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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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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 09시 1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마흔 세 살에 삼국유사를 만났다. 삼국사기가 아닌 삼국유사. 야사로 비아냥 거림까지 받고 있는 삼국유사이지만 나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역사적인 도시 경주이다. 경주에서 초, , 고를 나왔지만 오랜 타향살이로 진정 고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이번 삼국유사를 통해 내가 살고 있지만 잘 몰랐던 것에 대해 일깨워주었다. 언젠가 경주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수학여행, 신혼여행, 가족여행, 역사여행 등 갖가지 이름으로 경주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한번은 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에게 제대로 된 경주여행을 알려주고 싶었다. 마음만 앞섰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는데 이번 제주여행과 <삼국유사> 책 읽기를 통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과 이 책의 저자 고운기씨에게 감사를 드린다.

 

일연은 1206년에 태어나 128984세에 입적하였다. 조선시대의 평균 남자 수명이 30살 즈음이었다고 하니 그 시절 84세까지 살았다는 건 천수를 누린 셈이다. 아마 불교에 의탁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효선(孝膳)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일연은 경북 경산시 압량면 옥곡동에서 출생하였다. 경주(慶州) 김씨이다.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해가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에게 비추기를 사흘이나 한 까닭에 견명이라 이름지었다. 아버지는 김언필인데 벼슬하지 않고 일찍 작고한 듯하다. 일연스님 덕분에 아버지는 나중에 좌복야로, 어머니 이씨는 낙랑군부인으로 봉해졌다. 9세 때 학문 수학을 위해 전남 광주 무등산 무량사로 들어갔던 일연스님은 14세 되던 해 출가사문의 길을 택했다. 일연스님은 1219(고종 6)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고 대웅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처음 세상에 나와서 지은 이름에 밝을 명()자가 들어 있어서, 다음엔 반대로 어두울 회()자를 넣어서 지은 것이라 한다. 일연(一然)이란 이름은 스님이 아주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전에 썼던 이름에 각각 밝음과 어둠의 의미가 들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보겠다는 깊은 뜻에서 한 일()자를 넣은 거란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道義)가 은거하며 수행하던 곳이다.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선과 교를 겸비한 결과 1227년 승과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승려의 과거시험인 셈인 것이다. 그리고 고향 경산에서 멀지 않는 포산(지금의 비슬산)에 있는 보당암에서 수도에 전념하였다. 현재 대구 달성군에 보당암으로 추정되는 비슬산 대견사지와 대견사탑이 아직 남아있다.

 

그 이후 남해 정림사, 영일 오어사, 청도 운문사, 강화 선월사, 개경 광명사 등에서 고려대장경 도감 일부터 각 절 주지, 고려국사로 책봉되기까지 승려로서 영광의 길을 걸었지만 그 길을 마다하고 퇴소한 곳은 군위 인각사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딱 1, 김대성의 전생 어머니처럼 아들의 지극한 봉양을 받았을 일연의 어머니는 96. 그해 극락왕생하시고 늙은 아들 일연도 5년 후 84세에 입적한다. 문도들이 자기 부도 탑 세울 위치를 의논하자 일연은 다시 살아나 어머니 묘소에서 잘 보이는 곳을 지정하고 눈을 감는다. 일연은 이곳 인각사에서 지금 역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대개 승려로서의 삶을 마치는 시점에서 책을 쓴다면 불교적인 깨우침을 전하거나 교리, 경전에 대한 해석을 생각하기 쉬울 텐데 일연 스님은 이런 통념을 뒤집고 <삼국유사>를 썼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몽고와 끔찍한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지키기도 힘든 위태로운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처참하게 짓밟히던 시기에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당당하게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왔는지, 얼마나 착한 마음으로 삶을 이어왔는지를 전하려고 했을 것이고 그가 몸담았던 불교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삼국유사>를 통해서 잊혀져 가는 영광스러운 우리 역사를 되살리고 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일찌감치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책.” 여기에 내가 듣고 싶은 것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삼국유사의 비판

 

그동안 <삼국유사>는 일반적으로 일연이 지은 것을 알려져 왔으나 학계 일각에서는 의혹을 받아왔다. 찬자 이름이 권제5에만 나오는 점, 일연의 문도가 세운 일연의 비문에 삼국유사에 관한 언급이 없는 점 외에 삼국유사가 서발문 및 목차조차 없는 점, 서술상의 일관성이 결여된 점, 조목간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한 점 등 역시 지적돼 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교하면, 삼국사기는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 아래 쓰여진 책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과 여러 학자들은 삼국의 시조들의 신이한 기록들을 "중국 제왕들에게 신비주의적인 탄생 비화들이 있었다면, 한반도의 왕조들도 그러할 것이다."라는 명분을 들어 자주성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목적 아래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들어 유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저자들 중 저술의 총관을 맡았던 김부식은 공자께서 금한 괴력난신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는 비유교적이다!!"라며 춘추필법의 전통에 따라 비판했다.

반면 일연은 장자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스스로 불자였던 자신의 메세지를 설화에 담아내었는데, 한국 신화와 관련된 내용이 제법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일연은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설화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품을 매개체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방대한 정보를 여러 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정리하여 지어낸 삼국사기와는 달리 일연 개인의 경험과 학문에 근거하여 편찬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자면 내용이 적고, 불교 설화가 내용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래서 보통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이 겹치는 사건이 있으면 보통 삼국사기가 정사고 삼국유사는 야사정도로 추정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라는 이름도 이전의 사서에서 빠진 내용들을 수록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역으로 말하면,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역사를 현실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의 이미지에 그대로 대입하긴 곤란하다. 하지만 그 사실성이나 합리주의가 말 그대로 사실대로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대표적 편찬자인 김부식 외 당시 사람들 기준은 유교적 합리성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원문을 알 수 없게 된 것도 있다. 이 기준에서 생각하면 차라리 손을 대지 않은 쪽이 낫다. 또한 이 설화들도 당대의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되려 삼국유사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고대 사료 부족이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사학계를 지탱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둥이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들어온 문장

 

불교로 보는 역사

 

385. <삼국유사>의 후반부를 여는 첫 편은 흥법(興法)이다. 세 나라가 솟발처럼 선 다음 처음 불교가 어떻게 들어왔는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다.

 

385.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 <삼국유사>의 본령이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일각에서 <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 부분에 더 많은 열정과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스님도 어떻게 보면 직업이다. 직업관에 충실한 그일 것이고 더 자신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386. 후반부의 세 조는 그 무게 중심이 신라 쪽에 가 있다.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386.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 <흥법>편의 여섯 가지 이야기에 숨어 있는 메시지야말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일단 이것을 일연이 지닌 불교 역사주의라고 명명해 본다.

 

389.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잠시 뒤에 소개할 신라와 비교한다면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가 지닌 대륙적 기질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라고 해서 민간 신앙이 없었을 리 없고, 4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것이 나름대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대륙과 연결된 큰 나라를 경영하는 고구려라면 어떤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굳이 막거나 감시할 만큼 자잘하지는 않았으리라.

 

389. 고구려에 첫 승려가 온 지 꼭 12년 뒤, 백제에도 중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러 온다.

마라난타, 고등학교 시절 배운 듯한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주네.

 

390. 공주에 있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마라난타가 세운 절로 전해온다.

계룡에 있을 때 가까이 갑사가 있었는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못 가봤을까. 항상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을 잃어버리지 말자.

 

390. 마라난타의 입국을 알리는 이 간단한 기사에서 고구려와 달리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바로 열 명의 승려를 가르쳤다는 점이다. 기록에 없을 뿐 고구려에서도 사정은 같았겠으나, 이렇듯 명백히 이 땅의 첫 승려를 알려 주는 기사는 따로 없다. ...... “또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2월에 불교를 잘 믿어 복을 얻도록 하였다는 기록을 추가하고 있다. 고구려보다는 뭔가 한 발 앞서나가는 느낌이다.

 

392.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떤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는 사실 이상의 사실이 넘어간 그 어디쯤에서 완성된다. 이런 생각을 <삼국유사> 전체로 확대시켜도 좋다.

왜 하필 시일까? 그 시대는 말 한마디에 따라 대역죄인이 될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시는 말 그대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수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수 있어서 일연이 선택한 가장 안전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392. 鴨綠春深渚草鮮(압록춘심저초선)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白沙鷗鷺等閑眠(백사구로등한면)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忽驚柔櫓一聲遠(홀경유로일성원)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何處漁舟客到烟(하처어주객도연) 어느 곳 고깃밴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

393. 1, 2행은 고요한 봄 풍경이다. 그것은 곧 문명이 전해지기 이전의 미명상태요, 역사의 발전 단계로 치면 이제 시작을 알리는 처음이다. 굳이 계절을 봄으로 설정한 것 또한 같은 뜻이리라. 이 때 3행에서 노 젓는 소리와 갈매기의 비상은 고요함을 깨뜨리는 파각(破却)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징조이며 신호다. 신호의 주인공은 바로 배를 타고 오는 손님인데, 본문 기록대로라면, 그는 곧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한 순도다.

저자가 시인이면서 국문학자이면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인 시라고 한다. 일연이 정말 저자의 해석대로 지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393. 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고, 고깃배가 안개 속에서 가물가물 나타나는데, 시초는 그처럼 신비롭고 엄숙했다는 시적 표현이면서, 놀라서 나는 갈매기와 왜가리는 거기로부터 터져 나오는 돈오(頓悟)와도 같다. ()과 정(), 상승과 하강이 잘 조화된 탁월한 시편이다.

 

394. 이 같은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순례자의 길은 외교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고구려는 그나마 불교를 잘 받아들였지만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까지 겪으면서 불교가 전파되었다. 순례자가 있음으로써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익히 보고들었다. 그들을 거기까지 내모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종교적 믿음과 힘에 대해 무서움을 느껴본다. 무슬림의 자살폭탄처럼.

 

394. 신라는 앞선 두 나라에 비해 불교를 만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398. 고구려와 백제에서 이것이 불교의 처음이다라고 썼던 자리에, ‘불교도 없어져버렸다고 비통히 마감하고 있다.

 

398. 雪擁金橋凍不開(설옹금교동불개) 금교에 눈 덮여 아니 녹으니

鷄林春色未全廻(계림춘색미전회) 계림의 봄빛은 아직도 먼데

可怜靑帝多才思(가령청제다재사) 영리한 봄의 신() 재주도 많아

先着毛郞宅裏梅(선착모랑댁리매)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399. 이 곳이 눈에 덮여 풀리지 않았다는 1행의 표현은, 신라에 불교가 심어지기에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못했음을 말한다. ......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 그것은 3봄의 신(靑帝)’이 상징하는 바이니, 언젠가 오고야 말 그분은 어여쁘시고 재주도 많으시다. 추운 겨울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자연의 이치에 따라 봄이 오듯이, 신라 땅에도 봄은 찾아오리라. 4행은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례의 집 매화나무에 먼저 도착한 봄이 있다는 것이다.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400. 법흥왕(514~539) 때에 와서야 비로소 불교가 들어왔다는 것은 좀더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그것은 전파와 공인(公認)의 차이를 그냥 지나쳐 버린 말이다.

 

400. 민간에서는 조심스럽게 신불(信佛)의 분위기가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401.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전적으로 그 개인의 신심(信心)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 터였다.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도 한몫 거들지 않았을까?

 

402.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왜 그랬는지 그 기준은 <삼국사기>와 비슷할 터이니, 한 가지 추가한다면 불교역사주의적 의식이 작용했다는 점도 앞서 지적했다. 신라의 불교는 신라 한나라에만 그치지 않는 한국 불교의 화두. 한국 불교라는 강물은 신라에서 물꼬를 터서 흘러 나왔다. 일연은 그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2. 순교는 어떤 의미를 따지기에 앞서 순교 자체로 성스럽다. 거기에 신라 불교의 공인 그리고 한국 불교의 본격적인 출발이라는 의미를 보탠다면 더 이상의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지 않다.

순교자를 보면 위대하고 성스러운 건 맞다. 그러나 순교자의 가족을 보면 한 편으로 애처롭다. 그들의 고통과 고단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407. ‘이차돈의 머리를 베었더니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라는 대목은 어디에나 있다. 붉은 피가 아니라 흰 젖이었다는 이적이 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며, 흰 젖은 부처님의 감응을 말하는 것이다.

 

407. 금강산은 북산 곧 경주의 북쪽에 있는 산이다.

소금강산이라 불리는 산이다. 여기는 한번 가본적이 있다. 백률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408.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 터는 지금 텃밭이 되었다. 여기에서 불법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차돈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어차피 모든 것이 불교의 진리라면 그리 서운해 할 일도 아니다.

 

411.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412~413. 삼국 통일 후 불교는 신라의 그것으로 하나 되어 가 버리고, 13세기의 일연으로서 백제에 관한 자료는 쉬 얻지 못할 형편이엇음을 이해해야겠다.

 

413.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도교를 신봉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가 쇠퇴해진 데 대한 아쉬움이 컸겠지만 굳이 그것만으로 이유를 댈 수야 없다. 보덕이라는 큰 스님이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피신해야 했던 것을, 일연은 나라가 기우는 혼란스런 상황의 사건으로 보고 있다.

 

413. 보장왕이 즉위한 해에 이르러 삼교(三敎)를 함께 일으키고자 하니, 총애 받던 신하 개소문이 왕을 설득하기를, ‘유교와 불교를 함께 키우다 보면 도교가 번성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만을 배워 왔다.

 

414. 고구려의 후반기에 도교가 번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적은 일연의 태도는 현저히 불교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입장이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

망할려니 망한 것이지 도교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현실 회피주의가 아닌 <도덕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했더라면 오히려 나라가 강대해졌을 것이다.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416. 통상적인 관광 코스에서 황룡사 터는 별로 인기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데려다 놓으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뭐라도 눈에 보이는 실물이 있어야 구경했다는 기분이 날터인데

 

417.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가 중심이라는 말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경주에 대한 새로운 사실

 

417.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 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활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417. 지금 겨우 남아 있는 황룡사 구층탑을 지탱했을 돌들이나, 금당과 회랑 등을 놓았을 돌들이 무어라 외치는지 들어 볼만도 하다.

 

417.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년을 기다렸단다.

 

420. 아도가 와서 처음 지었다는 절이 바로 천경림의 흥륜사와 삼천기의 영흥사다. 나머지 다섯 절은 차례로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다. 그러니까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이라 계시된, 신라 7대 사찰의 후보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황룡사, 분황사밖에 모르겠다. 나머지 절은 터만 남았다고 하니 언젠가 한번 둘러봐야겠다.

 

422. 일연이 첫손 꼽으며 소개한 것은 장륙존상이다. 장륙존상의 높이가 1() 6()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16척이면 3m+6*0.3=4.8m, 5m 내외라는 뜻이다.

 

424. 아육왕이라면 기원전 4세기경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를 이끌던 아쇼카왕을 이른다.

 

428. 이 곳은 아쇼카왕 때 벌써 불교가 전해졌고, 그리스 조형 예술의 기술도 들어와 있었다. 거기서 불상은 탄생했다. 이 무렵의 불교는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나아간다. 대승은 대중을 상대로 전도해야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을 만들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430. 장륙존상은 인도에서 직수입된 모델을 가지고 만들었다. 순도의 불상도 장륙존상도 모두 없어져 버린 지금,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세계 불교 문화의 두 중심을,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워 할 뿐이다.

 

430. 전체가 225척이라는 것인대. 학계에서는 요즈음의 단위로 70m정도라고 추정한다. 불가사의한 높이다. 과연 얼마만한 건축 기술을 가졌기에 20층 아파트 높이의 탑을 세울수 있었을까?

 

432. 석가모니의 명령을 받아, 거기 가절을 지키고 있지요.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가운데 구층탑을 지으시오. 이웃 나라들이 항복해 오고, 구한(九韓)이 조공을 바칠 것이며, 왕실이 영원히 평안하리다. 탑을 세운 다음 팔괸회를 설치하고, 죄인들을 사면해 준다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

부처는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텐데 종교의 변화의 모습에서 놀란다.

 

434. 어쨌거나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434.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신라를 지키는 세 가지 보배 중 두가지에 해당된다. 나머지 하나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옥대(玉帶). 특히 구층탑은 주변 아홉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을 비는 뜻에서 만들어졌으므로 더욱 신라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434. 아홉 외적이 1층으로부터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적, 예맥이라고 하였다. 지금 잘 모르는 나라도 있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빠져 있는 것 또한 의아스럽다.

그렇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는 한 민족이니까 그런 것인가.

 

436. 나는 들었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한 쪽은 무간지옥을 보여 주더라고

구층탑이 불타는 것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된다. 이 문화재가 남아 있었더라면 대단했을텐데. 복원은 먼 얘기인가.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440. 일연의 불교사상이 문수신앙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잠정적인 이정표를 세울수 있다.

 

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 한다. .....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가는 데 부모라고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成佛)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리라. 나아가 문수신앙은 대체로 이런 문수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수보살은 그가 죽은 다음 동북방의 나라에 봉우리가 다섯 개인 산, 청량산이라 부르는 거기에 머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문수보살의 10대원 중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게 하고 갖가지 방편으로 불도에 들게 한다.”에 들어맞는 내용. 그런데 무슨 보살이 이렇게 많은지.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불교는 부처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아는 만큼 보이고 기독교도 그렇게 종파가 많듯이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시대를 지나면서 그렇게 많은 것이 생겨나는 것 아닐까. 석가모니에서 비로자나불, 아미타불까지....

 

441. 우리 나라의 오대산은 바로 이 같은 배경을 가진 오대산이 그대로 넘어온 것이다. .... “이 산을 문수보살이 머문 곳이라고 처음 적은이는 자장법사이다.”

 

444. 불상에 깊은 관심이 있지 않고서야 법당에 있는 불상이 다 같은 부처님으로 보일테지만, 부처님께 절 한 번 올리고 마음 한 번 씻는다면 그 부처가 어느 부처인지는 몰라도 될 것 같다.

그래 마음이 중요한 거지. 누가 누구인지 뭐가 중요한가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쪽으로

 

444.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 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6년 전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변경연 연구원.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었다.

 

448. 문수보살은 매일 아침 서른여섯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면서...

문수보살이든 누구이든 나에게도 매일매일 찾아오는 그리고 뭔가를 암시하는 것들이 분명 있을텐데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두 눈 똑바로 뜨고

 

454. 눈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는 학의 깃털은 곧 그를 출가로 이끄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 깃털의 진짜 주인은 오대산의 다섯 성중이요, 그 가운데서도 문수보살이었으리라. 처음부터 그에게는 문수보살의 계도가 걸려 있었다.

 

45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게 아닐까?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455. 나는 사실 불교신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와 가까워진 것은 전적으로 <삼국유사>연구 때문이었는데,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경우,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455. 일본에서 온 지인들이 나와 함께 몇 군데 절을 돌아보고 난 다음, 산과 물과 절이 어울린 전체의 풍광이 특히 인상에 남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그렇듯이 일본인들의 눈에도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일본은 아닌가. 도심지 깊숙이 있다는 얘기인가.

 

456.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만 상처만 커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내게는 가족, , 음악이다.

 

456. 분황사는 작은 절이 아니다. 신라의 일곱 군데 성지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효가 그 생애를 마감한 절로, 그리고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골을 빻아 소상(塑像)을 만들고 걸어둔 절로, 일연은 여러 군데서 이 절을 소개하고 있다.

몇 번을 가봤던 분황사가 새롭게 느껴진다.

 

456. 일천 개 손 일천 개 눈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457. 천 개의 눈에서 하나만이라도 내 주어 소원을 들어 주기 바라는 지극한 마음이 노래에 스며 있다. 그러면서 짐짓 희명은 엄포처럼 마지막 줄을 맺는다. ‘어디에 쓰실 자비이기에 여기서 들어 주지 않으시려는가라고

 

469. 불성은 대체로 마음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법이다. 그 불성은 어떤 지식보다 나으며, 때로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이 값어치 있는가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469. 개인사의 그늘에 놓일 책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삼국유사는 때로 일연의 생애와 견주었을 때 보다 맑게 이해되기도 한다. 일연에게서 평생의 화두를 하나 들자면 어머니다. 세속의 인연에 너무 연연해한다고 탓하지 말라. 일연의 어머니는 열 아홉 살 아직 꽃 피지 않을 나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아흔 살 넘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다.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471.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의 이름으로 온갖 만행이 저질러지고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이용한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름이 너무 예쁘다. 나는 무슨 노래가사인줄 알았는데 이름이었다. 노힐부득(努肹不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 정확한 뜻이 없어 내가 생각하건대 힘써 소리내어 염불하는 부득과 슬픈 박박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결국은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성불하는 부득과 이 여인을 내쳐 기회를 놓치는 박박. 그러나 결론은 해피엔딩

 

472. 만약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넘는 이야기 중에 가장 뜻 깊은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를 대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 학위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 조가 일연과 일연의 문학 그리고 삼국유사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학위논문이 책이 되었다.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고 책도 내고 일석 삼조이네.

 

472. 역외가상이 있어 속세의 인연을 버리고 산중으로 숨는다.

그들의 아내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473.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하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융통성의 승리인가. 원리원칙은 어디에서나 살아남기 힘들다. 정답은 원리원칙과 융통성이 절묘한 조합

 

475. 부인과 집이 진정 좋다 하나, 연꽃 핀 연못가와 꽃밭에서 천성(天聖)들과 함께 놀며 앵무새며 공작과 어울려 함께 즐김만 같지 못할 것이네. 하물며 부처님을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좋은 말이다. 배우면 배운대로 해야하는데 배운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배움은 소용이 없는 것인지 모른다. 나부터.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아는만큼 실천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데 나는 눈감아 버린다. 그러면서도 지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책을 읽는다.

 

475.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저절로 시켜서 된 것이지 억지가 끼어들 수 없다.

 

476. ‘부처를 배우면 부처가 되어야 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는 말은 평범 속의 비범이다.

 

476. 박박이 산 곳은 판옥, 부득이 산 곳은 뇌방이었다.... “부득은 열심히 미륵보살을 찾고, 박박은 한마음으로 미타보살에게 예불을 드렸다.”

* 미륵보살 :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현재 천인(天人)들을 위해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 미타보살 : 아미타불의로 극락세계의 주인입니다. 전생에 법장 비구라는 비구였는데 사바세계 사는 사람들이 고통속에 사는 것을 보고 원을 세우기를 자신이 성불하여 고통없는 세계를 세우겠다고 함

 

476. 3년이라면 수행에 꽤 진전이 있을 기간이다. 군대 3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때서야 총 쏠줄 알 만하니까 제대하더라고 말한다. 우리도 중학교도 3, 고등학교도 3년을 다닌다. 3년이라는 시간은 묘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연구원 1년차다. 3년이 되어야 진전이 있으려나

 

477. 우리 같은 속인으로서는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다.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라던 바임

 

478. 이미 세속을 떠나 3년을 수도하며 근실히 서방정토를 갈구하는 마당에 속인의 욕정만으로 대하지 않았던 듯하다.

출가를 하면 욕정,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478. 부득과 박박이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다.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나는 어느 쪽일까? 아마 부득에 가까우면서 아마 그날 여인에게 유혹당했으리라.

 

481. “내가 눈에 씌운 것이 있어 대성을 만나고도 바로 모시지 못했구먼. 그대는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이루었네. 바라건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만 말아주시게. 부디 함께 가야지?” 옛날의 약속이란 함께 성불하자는 것이었다. 부득은 욕조에 남은 물로 몸을 씻으라고 일러준다. 박박은 무량수 불상이 되고, 두 불상이 우뚝 마주보고 앉았다.

박박은 그냥 인간으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성불이 되었다. 너무 인자하신 부처님이다. 한편으로는 깨달음이 더 커 불상으로 천인(天人)을 더 보살폈을 것이다.

 

484. 그런데 그 속에는 이기적인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기심은 독선만 키울 뿐이요 자비심이란 찾을 수 없게 한다.

 

484. 계율이 인간보다 앞서는, 그래서 매정하게 보이기만 하는 도의 낮은 차원을 일연은 이렇게 표현했다.

 

485.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참 보살행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485 여자를 외딴 암자에 들인 부득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부동심만의 그것은 아니었으리라. 자꾸만 갈라지믄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염불소리는 밤 깊을수록 높아갈 수밖에 없다. ‘심심전(深深轉)’이라는 표현은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문득, 곤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고 있을 가련한 여자를 생각하니, 염불도 한낱 시끄러운 소리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염불로 공덕을 쌓는다고는 하나, 이럴 때의 염불은 손님의 곤한 잠만 방해할 뿐인 것이다. 일연은 그 부득의 그런 마음을 읽어내고 있다.

역시 시인은 시인이네. 시에서 이렇게 깊은 뜻을 유추해낸다.

 

486.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낙산사의 힘

 

487. 어줍잖게 관광 산업을 일으킨다고 버린 것이 절이다. .....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살아남은 곳이 낙산사인가 한다.

어디 절 뿐이겠는가. 뭔가 좀 돈이 된다고 하면 여지없이 모든 환경이 달라진다. 그것이 지자체가 되었든 인근 상인이 되었든 돈을 버는 것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을 하더라도 철학을 하고 개발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

 

488. 그러나 일단 낙산사 경내로 들어서면 주변의 유흥과는 아무 관계없다는 듯, 절은 차분하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가끔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는 관광객들도 웬일인지 경건한 모습이다. 낙산사에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힘일까? 비밀의 열쇠는 다름 아닌 담에 있다고 본다.

 

488.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주택인 우리 집의 경우에도 담이 낮다.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이 오픈성이 좋았는데 이제는 불편하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다. 그리고 마당에서 바비큐를 하든 뭘 하든 사람들이 신경이 쓰인데. 담을 다시 높여야 하나 고민이다. 어찌됐든 담은 필요하다.

 

490. 첫째, 의상 스님이 관음진신을 직접 뵙고, 그가 정해준 자리에 낙산사를 세우다. .... 원효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 자신도 관음진신을 뵈러 왔다가 엉뚱한 경험을 하다.

둘째, 범일 스님이 중국에서 만난 소년을 인연으로 낙산사 가까운 곳에서 정취보살의 석상을 캐내다.

셋째, 의상과 범일 스님이 남긴 관음과 정취보살의 불상 등이 일연 당대까지 전해진 경위

넷째, 이 지역 사찰의 관리자로 와 있었더 조신이 특이한 꿈을 꾸고, 세상의 허무함을 느낀 뒤 오로지 수행만 하다 세상을 마치다.

 

491. 사실 일연이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아 낙산사를 이렇듯 자세하게 소개한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이란 앞서 월정사를 소개하면서 한번 말하였다. 14세 때, 낙산사 가까운 진전사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으며, 22세까지 이 곳에서 머물렀다.

 

492. 더욱이 이 이야기들은 일연이 승려로 살아가는 동안의 어떤 지남과도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마땅히 승려가 가야 할 길, 그러면서도 세속의 인연이 주는 모진 시련, 허망한 세상을 저버릴 수 없다면 그나마 뜻 있게 살아가는 방법- 그런 이야기들이 관음과 정취보살의 친견 그리고 조신의 꿈에 잘 나타난다.

 

495.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 원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도 다음을 기약하거니와, 왠지 그는 의상과는 달리 조금은 조급하고 매사에 덤벙대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496. “제호화상은 그만두시라는 뜻일 것이다. 제호화상은 원효를 가리키지만, “잘난 스님은 그만두시오라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조라고나 할까? 진신을 만나는 데 실패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496. 관음보살이 여성으로 변신하는 경우는 앞서도 보았지만, 원효는 보살의 시험에 여지없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실패만이 아니라 낭패다.

 

496.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런 뜻밖의 만남이 곧 보살과의 만남임을 영원히 모르고 지났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우연의 메커니즘, 사실 우리들의 만남은 대부분 이렇다.

 

496. 의상의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 명명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저자와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498. 무릎을 칠 일, 거기서 애석해 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위기, 원효는 그렇게 인간답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더 나아간다면, 이런 정도? 의상이건 원효이건 어떤 하나의 삶의 방식대로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모델일 뿐이다.

 

499. 그가(도의스님) 수행한, 오늘날 우리가 선종이라 부르는 불교의 한 방식은 당대에 이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종 초기 중국 쪽 사정과 마찬가지로 신라 땅에서도 금기시되거나 폄하 받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의가 때를 기다리며 깊은 산골로 숨은 곳이 바로 진전사다.

 

499. 처녀가 남자와 관계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이야기는 <신약성서>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여기서 또 한번 증명된다. 신화의 공통점

 

504. 강릉 지방에서 범일의 위치는 신격이다. 언제부터인가 대관령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영험있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범일을 모신 성황당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무당들의 굿판이 일 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504. 세상살이의 헛됨을 비유하는 말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단지몽, 중국의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나온 이야기다. 밥이 끓는 솥단지 앞에서 불을 쬐다 잠깐 잠이 든 사이, 온갖 영화와 패배를 맛보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밥이 되어 있었다는데, 한 세상 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더라는 이 절묘한 비유.

 

505. 조신은 승려이기는 하지만 수행을 본업으로 삼는 이판승이 아니라 행정적인 업무를 보는 사판승으로 보인다.

 

505. 황홀한 기분이 되어 사판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살았다. 인간으로 누릴 행복은 그 정도면 충분했으리라.

 

506. 부끄러움의 무게가 산과 언덕만큼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얼어 죽고 굶어 죽으니 살아나갈 겨를도 없는데, 부부간에 사랑이며 즐거운 마음이 들기나 하겠습니까?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돈은 정말 있어야 한다. 사람을 정말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506. 강하기는 여자가 더할까? 냉정히 현실을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여자가 더 빠를까? 구구절절이 가슴을 친다. 조신은 조목조목 올바른 말을 하는 부인 앞에서 기뻐했다, 일연을 적고 있다. 속없기는 그저 남자다. .... 그리고 그것은 꿈의 끝이었다.

 

506. 망망히 세상사는 뜻이 없어지고, 이미 수고로운 인생에 지쳐 마치 백년 고생을 다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이 얼음 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잠잠히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회하는 마음 끝이 없었다.

 

507. 꿈에 게고개에 묻은 아들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행여나 싶어 가서 파보니 돌 미륵상이 나와, 물로 깨끗이 씻어 가까운 절에 모셨다.

 

508.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삶에서 벗어낫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또다른 욕망이 자꾸 생긴다. 아무것도 안되면 어떠하리.

 

운문사 이야기

 

509. ‘의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까? 중국에서 나온 승전에도 한 편의 제목으로 이 말을 쓰고 있고, 일연도 그것을 그대로 본떠삼국유사<의해>편을 만들었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승전에서나삼국유사에서나 이 편의 내용은 모두 고승들의 전기다. 그러므로 의역하건대 고승의 삶정도일까? .... 승전의 애초 목적이 고승들의 전기를 엮는 것이기 때문이다.

 

513.삼국유사의 문장이 난삽한데다 바르지도 않다는 비판은 <의해>편에서만큼 일단 유보되어야 할 일이다. ...... 우리는 <삼국사기><열전>에 승려가 단 한사람도 채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그다지 거론하지 않는다. 원효도 의상도 없다. 아마 일연에게는 이것이 못내 아쉬운 한 가지였으리라.

 

513.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의해> 편의 여러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이런 단점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513. 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종교다. 무릇 2천 년을 바라보는 오랜 역사에다, 거기 누벼진 사연이 많기도 많아, 불교야말로 이성으로만 받아들이는 어떤 형식으로서가 아닌 우리들 심성 깊숙이 내린 튼튼한 뿌리다. 그같이 누벼진 사연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좋은 승려들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우리가 불교의 큰 세 가지를 불법승(佛法僧)이라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로야 그 가운데서도 승이 가장 으뜸 아닐까?

 

514. “원종 곧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킨 다음 비로소 나루와 다리는 놓았으나 진리의 집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진리의 집을 가장 먼저 지은 이는 누구인가? 일연은 그를 원광이라 생각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가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의 진수를 체득해 온 해동의 처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514. “진나라와 수나라 때 우리 나라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불교를 배우러 간 이가 드물다. 설사 있더라도 크게 떨치지 못했는데, 원광의 다음에는 발꿈치를 밟으며 공부하러 간 이가 휘날렸다. 곧 원광이 길을 연 것이다.”고 못박고 있다.

어느 시대에든 선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다.

 

515. 본디 유학과 도학을 배웠으나 좀더 깊은 공부를 위해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쪽 진()나라에 왔다가 불교를 만난다. “평소 세상의 경전에는 익숙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통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교 공부를 하자 도리어 썩은 풀 같았다. 헛되이 유교를 공부하는 것이 실로 생애의 두려움으로 다가와드디어 출가한다. 곧 중국에 와서 승려가 되었다는 말이다.

 

516. 고국 신라 땅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일만 아니라 나라의 중대한 정책에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문서를 작성하는 일 또한 그에게 맡겨졌다.

오늘날도 치면 유학을 간 셈이니 오히려 승려가 되는 것이 출세의 가장 빠른 길일수도 있겠다.

 

521. 기실 원광은 오늘날의 일반인들에게 세속오계를 지은 승려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세속오계는 다분히 유교의 삼강오륜에서 오륜과 닮아 있다.

 

523. 육재일(六齋日)과 봄과 여름에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때를 가림이다. ..... 필요한 만큼만 하고, 너무 많이 죽이지는 말아야 하리니, 이것이 세속에서 좋은 계이다.

전쟁은 비록 죽고 죽이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전쟁과는 달이 인간적인 면이 있는 전쟁이다.

 

527. 고단한 왕의 곁에서 마음의 안식을 주어야 하는 일이 일연에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운문사는 끝내 일연의 마지막 거처로 기록되었을 터다. 대체로삼국유사의 편찬이 이 절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 자신이 거처했을 뿐만 아니라삼국유사편찬의 첫 발을 내디딘 곳으로서 운문사는 일연에게 다른 어느 절보다 깊이 각인되어 있다.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530. 세상에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것과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지구는 자전을 하면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은 사람이라고. .... 원효를 관형(冠形) 하기를 성사(聖師)’라 한 것이다. 같은 <의해>편에서 일연은 의상에게 법사(法師)라 하고, 자장에게 율사(律師)라 했다. 세 분은 신라 불교를 대표한다.

 

530. 의상의 관형어가 화엄을 전한 분, 자장이 계율을 정한 분이라고 해석해도 좋다면, 성사는 무슨 뜻일까?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불교의 최고 경지를 이룬 분이라 해야 할까?

 

531. 그러나 원효는 요석공주로 하여 파계하야 설총을 낳았다. 그는 어찌하여서 파계를 하였던가. 성승의 파계 그것은 큰 사건이다. 오늘날까지 해답 못 된 문제다.

 

531. 신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위인이라 치켜세운 원효에게 결정적인 흠이라면 파계요 그것은 인간적 고뇌라 말하는 춘원의 저변에는 사실 자진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에게 파례라면 이광수에게는 변절이 있다.

 

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그러나 미로를 헤매지 않으며 오해를 무릅쓰면서, 사람이 살다 보면 당할 문제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기란 쉽지 않다. 원효는 그것을 감당했고, 그 같은 전범을 뒷사람에게 남기고 보여준 사람이다.

532. 경북 경산시 압량면에는 삼성산이 있다. 원효, 설총, 일연이 모두 이 동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삼성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533. 적어도 일연은삼국유사안의 곳곳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원효야 내가 알만큼 안다는 식이다.

 

535. 자루 빠진 도끼라는 비유야말로 얼마나 기이한지, 여성을 상징함과 아울러 본디 자루가 있었음을, 그러니까 지금 혼자되어 사는 여성임을 동시에 말한다.

 

536.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 낳은 아들이 설총이다.

설총은 신라의 10명의 현인 중에 한명이 되어 다행이다. 아비를 알고 자신이 태어난 과정을 알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텐데 그것을 이겨냈다. 주위의 시선도 극복하고.

 

537. 속과 성의 경계를 마음대로 드나들고자 했던 원효도 요석공주와의 사랑이며 설총을 낳은 일에 초연할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스스로 파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그를 부정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극복되는 초월의 단계. 원효가 오늘날의 원효가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537. 요석공주와의 만남, 불교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파계다. 하지만 원효에게 그것은 이미 원효인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 부정 다음에 원효는 아닌 원효로 거듭난다.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너무 원효에 대해 좋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고승이고 나이도 제법 있을 때인데 파계를 선택해야 할 만큼의 무엇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538. 농사꾼에다 하급 기술자, 나아가 저 짐승들에게까지 부처님의 이름이 퍼졌다는 이 놀라운 광경, 그것은 원효가 만들어 낸 절묘한 전파 방법 덕이었다.

 

539. 오어사는 신라의 열분 성인중 의상, 원효, 혜공, 지장이 수도했다고 하는 이름난 절이기도 하다.

신라의 열분 성인 :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아도, 염촉(이차돈), 혜숙, 안함, 의상

 

541. 원효는 똥으로 나오고 말았지만 혜공은 물고기가 그대로 살아나와 헤엄쳤다고 말한다. 조연으로 나오는 해동 불교 좌장 원효의 완벽한 한판패다.

 

542. 한마디로 말하면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546. 분황사는 만년의 원효가 거처한 곳이다. 그런 인연에서일까. 지금 경주의 분황사 정문에는 원효사상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이건 내가 못 본 것인데. 다음에 갈때는 꼭 한번 가야겠다.

 

548. 하늘을 괼 아들을 얻으려 세속의 인연도 마다 않은 원효의 큰 뜻을 생각하는데,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의상, 화엄의 마루

 

549. 원효와 의상이 중국 유학 길에 겪었다는 해골바가지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거기서부터 두 사람은 때로 라이벌로 때로 동업자로 한 길을 가는 것이니, 오늘날까지 절이면 절마다 원효가 세웠다느니 의상이 세웠다느니 그 유래담을 말할 때 두 사람을 걸고넘어지지 않는 경우가 드문 데에서 그 깊고 오랜 관계를 실감한다.

 

551. 다시 서른일곱 살의 의상은 중국을 향하였고, <승고승전>이 말하는 해골바가지 사건은 두 번 가운데 딱히 어느쪽인지 분명치는 않다.

 

551. ,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았네.

 

552. 그러나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라고, ..... 의상은 그런 사람이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귀신 따위로 마음을 흩뜨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부터 원효와 의상은 서로 가는 길이 분명히 달라졌다.

 

565.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다. 원효의 현실주의를 앞서 소개했거니와 의상의 교조주의 또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결코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닌 까닭이다.

 

567. ‘솥 안의 국 맛은 한 점 고기로도 충분하다고 일연은 의상의 저술을 평했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본 눈맞은 석등과 안양루야말로 부석사를 맛볼 수 있는 한 점 고기.

 

568. 불도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 이 법사란 말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태도가 함의된다.

 

568. “무성한 꽃들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은 봄이로다.”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무성한 꽃들이란 화엄의 세계를 말한다. 지상사가 있는 종남산이나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이나, 의상의 전교로 인해 같은 화엄의 세계가 펼쳐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569. 인도의 자연과 인도인의 성품에서 강렬하게 인상을 받는 그 천연스러움 또는 한가로움 같은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 스타일의 충격, 아니 그보다 더 심한 한반도의 살아 있는 액션 영화만 보다가, 오히려 그 정반대의 상황이 역으로 충격적이었다고들 했다.

정말 인도를 그렇게 봤다. 그러나 뉴스에서 보여지는 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폭력을 보면서 충격적이었다. 인도를 가기 겁이난다.

 

569. 힌두 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 세상의 영화보다 저 세상의 부귀를 더 갈망하는 그들의 심성 속에서는 헛된 세상의 욕심을 버린 지 오래고, 심지어 고통스럽게 사는 이 세상을 더 달가워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된다.

가장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이 행복해야 하는데 죽고 난 다음에 천국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리 종교가 사람들의 불안을 먹고 산다지만 이런 것을 보면 화가 난다.

 

570.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다스릴 목적으로 혹시 그렇게 길들여 놓지나 않았을까?

카스트 제도도 공식적으로 없어졌다지만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힌두교가 없어지지 않는다면 모를까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종교가 생겨나고 그 종교가 오래 지속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571. 오천축국이란 인도 북부 지방에 있었던, 부처님이 나신 나라를 비롯하여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중천축국과 동서남북의 넷 그래서 오천축국이다.

 

574.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580. 끝없는 사막 길에 외롭게 순례하는 승려는 마치 망망대해에 뜬 조각배와 같을 것이다. 그것을 달이 떠가는 것에 이중으로 비유를 했다. ..... 떠가는 마음과 언젠가는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이 대조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581. 중국의 남방 불교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일찌감치 미륵 신앙이 바다 건너 들어오고 있었던 것은, 저 충청남도 태안과 홍성의 마애미륵불상 등을 통해 증명된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일은 그 꽃이라 할 것이고.

 

583. 백제 불교의 진수는 미륵 신앙이다. 진표는 옛 백제 땅 김제 금산사에서 미륵 신앙을 다시 한번 일으킨다. 지금도 금산사는 미륵 신앙의 성지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586. 먼저 <점철경>이다. 이 경의 본디 이름은 점찰선악업보경이며, 중국의 수나라 때 보리등이 번역하였다고 한다. 지장보살이 말세의 중생을 위해 지은 것으로, 자신의 업보가 어떤지 점치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은 지장보살 신앙과 깊이 연관된다.

 

586. 그렇다면 지장보살은 누구인가? 지장은 대지의 태(), 곧 땅 속에 묻어 있는 어떤 것이다. 땅이 지는 덕을 의인화하였다고도 하는데, 지장보살은 현세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과 함께, 죽은 이들의 구제자가 된다. 특히 죽은 이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는 이 보살에게 빌어야 한다. 지금도 절에 가면 명부전이라는 불당이 있은데 거기서 바로 이 지장보살을 주부로 삼는다.

 

587. <점찰경>에서 말하는 점치는 방법이 탐참법이니 박참법이니 하는 것들이다.

 

587. 탐참법을 통해 바라본 자신의 죄업을 씻기 위해 박참법의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박참의 수행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이다.

 

593. 진표에게 미륵 신앙이 중심이라는 점 분명하다. 금산사로 돌아온 진표가 절을 다시 짓고 불상을 만들 때 미륵보살이 또 한 번 도솔천으로부터 내려온다. 오늘날 금산사가 미륵 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596. 무릇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 진표에게도 불심과 효심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으리라.

 

601. 절에서 만난 스님 한 분은, 수도가 들어오자 샘은 빨래터로 전락했고, 얼마 안 있어서 그나마 절 안팎에 콘크리트 포장을 하면서 묻어 버렸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했다.

이런 바보 같은 스님 같으니라고 자기가 다니는 절에 대한 유래부터 모른다니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601. 샘은 이 절이 생겨난 유래와 성격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다. 없던 것도 만들어 놓을 바에 있는 것마저 없애 버린 처사가 너무 무작스러워서, 속으로 점찰법회 자리에 웬 역사여래람?’ 이렇게 중얼거리며 산을 내려온 적이 있었다.

 

602. 미륵 신앙은 크게 상상 신앙과 하생 신앙 두가지로 나뉜다. ..... 때때로 미륵보살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하다는 신앙이 하생 신앙이고, 근실히 수행하여 미륵보살이 계시는 도솔천으로 올라간다는 신앙이 상생신앙이다. 상생 신앙은 미타 신앙에서 서방정토를 찾아 극락왕생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미륵 신앙에서의 본령은 상생신앙보다 하생신앙에 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미륵불입네 자처하고나서는 사람들은 이 하생신앙을 잘 이용한 것이다.

 

밀교의 한 자락

 

603. 삭발한 승려를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슬픔부터 느껴진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 출가는 그 번뇌로부터의 떠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자체가 슬픔이다.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그러기에 출가는 번뇌로부터의 결별이면서도 오히려 슬프게 다가오는 것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는 있다.

 

604. 혜통은 다름 아닌 밀교 승려다. 우리는 밀교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과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법통을 달리할 뿐 불승에서 다르지 않고, 어떤 면에서 그들이 민간의 생활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이다. 운명적으로 인생의 신고를 겪었거나, 일부러라도 겪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거나, 사람이 이를 수 있는 무상의 경지를 추구해 가자는 데 더 철저하다면 철처한 것이 밀교다.

 

604. 다만 더 극적이어서 가치가 높다는 말은 아니다. 평범한 속에서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깨달은 무상의 존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605. 밀교는 같은 불교이면서도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 사실이다. 밀교의 기본 경전인 <대일경>에 따르면, 수행의 10단계가 있는데, 거기서 9단계까지를 현교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단계를 밀교의 세계로 규정한다. 현고는 드러난 불교, 밀교는 숨어있는 불교랄까, 누구나 쉽게 보이는 세계속의 불교가 현교라면 깊이 숨어 은미한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가 밀교일 것이다. 어쨌건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의 세계를 거쳐 최후에 이르는 세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일반적인 불교를 포함하면서 거기에 넘어선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말이 이 때문이다.

밀교는 이단같아 보이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구나. 자기 세계를 구축한다는 말이 다가온다.

 

607.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는 해설을 통해 대충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만 여기 단 한번 나오는 지은이 이름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삼국유사의 저자를 일연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사실일 중요하다. 만약 이것마저 없었다면 이 책의 저자를 찾는데 무척 애먹었을 것이다. 다른 역사 사료뿐만 아니라 일연의 생애를 기록한 비문에도 이 책의 이름은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이렇게 버림받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의 눈 밝은 사람이 필요한지 모른다.

 

612. 신통력을 미끼로 헛된 이름을 팔거나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것은 밀교의 본령이 아님을 분명히 q여 주자는 것이다. 일연은 밀교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616. 중국의 이무기가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된다. 환생담은 물론 기본적으로 불교적 발상이다. ..... 다만 무대가 중국으로까지 넓어졌다는 데 다른 점이 있다. 이야기를 통해 은근히 중국을 비판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삼국유사찬술 당시가 몽고와의 오랜 전쟁 기간이었음을 감안할 때, 결코 억지로 갖다 붙인 것만은 아니었다.

 

619. 명랑이 이 때 썼던 비법이 문두루(文豆樓)였던 것도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결국 그가 신인종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대목은 신라에서 밀교가 공인되고 조직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620.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나선 조선조의 정치 이념에 따라 한국의 불교교사는 잠시 주춤한다. 그런데 이 때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쪽이 점철법회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연도 이 같은 부류로 나눠직, 그에 따라 일연에 대한 관심이나 샂거이 인멸되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623.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 이름없이 살다간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불교를 매개로 진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625. 이 곳의 유지들이 미타사를 세우고 서방정토에의 왕생을 빌었다는 대목은 곧 신라 불교의 미타 신앙을 그래도 보여준다. 미륵 신앙과 대칭되는 점에 서 있는 미타 신앙의 정토왕생 신앙은, 현세에 복락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내세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마음의 소산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실 정토 신앙은 번성기의 유복한 사람들에게 퍼지게 마련이다.

 

626. 안양이란 곧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안양문은 극락으로 가는 문이다. 극락에 계신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법당의 입구에는 이처럼 안양문을 세우기도 한다. 불국사에도 안양문을 지나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 있다.

 

627.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 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 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628. 염불을 통해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은 신라 사회에 널리 퍼진 대표적인 불교 신앙 형태였다.

 

628. 계집종의 성불에 자극을 받은 귀진은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그것은 껍데기가 아닌 진짜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신라 사회의 힘이다.

 

629. 천리를 가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알아보는 것이지요. 이제 스님을 보니 동쪽이라면 그렇다 하되 서쪽은 알 수 없겠습니다. .... 광덕은 치밀하고 정성스레 예불하여 목적한 바를 이룬 점에서 의상을 닮았다면, 엄장은 실수 투성이의 원효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더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630. 사실 광덕은 모진 사내다. 밤마다 아내를 제쳐놓고 단정히 앉아 한결같은 소리로 아미타 부처님만 불렀으니 말이다. .... 아내는 분황사의 계집종 출신, 그러나 아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그만큼 깊었던 까닭이다. 그런 광덕을 부인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광덕보다 그 아내가 대단하고 보살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광덕은 진정 행복했을 것이다. 자기 욕망대로 사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630. 엄장은 현실적인 사내다. 엄장은 광덕의 죽음을 알고 찾아가 장례를 치르고 그의 아내를 거두어 왔다. .... 광덕과 달리 세속의 인연만을 생각하는 엄장을 준엄히 꾸짖었다. 우리들의 주인공 엄장의 극적 전환은 여기서 이루어졌다.

 

632. 광덕과 엄장의 성불은 한결같이 여자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앞서 소개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처럼 위 예의 여자도 관음보살의 현신이다.

 

633. 그러나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회한과 눈물로 범벅이 된 엄장은 원효 스님에게 달려가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가르침을 물었다고 한다.

 

636. 절의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를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637. 절에 가면 산신각이니 칠성각이니 삼성각같은 이름을 붙인 자그마한 건물이 있다. 이름에서도 바로 알 수 있지만, 전형적인 불교의 성격을 띤 건물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불교가 민간신앙과 만나 이룩한 특이한 면모다. 특히 산신각이라 이름 붙인 건물에서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당당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의 그림을 보게 한다.

 

637. 산에 절을 두니 그 산을 지키는 신령도 모신다. 그런 까닭으로 절과 호랑이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638. 부처님의 전생담에 보이는 것처럼 호랑이는 도움을 받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어떤 경우에 나오고 있으니, 해악을 끼치는 동물이 아니다.

 

643. 처녀 호랑이의 바람은 단 하나, 자신을 위해 절을 지어달라는 것인데, 이로 인해 절에는 호원사(虎願寺)라는 이름이 붙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사찰 연기 설화로 분류된다.

 

644. 그것도 불교적인 내용과 거의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이렇듯 장황히 늘어놓은 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649. 행복한 생활은 어떤 파국을 향해 간다. .... 부인의 시에서 뭔가 비극의 복선이 깔리는 것을 유리는 알 수 있다. ...... 그렇게 신도징은 현명한 부인에다 총명한 아이들까지 얻어, 행복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비극의 복선이란 바로 부인의 시 가운데 나오는 산중에 둔 뜻이라는 대목일 것이다.

부인으로서 역할을 만족 못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면서 여성들에게 용기를 잃지말고 가고 싶은 길을 가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650. 호랑이는 결국 호랑이 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652. 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방법이고, 김현이 탑돌이에 할 수 있는 한 온 마음을 다하는데 감동하여 적이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일 따름이다. 그 때에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마땅하다.

 

652. 탑돌이의 공력으로 부처님이 보낸 호랑이를 만났다는 식으로 말이다. 한갓 짐승이 할 일이 아니요, 세상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로 말이다..... 불교의 의미망을 벗겨내고 나면, 분명코 김현이 호랑이에게 감동된 이야기이지 않을까?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653. 절의 이름은 망덕사. ..... 본디 당나라 황실을 위해 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지으면서, 당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사천왕사라고 둘러댄 바로 그 절이다.

 

655. 남산에 숨겨진 신라 사람들의 심성을 보물찾기하듯 하나씩 찾아내는 재미에 남산을 자주 찾게 된다. 1999년 가을에는 해 떨어질 때까지 어정거리다가 더듬더듬 내려온 적도 있다.

남산. 진짜 괜찮은 산이다. 올라가는 길도 여러 가지이고 아이들과 가도 될만큼 길이 잘 되어 있다. 나도 좀더 남산을 자주 찾아야 할 것 같다.

 

656.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순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656.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가에서 외치듯이 기도하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은 말한다. “하늘나라에 이르거든 하느님은 저들을 결코 모른다 할 것이다.” 그리고 첨언하지 않았는가, 골방에 숨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에게 하느님은 다올 것이라고.

 

657. 그러나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도 만남은 만남이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 만남을 뒤에라도 만남인 줄 알면 그렇다. ....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절을 짓고 공양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우리에게는 더 많고, 또 소중하지 않은가?

 

657. 사실 바위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는 민간 신앙의 전통이다. 큰바위 앞에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 드리는 할머니, 그것은 이 나라 어디를 가든 볼수 있는 광경이고,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민간 신앙의 한 형태이리라. 그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넣은 것은 민간 신앙과 불교의 절묘한 만남이었다. 남산의 불상은 거의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659. 주인없는 바위에다 자신의 불심을 새긴 마애불을 하나 남긴 것으로, 살아 보람 있는 일 하나 했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659.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흐릿한 선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나머지는 불상을 보러 온 사람이 완성시키라는 조각가의 배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660. 근사하게 차려 입어야 사람 대접받는 것은 지금 세상이나 예나 마찬가지, 효소왕이 걸려 넘어진 것은 그런 겉모습에 집착한 데 까닭이 있었다.

 

663. 100권으로 이뤄진 이 경저의 4권에 이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때로 일연이 제시한 출전을 찾아가 확인해 보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663. 왕이야 정치적인 인물이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명색이 대덕의 소리를 듣는 스님이 저지른 실수는 오히려 더 커서, 일연의 비판 또한 준열하다.

 

664. 삼랑사는 경주 시내에 있던 절이다. 앞서 정수 스님의 이야기에서도 나왔던 절이지만, 지금은 경주시 성건동에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와우~ 여기가 우리집 바로 옆인데 그걸 몰랐네. 진짜 새롭다.

 

664. 그가 비록 국사의 자리에 앉아 속인들이 보기에 위엄찬 승려였을지 모르나, 속에는 뭔가 남은 문제가 있었다. 거기서 후반부 이야기가 이어진다.

 

666. “큰 성인께서 오셔셔, 내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에 주의를 주셨구나.” 그런 다음부터 끝까지 말을 타지 않았다.

 

666. 첫 번째 관음보살이 나타나 경계를 주었는데도 깨닫지 못하니, 다시 문수보살이 출동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경흥은 행복한 사람이다. 남들은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진신을 두 번씩이나 뵈었으니 말이다.

 

667. 그 본연의 신분이 승려이므로 스스로 경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다른 관료들처럼 위엄차게 행차하는 풍경은 도저히 덕이 되지 못할 일이요. 그것 하나로 끝나지 않고 무릇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런 데 바탕을 두고 있다면, 진정한 구도자의 길과 사표가 되는 데서 멀어지는 것이리라. 하나를 보면 열을 알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668. 일신의 안락만을 구하는 승려들의 추한 모습을 <고려사>의 한 구절은 이렇게 증언해 준다.

왕이 경주에 행차하였다. 하승과 비승배들이 능라를 가지고 여기저기 뇌물을 바쳐 관직을 얻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은 나선사요 능수좌라 일컬었다. 여자를 얻어 살림을 차린 자가 절반 이상은 되었다.”

 

668. 불교의 법을 섬기면서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탑이 즐비하게 서고,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군대와 농업은 점차 줄어들어 나라가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찌 어지러워 망하지 않으리요.

 

670. 사실 고려는 기본적인 국가 체계를 유학의 이념에 두었다고 해야한다. 불교의 권위는 여전했으되 신라만큼 그렇게 철저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런 사회의 종교는 오히려 더 타락하기 쉽다. 헛된 권위만 살았을 뿐 책임 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좋은 것만 택하고 힘든 일은 하지 않는다. 일연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듯이 모든 종교가 종교의 존재와 역할을 항상 알고 있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을 경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선을 넘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670. “내가 마땅히 내세의 염부제에 태어날 것인데, 먼저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들을 데려갈 것이로되, 말을 탄 비구들은 제외한다. 부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계하지 않아 되겠는가?

 

670. 문제가 생길 때는 신라가 그랬고 고려가 그랬듯이, 성인의 가르침도 소용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다. 지금 우리 시대의 풍속은 거기서 얼마나 멀까? 성인조차 나타나지 않은,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경계 삼을 사표를 세울까?

 

숨어 사는 이의 멋

 

671. ‘피은은 피세은거, 즉 세상을 떠나 숨어 사는 것이라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671.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까지 우리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을 다시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그 때까지의 불교는 사회의 전면에 나서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찰의 경우, 그것이 어디 있는냐에 따라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으로 나눠 보지만, 고려시대까지 두 가지 사찰은 비슷한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조선조 이후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이 확립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671. 산지가람과 평지가람의 공존에서 산지가람 일변도로, 이것은 불교가 사회전면에 있느냐 배경으로 밀리느냐를 설명하는 좋은 예다.

 

672.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물론 사찰이 산에도 있었듯이 세상과의 완벽한 절연 속에 살아간 승려도 많았다. 그런 그룹들을 다루려는 것이 바로 이 <피은>편이 아닌가 한다.

 

671. 불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물계자도 포함되어 있다. 물계자는 전형적인 유교 이념의 은둔자이고, 신충은 유교에서 불료로 전향해 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연은 이 편에서, 불교만이 아닌 여러 가지 모양의 피세은거를 소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671.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모정의 세월이다. 누군들 거기서 벗어나 홀로 한 길을 가고 싶겠는가. 그런데도 그 길을 간 사람들에게는 뭔가 곡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671. 불교에서의 숨음은 이와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만 해서 은거가 아니다. 또 드러냈다고 해서 드러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교적 인식의 숨음과 드러남을 이해하자면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 사고가 필요하다.

 

674.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인심이다.

 

675. <법화경>을 염송하는 승려들은 죽은 다음에도 혀가 썩지 않았다느니, 심지어 혀가 계속 <법화경>을 염송하더라는.

 

678. 숨어 산다면 바로 이런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그런 이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누린 즐거움이랄까를, 일연은 부러운 듯 그리고 있다.

 

682.삼국유사는 일연이 곳곳에서 머물 때마다 써 둔 메모들의 집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685. 연회스님, 까불더니만 정통으로 맞았군. 그리고 그 미소 뒤에 다가오는 깨달음

 

686. 변재천녀는 불교에서 보이는 최고의 여신이다. .... 결국 연회는 왕의 사신이 찾아오자 제 업으로 받아야 할 줄 알고, 부르심대로 궁궐로 가서 국사에 임명되었다

 

불교가 보는 효도

 

687. 승려였던 일연이 효행이 뛰어난 사람들의 일생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먼저삼국유사가 단순한 승전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지은이의 신분상, 그리고 그 시대의 성격상삼국유사가 불교적인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고, 글을 써나가는 관점도 불교적인 그것에 가깝지만, 거기에 국한하여 이 책을 썼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687. <탑상>편은 그 자체로 불교 사료이지만, 다른 한편 불교의 사적을 재료로 한 당시 역사의 재구성이라 할 만하다.

 

687. 그런 까닭에삼국유사가 불교문화사적 역사와 설화의 모음이라고 한다면 모르되, 승전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책이거나 거기에는 그 책만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삼국유사의 이념이 불교일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일연 개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효심이다. 그의 생애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척 큰 역할을 하고 있다.

 

690.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일연의 나이는 79세였다. .... 목주 출신의 그를 사모하여 목암이라는 호를 지었다는 것이나, ...... 효심은 일연을 일연이게 한 주요한 요소다. 바로 그 같은 효심의 결저잉 <효선>편에 집약되어 있다.

 

692. 다만 배불리 모시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편하게 못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694.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인 불국사와, 가장 신비스런 불상인 석굴암을 지은 사람이 김대성이다.

 

699. 그래서 지금의 부모 두 분을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지어, 신림과 표훈 두분 성사를 불러다 각각 지내게했다. 게다가 더 많은 불상을 세워, 길러준 노고를 갚았다.

 

699. 복을 빌어 받되 받은 다음에는 제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700. 장가들 형편도 못 될 만큼 가난한 살림살이, 진정은 홀어머니를 두고 부역에 나가랴 품 팔아 양식 대랴 틈이 없다. 그런 그에게는 출가하여 높은 도의 경지에 오르고픈 아름다운 뜻이 있다. 다만 늙으신 어머니가 걱정일 뿐.

 

701.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하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703. 일연은 어머니가 돌아가시 전, 서울에서 국사의 자리라는 호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곁에 두고 모시겠다는 일념 하나로.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704. 일연이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 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삼국유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704. 재래 신앙과 불교 신앙이 조화하여 신라인의 독특하고 탁월한 불교 문화를 창출해 낸 것이다. .... 신라사람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노는 고급의 문자 수단인 한문을 두고 왜 굳이 향찰을 만들었을까?

 

705.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원왕생가>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706. ‘처용랑과 망해사조에서 <처용가>가 빠지면 처용의 심리 상태나 역신이 처용에게 굴복하는 이유가 불분명해진다. ‘무왕조에서 <서동가>가 빠지면 어떻게 하여 선화공주가 궁중에서 쫓겨나게 되는 지를 알 수 없다.

 

707. <제망매가>는 누구나 공감하는 향가의 최고 작품이다. ....... 일연의 개인적인 성향인 시취미가 크게 작용한 결과다. 시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식견으로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삼국유사속에 실은 것이다. ....... 이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 시가의 한 시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논의하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니 아찔하기까지 하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도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

저자도 좋은 시를 알기 때문에 일연의 시를 보고 감동하여삼국유사쓰게 되었다. 나에게 시란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도 좋은 시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워야겠다.

 

709. 현존하는 향가의 작가는 화랑이거나 화랑 출신의 승려 또는 승려가 압도적으로 많다. ..... 이는 화랑과 승려 사이에 어떤 함수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 신라의 통일 이후 상당수 화랑들이 승려가 되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709. 지금 전해지는 향가는 대체적으로 불교적인 사상이나 정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 한마디로 말한다면 향가는 서정시다. 개인의 일상이 개인의 정서 속에서 부딪혀 형상화되어 있다. 여러 가지 소재나 주제가 얽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향가는 일상사의 개인이 부르는 곡진한 노래다.

 

710. 신라시대에 시인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그룹은 화랑이었고, 특히 그들 가운데 승려가 된 자들이다. .... 다만 같은 화랑출신이라 해도 관계에 나가 화려하게 출세한 이들은 여기서 제외되며, 현세에서 박탈된 사람들이 시인이 된다.

계급이 신분이 없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승려일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이 승려가 될려고 했을 것이다.

 

712.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714. 이 노래는 그 때 흙을 나르던 사람들이 일하면서 부른 것이다. 용도가 그랬으므로 전형적인 민요, 그 가운데서도 노동요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노동요다. 노동요는 일할 때 부르는 민요다. 힘든 일을 하다 지치고 괴로울 때 부르는 노래는 위안을 준다.

 

714. 서방정토를 간절히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공덕을 쌓아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저버리지 못한다.

 

718. 건달파는 건달바심을 이르는 신기루다. 신기루를 보고 왜군이 왔다고 호들갑을 떤다든지, 산행 오는 화랑을 맞으려는 달이 무심히 떠있는데 사라진 혜성을 두고 뭐 그리 놀라느냐는 표현은 곧 변괴를 두려워 말라는 융천사의 차원 높은 응원이다. 출전하는 세 화랑에게 써준 격려의 노래이다. 그러기에 표현은 씩씩하고, 자잘한 일에 얽매지 않은 호쾌함이 있다.

 

일연, 혼미 속의 출구

 

723. 이제는 진정된 감이 있지만 한때 일연에 대한 평가는 너무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과장되기로는 그가 민족의 명운을 개척이라도 한 사람처럼 떠받들린 부분인데, 가뜩이나 존경할만한 인물도 적은 판에 그것은 차라리 위로 삼아 해보는 일이라 해도, 뒤틀린 생각을 가지고 까닭 없이 폄하하는 일은 못마땅하기 그지 없다.

 

724. 해박한 불교사학자인 그는 이미 중국의 선종사를 저술한다음, 한국의 선종에 대해 경외로움을 표시하면서, 방대하고 치밀하게 우리 선종사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였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일본인이 선편을 잡은 우리 선종사라는 점에서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 우리 선종이 중국에서 전래된 사실은 분명하나 연장이니 직수입 같은 극단적인 표현은 눈에 거슬린다. .... 우리는 단순 수입이 아닌 이미 자기화한 어떤 사상의 고갱이를 발견하다.

 

724. 그가 제기한 문제점은 세 가지다. 일연이 시대의 사조에 빠졌다는 것, 사상과 신앙 모두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가지산문의 현풍을 떨치기에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725. 제도권 속의 승려들은 권력을 탐해 이미 본분을 잃은 행동으로 백성들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으며, 그 자리를 대신해 밀교에 배경을 둔 이단적인 불교가 들어와 차지했다.

 

725.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726. 스물두 상에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고 전란기의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올곧은 수도 생활을 계속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차례 올랐다.

 

726. 마흔네 살에는, 당대의 실력자 정안이 남해의 개인 집을 내놓고 정림사를 만들었는데, 그 곳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된다.

 

726.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이름에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있다. 일연은 1281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 것이다.

 

729. 책의 서문에서 일연은, 쉰하나 되던 해 윤산 길상암에 주석하여 한가한 시간을 얻자, 평소 꿈꾸어 오던 일을 했다고 적고 있다. ..... ‘평소 꿈꾸어 오던 일이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비록 선종사의 중요한 일면을 차지한다고 한들 자신의 산문과 상관없는 책을 편찬하고자 꿈꾼 그의 뜻은 무엇일까?

 

733.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733.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733. 새로운 시대상을 창출한다는 명제 앞에서 다른 산문의 경전을 해석하는 일이나 다른 산문의 고승을 스승으로 삼는 일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거기에 가르침의 본질이 있다면 가서 배워야 하고 그 업적을 널리 현창하여야 하는 일이다.

 

734. 한편 지눌은 사자산문에서 출발하였지만 수선사를 결성할 때에 이미 산문의 울타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일연은 그것이 정당하다고 보았기에 산문의 같고 다름을 의식하지 않았던 듯하다.

불교에서도 주류와 비주류, 파벌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734. 일연에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은삼국유사의 편찬이다. 내외적으로 불어닥쳤던 거대한 변화의 조류은 필연적으로 전통적 사고방식의 해체를 가져왔는데,삼국유사는 그같이 변화된 모습을 담는 그릇이었다.

 

734. 중국을 주인의 나라로 모시며 언감생심 큰소리 한번 치지 못했던 작은 나라들로서는, 저마다 자신의 정체를 찾아갈 계기가 여기서 마련된 것이다. 거기 고려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736. 예악과 인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괴이한 힘을 부리거나 이름없는 잡신들을 들먹이지 않는다는 말은 <삼국사기>의 기술태도를 요약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에서 마련된 전범이다.

 

736. 중국은 분명 이중의 전범을 가지고 있었다. 예악과 인의를 내세우기는 표면적 전범이요, 신이한 현상을 통한 합리화는 이면적 전범이다. 표면적 전범은 중국이 민중을 다스리거나 변방 민족에게 요구할 때 쓰던 형식적 전범이었다면, 이면적 전범은 권력의 질서를 세워나가는 데 유리한 내용적 전범이다.

 

738. 그러나 상황이 변화한 다음, 민족의 주체성에 눈을 뜨고 중국으로부터 오는 힘에 공백이 생겼을 때, 변방의 민족들은 이면의 전범, 내용의 전범으로 눈을 돌렸다.삼국유사는 우리 나라에서 그 같은 경우를 보여주는 증거다.

 

738.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지존의 극치다.

 

738. 이른 삼국 시기에 한문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고 하나 그 문자체계가 매우 복잡다단하여 우리로서는 쉽게 익혀 쓰기가 곤란했다.

 

739. 논리적인 사실만 기록하는 산문보다 정서적이며 주관적인 개성을 표현하는 시에서 더욱 그러했다. 한시를 배웠다고는 하나 그 운율의 다단한 활용을 체득하고, 정서의 미묘한 부분을 묘사해 내기란 어려웠다.

 

739. 연구자들은 차자표기법이 자국의 인명, 지명 등의 고유 명사를 표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본다. 게다가 산문과 달리 운문은 내용과 함께 형식이 중요하므로 형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조건인 문자 체계의 성립은 필수적이었다. 그렇다면 향가의 탄생은 차자표기법의 고안 곧 향찰의 발생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741. 승려가 범어로 주문을 외우지 못함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경덕왕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두 사람이 취하는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741. 민족적 정서를 그 고유어로 가장 잘 드러낸 시 그것이 향가이고, 일연은 이 점을 가치있게 보았던 것이다.

 

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와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터이다.

 

741.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사진 찍기는 참 재미있다.

 

742. 우리에게삼국유사는 깊은 밤 외딴 산길 멀리서 흔들리는 불빛 같은 그런 존재였다.

 

743. 차가 없으면 무작정 걸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7백년 전으로 돌아가 일연도 걸었을 그 때 그길을 그려보기도 했고, 탑만 남은 빈 터네 절을 일으켰다가 허물기도 수 없이 했다.

 

743.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불빛과 노란 가로등 불빛에 처연히 빛나던 분황사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온갖 번뇌에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켜 내는 의상의 순결한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 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짝사랑

 

744. 솥 안의 국맛을 책임지는 특별한 한 점 고기같은 사진 만들기. 희망사항이다.

남은 내 인생을 책임지는 한 점 고기는 어떤 고기일까?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에 대하여

 

부제목들이 너무 좋다. 시인인 저자의 감각이 느껴진다. 이를테면 밤에 찾아오는 손님”, “첫 성전환증 환자등 내용들과 제목이 잘 어우러져있다.

 

보완이 필요한점

 

1. 문희라는 장에서 굳이 어린시절 미워도 다시한번이라는 영화내용이 필요했을까? 그 문희랑 이 문희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사족에 불과한 부분이다.

 

2. p.398 毛郞宅裏梅 毛郞宅裏梅(선착모랑댁리매) 모례네 집 매화꽃에 먼저 피었네.

인터넷에서 몇차례 찾아보니 나타날 가 아니라 도착할 이었다. 저자의 실수로 봐야 할까?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 등)

 

1. 삼국사기와의 비교를 통해 비록 삼국사기를 읽지는 못했지만 어떤 내용이지를 짐작할 수 있고 삼국유사와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비교함으로써 두 책의 자연스러운 비교가 가능하게 해준다.

 

2. 저자(고운기)가 얘기한 것처럼 해당 내용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풍부한 지식과 저자만의 해석을 통해 알려주어 책 읽기가 수월했고 700페이지라는 내용이 지겹지 않았다.

 

3. 경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경주에 대한 역사적 설명과 지리, 얽힌 이야기, 사진을 보여주니 경주가 다시 보인다. 고운기/양진씨 덕분에 나는 경주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고 경주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1. 김원중의 <논어>처럼 먼저 삼국유사의 원문을 적어주었을 것이고 그 이후에 저자의 생각을 넣어줄 것이다. 원문이라는 충실한 해석을 먼저 한 다음에 저자의 생각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다. <삼국유사>의 많은 이야기가 생략된 것 같다. 발해부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된 것처럼.

 

2. <기이>편에 발해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저자는 발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물어보고 싶다.

 

IP *.71.149.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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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12:16:38 *.18.218.234

기상씨가 읽는 삼국유사는 어떠했을 지 제일 궁금했음.

괜히 더 현장감이 느껴지네요. 삼랑사 터랑 인연이 있네요? 오~~

그리고 진짜 꼼꼼하게 읽었네요.

나도 한자는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래 지적에서 손 들었음. 역시 꼼꼼!

毛郞宅裏梅 毛郞宅裏梅(선착모랑댁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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