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정승훈
  • 조회 수 141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7년 7월 29일 13시 05분 등록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2/2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고운기 (1961~ )

"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

고운기 교수가 1980년대 초 산 영인본 <삼국유사> 맨 앞장에 직접 적어 넣은 글귀다. 이 글처럼 그는 지금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낸 자타가 공인하는 '삼국유사 전문가'이다.

·고교 시절 필사본 시집을 직접 만들 만큼 문재를 가졌던 그가 문단의 말석이 명함을 들이민 것은 대학 3학년 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서다.

지금은 작고하신 최철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한문공부 하러 다니던 민족문화추진회의에서 <삼국유사>를 만났고, 시 창작 교수직까지 버리면서 일본 게이오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가서 한·일 고시가 비교 연구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삼국유사>에 매달려 2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3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지만 여전히 고전시가 연구에 매달려 있는 그는 앞으로는 경전 공부도 할 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삼국유사연구회'조차 결성돼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며 엄청나게 많은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한데 모아 접근이 쉽도록 D/B화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2006. 06.05일자 오마이뉴스 인터뷰 기사

"지난 20세기에 우리는 <삼국유사>가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와 더불어 고대사의 여러 면에 두루 많은 책임을 지운 책이라 하더라도 고운기 교수의 <삼국유사> 상찬은, 20년 연구자로서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겐 시쳇말로 뻥이 잔뜩 들어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삼국유사>가 나온 13세기는 고려 무신정권의 혼란스러움에다 몽고와의 전쟁, 그리고 몽고를 대리해 치러야 했던 일본 정벌 등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절절하게 느껴야했던 시기. 듣기 좋은 말로 역사에서 '몽고의 간섭기'라고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던 시기였다.

특히 당, 송으로 이어지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한족의 콧대가 변방의 오랑캐에게 푹 꺾였는데,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우리의 <삼국사기>(김부식 지음)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더 이상 약발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럴 때 <삼국유사>가 나온다. 당시 국사이자 지식인이었던 일연이 짓밟힌 민족자존을 세우고, 민중의 처지를 위로할 요체가 무엇인지를 한 권으로 책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일연은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을 드러내려고 했죠. 고려도 중국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민중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민족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20세기 한국의 선험적인 시대인 13세기의 시대적 상황으로 20세기의 민족적 위기 극복에 적잖은 거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같은데 열광하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제기랄! 우리에겐 왜 그런 멋진 신화나 설화가 없느냐. 과연 그럴까?

고운기 교수는 <삼국유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역시 삼국유사 연구자다운 발언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을 줄 알겠지만, 잘못 짚었다.

<삼국유사>에는 신화나 설화가 가득하다.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왕검 이야기를 비롯하여 알에서 나온 삼국 시조의 탄생설화와 햇빛과 달빛을 살린 연오랑 세오녀, 귀신을 부린 비형랑, 선화공주에게 장가든 무왕, 몸을 바쳐 불교를 일으킨 이차돈, 신문왕이 받은 마법 같은 피리, 견훤과 지렁이, 호랑이처녀와 애틋한 사랑을 나눈 김현, 활을 잘 쏜 거타지 등 끝이 없다.

"<삼국유사>는 중국에 없는 신화만 모았습니다. 일본만 하더라도 건국신화부터 중국 신화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서 이름만 바꿨지만 <삼국유사>는 중국 얘긴 안하겠다는 원칙을 만든 것 같습니다."

그 예로 고운기 교수는 원효에 대한 설화를 들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아예 원효 전기는 중국 승전기에 있기 때문에 쓰지 않고 일연이 알고 있는 것만 쓰겠다고 하고 써내려 간다.

또한 임금의 비밀을 안 두건 만드는 기술자가 죽을 무렵 끝내 참지 못하고 대나무 숲에 가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고 외쳐 바람만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 소리가 들려왔다는 이 설화는 서양 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왕이 이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유수를 심었더니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만 들리더라나.

그러나 <삼국유사>에 대한 우리의 대접은, 지금이야 고전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만큼 중요시 여기지만, 적어도 20세기에 들어오기 전에는 '홀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잊혀진 존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데서 어쩌다 인용될 뿐,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콧대 높은 유학자들은 승려가 쓴 이 책의 이름조차 밝히려 들지 않았다. 이렇게 거의 잊혀질 뻔했던 <삼국유사>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은 일본에서 먼저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가져간 수많은 종류의 책 중 <삼국유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1904년에 활자를 조판한 배인본(排印本) <삼국유사>를 출간한다.

이어 교토대학 이마니시 류(今西龍) 교수가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순암 안정복이 소장했던 판본)을 손에 넣고 교정주기를 붙인 완본을 준비하다 관동대지진으로 원고가 소실되자 1926년 이를 저본으로 영인본 <삼국유사>를 내놓는다.

이때 이미 일본은 <삼국유사>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일본은 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한 다양한 정보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같은 책을 가지고 한쪽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정보원으로, 다른 한쪽은 제국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셈입니다."

이러 함에도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에서 단절 없이 중요시 되어온 것 같은 오해를 낳았고, 그 오해는 정사인 <삼국사기>는 믿을만하고, 야사인 <삼국유사>는 믿기 어려울 것 같다는 또 다른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관찬사서일 뿐인데 이를 확대해 정통사서로 격상시켜 각종 교과서 같은 데에서 <삼국사기>를 높이 평가하고 전범으로 삼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운기 교수는 신라 재상 박제상을 김제상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학부형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교과서에 박제상으로 나와 있는데, 김제상은 무슨 얼어 죽을 김제상이냐며 아이들이 시험을 망치면 책임질 거냐는 것이 항의의 주된 골자.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제상은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이다. ! 그래서 당연히 뒤따르는 질문. 어느 것이 맞느냐고 하자 고운기 교수는 "글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인터뷰 기사를 쓰는 한글 'hwp'도 박제상 아래에는 아무 줄도 안 그리며 맞춤법이 '맞다'고 하는데, 김제상 아래에는 빨간 줄을 그어대며 틀렸단다.

고운기 교수는 <삼국사기> 또한 대단히 중요한 역사책이며 <삼국유사>와 가치의 경중을 따질 성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삼국사기>이며,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얘기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삼국유사><삼국사기>를 보충하거나 극복한 책이라는 것. 그래서 둘이 함께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고 했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와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우리 판타지의 보고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블록버스터 드라마인 MBC <주몽>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는 당신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삼국유사>에 들어있는 '주몽 이야기'부터 읽으시라.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흥법(興法)

불교로 본 역사

<흥법>편의 성격

세 나라가 솟발처럼 선 다음 처음 불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다. (385)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 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 갔다. (386)

 

이 땅에 처음 온 승려 순도

이 기록으로 놓고 보건대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389)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도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을망정, 멸망의 빌미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일연은 불교적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389)

앞부분에서 이 내용을 같이 넣었으면 좋았겠다. 일련의 생각을 짐작하곤 끝내 버려 저자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줄 알았다.

 

백제에 이른 마라난타

마라난타의 입국을 알리는 이 간단한 기사에서 고구려와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열 명의 승려를 가르쳤다는 점이다. (391)

 

상상력, 사실 이상의 사실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392)

큰 나무의 인고

종교를 처음 전할 때 의술이 따라다닌 것은 동서의 고금을 두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396)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교의 전통은 면면하다. (398)

지역적 폐쇄성에서 기인한 것도 있는 듯하다.

 

완고한 신라 사회 속에 뿌린 불교의 씨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에는 단지 승려만이 등장하는 것과 달리, 신라의 이 이야기에서 평신도인 여자의 존재는 이채롭다. (398)

 

순교의 흰 꽃 이차돈

법흥왕 이전에 불교는 없었는가

많은 사람에게 퍼지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인정하지도 않는데, 민간에서는 조심스럽게 신불의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400)

그렇다면 역으로 비처왕 때에 이르러 신라 사회에 퍼진 불교가 이미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01)

 

이차돈에 대한 일연의 관심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다.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402)

 

순교자의 마음

뭐라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 (405)

이차돈이 무엇을 잘못해 목을 베는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406)

이차돈하면 순교, 이차돈의 순교하면 흰 피가 생각난다. 말이 안 된다. 흰 피는 연꽃의 진액이 흰색이라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등등 참 신기하게 여겼던 이야기로 기억된다.

 

아도의 본마음을 이룬 성자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적이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다. (407)

... 흰 젖이고 부처님의 감응이었구나.

신라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409)

 

그 후,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

법왕은 599년에 왕위에 올라,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 주며, 천엽질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하는 명령을 내렸다. (412)

그 이전의 불교에선 살생 금하지 않았나보다.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413)

고구려의 후반기에 도교가 번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적는 일연의 태도는 현저히 불교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입장이다. (414)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의 돌무더기

지금 겨우 남아 있는 황룡사 구층탑을 지탱했을 돌들이나, 금당과 회랑 등을 놓았을 돌들이 무어라 외치는지 들어 볼 만도 하다. (417)

황룡사는 어떤 절이었는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소개할 <탑상>편은 기본적으로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부분이고, 거기에 경전과 사리가 추가된다. 이것들은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만들고 떠받들어졌다. (421)

일반인이야 절이 규모도 크고 볼거리가 있어 관심을 가지지만 불교인에겐 경전과 사리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장륙존상은 높이가 16척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 이는 석가모니시대 인도인의 평균 신장 8척의 두 배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422)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424)

이건 자부심보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불국토라는 당위성을 위해 넣은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 아육왕이 보낸 것일까

아육왕이라면 기원전 4세기경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를 이끌던 아쇼카왕을 이른다. (424)

그는 왕이 될 것이며, 온 세계에 84,000개의 탑을 세워 내 이름을 알리 것이다. (428)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불교신자들은 매우 오랫동안 어떤 그림 속에서도 석가모니의 모습을 그려 넣지 않았다. 얼굴을 직접 그린다는 것은 신성한 일이 아니었기에 대신 그 자실에 아쇼카의 기념주처럼 사자 같은 동물이나 성수로 불리는 나무들을 새겨 넣곤 하였다. (428)

이슬람 종교도 비슷한 의미로 어떤 조형물,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 대신 글자가 그림처럼 발달했다고 한다.

대승은 대중을 상대로 전도해야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을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428)

중국에도 아육왕의 불상을 바다에서 건져냈다는 기록이 있다. (429)

 

황룡사 구층탑의 경우

인도 모델의 불상 앞에 중국 모델의 탑이 서려는 순간이다. (433)

어쨌거나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434)

 

그 안타까운 최후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중 두 가지에 해당된다. 나머지 하나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다. (434)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435)

그 때까지 구층탑은 여섯 번이나 개보수를 거치면서 꿋꿋이 서 있었다. 파손된 이유는 대체로 낙뢰였다. (437)

불에 타 파손됐다는 내용은 본 것 같은데 그게 낙뢰 때문이었구나.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일연과 오대산 그리고 문수보살

여기에서 여러 사찰을 돌며 공부하는데 명성이 대단했다. 같은 도반들은 구산사선의 우두머리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438)

그냥 도반이란 단어가 나오길래 연구원 도반들이 생각나서 반가운 마음에.

14세에서 22세에 이르는 호기심 가득한 청소년기를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온전히 보낸 일연이, 자기가 살았던 곳 주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간직했던 흔적은 [삼국유사] 곳곳에서 드러난다. (438)

 

중국의 오대산과 한국의 오대산

문수보살을 흔희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440)

문수보살이 이런 의미가 있구나. 유적과 역사에 얽힌 건 그나마 좀 알지만 불교에 대해선 모르는 게 많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440)

중국인들은 문수보살이 예언한 산이 바로 산서성의 오대산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441)

일반 독자가 이렇게 자세하게 알아야 하나 싶다. 그러면서 나 역시 지난 칼럼에서 이렇게 썼구나 깨닫는다. 내가 알아낸 걸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나?

 

오대산과 오만 진신이 된 까닭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444)

알아보는 눈도 중요하다. 나 역시 나의 기준에 맞추다 모르고 지나친 성인이 있을 거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 앞으로 그러지 않게 눈 똑바로 뜨고 잘 보자.

한편 문수보살은 매일 아침 서른여섯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일이 나열한다. (448)

 

눈물의 태자

보천이 흘린 눈물은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리라, 도의 경지에 맛을 본 이가 세속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을 뿐이니, 신하들을 따라 왕궁으로 가야 하는 효명이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450)

 

학의 깃털이 가르쳐 준 것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했다는 에피소드는 웬만한 효자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지만, (452)

초등학교 때 읽었던 옛날이야기가 생각난다. 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님께 드렸다는 장면은 효자라는 생각보다 끔찍했다. 그걸 먹었다는 어머니는 더 그랬다.

눈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는 학의 깃털은 곧 그를 출가로 이끄는 방편이었다. (454)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금대암에서 보낸 하룻밤

절은 그 익숙함의 풍경에서 그 자체로 안식의 공간을 우리에게 주는 듯하다. (455)

절은 그저 관광이나 수학여행 코스였다. 그러고 보니 절을 안식의 공간으로 느낄 만큼 오래 머문 적이 없다.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458)

 

의지할 데 없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안식

일천 개의 손과 일천 개의 눈을 가지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님이었다. (459)

 

중생사에 얽힌 이야기

그는 불교를 깊이 믿는다고 알려진 신라로 가자 마음먹고, 중생사에 이르러 대비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464)

 

고려까지 이어지는 중생사의 이야기

시주나 걷자고 나온 이야기는 결코 아닐 것이다. 자신들이 믿어마지 않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꾸밈없는 흠모는 이런 기적을 낳게 한다. (466)

 

일연의 생애와 그 반영으로서 [삼국유사]

일연의 어머니는 열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469)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40)

 

조힐부득과 달달박박

흰 달이 비추는 산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473)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사람

무슨 외국사람이름 같다.

둘 다 풍채가 평범하지 않고 이 세상 밖의 뜻을 품으며 친구 사이로 가까이 지냈다. (474)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는 말은 평범 속의 비범이다. (476)

 

저물 무렵에 나타난 아리따운 여인

어떤 하나의 매듭이랄까, 3년은 그런 경험을 보편적으로 주지 않는가 싶을 따름이다. (477)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478)

 

밤부터 아침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성불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관음보살이 흔히 여자의 모습인 것은 [삼국유사] 안에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에서 볼 수 있다. (480)

발톱 하나 칠하지 못한 만큼의 차이

그들을 기념하여 만든 불상에서, 유독 박박의 것만 금칠을 다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우연이 아니라 거기 어떤 필연이 끼어들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민중의 소박한 신심을 읽게 된다. 발톱 하나만큼의 차이로 말이다. (484)

 

시로 완성되는 [삼국유사]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486)

 

낙산사의 힘

담으로 쌓아서라도 지켜야 할 곳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살아남은 곳이 낙산사인가 한다. 낙산해수욕장이 있고, 설악산이 가깝고, 낙산사야말로 사람의 손때를 타기 쉬운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본디 절이 지닌 고아한 품위를 잃지 않고 서 있다. 여간 다행이 아니다. (487)

 

진신의 친견담과 조신

일연은 이 조를 때를 따라 순서대로 쓴 것이 아니라, 서로 묶일 수 있는 성격에 따랐음을 알 수 있다. (491)

 

의상과 원효의 거리

의상은 이 곳에 진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직접 뵙고자 정성 들여 재를 올린다. 7일간의 첫 정성에 감응한 것은 부처님을 모시는 시종들과 동해 바다의 용이었다. 의상은 그들에게서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받았다. (494)

문면으로만 놓고 보건대 원효의 완전한 실패담이다. 진신을 만나러 간다는 사람이 길가다 마주친 여인들에게 희롱이나 일삼고 있으니 될 일도 안 될 판이다. (496)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재궁마을의 우물가 학 바위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이 여자는 표주박에 해가 담긴 물을 마시고 와서 잉태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이다. (499)

익령현 덕기방은 낙산사에서 가까운 마을이었다. 그래서 범일은 한 쪽 귀가 잘린 정취보살상을 낙산사에 모셨다. (504)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의 꿈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507)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았네. (508)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어떤 사람이 승려가 되었는가

승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대체적으로 인생의 번뇌와 그 번뇌 속에 시달리는 세속의 인간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 (603)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603)

이는 승려만 해당되진 않는다. 수녀에게도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혜통은 다름 아닌 밀교 승려다. ...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를 겪었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더 철저하다면 철저한 것이 밀교다. (604)

신라의 밀교 승려

신주라는 말은 밀교 신승들의 사적을 뜻하겠는데, 일반적으로 다른 고승전에서 쓰이지 않는 용어다. 일연은 밀교승들이 신령스런 주문을 외우기 때문에 그것을 특징 삼아 이렇게 이름짓지 않았나 싶다. (605)

신령스런 주문이라고 하니 퇴마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그가 밀교승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도 비추지 않고 있는데, 신통력이나 행적이 그에 가깝다고 보일 뿐이다. (610)

신통력을 미끼로 헛된 이름을 팔거나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것은 밀교의 본령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자는 것이다. (612)

 

혜통과 용의 질긴 싸움

무외의 제자가 된 것은 물론 큰 신임을 받아, 당나라 황실의 공주가 병에 걸렸을 때, 스승은 자신을 대신해 혜통을 보낼 정도였다. (513)

혜통에게 쫓겨난 이무기는 용으로 변해 신라 땅으로 가서 나쁜 짓을 거듭했다. (613)

이무기를 죽이지 않았나보다. 죽였으면 그럴 일은 없을텐데.

정공에게 억울함을 갚은 용은 기장산으로 들어가 곰 신이 되어, 여전히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616)

명랑의 신인종

정체를 잘 모르는 밀본이나 평범한 집안 출신의 혜통과 달리, 명랑은 자장 법사를 외숙부로 하는 가문도 짱짱한 데다, 형제가 모두 큰스님이 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617)

결국 그가 신인종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대목은 신라에서 밀교가 공인되고 조직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619)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불교적 정신이 바탕 된 사회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통>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민간 대중들에게까지 얼마만큼 체화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621)

 

욱면이 염불해서 서방정토로 가다

미륵 신앙과 대칭되는 점에 서 있는 미타 신앙의 정토왕생 신앙은, 현세에 복락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내세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의 소산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실 정토 신앙은 번성기의 유복한 사람들에게 퍼지게 마련이다. (625)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627)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부지런히 서방정토를 염원하되, 먼저 이루는 사람이 알리고 가자 약속하였다. (628)

아무리 친구라 해도 이런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천리를 가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알아보는 것이지요.” (629)

아미타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기야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과 현실의 삶에 고단하게 매인 사람은 마지막의 자리가 서로 멀다. (632)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633)

 

선율이 살아 돌아오다

아마도 이 조의 본문과 찬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일 것이다. 절의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636)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절과 호랑이

산에 절을 두니 그 산을 지키는 신령도 모신다. 그런 까닭으로 절과 호랑이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637)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처녀 호랑이는 제 마음에 맞는 한 남자를 만났으되, 식구들이 모두 당해야 할 재앙 앞에 혼자 목숨을 버려 막기로 다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642)

처녀 호랑이의 바람은 단 하나,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는 것인데, 이로 인해 절에는 호원사라는 이름이 붙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사찰 연기 설화로 분류된다. (643)

 

이어지는 신도징의 이야기

신도징이 먼저 쓴 시에 나오는 매복은 중국 한나라 때 사람이다. 어지러운 정치를 멀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 그에 비하면 변방의 미관말직을 얻어 나가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649)

 

호랑이는 호랑이의 굴로

한갓 짐승이 할 일이 아니요, 세상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로 말이다. (652)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다시,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

어쨌거나 그 때문에 중국 황실을 위한 절이 되었고, 경덕왕 14년에는 절의 탑이 흔들렸는데, 이 해에 바로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언해 준 것이라고 믿었다. (653)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656)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도 만남은 만남이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657)

 

바위 속으로 숨은 뜻

바위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는 민간 신앙의 전통이다. (657)

그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넣은 것은 민간 신앙과 불교의 절묘한 만남이었다. (658)

그럼 불교를 믿는 나라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인가?

마애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658)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흐릿한 선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나머지는 불상을 보러 온 사람이 완성시키라는 조각가의 배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659)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세상

비파암 위의 달이란 곧 진신을 말한다. ... 정토에의 참된 희구는 없고, 형식과 의례에만 치우친 무리들뿐이니, 그들은 밝은 달빛을 가리우는 구름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663)

 

경흥이 우연히 성인을 만나다

지팡이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모습은 마치 앞서 남산 비파암 바위로 숨은 진신과 비슷하다. (664)

숨어버린 것이 어떤 것을 상징하는 걸까. 그냥 사라져버렸다 해도 될텐데. 사라져야 그 장소성이 남기 때문인가.

문수보살상 앞이라는 것은 앞의 관음보살상과 다르다. (666)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

 

저무는 사회 속의 고민

경흥이 비록 국사라는 높은 위치에 있어서, 말을 타고 다닌들 그다지 흠이 될 일은 아니겠으나, 그 본연의 신분이 승려이므로 스스로 경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667)

비단 주고 승직을 사고, 남몰래 여자를 두고 세속의 삶에 빠진 자들이 들끓던 시대였던 것이다. (668)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는,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670)

 

피은(避隱)

숨어 사는 이의 멋

숨어 사는 것의 뜻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672)

관료였다가 승려가 된 신충이나, 불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물계자도 포함되어 있다. 물계자는 전형적인 유교 이념의 은둔자이고, 신충은 유교에서 불교로 전향해 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672)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

순수한 백제 승려로 소개되기는 혜현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673)

그만큼 영향력 있는 승려겠지. 은거한 승려면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주로 [묘법연화경] 이른바 [법화경]을 외는 일을 하고 기도하여 복을 청하였다고 하여, 법화 신앙의 한 가닥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앞서 했었다. 앞으로도 소개할 <피은>편의 승려들은 대체로 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673)

법화경을 외우는 일과 법화 신앙이 왜 중요한 지 알 수 없다.

이름은 여러 중국의 나라에 퍼져 전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당나라 때에 명성이 자자했다.” (674)

이 이유 때문에 혜현만 소개된 것인가.

 

낭지와 포산의 두 성인

[법화경]을 외우기 좋아했다는 그도 신이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이다. (677)

포산은 지금의 경북 경산, 달성, 청도의 세 군을 가르는 비슬산이다. (678)

일연은 아직 젊은 시절부터, 자기가 머문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꼼꼼히 메모해 두었던 듯하다. (682)

 

양손 스트레이트에 나가떨어진 연회

연회는 무언가에 들떠 있었다. 그런 그를 무상의 도 앞에 쓰러뜨리는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의 합동작전은, 연회로서야 아프기 그지없었겠지만, 읽는 우리들에게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685)

변제천녀는 또 뭐지?

변재천녀는 불교에서 보이는 최고의 여신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여신이지만 불교에 들어와서 사람의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비파를 오른손으로 퉁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686)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효심의 결정편

그런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다. (690)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옛날 곽거가 아들을 묻어 하늘에서 금 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니 땅이 돌 종을 솟아나게 했구나. 옛 효도와 지금의 효도를 하늘이 함께 살피셨도다.”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매년 메벼 50석씩을 주어, 그 순수한 효도를 드높였다. (693)

 

두 세상을 산 사람

대성이 김대성으로 바뀐 것만큼이나 영특한 소년은 순식간에 받을 복을 다 챙긴 듯한 느낌이다. 먼 후생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같은 시기 같은 마을에 재상 집 아들로 태어났으니 말이다. (696)

 

진정 스님, 일연의 초상화

진정은 의상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 장가들 형편도 못 될 만큼 가난한 살림살이, 진정은 홀어머니를 두고 부역에 나가랴 품 팔아 양식 대랴 틈이 없다. (700)

진정은 주먹밥 일곱 덩이 싸주며 호통치듯 자신을 떠나 보낸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하였다. (703)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향가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 하나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이것은 신라인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급화된 문화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향가는 그 같은 특성을 설명해 주는 대표적인 증거다. (704)

한편 그 노래들은 하나같이 이야기를 동반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이야기 전개의 보조 수단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706)

 

어떻게 무엇을 노래하였는가

현존하는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709)

한마디로 말한다면 향가는 서정시다. (709)

기실 향가는 일상사의 개인이 부르는 곡진한 노래다. (710)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기파랑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화랑 가운데 한 사람이다. (711)

높이 솟은 잣나무 가지가 눈도 이겨내고 꼿꼿한 것처럼, 기파랑은 굳세고 강인한 존재다. (712)

 

노동요의 원조, <공덕가>

불상을 만드는 데는 많은 진흙이 필요했다. ... 이 노래는 그 때 흙을 나르던 사람들이 일하면서 부른 것이다. (714)

 

호쾌한 기상이 서린 노래, 융천사의 <혜성가>

심성은 28개의 별자리 가운데 하나로 신라를, 혜성은 일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715)

출전하는 세 화랑에게 써준 격려의 노래였다. 그러기에 표현은 씩씩하고, 자잘한 일에 얽매지 않는 호쾌함이 있다. (718)

 

충성심과 이기주의의 사이, 신충의 <원가>

가을 서리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 같은 줄로만 알았던 왕과의 약속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연못에 비추는 달빛도 흘러 자취 없어질 허망함이다. (720)

 

깨달음의 더할 데 없는 경지, 영재의 <우적가>

영재는 이 노래를 지어 그들을 조용히 타이른다. 나는 무기 따위를 두려워 않는 사람인데, 그대들도 즐거이 법을 듣는다면 모두 나처럼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722)

 

일연, 혼미 속의 출구

괴승 시비

그가 제기한 문제점은 세 가지다. 일연이 시대의 사조에 빠졌다는 것, 사상과 신앙 모두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가지산문의 현풍을 떨치기에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724)

저자는 그럼 누카리야의 의견에 대해 반박하는 글이나 행동은 했는지 궁금하다.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725)

 

일연의 생애

처음에는 다만 공부를 하기 위해 갔던 무량사에서 인연이 되어 일연은 열네 살이 되던 해 설악산의 진전사로 가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726)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728)

 

본질 앞에서 수정해야 할 방편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733)

 

표면적 전범과 이면적 전범

저들의 안방을 이민족에게, 오랑캐라고 깔보아마지 않았던 변방족에게 내주고 난 다음 겪게된 고통이야 형용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새로운 각성을 하기는 다른 변방 민족들이 아니었던가 한다. 중국을 주인의 나라로 모시며 언감생심 큰소리 한 번 치지 못했던 작은 나라들로서는, 저마다 자신의 정체를 찾아갈 계기가 여기서 마련된 것이다. 거기 고려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734)

표면적 전범은 중국이 민중을 다스리거나 변방 민족에게 요구할 때 쓰던 형식적 전범이었다면, 이면적 전범은 권력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데 유리한 내용적 전범이다. (736)

전범이란 표현은 잘 안 쓰는 표현이라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 (전범 ; 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

 

혼미 속에서 찾는 출구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741)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대학교 때, 인생 공부를 한다며 강의실보다 더 자주 들리던 술집에서, 고운기 선배의 제안으로 시작된 [삼국유사] 사진 찍기는 어느 덧 십 년을 넘겼다. (742)

지금처럼 자가용은 없었기에 기차며, 버스며 시간에 맞추어 닥치는 대로 타고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743)

이런저런 사랑을 찾아다니다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면, 초롱초롱한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743)

이 책이 히트치기만을 바랄 뿐이다. (744)

사진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참 솔직한 듯하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 목차는 저자가 [삼국유사]와 똑같이 하지 않고 시대 순으로 다시 배열했다고 했다. 큰 제목 말고 작은 제목들은 굳이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한다.

- 마지막에 일연에 대해 따로 넣었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한다. 책 전체에서 일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어떤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썼는지도 기술하고 있다. 빼도 좋겠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 [삼국사기]와 다른 점들을 계속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명확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산만하기만 하다. 그냥 [삼국유사]에 집중해서 설명했으면 더 나을 것 같다. 원문을 너무 잘게 쪼개고 설명을 이어가니 집중이 안 된다. 무엇보다 중립적 시각이 아닌 편중된 시각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 신라는 계급이 중요한 사회였다. 저자가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별도의 표로 정리해서 보여줬으면 좋겠다.

- 저자는 사진이 만족스러워 풍성해졌다고 하는데 사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별로 도움이 되기보다 이 역시 산만하고 오히려 책이 두꺼워지기만 했다. 사진과 글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아서 인 듯하고, 책 내용과 사진과 사진 설명을 함께 보면 집중을 할 수가 없다.

 

- 저자가 너무 욕심을 낸 건 아닌가 싶다. 삼국유사의 우수함도 알려야하니 여러 참고문헌을 비교하며 쓰게 되고 거기에 개인적 경험도 넣고, 사진도 넣고 일연에 대한 견해도 넣다보니 독자는 어디에 중심을 둬야 할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삼국유사 내용을 충실히 실은 것도 아니다. 차라리 기행문 형태로 삼국유사를 풀어썼으면 어떨까 한다. 그러면 사진과도 연결되고 저자의 경험을 넣어도 산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저자 자신이 일연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

- 저자의 연구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삼국사기와 다른 점과 같은 점을 비교하고, 다른 참고서적도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설명이 너무 길어져 단점이 되기도 했다.

 

- [삼국유사]에 나오는 많은 상징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만 볼 때 몰랐던 것들을, 사실 여부만을 따지지 않고 상징을 생각하게 해준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 [삼국유사]에 국한시키지 않고 <삼국시대>에 대해 다른 역사적 내용을 같이 보완해서 볼 수 있게 새롭게 구성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유적지는 전쟁으로 소실되어 사실 터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유적지 사진으로 유적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저자라면 유적지 사진 외에 복원한 유적이나, 복원하면 이런 모습이다 구현해놓은 이미지들을 넣을 것이다. 예를 들어 황룡사 9층탑도 경주 엑스포를 위해 만든 경주타워라든지 9층탑 재현해 놓은 실제 모습을 넣어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겠다.

IP *.124.22.18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52 # 15 사피엔스 2(이정학) [1] 모닝 2017.07.18 1348
351 #15 사피엔스 2/2 (송의섭) [1] 송의섭 2017.07.18 1345
350 #15 사피엔스_2 [1] 뚱냥이 2017.07.18 1408
349 #15. 사피엔스 2(김기상) [1] ggumdream 2017.07.18 1599
348 #15 사피엔스 2_이수정 [1] 알로하 2017.07.18 1425
347 사피엔스(2) - 명상을 통해 쓰여진 인류의 예언서 [1] 보따리아 2017.07.18 1442
346 고운기의 삼국유사(1) - 두 시인이 길에서 역사를 노래하다 [2] 보따리아 2017.07.24 1319
345 #15 - 삼국유사1(이정학) 모닝 2017.07.24 1387
344 #15. 삼국유사 1/2(김기상) [1] ggumdream 2017.07.24 1563
343 #1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1/2 (정승훈) 정승훈 2017.07.24 1323
342 #16 삼국유사_1 뚱냥이 2017.07.24 1316
341 #16. 삼국유사 1/2 (송의섭) [2] 송의섭 2017.07.24 1323
340 #16 삼국유사 1/2 (윤정욱) 윤정욱 2017.07.24 1374
339 #16 삼국유사 1_이수정 [1] 알로하 2017.07.24 1361
338 #17 삼국유사 2/2 (윤정욱) 윤정욱 2017.07.28 1322
337 고운기의 삼국유사(2) - 일연: 어두운 동굴 속에 빛의 노래를 흘려주다 보따리아 2017.07.28 1483
» #17 삼국유사 2/2 (정승훈) 정승훈 2017.07.29 1416
335 #17 삼국유사 2(이정학) [1] 모닝 2017.07.30 1337
334 #17. 삼국유사 2/2 - 새롭게 다가온 경주(김기상) [1] ggumdream 2017.07.31 1660
333 #17. 삼국유사 2/2 (송의섭) [2] 송의섭 2017.07.31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