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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5일 09시 30분 등록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효형출판

 

저자연구

1938년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체육교사, 웨이터 등 손대지 않은 일이 없다. 1964년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 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이어 CFJ(Centre de Formation des Journalistes,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부문의 그랑제콜)를 졸업했다. 30여 년간 <파리 마치> <르마탱> <르피가로> 등 유수한 프랑스 신문과 잡지사에서 활동한 그는 호기심 많은 정치부 기자였으며 잘 알려진 사회­경제면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베르나르 올리비에 또한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특히 역사 분야를 탐독했는데, 독서를 통해 서양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동양에 진 빚을 인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퇴 후인 1999, 그는 바다에 병을 던지듯 실크로드에 자신을 던졌다.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걸어서 여행하기로 결심한 그는 4년에 걸쳐 자신의 꿈을 실현해나갔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간을 정해 단 1킬로미터도 빼먹지 않고 걸어서 실크로드를 여행한 것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을 비우는 법을 배워간다.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재활한 것이다. 그는 또한 비행청소년에게 도보여행을 통해 재활의 기회를 주는 쇠이유(Seuil) 협회를 설립했다. 4년간의 실크로드 여행을 책으로 낸 『나는 걷는다』의 인세는 이 협회의 운영비로 쓰인다.

- yes24

 

살기 위해 걸었다. 나이 60. 침몰하는 배처럼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 극도의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 걷기가 그를 구원했다. 전쟁과 질병, 맹수가 도사리는 실크로드 12000㎞를 단지 두 발로 걷고 또 걸으며 그는 소생했다. 길이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선물했다. "두 달 뒤면 75세가 된다"며 웃는 이 남자의 이름은 베르나르 올리비에(Ollivier). 전직 기자였던 그는 은퇴 후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에 이르는 1099일의 여행기록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3부작을 펴내 모국인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한국의 걷기 여행자들에게 '구루(guru, 스승)'가 된 사람이다. 2000년에 설립한 협회 '쇠이유(Seuil·문턱)'는 실크로드가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길을 통해 자신이 치유받은 것처럼, 범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청소년 수감자들을 '걷기'를 통해 12년째 교화하고 있다. "한 아이가 말했다. 길을 떠나기 전 나는 건달이었으나 돌아온 뒤 나는 영웅이 되었다고." 올리비에가 책의 인세를 모두 쇠이유 협회에 쏟아 붓는 이유다.

―은퇴 후 무엇이 그렇게도 당신을 힘들게 했던 걸까. 자살을 생각할 만큼.

"
직장에 다닐 때는 내 자리와 이름과 존재할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연금생활자가 되면서 방향 잡을 키도, 목적지도 없는 구제민이 되어버렸다. 무기력감,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내가 사랑한 아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자식들은 독립해 떠나갔다. 내겐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걸은 길이 파리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었다.

"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친 뒤 일단 파리를 떠나자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제자인 야곱이 순례한 길로 유명하지만 나는 종교적 이유로 걷지 않았다. 유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을 걸으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보고 싶었다. 석 달 동안 2300㎞를 걸으면서 걷기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매일 20㎞씩 걸으니 내 몸이 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주 전만 해도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3주 후 걷기의 즐거움에 빠져버린 거다. 인간이란 걷기 위해서 태어난 동물이란 생각을 그때 했다. 신체의 균형이 잡히면 정신의 균형도 잡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걷기'는 육체의 운동이 아니라 정신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
걸으면서 사람들은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러운 바람, 울퉁불퉁한 길, 미모사의 향기처럼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작은 풍경을 관찰하게 된다.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을 탐구하게 되고,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세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위안을 받는다.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물속 깊은 곳에서 숨이 차 수면으로 올라오려 발버둥치는 수영 선수와도 같았다. 공기가 간절히 필요했다. 걸으면서 투지가 생겨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세상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울퉁불퉁한 길을 수천킬로미터씩 걷는다는 건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
걱정하지 마라. 당신의 몸이 훈련된 육상 선수처럼 적응할 테니까. 실크로드를 걷기 시작한 지 13일째 되던 날 내 몸의 근육들은 걷기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분당 맥박 수도 쉴 때는 60까지 내려갔고 걸을 때에도 85까지만 올라갔다. 예순한 살이었지만, 피로는 즉시 해소됐고, 짐도 덜 무겁게 느껴졌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취기 같은 게 느껴졌다. 당신도 나처럼 보행자의 열반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웃음)."

실크로드의 기적

―산티아고에서 그치지 않고 실크로드로 간 이유는 뭔가.

"
산티아고 도착점을 50㎞ 앞에 두고 그곳에 닿으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래서 그보다 더 역사가 깊고 거대한 길 실크로드를 떠올렸다. 미친 모험이란 걸 나도 안다. 내 나이에는 장미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 데 말이다. 더구나 내가 실크로드로 떠났을 땐 터키와 쿠르드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9·11테러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졌고 그로 인해 테러리스트로 숱하게 오인받았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시기에 실크로드를 걷지 않는다. 유서 깊고 아름답고 안전한 길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
내가 실크로드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적인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진정한 세계화는 실크로드에서 시작됐다. 실크로드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길이 있을까. 실크와 값비싼 보물, 향신료 같은 물품이 교역되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찬란한 아이디어들이 교환되는 장소가 실크로드였다. 세계 정복에 도움을 준 나침반, 화약, 종이, 그리고 과학과 사상이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됐다. 유럽인 4명 중 1명을 사망하게 한 페스트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됐다. 참으로 역사적이고 진기하고 놀라운 장소다. 이 길을 완주한 사람은 마르코 폴로와 일부 대사들이겠지만 말이나 자동차가 아닌, 걸어서 완주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책을 읽어보니 고생만 엄청 했지,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지는 대목은 별로 없더라.

"
그렇지 않다. 걸을 때보다 걷기를 멈추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을 만큼, 길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에게 우정과 사랑을 베풀었다. 나무꾼 철학자 셀림과 아직도 내게 펜으로 쓴 편지를 보내는 정겨운 할아버지 베흐체트, 내가 굶어 죽을까 봐 내 식량 주머니를 꽉꽉 채워주던 여인들, 일주일만 더 머물다 가라고 붙잡으며 포옹해주던 남자들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 정말 힘들었다."

―가장 큰 고비는 터키와 이란의 국경에서 이질로 쓰러져 파리로 이송됐을 때일까.

"
위험은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 있었다.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를 잡으러 온 40여명의 군인,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뛰어다니던 광인, 살기를 띠고 달려들던 맹견 캉갈, 하다못해 발가락의 화농성 염증까지.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유서를 써놓고 온 것이 다행스러웠을 정도다. 그렇다고 내게 닥칠 위험에 무방비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실크로드에 관해 전문가 이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했다. 수십장의 지도를 모으고, 터키어와 이란어도 배웠다. 관공서에 미리 도움도 청해놨고. 생명의 안전을 기적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아파 불가피하게 자동차를 타게 되면 회복된 뒤 자동차를 탔던 바로 그 자리로 되돌아와 걷더라. 일종의 결벽증 아닐까.

"
보는 관점에 따라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고 미친 사람, 편집증 환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 좀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하나 꼼꼼하게 세운 계획에 흠을 내거나 첫 단계부터 얼렁뚱땅 넘기고 싶지 않았다. 걷기는 다른 누구와도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실크로드 최초의 도보 여행자다. 당신은 '나는 영웅이 아니다, 자랑할 일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책을 펴냈다는 건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
나처럼 특별한 재능도 없고 소심한 사람도 실크로드를 걸었으니 누구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가난이 준 선물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난으로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웨이터 일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갔다.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해 대학에 들어간 게 그의 나이 서른 살 때. 졸업 후 기자가 된 그는 '파리 마치''르마탱''르피가로' 등 프랑스의 유수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걸 배울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새로운 걸 습득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지. 특종? 물론 많이 써봤다. 특종이 아니라도 기자는 자기가 쓰는 모든 기사를 특종처럼 여기고 써야 한다."

―실크로드를 걸을 때 엉터리 지도 때문에 애를 먹었다는 푸념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갈림길'이 나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신 인생의 갈림길도 그렇게 많았을까.

"
물론이다. 내 인생의 첫 갈림길은 학교였다. 집이 너무 가난하니 7남매를 도저히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되는데, 선생님이 부모님을 찾아와 베르나르만은 꼭 고등학교에 보내라고 부탁하셨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내가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갈림길은 퇴직 후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 그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때였다."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1929
년 대공황이 왔을 때 쫄딱 망한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두 분 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가장 큰 미덕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너그러움이었다. 돈은 없었지만 우리 집엔 늘 사랑이 넘쳤다. 내가 이런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모험가 기질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아올 안식처가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모험을 떠날 수 없다."

―가난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
작은 것에 만족하는 능력."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밑바닥 생업을 전전했다.

"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나는 굶어 죽지 않겠다는 확신을 그 시기에 얻었다. 뛰어난 적응력은 내가 기자로 일할 때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했다."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
돌체비타'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보고 기자가 돼야겠다, 결심한 뒤 대입 자격시험을 봤다. 영화와 현실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기자란 직업이 그냥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공부했다. 접시를 닦을 때에도 공사판에서 일할 때에도 나는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역사책은 나를 매료시켰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텐데, 굳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뭔가.

"
정치부 기자였던 내가 주로 만난 사람들은 정치인, 장관들이었다. 내가 쓴 기사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이 된 경우가 훨씬 많았다(웃음). 비즈니스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과 우정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실크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환대하면서도 그들은 (사랑을 베풀 기회를 준) 나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2002년 중국 시안에서 걷기를 끝낸 뒤 다시 그 나라들에 가본 적이 있는지.

"2005
년 다시 실크로드에 갔다. '나는 걷는다'를 읽은 독자들이 왜 책에 이미지가 없느냐고 해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9주 동안 자동차로 실크로드를 완주했다. 키르기스스탄에 갔을 때 핫산이란 이름의 목동과 재회했다. 키가 크고 덩치도 산만한 이 사람은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껴안았다. 핫산이 나를 얼마나 세게 껴안았는지 목에 걸었던 내 안경이 박살 나고 말았다. 단지 하룻밤을 잤을 뿐인데, 그는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이 걷기의 기적이다. 불꽃이 튀는 강렬한 만남이 걷는 동안 이루어진다."

―사진은 왜 싣지 않았나.

"
감동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글이다. 내가 독자들에게서 받은 가장 큰 칭찬은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저자의 옆에서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의 사진을 실었다면 이런 감동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왜 가져갔나.

"
기록하기 위해서. 사막을 건널 때 빼고 하루 10여명의 사람을 만났다. 매일 저녁 하루를 정리할 때 나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길에서 만난 꼬마의 이름까지 책에 적을 수 있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
기자생활을 할 때부터 주머니가 많이 달린 바지를 즐겨 입었다. 주머니 하나에는 여권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수첩과 펜, 또 다른 주머니에는 카메라를 넣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부터 묻고 메모했다. 엄청난 양의 메모를 하고, 엄청난 양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책은 3권이지만, 메모한 것의 5%도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도 매 순간 메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
실크로드로 떠날 때 자식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실종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고 묻더라. 고심 끝에 약속했다. 저녁마다 편지를 한 장씩 쓰겠다고. 그날 하루 있었던 일, 내가 있었던 장소와 날짜를 적은 편지를 써서 부치겠다고. 만일 내가 실종되면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에 등장하는 장소부터 나를 찾아 나서라고 했다. 여행이 끝난 지 수개월이 지난 뒤에도 메모를 읽고 사진을 보면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왜 혼자 걸어야 하는가.

"
혼자 걸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생각도 자유로워진다. 상상력이 부족해졌다고 느낄 때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걷는다."

―실크로드 이후 걸은 길이 또 있을까.

"15
일 동안 피레네산맥을 걸었고, 노르망디의 성지 순례길 3000㎞를 걸었다."

―다시 걸을 계획은?

"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6개월간 걸어볼 생각이다. 처음 실크로드를 완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집이 있던 노르망디에서 중국까지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건상 이스탄불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번에 그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싶다."

―역시 혼자서 걷겠지?

"
아니다. 이번엔 고독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걷게 될 것 같다. 걷기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동료와 함께 걷는다."

―혼자 걸어야 걷기의 완벽한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나.

"
동료가 실은 내 여자친구다. 아내와 사별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사람이다(웃음). 그런데 우리는 걸을 땐 각각 혼자 걷는다. 걸을 때는 침묵하고 멈추었을 때 대화한다. 서로 침묵을 존중한다."

―당신은 은퇴자들에게 도보여행을 권유하지만, 은퇴자들은 인생 2막에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에도 바쁘다.

"2000
년 이란 국경을 넘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4개월간 내가 쓴 돈은 겨우 300달러였다. 집에 있었다면 더 많은 돈을 썼겠지(웃음). 걷다 보면 인생 후반부, 무한하게 주어진 시간과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영감과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74세에 이처럼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역시 걷기일까?

"
매일 아침 30분 이상 걸은 뒤 찬물로 샤워하는 것을 거르지 않는다. 당신도 하루 6~7㎞씩 걸으려고 노력해보라. 실크로드도 거뜬히 걷게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도보여행자가 될 것인가.

"
나는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 환생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생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고 싶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걷는다."


출처 :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 (2012.11.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2/2012110201391.html)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25

내가 얼마나 그애들을 사랑하는지! 아이들과 나, 우리는 모두 삶의 대양 앞에 서 있다. 아이들은 현재로선 거대한 물만을 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건너가야 할 지 저 건너편을 보고 있다.

 

P27

콤포스텔라 길의 끝에서 나는 내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인간과 문명의 길, 베네치아와 구 비잔틴(이스탄불)에서 중국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가보리라. 걸어서, 서두르지 않고, 하지만 친구들과 내 원래의 생활에서 영원히 단절되기를 바라진 않았기에, 나는 크게 몇 단계로 나누어 매해 서너 달 동안 2500킬로미터에서 3000킬로미터를 걸음으로써 여정을 완성하리라 결심했다.

부럽다. 이런 것을 시도해 보겠다는 생각 용기가 부럽다.

 

P34

예전에 동양을 여행하는 서양인들의 대부분은 전도유망한 직종에 몸담기 전 이국 취향에 한번 빠져보거나 젊은 혈기로 엉뚱한 일을 벌이려는 부유한 집안의 괴짜들이었다. 그들에겐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다. 오늘날엔 평균 수명이 연장되고 사회활동이 예순 살에 마감됨에 따라 새로운 모험가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바로 이마에 주름이 지고 머리가 허연 사람들이다. 그들은 꿋꿋하고 드세고 고집이 세며, 어린 날의 꿈을 실현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요즘은 서양을 여행하는 많은 동양인들이 있는 것 같은데? 모두가 조금은 삶의 여유가 생겨서 일까?

 

P35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잘 짜여진 사고와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사고는 고운 모래밭에 말랑말랑한 베개를 베고 누워 반쯤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거나, 솔밭에서 낮잠을 청할 때 더 잘 이루어진다.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P37

하지만 내가 돌아온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는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이번 모험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얼마 전만 해도 어느 날엔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지금은 그것을 확신한다. 이 여행을 마칠 때까지 죽음은 나를 내버려둘까? 수 많은 위험-, 사고, 폭력- 이 내 앞에 도사리고 있음을 안다. 여럿이 함께 간다면 서로 기대고 돕고 격려해주고 돌볼 수 있다. 실수를 하거나 약해지는 순간도 이겨낼 수 있다. 하지만 혼자 걷는 길에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일이 드물다.

모험 도전은 항상 위험을 동반한다. 그 위험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또한 도전자가 해 내야할 과제인 것 같다.

 

P41

이스탄불은 인구 1300만의 초대형 도시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다. 하지만 정치의 중심은 수도인 앙카라다. 그래도 이스탄불이 여전히 터키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P49

중요한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처럼 나는 몸 구석구석을 점검했다. 갈비뼈와 무릎에 약간 통증이 있었고, 다리에 쥐가 나는 듯 했다. 갈비뼈와 무릎에 약간 통증이 있었고, 다리에 쥐가 나는 듯 했다. 이것은 오히려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지만 조심하기로 했다. 삼순호에 타고 있을 때는 거의 매일 발을 검사해보곤 했다. 모든 상태가 완벽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몇 시간을 걸었고 또 다시 길을 떠나야 하므로 내 몸, 특히 중요한 패탈인 발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피로의 징후에 대해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군대에서 4-50킬로미터 행군을 해 보면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몸의 균형을 깨트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결국 발에 물집이 잡히고 한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려서 더 몸을 힘들게 만드는 경우들이 생긴다.

 

P56

처음에 인간의 몸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되도록 부드럽게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너무 서두르면 고통스럽고 상처도 입게 되는데, 매일 걸어야 하는 만큼 회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판단의 척도는 바로 몸 안에, 근육과 관절 하나하나 안에 있다. 초반에 몸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우리 몸은 그런 약점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고통을 호소하기보다는 복구 하고 또 연구한다.

인간의 몸은 신기다. 어떻게 든 적응해 나간다.

 

P61

난 걸어갑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은 멀어져 갔다.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는 엉덩이와 배낭을 풀밭에 맡기고 길가에 앉았다. 5월의 햇살은 아름다웠고, 그 무섭다는 터키 군과 첫 부딫힘도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P67

걷는 것이 미덕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파리에 있을 때는 잠이 들려면 두 시간 정도는 고요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밤 열한시경 확성기를 통해 기도를 알리는 이브라힘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바로 다시 잠이 들었다.

 

P74

나는 다시 길을 떠났고, 조금 가다가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들어보니 거북 한 마리가 비탈길 위쪽에서 둥그런 눈으로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친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너와 경주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 경주가 꼭 중요한 건 아니다.

 

P77

그날 오후 누군가 말하길, 내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서 후세인이 모욕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내 행동이 터키인의 전통인 환대 정신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여행자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것은 이슬람 교도의 의무였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에서 환대손님인 여행자에게 모든 권리를 갖게 한다는 의미였다.

이슬람교의 이런 교리가 있는지 몰랐다. 이대로라면 이슬람교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P78

독일 회사와 터키 국방부 공동 제작인데도 말이다. 외부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한 터키 군대의 전략임을 틀림없다. 몇몇 지표들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거짓이었다. 어쨌거나 지도상으로는 길 위에 있는, 그리고 아주 드물게도 표지판에 표지가 된 작은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P83

아픔을 참으며 힘겹게 걷느라고 주변 경치는 눈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다만 해가 다시 나서, 비에 젖어 미끄러운 땅이 마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한 시간 반쯤 걸으니 고통이 조금씩 사라졌다. 내 몸이 엄청난 양의 엔도르핀을 만들어 고통을 없애 준 모양이다.

 

P85

그러니 도착 지점이 눈에 보이자 엔도르핀 공급소가 작동을 멈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절뚝거리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게다가 배낭의 벨트가 피부를 자극해 허리가 다시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버터냈다. 내가 대장정의 시운전이라고 부르는 절차에 나는 이미 익숙해졌다. 초반 며칠 동안은 신체기관이 지나치게 혹사당한 근육들을 강화시키지만, 과로가 심각해지면 다시 출발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인간의 신체는 참 신기하다. 상황에 맞게 변화하고 적응한다.

 

P88

레제프가 마치 확성기를 들고 외치듯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바지를 입은 외국인의 등장을 알린 탓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이 작은 촌락에서는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P90

소녀들은 깔깔거리며 도망쳤다. 이런 식으로 스타 형세를 하는 것이 쾨무를루크에서는 정말 고역이었지만, 이제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꽤 곤욕스러우면서도 한번쯤은 경험해볼만한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P107

내겐 이 음악이 동양적이라기보다는 두 운명이 서로 어루러지는 날의 모든 감흥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편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아무 걱정 없던 젊은 시절에서 이제 고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삶으로 접어드는 진지한 순간이다. 하지만 또한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다.

정욱이 생각난다. 기쁨의 순간이기도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문을 들어서기도 한 것이다.

 

P110

대부분의 스포츠와 달리 마라톤은 몇몇 챔피언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35킬로미터를 달리고 나서 몸이 이제 더는 못 하겠다고 비명을 지를 때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근육에 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지방을 분해하는 복잡한 화학작용이 몸 속에서 일어날 때, 주자는 자신의 머리와 장 속에서 고갈된 에너지를 찾는다. 바로 이러한 뇌의 회전과 장의 회전이 결합되어 이를 악물고 뛰어감으로써 그는 소중한 몇초를 벌 수 있는 것이다. 42킬로미터를 뛰어 근육이 마비돼버린 마라토너는 결승선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크로노미터를 돌아본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거기, 그가 단축한 몇 초안에 숨어 있다. 마라토너에게 어느 날엔가 그를 훌쩍 추월할 수 있는 적수라고는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대 부분 하는 말도 비슷하다. 고통의 순간을 넘길 때의 희열과 쾌감을 잊지 못해서 마라톤을 계속 하게 된다는 것이다.


P111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는 한 그리고 배낭을 짊어질 힘이 남아 있는 한, 목표에 이르길 갈망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내게 주어진 이 의무는 바로 내가 정한 것이기에 앞뒤가 마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P116

나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길을 떠났다.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거의 성자들이나 참고 견뎌낼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 시간 이상 걷고 난 후에야 더 이상 신음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은 20킬로미터를 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P123

철과 소음의 감옥인 자동차는 선택이 불가능한 혼잡스러운 장소인 것이다. 이 유목민의 후손들이 게다가 조상의 덕망을 즐겨 칭송하는 사람들이 자동차 안에서 앉은뱅이가 되어 이제 근육을 써서 스스로 움직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활동성이 퇴화해 버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우린 자동차의 편리함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P126

여기에 언어에서 오는 소외감이 더해졌다. 내가 과소평가했던 적이었다. 걸을 때는 고독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내 안에 쌓여가는 영상들, 자신과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숙소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외딴 언어의 섬에 고립돼 있었다. 떠나기 전에 배운 말과 길을 가며 알게 된 말만으론 부족했다. 언어의 감옥이라는 이 넘지 못할 장벽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견디기 힘들 것이다.

사람에게 다른 고독보다 말을 하지 못하는 고독, 사람은 있으나 소통하지 못하는 고통.

 

P129

이것만으로도 운전사들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적대감에서 열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클랙슨과 휘젓는 듯한 손짓을 동반한 경우 : 비켜!

-클랙슨 소리만 울릴 경우 : “얼굴 한번 봅시다.” 내가 아스팔트에 코를 박듯이 하고 가파른 비탈을 오를 대 가장 많이 접하는 반응이다.  이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트럭들의 신호였다. 배낭 아래로는 한 쌍의 다리, 또 위로는 모자만 보이니까 머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클랙슨 소리와 더불어 손바닥을 하늘로 하고 팔을 들어올려 뭔가 물어보는 듯한 시늉 : “무슨 일인지? 어느 나라 사람이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요?”

-클랙슨 소리 그리고 오른팔을 번쩍 들어올려 손바닥을 내 쪽으로 향한 경우 “ “헤이, 친구.”

재미있는 표현들이다. 그래 꼭 말이 안 통해도 온 몸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서로 통할 수 있다.

 

P131

내가 웃으며 거절하자 그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데려다 주는게 자신에게도 기쁨임을 거듭 밝혔다.자신의 호의가 묵살되자 그는 아주 불쾌한 표정이었고 나도 울적해졌다. 그러니 자유로워 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P133

그는 지붕을 수리해 이곳을 보존하려고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2년째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크로드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이런 멋진 기념물도 다른 많은 건물들처럼 조만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세계 어디나 비슷한 것 같다. 예전 것의 소중함을 알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이다.

 

P135

예순하나의 나이, 삼순호에 타고 있을 때는 걱정도 많았지만 육체의 젊음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내 신체기관을 내가 뛰어든 모험에 적응시키는 것, 이 첫 싸움에서 나는 승리한 모양이다. 나는 세포 하나하나마다 취기 같은 것을 느꼈다.

몇 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몸은 참 신기하다. 오히려 위험에 처했다고 느낄 때 몸이 스스로 이를 알고 스스로 진화한다.

 

P135

그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상황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로 완벽한 고독, 이는 구름 속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조건이다. 비밀과 경계심이 너무도 많아 일부러 거리를 두는 신들은 단체 여행자들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올림포스 신전에 받아들열지지 위해서는 혼자인 것만으론 부족하다.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P136

우리를 가두고 있던 일상이라는 감옥의 창살이 순식간에 부서져버린다. 그제야 비로소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성 바울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며 보았던 빛나는 환상을 자주 생각한다.

 

P142

걸으면서 몽상하기란 쉽지만, 걸으면서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날아오르는 독수리, 흘러가는 구름, 도망치는 산토끼, 엉뚱하게 마주치게 되는 교차로, 이름 모를 꽃의 진한 향기, 목동의 외침 혹은 끝없이 펼쳐진 언덕의 흰 물결, 이렇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생각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매 순간, 걷는 이는 수많은 사소한 사건들에 이끌려 명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로 되돌아오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꿈꾸는 자에게 더욱 관대하다. 심사숙고할 때와 달리 몽상은 일단 끊겼다가도 별 어려움 없이 다시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다.

 

P143

길을 가면서, 나보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과 자주 교감하곤 한다. 예를 들면, 1245년 교황의 명을 받고 이곳을 지나간 조반니 카르피니 같은 사람이다. 하루라도 빨리 위대한 칸의 궁궐에 도착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인들이 애용하는 포니 엑스프레스[미국 몬태나주 세인트조지프와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사이를 말을 타고 우편물을 배달한 릴레이식 우편배달 체계]’의 선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몽골식 연락체제를 이용했다.  

 

P144

수도자와 대상들만 이 길을 독점했던 것은 아니다. 무시무시한 군대를 또한 이곳에서 갑작스럽고도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도시들이 대부분 방어하기 좋은 계곡 사시에 자리를 잡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P145

첨탑 위에서 떨어진 소리가 옆 첨탑의 소리들과 부딪쳐 튀어오르고 방 안으로 온통 뒤섞여 들어온다. 저 위 천국에 있는 알라도 귀를 막고 있으리라. 알라와 나, 우리 둘은 한시라도 기도가 빨리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P147

이 무시무시한 개들은 터키인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외국인에게 파는 것도 금지돼 있다. 힘 좋고 공격적인 캉갈의 임무는 양 떼를 지키는 것이며, 늑대와 곰 같은 야생동물을 공격하도록 훈련을 받는다.

우리의 진돗개 같은 느낌? 국가 상징적 개인가 보다.

 

P154

마샬라!”

이는 놀라움이나 경탄을 표현할 때 쓰는 말로, 여덟에서 열 살 사이의 터키 소년들이 남자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을 의미하는 할례 의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대로 직역하면 신께서 원하신 이 경이로움을 보라는 뜻이다. 내 장딴지가 신께서 원하신 경이로움의 일부라고 생각하니 매우 유쾌했다. 하지만 전적으로 신의 뜻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P156

나는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능적이고 실제적이고 자연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도 않는 이런 길들을 아무런 몽상도 생각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란 한 가지 측면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내가 가장 놀라운 만남을 겪게 된 것은 바로 그곳, 무표정한 포플러들이 늘어선 이 무뚝뚝한 길 위에서 였다.

동감한다. 대로는 인간적인 느낌, 여행에서의 공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아니 뭔가가 결여된 듯한 느낌이다.

 

P157

한 노인이, 시선을 허공을 향한 채로 어디서 생겨났는지도 알 수 없는 달걀들을 파리에서 온 보행자에게 마치 선물하듯 건네는 광경을!

 

P160

즉 짐을 실은 낙타의 느린 걸음으로 아홉 시간에서 열 시간을 걸었던 것이다. 자동차가 거리를 단축하기 전까지, 숙소가 있던 도시들은 낙타가 하루 이동할 거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로 하루에 500에서 1000킬로미터를 갈 수 있게 되자 대상을 위한 시설은 존립 근거가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인적이 끊기고 쓸모 없게 된 대상 숙소들은 폐허가 되었다. 이런 현상은 터키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한 변화는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자동차로 인해서 대상들이 지나갔던 길이 쇠퇴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P164

통신의 신께서 삼 초 동안 연결을 허용해 주셨다. 네 개의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것들을 읽으려면 내일 다시 시도해봐야 할 것이다.

 

P168

원기를 되찾게 해준 저녁시간이었다. 시골 마을 사람들도 친절했지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나는 대화나 접촉에 늘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우리 네 사람 모두 마치 무언가 서로 채워줄 것이 있는 것처럼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헤어질 때 에멜이 포옹을 해주었다. 내 수염에 어린 아가씨의 얼굴이 스친 것은 여행을 통틀어 그때가 유일했다.

프랑스인들이 독특한 인사 방법이 생각난다. 프랑스인들은 얼굴을 서로 맞대고 인사를 하는데 이슬람에서는 금지 시 된 인사 방법이었을 것 같다.

 

P170

하지함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구조는 독특했고 흥미로웠다. 다른 곳과 달리 대상 숙소가 마을 안이나 그 주위에 있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대상 숙소였던 것이다. 그곳은 아직도 흙과 돌이 섞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의 출현이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누가 나를 재워줄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뜨거운 감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재미있는 경쟁이다. 이슬람의 관습이 참 신기하다.

 

P173

! 이 세상에 아직도 그 노인처럼 진귀한 사람이 존재함을 확인한다는건 얼마나 힘이 솟는 일인가.

 

P175

그래서 아랍 속담을 되뇌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았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고, 집에 머무는 사람들은 업신여김을 받을 뿐이다.”

떠나고 싶어진다. 부럽다.

 

P177

도보여행과 트레킹에 열광해 있던 이 보따리 장수는 나의 걷는 기술, 배낭 안의 물건들, 신발의 품질, 침낭의 재질 등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여기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 어떤 노하우가 있을까? 나도 갑자기 궁금해진다.

 

P179

메릊리폰 근처에 이르렀을 때 경찰차가 와서 서더니 차에 타라고 했다.

당신과 애기를 하고 싶소. 영어 연습을 해야 하거든.”

내가 알아들은 말은 대충 이랬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도 많이 겪는 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P181

이튿날 나는 국도로 가지 않았다. 트럭들이 내는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발은 이제 완전히 신발을 제압하고 있었다. 토시아에서 취한 휴식이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P186

유목민이었던 터키인들은 집에서 살 때도 마치 텐트 안에서 살 듯이 했다. 방 하나에서 접대와 식사, 잠자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텐트 생활이 아닌가. 가장 검소한 집조차도 바닥엔 항상 양탄자가 깔려 있다. 좀 여유가 있는 터키인들은 벽이나 침실 칸막이에도 양탄자를 치곤 한다. 텐트 안에 놓인 쿠션 또한 언급할 만한 것이지만, 차츰 접는 소파가 터키 가정의 필수 가구로 자리 잡은 듯 하다.

 

P188

그러나 뜨거워진 신발 바닥이 재촉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걸어야 했다. 항상 자문해보곤 한다. 무엇이 나를 자꾸 앞으로 떠미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힘이길래 잠에서 깨자마자 나를 길로 내던지는 걸까? 내게 진정 어려운 일은 걷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것이었다.

나도 궁금하다. 어떤 힘이 그를 그렇게 힘든 역경을 물리치고 걷게 만들었을까?

 

P189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여행을 마친 후엔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여정에서 친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5년 내에 꼭 도보 여행을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제 실행으로 옮길 수 있을까?

 

P204

아흐산이 자기 친구 한명을 불렀다. [밀리에트]라는 일간지의 질레 특파원으로 있는 하이다르 주하단이라는 친구였다. 그는 기사를 쓰려고 나를 인터뷰했고, 지역 TV 방송에 내 보낼 요량으로 촬영까지 했다. 입장이 바뀐 셈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제껏 질문만 해왔는데 답변을 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P231

새로운 풍경을 갈구하는 나의 취향은 정말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마치 새로운 미인을 보면 그 전의 연인은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바람난 애인 같지 않은가. 환상적인 장면을 막 보고 돌아섰는데도, 나는 다음에 올 경치에 다시 관심을 갖는다.

 

P244

당신은 보물지도를 갖고 있는 거요.”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보물지도라구요?”

실크로드의 보물지도지. 실크로드에 보물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애기니까.”

실크로드에 대한 환상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P260

하지만 정 그러시겠다면 그 전에 우리 나라 영사관에 연락해서 내가 체포됐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부르도록 하지요.”

그렇다면 내 배낭을 뒤지는 것도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시죠. 이젠 뭘 하죠?”

밤 동안 여기 계시지요.”

결국 체포된 거로군요.”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의 손님입니다.”

 

P270

앙카라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 전화를 하자 한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가며 전화를 받았다. 그들이 자국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비행기로 날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위험한 지역들이 있다는 것, 내가 굳이 그런 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 잘못이라는 것, 그들 마음대로 한다는 것, 따라서 그들과 애기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 결론적으로 내가 체포되고 수색까지 받게 된 절차에 대해 영사관이 국가를 대표해서 항의할 명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계속 여행하기를 고집하는 이상 나는 또 다시 검문 받고 체포되고, 심지어는 헌병들 마음대로 하루건 일주일이건 혹은 그 이상이건 감금할 수도 있었다.

프랑스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 같다.

 

P272

푸른눈 쾨크쾨즈는 터키인이 군인과 거의 동의어로 인식되던 시대의 직계 후손이었다. 투쟁과 왕의 절대권력이 주가 되던 아시아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실상 이 나라를 통치하는 군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P274

실크로드는 지역 영주들의 주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대상들이 이동경로를 바꾸지 않도록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줘야 했던 것이다. 값진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높은 관세를 놓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상인들이 무사히 오가는 일에 고심한 나머지, 당시의 관료들은 이미 보험이라는 것을 고안해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이득이다. 경제적 이득이 있는 곳에는 어떻게든 방법이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P287

필로바 시의 시장인 오스만 쿠르트가 테라스로 차를 내왔다. 그는 지금부터 한달전쯤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에 가던 중 이스멧파샤 해안을 걷고 있는 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괴짜가 지금 자기 옆에 있으니 어리둥절해 했다.

 

P307

시골 마을에서 터키 여인들의 운명을 접할 때마다 나는 늘 반감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뒷전으로 물러서도록 배우고 일만 하도록 정해져 있는게 아닌가. 관찰해보니 사진을 찍을 때도 사내아이들은 좋아하며 카메라 앞에서 설쳐대는 데 비해 계집아이들은 사내 애들 뒤로 숨었다.

 

P315

어떤 목표가 막 달성될 찰나에 이르면, 나는 거기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내겐 언제나 그 다음이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다. 에르주룸은 이스탄불과 테헤란의 중간쯤 된다. 이미 며칠 전부터 나는 이란에 관계된 자료들을 뒤적거리고 있었으며, 여행의 두 번째 단계에 어떻게 접어들 것인지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P317

서아시아를 여행하고 나면,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에서 장사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대화의 기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손님이 상점에 들어올 때 상인이 기대하는 것은 실제적인 이익도 이익이지만 좋은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글쎄 상인들의 농간, 이른바 호갱님들을 대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멋진 말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다.


P331

우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그것도 어이없는 죽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후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실 어이없지 않은 죽음은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저자가 여행을 떠나면서 거쳐간 지역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고 있다. 다만.여행을 준비하게 된 배경과 여행 전 준비과정을 조금 담은 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보완이라고 하긴 그렇고 사진을 분명히 뺀 이유를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래도 나는 오히려 적절한 사진은 책의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해 본다.

 

3. 이 책의 장점

이 책은 전 세계적인 도보여행? 걷기 열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2000년대 초 제주도 올레길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여행의 큰 패러다임이 바뀌었던 기억이 난다. 걷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행과는 또 다른 의미일 듯 싶다. 도보여행은 여행지를 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숨결하나까지 느끼게 해줄 것이다. 분명 자동차로 지나가듯 가는 여행과는 다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역시 도보여행을 시도해 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4. 내가 저자라면

난 적절한 사진과 함께 자신의 여정을 지도로 표시해서 책에 각 장마다 소개했을 것 같다. 그렇게 하면 독자들이 조금 더 저자의 글 속에 빠져들고 함께 도보 여행을 하는 느낌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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