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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일 11시 01분 등록

난중일기(94째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이순신 李舜臣 (1545 ~ 1598)

 

좀 오래된 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동상 2개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세종대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광화문 광장에도 지금이야 세종대왕 동상이 있지만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순신 장군 동상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만큼 한국에선 존재감 있는 역사인물이다. 전장에서 장군의 면모만을 가진 것만이 아닌, 전쟁 기록물인 난중일기와 그를 통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 인간 이순신의 면모를 보면 존경의 인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 [李舜臣] - 자신과 나라의 역경을 극복한 명장 (인물한국사)에서 발췌

이순신은 조선 인종 1(1545) 38(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우뚝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3)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2)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李琚)1480(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5)과 병조참의(3)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 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아직 어렸고 나중에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그때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127)”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그 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9)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석문과 사곡은 호랑이들의 소굴로 우리 영토를 엿보네. 골짜기가 갈라져 하늘은 틈이 생겼고, 강이 깊어 땅은 저절로 나뉘었네(石門與蛇谷, 虎穴窺我藩. 峽坼天成罅, 江深地自分)”라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시([동구비보를 지나며(過童仇非堡)], [학봉속집] 1)는 그런 거친 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8)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5)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4)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7)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6)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3)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2월 진도군수(4)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3)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선조 25) 4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2)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22).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13). 그는 나흘 동안(416~19)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16)과 전주(825)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3).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해전에 나아갔고(916),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순신의 절망과 피로는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수많은 죽음을 집행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52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통곡했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선조 31) 11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604(선조 37)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간행사

생태학적으로 생물다양성의 옹호가 정당한 것처럼, 문화다양성의 옹호 역시 정당한 것이며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문화다양성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

우리 고전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그것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 예술과 사상을 두루 망라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문제적이다. (4)

세계 시민의 일원인 21세기 한국인이 부담감 없이 쉽게접근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품격과 아름다움과 깊이를 갖춘 우리 고전을 만드는 게 이 총서가 추구하는 기본 방향이다. (5)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동안 고전을 재미없게 딱딱하게 간행하다보니 독자에게 외면 받은 건 사실이다.

비록 좀 느리더라도 최소한의 품격과 질적 수준을 끝까지유지하고자 한다. (5)

 

책머리에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그의 동상이 그러하듯 거푸집 안에서 딱딱하게 굳은 채 변치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6)

난중일기는 어느 조선 장수의 일과와 행적이 기록된 사료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의 감정이 솔직하게 담겨 있는 내밀한 일기장이기도 하다. (6)

일과와 행적만을 적었다면 이렇게까지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선별한 일기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역자가 장마다 제목을 붙였다. (7)

덧붙여 이 책의 본문과 해설에 나오는 날짜는 모두 음력임을 밝혀 둔다. (7)

열하일기에선 이런 내용이 없어 그냥 음력이겠거니 짐작만 했었다.

 

조선을 지키리라

전쟁에 대비하라

활을 열 순 쏘았다. (22)

은 화살 다섯 대를 연달아 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럼 50발을 쏘았다는 것인데 장군인데도 무예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 우두머리 중에게 곤장을 때렸다. (24)

상관을 엄히 다스린 것이다.

 

무기와 전선을 점검하라

전쟁 대비에 여러 가지로 결함이 많아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26)

전쟁이 있지도 않은데 미리 준비하는 모습이다. 군관과 아전은 이순신장군의 준비를 못 마땅해서 제대로 안한 걸 수도 있다.

방답은 처음에 15명만 보냈기 때문에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너무도 나를 기만하는 태도를 보였다. (28)

결국 15명이 아닌 35명으로 늘렸나보다.

이순신의 승리는 철저한 대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

 

거북선을 만들다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이 다섯 번 등장할 뿐이지만, 1592년 있었던 사천. 당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 등에 투입되어 펼쳤다. 거북선은 전투가 시작되면 곧장 적의 진영으로 돌격해 대포를 쏘고, 왜적의 배에 가서 부딪혀 적선을 넘어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31)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주로 쓰인 배는 판옥선이다. 거북선은 몇 대 없었고, 돌격용이었다

 

오늘도 활쏘기를 연습하고

우리 수영의 장수들이 여러 번 이겨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해 왔다. (32)

예전부터 내기가 있었구나.

그렇지만 무엇보다 조선 시대에 활쏘기가 중시되었던 까닭은 활이 조선군의 대표적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34)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앞날

나라에 제사가 있는 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35)

공무를 보지 않는 걸로 정해진 것인지 이순신 스스로 보지 않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후자가 아닐까 한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대들보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구원할 기둥이 없으니 종묘와 사직이 끝내 어찌될는지. 심사가 어지러워 하루 종일 뒤척거렸다. (36)

 

실정 모르는 조정 관원들

담양. 진원. 나주. 창평 수령은 악행을 덮어 주고 상을 내려 달라고까지 하였다.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 리 만무하다. (37)

임금은 도망가고 신하는 자기 잇속만 챙기니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은 군사가 부족했고, 군사가 사망하거나 도망쳤을 경우 그 군사의 가족이나 이웃을 뽑아 빈자리를 채웠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을 대신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수군에 내렸다. (39)

그래서 이순신이 공문이 왔는데 잘못된 처사라고 했구나.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1953626일 장대비가 내리고 남풍이 거세게 붊

날씨도 그냥 맑음, 흐림, 비 이렇게 쓴 게 아니라 자세하게 썼다.

왜적은 이미 군량이 끊겼고 우리 군대는 느긋한 마음으로 고단한 적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라, 이러한 기세라면 마땅히 백번이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40)

비가 많이 와서 그렇게 된 건데, 그래서 싸움에서 이겼다는 건가?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유명한 말이다.

하급 병졸이라도 군대에 관한 일이라면 직접 이순신에게 가서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전투에 나갈 때는 부하 장수들과 더불어 전략을 정한 뒤에 출전했기 때문에 패하는 법이 없었다고 류성룡은 술회했다. (42)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았다는 거다. 남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영의정 류성룡

전에 영의정이 천식을 심하게 앓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병이 나아 평안해졌는지 알지 못하여 척자점을 쳤다. 그러자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44)

척자점이 뭘까? 한자를 풀이하면 그렇긴 한데 글자()를 던져 점을 치는 것인가?

네 면에 각각 1, 2, 3, 4를 새긴 하나의 나무 막대인 윤목을 던져 괘를 만들고, 괘를 찾아 길흉을 확인하는 것이다.

[출처]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 : 난중일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척자점의 비밀

 

왜적의 배를 침몰시켜라

임진년, 전쟁이 시작되다

부산진은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하였다.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49)

부산을 침공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왜적의 기세에 겁을 먹어 싸우지 않고 달아난 지방 수령이나 장수들도 많았다고 한다. (51)

414일에 전쟁을 시작해서 5월 초에 서울을 점령했다니 보름밖에 안 걸린 거다. 이렇게 도망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첫 출전의 날

진해루에 앉아 방답 첨사, 흥양 현감, 녹도 만호를 불렀더니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지 않았다. 의로운 무사들이라 할 만하다. (52)

우리는 이순신과 몇몇의 사람들만을 기억하지만 여기 써진 사람처럼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이 분들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비단 이 경우만 그럴까. 모든 역사의 현장에 이름 모를 이들이 있었다.

 

사천 전투

군관 나대용이 총을 맞았고, 나 또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아 총알이 등을 뚫고 들어갔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54)

후에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깨뼈가 깊이 상한 데다 갑옷을 입고 있다 보니 상처가 헐어 진물이 계속 흐른다고 했는데, 이때 생긴 상처 때문에 오랜 기간 고통을 겪은 듯하다. (55)

하긴 그 당시 의술로는 총상을 치료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감염에 의해 죽기까지 할텐데, 운이 좋은 걸 수도 있다.

 

당포 해전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왜적의 수를 셀 수 없었으니 적군은 모두 섬멸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56)

화살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는 표현이 과정된 것이 아니구나 싶다.

 

적을 유인하라

전부 섬멸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발포 배 두 척과 가리포 배 두 척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돌진하다가 바닷물이 얕고 좁은 곳에 부딪쳐 배가 걸리고 말았다. 왜적이 그 배에 올라타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분통함에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였다. (60)

오늘의 분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다 경상 수사(원균)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60)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왜적을 여러 차례 유인하였다. (60)

원균을 탓을 하는 것을 보니 조정의 명에 원균이 영향을 끼쳤나보다.

 

수군의 기세에 왜적이 달아나고

경상 우후 이의득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수군들이 적을 많이 붙잡아 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원균)에게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사가 군사들의 발바닥까지 때리려 했다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62)

한때 원균에 대해 이순신에 의해 평가 절하된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이었고 다시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루 종일 적과 싸워 보려 했지만 적들은 겁을 내어 나와서 대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65)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에게 패배만 당하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남해의 재해권을 장악하자 가능한 조선 수군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수군은 섬나라 군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해전을 치러 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66)

해설을 읽어보니 위의 일기가 이해가 된다.

 

나에게 항복한 왜인들

전라 좌도와 우도에 나누어 보냈던 항복한 왜인들을 전부 모아 화포 쏘는 연습을 하게 하였다. (67)

전쟁에 내보낸 것이겠지?

항복한 왜인들이 와서 자기들 무리 중에 산소라는 자가 흉악한 일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베어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왜인들에게 산소의 목을 베게 하였다. (67)

전쟁이란……. 같은 아군임에도 이럴 수 있구나. 아님 같은 아군이라도 흉악한 일을 했으니 죽어 마땅한가?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이 자기 동료인 신시로를 죽여 달라고 청했다 하므로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70)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어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없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 가운데 일부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또는 상관의 혹독한 매질을 견디다 못해 조선 진영으로 와서 항복을 하였다. 조선이 항복한 왜인들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71)

이순신의 기록엔 처형하거나 부역을 담당하게 한 게 전부인데 본인 스스로 잘 대해줬다는 기록을 하기는 그랬을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대

우리 수군의 훌륭함을 여러 번 칭찬했다. (73)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많았다. (73)

왜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까.

사뭇 비분강개한 심정이 되었다. 또 왜적의 형세를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74)

명나라의 지원으로 평양과 개성을 되찾고,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까지 물리칠 수 있었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과 소, 말 등을 바쳐야 했고, 식량을 빼앗긴 백성들은 더욱 굶주려 갔다. 더욱이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부족한 군사까지 보충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의 젊은 남성은 대부분 전쟁터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75)

이후 조선에선 명나라가 망하고도 이때 도와준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섬겨야한다고 주장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지식인들인가.

 

정유년, 다시 왜적과 맞서다

꿈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임진년 왜적을 크게 이겼을 때 꾸었던 꿈과 거의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76)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77)

이순신이 한 유명한 이야기다. 병법에서 인용한 말이 아니라 이순신장군의 말인 줄 알았다.

처형하고 싶지만 왜적의 형세 또한 급박하니 일단 공을 세우게 해 주마.“

도망간 군인에게 처벌보다 현실적으로 전쟁에 참여시킨 현명함이 보인다.

무상 김돌손에게 그 시신을 갈고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라고 하였다. 준사는 이자가 바로 마다시라면서 펄쩍 뛰었다. 곧바로 시체를 토막 내라고 명령하였더니 왜적의 기세는 푹 꺾이고 말았다. (80)

1597년 일본은 조선을 또 한 번 침략했으며,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는 사이,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15977월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참패하며 수많은 군사와 전선을 잃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전선 12척 뿐이었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장수와 군사들을 모아 다시 전쟁을 준비하였다. (81)

 

진린과의 연합 작전

왜적이 타고 왔던 배와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진 도독에게 바쳤다. (82)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왜적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버리자고 말했다. (84)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은 15987월에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 진린은 이순신과 노량 해전에 출전함으로써 이순신의 마지막을 함께한 명나라 장수가 되었다. (84)

진린이란 인물이 궁금하다. 기록이 많지 않을 것 같다. 찾아보니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공적을 알려 선물을 받게 하고, 손자는 조선으로 와서 살았으며 광동진씨의 선조가 되었단다.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군율로 엄히 다스리리라

경상 수사 휘하의 군관 고경운과 도훈도 및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수영 아전들을 잡아 와 나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왜적이 일으킨 변고를 재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렸다. (87)

엄히 다룰 땐 확실하게 했나보다. 하긴 조그만 실수가 큰 일이 될 수 있다.

두 번이나 기한 안에 오지 않는 하동 현감에게 곤장을 아흔 대 쳤다. (89)

아흔 대는 심한 거 아닌가. 곤장도 하루에 몇 대 이상 때리지 못하게 정해져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머니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벌써 이레째라 속을 태우고 마음을 졸였다. (89)

전쟁터에서 일주일 동안 소식을 듣지 못해 마음을 졸였다는 걸 보면 생각보다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고, 극진한 효자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부인은 참 힘들었겠다 는 생각까지 든다. 아들, 어머니 걱정에 조카까지도 걱정하던데 부인 얘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뒤에 가족이야기에서 나오겠지.

자신이 수군의 수장으로서 호령을 내려도 각 고을 수령들이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핑계를 대며 명령을 따르지 않아 수령들을 다스리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90)

 

자기 잇속만 차리는 아전들

매번 거짓말로 둘러대며 일을 넘겼으므로 오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다. (91)

[사기열전]을 보며 죽이는 일이 다반사라 이해가 안됐는데 전쟁 중엔 어느 곳이나 그런가보다.

아전들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군사들을 징발해 보내지 않은 것과 백성의 제물을 빼앗은 등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다. (93)

 

도망친 군사에겐 죽음이 기다릴 뿐

오늘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제 집으로 달아났다. 황옥천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높은 곳에 걸었다. (94)

수군은 한 번 편입되면 대대손손 수군으로 복무해야 했기 때문에 천한 역으로 여겨진 데다, 육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두 배나 길고 배 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등 복무 여건도 상당히 열악했다. (97)

 

배에 여인을 태운 남해 현령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없고도 형편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98)

원균이 이 정도였구나.

그 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왜적을 만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왜란이 끝난 뒤 전쟁을 다스린 공이 있는 신하로 표창을 받았다. (99)

 

전쟁터에 첩을 데려온 순변사

나를 해치려 힘을 쏟는다니 우습고 우습다. 이일은 서울에 있던 첩까지 관아에 데리고 왔다 한다. (100)

당시 여진족이 이순신의 관할 지역을 기습해 조선군이 패배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부하인 이순신에게 떠넘기려 하였다. (101)

이일과 이전부터 좋지 않은 사이였다. 이순신의 글을 보면, 이순신은 원칙주의자 같다. 그러니 이일의 처사가 못마땅한 것은 당연하다.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 우수사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하여 감당치도 못할 자리에 분수 넘치게 올라앉아 나랏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는데도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니 어찌할꼬! (102)

나는 그 속마음을 알아차렸지만 아직 제 뜻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은 때에 앞서 나가는 것은 장수의 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03)

장수로서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새겨야 할 마음자세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자기 휘하의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자신을 문책할 것이 두려워 병을 핑계 대고 또 한 번 달아났던 배설은 결국 1599년 권율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104)

 

산에 숨은 무안 현감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벼슬아치인데, 자기 한 몸 지키려고 꾀를 내어 수군 부대로 오지 않고 산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105)

이때 남언상과 같은 죄목으로 잡혀 온 수령만 30여 명에 달했다. (106)

 

아첨으로 지위를 얻은 김억추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일개 만호 자리에나 겨우 적합할 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다. (107)

김억추는 임진왜란 중에 여러 번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왜적과 맞서 보지도 않고 미리 달아나 버린 장수이자, 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정을 저지른 지방 수령이었기 때문이다. (107)

비리 인사다. 고위 관료의 인맥으로 수령이 된 거다. 특히 장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모두에게 참혹한 전쟁

피란 떠나신 임금님

피란 떠나신 임금님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 주는데 통곡을 억누를 수 없었다. (111)

경상 수사 원균도 왔는데, 술을 지나치게 마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 원균이 남을 헐뜯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112)

원균은 알면 알수록 더 별로다.

유지 안에서 나온 임금님의 비밀 편지는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있음을 내 항상 잊지 않고 있다.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 가운데 큰 상을 받지 못한 자를 서둘러 보고하라는 말씀이셨다. (113)

어가가 관서 지방으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처음 알고, 놀라고 원통한 마음 끝이 없어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오장이 다 타고 찢어진 듯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113)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에서 원통했을까, 아님 백성을 버리고 간 임금 때문에 원통했을까. 둘 다 일수도 있겠다.

 

헐벗고 굶주린 군사들

옷 없는 자들이 이 배 저 배에서 거북처럼 웅크리고 추위 때문에 신음하는데, 그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었다. 군량이 도착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다. (114)

지붕이 세 겹이나 말려 올라가 비가 삼대처럼 새는 탓에 앉은 채로 밤을 새고 새벽을 맞았다. (115)

군사들이 먹을 게 없고 입을 옷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비가 새고 잠조차 제대로 못자니 병이 날 수밖에 없다.

이순신은 군사들이 전염병으로 수도 없이 사망하고, 남은 군졸들도 하루에 고작 두세 홉의 양식을 먹을 뿐이라 배고픔과 고달픔이 극에 달해 노를 저을 수도 활을 당길 수도 없는 지경이며,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서는 추위도 더욱 혹심하여 군사들이 모두 귀신 모양으로 변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117)

 

왜적의 손에 부하를 잃고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118)

전쟁 중에도 휴가가 있었구나.

왜적은 한 놈도 잡지 못했는데 장수 둘을 먼저 잃고 말았으니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하겠는가. (119)

이순신은 왜적과의 전투가 끝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릴 때면 언제나 사상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그 유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사망자의 시체를 고향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하고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애썼다. (120)

이순신은 요즘 표현으로 츤데레. 엄격한 원칙주의자이지만 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피란길에 돌아가신 숙모

어째서 요즈음 세상일은 이다지도 참혹한가. 장례는 누가 주관할는지, 대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121)

직계 가족뿐만 아니라 친인척까지도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카가 먼저 죽어 숙모의 장례를 치를 사람도 없다는 거다. 본인은 매인 몸이니 더욱 안타까웠을 것이다.

 

돌림병으로 죽은 금산이

밤 열 시경 수영의 사내종 금산이, 그 처와 자식까지 모두 세 사람이 돌림병으로 죽었다. 3년 동안 눈앞에서 믿고 부리던 자들인데 하룻저녁에 죽고 마니 마음이 놀랐다. (122)

금산이가 종이었구나. 이순신은 위나 아래나 똑같이 한 인간으로 대한 것 같다.

군사든 백성이든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린 상태였기 때문에 돌림병에 감염되면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122)

 

사람 고기까지 먹는 백성들

설날에 아산 선산에서 차례를 올리려는데 무려 200여 명이 몰려들어 산을 둘러싸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바람에 제사를 나중으로 물렸다고 한다. (123)

사람 고기까지 먹었다는 이야기. 옛이야기에 효자가 어머니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였다고 한 걸 보고도 믿기지 않았는데, 이건 더 심한 상황이다. 사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전쟁은 백성들이 가장 힘들다.

 

나라 안의 적

밤 열두 시쯤 수영의 정찰선이 들어와 왜적의 소식을 전했는데, 실은 왜적이 그런 것이 아니고 영남의 피란민들이 왜적 차림으로 가장하여 광양에 쳐들어가 집집마다 분탕질을 한 것이라고 하였다. (125)

이런 일까지 있었구나. 처음 알았다.

당포의 보자기가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왜적이 온다고 거짓 경보를 퍼뜨렸다. 나는 보자기가 사람들을 속인 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거짓 경보를 퍼뜨린 두 놈을 잡아다 곧장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군대 안의 질서가 크게 안정되었다. (126)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어야

지나온 곳마다 눈앞에 쑥대밭만 가득해 참혹한 모습을 차마보기 어려웠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부역을 면제해 군사들과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 주어야겠다. (129)

전리품으로 얻은 쌀과 옷감을 피란민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갈 곳 없는 백성들을 거두어 수영에 속한 둔전에서 농사를 짓게 해 먹고살 방편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129)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새해 첫날에

촛불을 환히 켜고 홀로 앉아 있다가 생각이 나랏일에 미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또 여든의 병드신 어머니가 떠올라 애를 태우며 밤을 지새웠다. (133)

 

수영에도 봄은 오고

오늘 밤은 많이 취한 탓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하다 보니 새벽이 되었다. 봄날의 나른함이 나에게까지 찾아왔구나. (137)

전쟁 중에 이런 정취를 느꼈을까 싶었는데, 설명을 보니 전쟁 전이었다. 하긴 술을 마셨다는 글이 종종 보이지만 취했다는 글은 없었다.

 

전장에서 보낸 명절

밤늦도록 군사들을 뛰놀게 한 것은 내가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애쓰고 있는 군사들의 노고를 풀어 주려는 생각에서 그리한 것이다. (140)

 

항복한 왜인의 광대놀이

장수가 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한 왜인들이 간절히 마당놀이를 하고 싶다 하기에 금하지 않았다. (141)

왜인들에게도 선행을 배푸는 모습이 엄한 모습과 대비된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잠 못 이루고

하루 종일 텅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수백 가지 생각이 마음을 뒤흔든다. 괴롭고도 심란한 이 마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흐리멍덩하여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 같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143)

이순신은 자주 불면에 시달렸다. 나라를 구할 책임을 짊어진 장수로서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밤 번민에 휩싸여 뒤척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45)

고민이 많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것이겠지. 임금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피랴, 적군과 전쟁도 해야 하고, 노략질하는 도적도 잡아야 하고, 정말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겠다.

 

앞일을 일러 준 꿈

새벽에 남자아이를 얻는 꿈을 꾸었다. 포로로 잡혀간 아이를 되찾을 징조다. (146)

이 편을 읽으며 깜빡 졸았다.

밤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곡을 하는 꿈을 꾸었다. 아주 좋은 징조라 한다. (147)

꿈은 반대니 그렇게 말한 거겠지. 꿈을 참 많이도 꿨다. 불면과 연관이 있겠지.

망가진 삿갓을 발로 찬 것은 머리에 쓰는 삿갓이 발길질을 당한 것이라, 삿갓을 쓰는 자란 곧 왜적의 두목이니 왜적들을 모두 무찌를 징조였다. (149)

간혹 모르겠다는 것도 있지만. 꿈 해석을 잘한다.

 

몸이 아파 신음하여도

몸이 많이 좋지 않아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 앓았다. 식은땀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셨지만 온 힘을 다해 앉아 있었다. (152)

몸이 좋지 않은데도 앉아 있었다는 걸 보니 근무 시간이었나 보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아픈 와중에도 일어나 앉아서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보냈다. (153)

역시 완벽주의자.

병세가 너무 위중해져 배에서 머물기가 불편했다. 실제 전쟁터도 아닌지라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155)

전쟁 중이 아닌데도 배에서 생활했어야 하는구나.

 

점괘에 위안을 얻고

비가 계속 올지 날씨가 갤지 점을 쳐 보았는데, ‘뱀이 독을 토해 내는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텐데 농사일이 걱정이다. 밤에도 비가 퍼붓듯 쏟아졌다. (156)

기본적으로 점을 쳐보는 것이 날씨이긴 하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서 적을 잘 물리칠 수 있을지를 점쳐 보았다. 첫 번째 점에서는 활이 화살을 얻는 것 같다는 괘를 , 두 번째 점에서는 산이 꼼짝 않는 것 같다는 괘를 얻었다. (157)

 

멀리서 그리는 가족

꿈에 뵌 아버지

평소와 꼭 같은 모습이셨다. 홀로 앉아서 꿈에 뵌 아버지를 떠올리니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161)

이순신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기일이나 생신이 되면 더욱 애통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162)

임진왜란 있기 10년도 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이렇게 사무쳐하다니……. 역시 효자다.

 

머리 흰 아들의 어머니 생각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 뽑았다. 머리 세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163)

아내는 집에 불이 난 뒤로 마음과 몸이 많이 상해서 가래가 끓고 숨이 차는 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하니 염려가 된다. (164)

처음으로 부인 이야기가 나왔다. 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하는 걸 보니 그 전에도 병이 있었나 보다.

저물녘에 정찰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니께서 이질에 걸리셨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165)

남편 없이 10년 이상을 살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애틋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당부

어머니께서는 잘 가라고 하시며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당부하실 뿐, 이별의 슬픔 때문에 한숨지으시는 모습은 조금도 없으셨다. (166)

장군의 어머니답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함께 배에 올라 본영으로 돌아왔다. 종일토록 어머니를 모셨으니 다행하고 다행한 일이다. (167)

이순신은 1593년 어머니를 수영 부근의 고음천으로 모셔온다. 그러나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뒤에는 가까이 계신 어머니도 1년에 고작 한두 번 찾아뵐 수 있었던 듯하다. (167)

 

병든 아내

오늘 아침 정찰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몹시 위중하다고 한다. 생사가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68)

어머니의 대한 마음은 절절했는데 의외로 아내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정도다. 부부의 정이 그리 깊진 않은 듯하다. 위중하다는데 그저 이미 생사가 결정난지도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의외다.

이른 아침에 손을 깨끗이 씻고 단정히 앉아서 아내의 병세가 어떠한지 점을 쳤다. ‘승려가 환속하는 것 같다는 괘가 나오고, 다음에는 의심하다가 기쁜 일을 만난 듯하다는 괘가 나왔으니 참으로 길하다. (169)

 

아비의 마음

아들과 헤어지니 마음이 착잡하여 텅 빈 동헌에 홀로 앉아 있어도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171)

오늘은 바로 큰아들 회가 혼인하는 날이다.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171)

아들 결혼인데 가 보지도 못했구나.

저녁부터 서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더니 밤새도록 잦아들지 않았다. 면이가 뱃길에 오른 것을 생각하니 걱정스런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애타는 이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172)

이순신은 형님들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조카 여섯을 거두어 길렀다. (174)

아니 자식 4명에 조카 여섯까지, 부인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장군으로서, 아들로서, 아비로서는 잘 했는지 몰라도 남편감으로 별로였겠다.

 

염이 걱정

수사 원균이 나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해서 좋지 못한 일들이 많다고 했는데, 죄다 허튼짓이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175)

염이의 통증 부위에 종기가 생겨 침으로 째자 고름이 흘러나왔다고 전했다. 며칠 늦었더라면 목숨을 구하기 어려울 뻔했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살아날 길을 얻은 셈이니 기쁘고 다행스런 마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176)

막내아들 염이에 대해 더 애틋해 보인다.

 

면아,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저녁에 천안서 온 어떤 사람이 본가에서 보낸 편지를 전해 주었다. 봉투를 열기도 전에 살과 뼈가 먼저 후들거리고 정신이 어찔했다. 겉봉에 대강 펼쳐 열이의 편지를 보니 바깥쪽에 통곡두 글자가 씌어 있었다. 면이가 전쟁터에서 죽었구나. 나도 모르게 간담이 내려앉고 목이 메었다. 통곡하고 통곡할 뿐이었다. (177)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내일이면 막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지만 마음대로 슬피 울지도 못하는지라 수영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 (178)

저물녘에 코피를 한 되 남짓 쏟았다. 밤에 앉아서 면이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마음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이번 세상에선 영혼이 되었으니 결국 제 불효가 이리 막심한 줄도 모를테지. 슬픔에 울부짖는 꺾이고 찢어진 심정 어찌 억누를 수 있으리오. (179)

태어날 때도 못보고 결국 죽어서도 못 가보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그 와중에도 업무처리를 다 했으니 맘이 아플 겨를도 없었겠다.

 

백의종군의 길

감옥 문을 나와

마음으로 내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억지로 마셨더니 몹시 취하였다. (183)

이순신을 게으른 장수로 여겨 왔던 선조는 이순신의 태도에 격노해 이순신을 옥에 가두라 명하였고,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했다. (184)

선조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 처사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싸운 장수를 치하하지 못할망정 옥에 가두다니.

 

다시 남쪽으로

마을 사람들 여럿이 술병을 들고 찾아와 먼 길 떠나는 이의 마음을 달래 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술에 흠씬 취한 뒤에야 자리를 끝냈다. (186)

내려가는 곳마다 이순신을 대접하고 위로했다. 성군을 임금은 몰라봐도 백성들은 알고 있었구나.

정사준도 와서 원균의 사리에 어긋나고 함부로 행동하는 꼴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187)

백의종군이란 죄를 지은 장수나 관리에게 관직이 없는 상태로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는 처벌인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로 가서 종군하게 된다. (187)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아뢰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늘의 해조차 캄캄했다. 곧장 게바위로 달려가 보니 배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슬픔으로 찢어진 이 마음, 글로 다 적을 수 없다. (188)

보통 너무 슬프거나 기쁘거나 하면 글보다 그 감정에 빠져있는데 이순신은 이 순간에도 글을 썼다. 그러니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 했지만 보통 그렇게 되지 않더라.

오늘은 단오다. 하늘 끝 변방에 종군하느라 어머니 영전에서 멀리 떨어져 장례도 못 치르고 있으니 내 죄가 무엇이기에 이러한 응보를 받는단 말인가. 가슴이 아파 미어진다. (190)

아마 3년 상을 말하는 것 같다.

새벽부터 해 저물 때까지 어머니가 그리워 슬피 우니 눈물이 엉켜 핏방울이 되었다. 하늘은 어찌 이리 무심하게 나를 비춰 주지 않으시는가. 나는 어째 빨리 죽지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191)

어머니에 대한 마음은 남편 없이, 큰 아들들 먼저 보내고 맘 고생한 것에 대한 것이 보태져서 더 애틋한 거겠지. 그 당시 80을 넘겨 사셨으면 장수한 건데도 이리 애달파하네.

어머니가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기 위해 여수 고음천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별세하였다. ... 이순신도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글로 적기 힘들었던가 보다. 위의 일기는 모두 나중에 기록한 것이라 한다. (192)

어쩐지. 설명을 보니 이해가 된다.

 

원균

수사 원균이 거짓 공문을 보내 군사들을 동요시켰다. 군대 안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다니, 그 사람됨이 음흉하고 분별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3)

그동안은 사람들에게 들은 내용이었다면 이것은 직접 겪은 일이다. 원균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겠다.

명나라 조정에서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보내준 화공 무기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만 쓰려고 하다니, 그 간계는 입에 올릴 가치도 없다. (194)

자신이 데려온 서리를 곡식 사 오라는 명목으로 육지에 보내 놓고 서리의 처와 사통하려 했는데, 서리 처가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와 고함을 지른 일도 있다고 했다. (196)

원균은 욕심도 많고 실수도 많이 하고 거기다 이런 일까지... 가지가지 한다.

대장의 잘못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요, 그 살점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라고들 하였다. (198)

부하가 이 정도로 이야기한다면 원균은 정말 최악이다.

 

나의 자리로 돌아와

밤에 꿈을 꾸었는데 무언가 명을 받을 조짐이 있었다. (199)

난중일기엔 꿈 이야기가 많은데 꿈이 잘 맞더라. 결국 삼도수군통제사의 역할을 맡으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니.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가는데 마음이 아파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 다시 오셨으니 저희들은 살길을 얻었습니다.” (200)

백성들이 달아난 까닭을 묻자, 왜적이 닥쳐온다고 병사가 겁을 내어 창고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기 때문에 백서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모두들 대답했다. (202)

오후에 다시 길을 떠나 10리쯤 가자 노인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서 다투어 마실 것을 바쳤다. 받지 않으면 통곡하면서 억지로 권하였다. (202)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모습이다.

 

두 번 다시 바다를 빼앗기지 않으리

내가 탄 배에서 곧바로 앞을 향해 지자포를 쏘았더니 산과 바다가 들썩였다. 왜적들은 우리를 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이나 진격했다 퇴각했다 하면서 대포만 쏠 따름이었다. (205)

이순신을 겁내한 게 맞나 보다.

포획한 왜적의 배와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빼앗겨 빈손으로 왔다고 보고했다. (205)

 

해설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159211일부터 19581117일까지 쓴 일기다. (209)

이순신은 왜 일기를 썼을까? ‘전쟁이라는 너무도 비일상적인 상황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넘겨야겠다는 의지가 이순신을 일기 쓰기로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09)

그럴 수도 있지만, 원래 메모광일 수도 있다.

이순신이 무관이 되기로 마음을 바꾼 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이순신이 어려서 유학과 문장을 공부한 덕에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글을 지어 남길 생각을 했고, 그리하여 난중일기를 남기게 된 것은 아닐까. (210)

육지의 조선군은 도무지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해 있었고, 얼마 전까지 일본 안에서 전쟁을 치렀던 터라 실전 경험이 많았다. (213)

도요토미 히데오시는 일본 내에서의 원성을 밖으로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일본군이 조선인에게 저지른 만행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성 안의 백성과 군사는 물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였다. 이러한 일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217)

일본은 이때부터 잔혹하고 야만스러웠다. 이래놓고 다시 식민지 지배를 하고 마구 유린했다. 식민지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은 한 동네 출신이다. 그렇지만 원균은 이순신보다 다섯 살 위이고 무관인 부친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순신과 가까이 지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219)

 

이순신 연보

1576(선조 9), 32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삼수군 동구비보 권관으로 임명되다. (226)

20세까지 문과 공부를 하다 22세에 무과로 전향해서 무예를 익혔는데 10년이 되어 급제를 했다. 무예에 뛰어난 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늦게 시작했나.

1597(선조 30), 5341, 석방되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시작하다. 411, 모친이 돌아가시다. 1014, 막내아들 이면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다.

같은 해에 어머니도, 막내아들도 죽었다. 원흉이라 여겼던 원균도 같은 해 7월에 죽었다. 이순신 자신도 그 다음 해에 죽었다. 전쟁도 끝이 났다.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원래의 난중일기 날짜순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역자는 주제별로 묶어서 소제목을 달았다.

독자의 입장에서 주제별로 묶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뒷부분에 해설과 연보를 실어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주제별로 묶여 있다 보니 시간순서대로 정리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연보를 보며 다시 정리가 된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난중일기전체가 아닌 주제별 발췌이다 보니 내용이 짧다. 어느 부분이 생략되었는지 알려주면 좋겠다.

 

3. 이 책의 장점

무엇보다 주제별로 묶은 것이 장점이다. 일기라 날짜순서대로 했다면 지루했을 수 있다. 몇 년치의 일기를 주제별로 다시 묶었으니, 역자의 노력이 보인다.

 

전쟁과 관련한 지도와 위치, 날짜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따로 실은 것이 좋았다.

 

한 장이 끝나면 그 장에 해당하는 배경설명을 덧붙여 놓아 일기만으로 이해 안 되는 것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모든 개인의 기록이 먼 훗날엔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일기 형태이든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어떻게 쓰일지 그 당시에는 알 수 없다. 그러니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기록을 하자.

 

동시대의 기록물인 징비록』 『선조실록등을 같이 비교하며 인물을 살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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