220권에 나오는 [동이전] ‘일본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이 내용을 [신라본기] ‘문무왕10년에 전재해 놓고 있는, ‘일본이라는 국호의 최초 사용을 보여 주는 의미 있는 대목이다.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아마도 더 이상 도움 받을 수도, 받는다고 자처해 이로울 것도 없는 백제계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백제의 멸망은 백제 왕실 하나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실 그 이후 일본의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 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독립의 비원(悲願)으로 본다.

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 문화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200여 년 뒤, 지금은 일본의 중심인 관동 지방으로 처음 진출하여, 첫 막부 카마쿠라를 만들고 쇼군이 된 이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모두 일본인이라고 말하지 백제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평범하지 않은, 두려움이 없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 같다.

 

332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한 사람이 완벽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둘 사이의 협동 내지 요즘 말로 케미(chemistry)가 중요한 것 같다.

 

336 하루는 왕이 세 딸을 모아 놓고 누구의 덕으로 행복하게 사느냐고 물었다. 위의 두 딸은 아버지 덕이라고 말했으나, 막내딸은 자기가 타고난 복이라고 말해, 화가 난 왕에게 버림을 받았다. 공주는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는데, 가난한 남자는 돈의 가치를 공주에게서 배워, 결국 두 사람은 큰 부자가 된다. 왕은 막내딸의 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리어왕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이가 많아져 분별력이 떨어질수록 사실보다는 듣기 좋은 소리에 혹하게 된다. 칭찬과 아첨은 잘 구분해야 한다.  

 

343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346 이런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 속에 나라가 강성해지고 왕이 선다는 해석은 언뜻 보면 희극 같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깊이 부리 박힌 미륵 신앙과, 그것에 국가적 명운을 걸던 분위기를 감안하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더욱이 선화공주가 미륵보살을 만나고 그의 발원으로 미륵사가 서는 데에 이르러 보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미륵상 셋과 회전(會殿), , 낭무(廊廡)를 각기 세 군데에 세웠다는 미륵사의 가람 구조는 미륵 사상의 삼론(三論)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 같은 구조는 황룡사의 조성으로, 다시 일본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의 조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견훤, 비운의 영웅

351 아자개가 상주성을 차지한 5년 뒤, 견훤은 부모가 야반도주했었을 외가 쪽 완산으로 돌아와서, 후백제의 왕에 올랐다. 그 과정을 아버지가 도왔다는 낌새는 전혀 없다.

도리어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을 한 시기는 고려와 후백제가 한창 싸움을 벌이는 와중이었다. 아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궁지에 빠뜨린 이 일을 두고 우리는 부자간의 불화 이외에 무엇으로도 까닭을 설명하기 어렵다.

불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똑 같은 되풀이를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망한 견훤 집안 3대다. 식민지 치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다 망해 버리는 집안을 그린 염상섭의 소설 <삼대(三代)>는 이미 천여 년 전을 무대로 삼아도 통할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 시간에는 배우지 않는다. 몇 십년 안 되는 후백제에 할애할 시간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집안 싸움이라 부끄러워서였을까? 이런 부끄러운 집안 일일수록 배워서 알고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352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은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릴 정도로 기백이 항상 다른 군인들을 앞섰다. 신라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6년 되는 해, 총애하는 신하들이 곁에서 국권을 농락해 기강이 문란해졌고, 게다가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이 흩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견훤은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사람들을 모으고 민심을 얻게 되자, 드디어 완산에 도읍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892,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353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로고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

견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고려와 가까워지려는 신라를 확실히 눌러놓자는 계산이었지만, 도리어 등뒤의 적을 만든 셈이었다.

역사를 배울수록 옛날과 지금이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힘이 세고 잘난 사람보다는 민심을 얻는 세력이 이기게 된다.

 

360 가엾은 안산 아이가

아비를 잃고 눈물 흘리네

~ 반역을 당한 자는 비참하지만, 반역자가 아들인 경우엔 슬픔은 이중으로 겹쳐오고, 급기야 천륜을 팽개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삼기가 어디에도 없을 지경을 만들어 낸다.

 

361 그리고 오랫동안 적이었던 왕건에게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러 갔다.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尙父)라고 했다. ~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는 이는 용케도 그 길을 간다.  

왕건의 성품을 알고 살길을 찾아가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걸까? 영웅 설화라면 비참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에 죽음을 택했을 것 같은데견훤의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왕건의 영웅 이야기라 이렇게 진행이 된 것 같다.

 

363 따지고 보면 자식을 원수로 여겨 죽이지 못하는 것을 분통해 하고, 치사한 목숨 부지하다 등창이 나서 제 명을 재촉한 사람의 생애다.

 

신비의 왕조, 가야

372 상상의 동물로서 거북이는 왕왕 용의 다른 모습이거나 똑 같은 역할을 한다. 분명 신성한 동물의 하나다. 그러나 존대보다는 위협을 가하면서, 심지어 구워먹겠다는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데에서 우리 옛 노래의 특이성을 발견한다. 이것은 삶을 개척하는 매우 강한 의지나 다름없다.

 

376 이 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 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거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공로는 마치 도산(塗山)이 하()나라를 돕고 당원(唐媛)이 교씨(喬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381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오직 한결같이 정밀했네

아주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중도가 매우 중요하면서도 아주 어렵다는 거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고’. 할수록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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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2:25:15 *.18.218.234

어머 발췌평들 좋네요. 나도 수정씨가 되어 다시 읽는 느낌.

아픈 와중에 언제 읽었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지 않았었다.

이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안 그래도 되지만 상징을 사용하는 연습도 하고 싶다.

--> 첫 줄에서 웃고 두 번째 줄에서 끄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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