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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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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8일 09시 22분 등록
I.저자에 대해

빅터프랭클

빅터 프랑클(Viktor Emil Frankl, 1905~1997년)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 의과대학에서 정신과를 전공했고 특히 우울증과 자살에 관심이 많았다. 초기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년)와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평소 호기심이 많던 프랑클은 용감하게 프로이트에게 자기 생각을 편지로 보냈고, 프로이트도 상냥하게 답장을 줘서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또 17세 때 학교 숙제로 쓴 논문이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24년에 《정신분석 국제 저널(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에 발표된 적도 있었다.

1937년 정신과 전문의가 된 빅터 프랑클은 3만 명의 자살위험성이 있는 여성들을 관리·치료했고, 이후 자신의 클리닉을 개업했다. 정력적으로 자기 영역을 만들어가기 시작할 때,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해 버렸다. 이때부터 유대인 의사들은 순수 독일민족 ‘아리안 족’의 치료를 금지당했고, 이후에는 유대인만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했다. 우생학적 관점을 앞세워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희생될 위험에 처한 수많은 유대인 환자들을 자신의 의학적 소견으로 구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에도 1942년 9월 결국 그는 아내, 부모와 함께 테레지엔슈타트의 유대인 거주지 ‘게토’로 강제 이송되어 일반의로 근무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열정적으로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사람들이 강제 수용된 심리적 충격에서 벗어나도록 강연해 나갔다. 늙은 아버지의 사망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프랑클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루 한 컵의 물이 배급되면 반만 마시고 나머지로 세수와 면도를 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환경이었지만 그는 면도를 거르지 않았고, 덕분에 건강해 보일 수 있어서 가스실로 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2년 후 그와 그의 아내는 1944년 10월 19일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로 옮겨졌고, 여기서는 의사가 아닌 일반 수용소 수감자로 강제 노역을 했다. 1945년 3월에야 튀르크하임의 수용소로 옮겨져서 1945년 4월 27일 전쟁이 끝나 해방될 때까지 의사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센 수용소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고, 어머니 엘사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동생 월터는 강제 노역 중에 사망했다. 유일한 생존자인 여동생 스텔라는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살았다. 프랑클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각기 다른 수용소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가족들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견뎌나가야만 했다.


전쟁의 생존자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극복하다

수용소에서 프랑클은 그동안 연구해 온 심리학 이론과 정신의학적 개념을 집대성한 원고를 옷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지만, 그 옷을 잃어버리면서 원고도 함께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프랑클은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자기가 직접 보고 들었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책을 쓰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그 원고를 갖고 있었다면 그 내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몽땅 잃어버린 덕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그는 F의 사례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면서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당사자의 내적인 힘, 즉 이 끔찍한 경험을 개인의 성장에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는 프랑클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고 그가 세운 이론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으로 그 생각은 그가 끝내 살아남을 수 있게 한 힘이었다. 2년 반 동안 네 군데의 수용소로 옮겨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마음이 그를 살렸던 것이다. 부모와 아내, 남동생을 모두 잃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는 아내와 이송된 수용소가 갈리는 바람에 아내가 사망한 것도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전쟁이 끝난 후 빈으로 돌아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아내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고, 몇 주일 동안 큰 슬픔에 잠겨 있었다. 비록 목숨을 건져서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우울증과 자살을 치료하던 프랑클 본인이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살아남은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죽을까 봐 크게 걱정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서서히 우울의 깊은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면서, “어떤 큰일을 겪는 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이건 간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라는 말을 친구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로 확장된 로고테라피 이론

그 생각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면서 프랑클은 자신의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불과 9일 만에 초고를 완성한 이 책의 독일어판 제목은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체험기(Die Psychotherapie in der Praxis)]였고, 영어판 제목은 [인간의 의미 탐구(Man's search for meaning)]였다(한국에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출간). 이 책은 이후 그가 쓴 31종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졌고,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것은, 즉 고결한 사람이 되느냐, 인간의 존엄을 잃고 짐승 같이 되느냐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유, 즉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삶의 길을 선택할 정신의 자유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그 자유를 잃게 되면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홀로코스트 경험 같은 끔찍한 시련도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할 중요한 가치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이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 책을 내고 난 후 1946년 2월 빈의 폴리클리닉 병원의 신경과 과장으로 취임했는데 그곳에서 엘리를 만나 사귀었고 1947년 7월 첫 아내의 공식적 사망 통고를 받은 후 7월 18일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후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의 경험과 책에 대해 강연했지만 빈 대학에서는 정식 교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독특한 정신치료의 한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현재 약 31개국에 로고테라피 훈련 및 치료 연구소와 전문 도서관이 있다.

이후 그는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고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1997년 9월 22일 93세에 사망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1991년 미국 의회도서관과 ‘이 달의 책 클럽(Book of the Month Club)’에 의해 미국에서 나온 10권의 영향력 있는 책 중 1권으로 선정되었다. 1997년 그가 사망했을 때, 이 책은 24개 언어로 1억 부가 팔린 것으로 추산되었다.

 
스스로 좋은 삶에 대한 답을 찾아라

프랑클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 상황마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약 없이 언제 가스실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미리 희망의 끈을 자르고 죽어버릴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가스실에 끌려가더라도 당당히 기도하며 인간의 긍지를 가진 채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왜’에서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인지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삶에게 ‘왜 살아야 하지’라고 질문하기보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삶에게 ‘답을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올바른 행동과 태도를 구체적으로 찾을 수 있고 현실적인 방법이 나올 수 있다.

빅터 프랑클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인류의 최악의 비극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 경험을 그저 개인적인 비극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년 간의 수용소 생활 중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 안에서 로고테라피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중요성, 그리고 삶의 의미 추구를, 자신의 생존 경험 속에서 삶의 정수처럼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온 이론이자 치료법이었기에 학계와 대중은 그의 책과 로고테라피 이론을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빈에서 태어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어 제3의 빈 심리학파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그 태생은 훨씬 극적인 면이 있다. 천재적인 학자가 환자 몇십 명을 진료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서 몇 년간을 버티면서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겪은 찰나의 감정과 사고의 엑기스가 바로 로고테라피의 씨앗이 된 것이다. 프랑클의 삶 자체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과 ‘그 의미를 삶에게 들려주는 실천’을 몸소 해낸 것이다. 이러한 언행일치가 바로 그의 이론을 빛나게 하며 후학들의 귀감이 되는 핵심적 부분이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9
1945년 처음 책을 쓸 때, 나는 2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 9일 동안 줄곧 그랬으며, 책을 익명으로 내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실제로 이 책의 독일어 초판본의 표지에는 내 이름이 없다. 하지만 초판이 출간되기 바로 직전에 적어도 속표지에서만은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권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음에 나는 익명으로 쓰는 이 책이 나에게 문학적인 명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을 기록해 놓을 책임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0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P.12~13
두번째 인연은 수련의 시절에 읽은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였다. 내가 접한 어떤 정신치료 서적보다 설득력이 있었고 실용적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정신과 임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응용하는 기법이다. 연단에서 떨리는 환자에게 ‘더 떨려보라’는 그의 역설기법은 나의 대인공포 클리닉에서 사용하는 핵심 치료기법이다.
세번째 만남은 빈 대학에서 열린 세계정신의학회장에서였다. 프랭클의 강연장은 초만원이었고, 이윽고 들어선 그는 겸손과 따뜻함이 넘쳐흐르는 너무나 평범한 시민의 모습이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가장 존경해 왔던 대학자와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번이 다섯번째 인연이다. 얇은 책 한 권이 한 인간에게 오랜 세월 이렇게 큰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그만큼 진실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론이 아닌 극한의 상황을 겪어낸 그의 체험담이기 때문이다.

P.14
그는 수용소 네 곳을 전전하면서도 끝까지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성자처럼 버티어 나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생환해온 산증인이다. 지난 1997년, 92세의 삶을 마칠 때까지 그의 영혼은 호수처럼 맑았다고 후학들은 전하고 있다.

P.15~16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어떤 사람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재능이 아까워서라고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저 간직하고 싶은 추억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런 환자의 대답 속에서 프랭클 박사는 정신과 치료에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지침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렇게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실존족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P.16
정신과 의사라면 이와 같이 극한 상황에 직면했던 한 정신과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처한 상황을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 박사의 말은 진실로 심오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P.16~17
프랭클 박사의 말이 권위가 있다는 사실은 그가 빈 대학교 의학부에 실제로 근무했던 교수이며, 그의 주도 아래 빈 신경과 외래환자 병동에서 창안한 로고테라피를 본받아 세계 곳곳에서 로고테라피 클리닉이 속속 생기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정신의학의 이론과 치료에 대한 빅터 프랭클의 접근법을 선배 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의학자는 신경질환의 특성과 치료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 중에서 noogenic neuroses와 같은 몇 가지는 그 원인이 환자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P.17
오늘날 유럽은 프로이트의 정신의학에서 크게 방향을 전환해 실존적 분석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로고테라피 학파는 바로 이런 추세와 연관이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부하지 않고, 그의 업적 위헤 기꺼이 그 자신의 것을 쌓아올리는 것. 자기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실존적 치료법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고, 그들과 유대를 맺으며 공동보조를 해나가는 것. 이런 관대함이 프랭클 이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P.18
프랭클 박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았다. 프랭클은 이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과 무감각의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제일 먼저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냉정하고 초연한 궁금증을 갖는 것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런 다음에는 곧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남아 있는 삶을 지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가까이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으로, 종교에 의지하거나 농담을 하는 것으로, 나무나 황혼 같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아름다운 자연을 단지 한번 바라보는 것으로, 그들은 굶주림과 수모, 공포 그리고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의 감정들을 삭인다.
하지만 명백하게 몰상식한 이런 시련에서 더 큰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기 않는 한, 위에서 이야기한 순간적인 위안들은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아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나게 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P.19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 학파는 물론 현대의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 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P.20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환자들이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어떻게 하면 환자들에게 상황이 아무리 참담해도 무언가를 위해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줄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직접 강제수용소의 동료들을 대상으로 했던 집단치료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P.21
나는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이 책을 권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인간 문제의 가장 심오한 의미에 초점을 둔 한 사람의 극적인 경험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인 가치는 물론 철학적인 가치도 지니고 있는 이 책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정신의학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유익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P.26
감시하는 병사들보다도, 나치대원들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카포들은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수감자 중에서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격을 가졌다고 인정이 되면 카포로 뽑혔고, 기대했던 대로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즉시 쫓겨났다.
  • 앞잡이를 사용한 잔인성. 일제 시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P.28
그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고 또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 즉 다른 ‘번호’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 넣는다.

P.29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격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33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P.39
손가락의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는 죽음 행을 선고받는다. 판결은 채 몇 시간도 못 되어 집행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그 화장터의 문에는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화장터로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비누 한 조각씩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 사피엔스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제 시대 우리의 조상님들께 일본놈들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P.43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뿐이었다. 그 동안의 삶과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물건 중 과연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안경과 벨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벨트는 나중에 빵 한 조각과 바꾸어 먹고 말았다.

P.46~47
9명에게 배당된 담요는 단 두 장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고,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비비면서 잠을 자야 했다. 날이 혹독하게 추웠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는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신발을 잠자리에 갖고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흙이 떡고물처럼 묻은 신발을 몰래 갖고 들어와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잠이 밀려 왔다. 그리고 그 잠은 비록 몇 시간 동안이지만 우리에게 고통을 잊고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뎠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놀라운 사례를 몇 가지 더 들어 보자. 수용소에서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잇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셔츠 한 벌을 가지고 반 년 동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입었다. 수도관이 얼어 붙어 세수는 고사하고 손 하나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흙일을 하다가 어쩌다 찰과상을 입어도 - 동상에 걸린 경우만 제외하면 - 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밖에서 생활할 때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사람이 있었다. 옆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잠이 깰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서는 그런 사람이 동료의 몸 위에 엎어져서 귀에서 불과 몇 인치 떨어진 곳에서 나는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주 깊이 잠을 잤다.

P.47~48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 가슴안에 숨겨두고 픈, 그만큼 잔인할 수도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 겠지

P.50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P.56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 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는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 밖을 보게 되었다. 방금 전에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 삶이란 그만큼 잔인할 수도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P.65~66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P.70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만 집중시키는 현상만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정말 스스르의 이성까지 

P.74
몇 시간 동안 나는 마음 속으로 글을 썻다.

P.77~78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 눈물이 났다. 하필 이책을 외국에서 읽을 줄이야. 

P.79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P.80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의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대로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P.86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너무 많이 연주되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곡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바로 그날은 어떤 사람이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다른 편 막사에 누워있다. 어쩌면 겨우 몇 백야드 혹은 몇 천 야드에 불과한 거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갈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 아내가 보고 싶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P.87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 준다.

P.88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 유머라 했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 유머라 할 수 있는 것이지, 당시로서는 삶의 처절한 생존의 목소리 였으리

P.89
우리가 비교적 작은 규모(수용인원이 2,500명밖에 안 되었다)의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첫번째 주요 뉴스는 그곳에는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몰골이 ‘회교도’로 변한 사람도 곧바로 가스실로 갈 염려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기 위한 ‘환자수송차’가 올 때까지는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우리 고참 관리인이 소망하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굴뚝’이 없는 그 수용소로 가능한 한 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몇 시간 동안을 아주 힘들게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연신 농담을 주고받았다.
  • 지금의 상황보다 더 않좋다는 가정은 늘 지금을 감사하게 한다. 특히나 생존의 문제에서 얼마나 다행으로 느꼈을까...

P.91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를 잡는 시간을 준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를 잡기 위해서는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에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마워했다.

P.92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P.95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 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계산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 얼마나 솔직한가

P.120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P.121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는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P.122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 그래도 시견이 주는 의미는 피하고 싶다. 너무 아프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P.131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P.132~133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희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P.137
수용소에서 사람이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이 대목에서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쉽지 않은 그 세월의 시간동안 아버지는 견디는 삶을 사셨던거 같다

P.138~139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P.146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 경험이 나를 키우고 그 경험안에서 성장한다. 경험은 곧 힘이 되는 것

P. 152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 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P.153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 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 억압된 환경은 모든걸 잃게하고 그 안의 생존으로의 적응만 남게한다

P.159
정신적 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나게 되었을 때, 도덕적 결함을 보이는 현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P.160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161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그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꿈 같이 여겨졌던 것처럼 수용소에서 겪었던 그 모든 시련들이 언젠가는 그저 하나의 악몽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P.167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vicious-circle formation과 송환기재feedback mechanism를 악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P.169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89퍼센트의 사람들이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왔다. 그 중 61퍼센트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기꺼이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어떤 것’과 ‘어떤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P.173~174
로그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가 환자에게 어떤 것을 다시 깨우쳐 주는 과정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의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분석이든, 심지어 치료과정에서 정신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석일지라도 환자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주된 관심사가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구별된다.

P.176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P.181
인간의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2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183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 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P.186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P.189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P.210
신경학과 정신의학 두 분야를 전공한 교수로서 나는 인간이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에 어느 정도까지 굴복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하다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도 사실입니다.

P.213
자유가 결론은 아니다.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P.221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어린 시절 읽은 파랑새를 찾아다닌 동화와 같이 행복은 파랑새와 같다는 생각이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나는 가족생각을 많이 했다. 아무리 좋은 공기가 있어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함께할 가족이 없다면 다 의미없는 일이되고 만다. 살면서 가끔은 화가 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가끔은 분노할 일이 있어도, 참아가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내 자신을 키우면서 사랑을 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과 꼭 멋진 여행을 해야 겠다. 그러한 결과로 행복이 피어나지 않을까 생각든다

P.225
모든 자살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만약 그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의미와 목적을 알았다면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는 충동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나 같았었으면 어떠했을까?

P.230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P.231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P.237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다시한번 이 말이 다가선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책을 읽고
  • 지금의 삶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의 삶, 내 아버지의 삶이 자꾸만 되뇌어졌다. 결국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고 사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어떤 것을 모으기위해 누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눌러서는 안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IV. 네이버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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