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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5일 11시 05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 임수현 옮김

효형출판

 

 

1. 저자에 대하여

 

"인간은 걷는 동물로 태어났지 운전하러 태어나지 않았다"

"걷기는 신체적 운동일 뿐 아니라 정신적 활동이기도 합니다. 특히 혼자 걷다보면 자신을 되돌아보며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철학적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西安)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12를 걸어간 도보여행기 `나는 걷는다'(3)를 내놓았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66) 씨가 지난 467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2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등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현재 5개국어로 번역돼 나와 있다. 이 책을 국내 출간한 출판사 효형출판의 주선으로 5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9층 목련실에서 마련된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걷기 예찬론을 펼쳤다.

 

"인간은 걷는 동물로 태어났지 운전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라며 "걷기는 신체기관을 단련시켜 건강을 유지해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치켜세웠다. 걷기의 또 다른 미덕으로 여행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특히 "혼자 걷는 게 중요하다""혼자 길을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귀게 되고, 자아와 타인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등 세상과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방편으로 걷기만한 게 없다"고 말했다.

 

35년 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은퇴 후 1년 간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다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는 그는 특히 "목적의식 없이 걷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길을 나서기 전에 반드시 왜 걷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여행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1938년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체육교사, 웨이터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1964년 서른 살의 느지막한 나이에 바칼로레아(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파리 마치' `르 마탱' `르 피가로' 등 프랑스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열정적인 정치부 기자로 일하며 숨가쁘게 살다 은퇴 후 1년 뒤인 1999년 예순한 살에 실크로드 여행길에 나섰다. 열아홉 살에 폐결핵에 걸려 건강에 큰 위협을 받았던 그는 미친 듯이 운동을 해건강을 되찾은 적이 있으며, 직장생활 중에도 마흔다섯 살 때부터 마라톤을 시작해 15년간 매년 한두 차례씩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등 달리기와 걷기는 그의 삶의 일부였다.

 

그가 실크로드를 걷기로 결심한 것은 실크로드가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 서로를 풍성하게 살찌운, 가장 매혹적인 역사적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어려운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만 자신은 참 운이 좋았다며 "걷다보니 책도 쓰고 또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성공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의 인생에는 배우며 공부하는 학업의 시기, 사회에 진출해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부양하는 생산의 시기, 은퇴 등 세 가지 단계가 있다며, 특히 은퇴의 시기에 정원이나 가꾸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사회에 유용한 활동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힘들 때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자신은 운이 많이 따랐던 인생이라며 앞으로 남은 삶을 운이 없는 사람들, 특히 불우한 청소년들을 돕는 데 모두 쏟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실크로드 도보 여행 중에 마음을 굳혔던 사회봉사 계획을 벌써 실천에 옮기고 있다. 마음이 통하는 20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2000`쇠이유(Seuil, www.assoseuil.org, `문턱'이라는 뜻의 프랑스어)협회를 창설, 판사의 협조 아래 소년원이나 감옥에 수감된 청소년들에게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협회는 두 명의 비행 청소년이 어른 한 명과 짝을 이뤄 넉달간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 인접 외국을 2500정도 걸어 다니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평범한 시민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재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그는 2002-20032년간 12명의 아이들이 이 여행길에 나섰는데, 아이들은 처음 한달보름 정도는 힘들게 느끼며 반항하기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지만 이후 적응기간을 거쳐 여행을 마치고 나면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사회에 자연스럽게 편입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립해 매년 100명 정도의 비행 청소년을 도보 여행 보내는 게 목표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모두 이 협회일에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2004.11.> 연합뉴스 인터뷰

 

 

길을 떠나 홀로 걸어보라길이 보이리니

", 나만 구원한 게 아냐85%인 청소년 재범률, 걷고 나면 15%로 떨어져"

 

은퇴 후폭풍걷기로 버텼다

아내의 죽음 겹쳐 우울증 앓아 자살까지 시도했다

예순에 처음 무작정 길 떠나

 

흘러가는 구름미모사 향기

평소 못 봤던 세상, 걸으며 만나고몸과 마음엔 진정한 자유 찾아와

 

청소년 치유그룹 '쇠이유'

범죄 청소년들 걷기로 교화3개월간 2000걸으며

성취감 느끼고 칭찬받으면 아이들 눈에 자신감이 생겨

 

아프간 전쟁 중에도 걸었다

군인에 쫓기고 이질 걸리고, 위험천만한 순간 많았지만

내 안전을 걱정한 이들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그 우정너무도 큰 행복

 

나는 또 걷는다

이번엔 혼자 아닌 동료와 파리~이스탄불 걸어볼 것

누구냐고?

아내 잃은지 20년 만에 새로운 사랑을 찾았거든

 

살기 위해 걸었다. 나이 60. 침몰하는 배처럼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괴감,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 극도의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 걷기가 그를 구원했다. 전쟁과 질병, 맹수가 도사리는 실크로드 12000를 단지 두 발로 걷고 또 걸으며 그는 소생했다. 길이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선물했다.

 

"두 달 뒤면 75세가 된다"며 웃는 이 남자의 이름은 베르나르 올리비에(Ollivier). 전직 기자였던 그는 은퇴 후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에 이르는 1099일의 여행기록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3부작을 펴내 모국인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한국의 걷기 여행자들에게 '구루(guru, 스승)'가 된 사람이다. 2000년에 설립한 협회 '쇠이유(Seuil·문턱)'는 실크로드가 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길을 통해 자신이 치유받은 것처럼, 범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청소년 수감자들을 '걷기'를 통해 12년째 교화하고 있다. "한 아이가 말했다. 길을 떠나기 전 나는 건달이었으나 돌아온 뒤 나는 영웅이 되었다고." 올리비에가 책의 인세를 모두 쇠이유 협회에 쏟아붓는 이유다.

 

'2012 월드 트레일 콘퍼런스'에 초청돼 제주에 온 그를 지난달 30일 서귀포에서 만났다. 이튿날 제주올레 10코스를 함께 걸었다. '혼자 걷기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물었다. 올리비에가 답했다. "나는 혼자였던 적이 별로 없다. 길 위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었다. 4년간 걸으며 사귄 사람들이 1만명? 아니 15000명은 될 것이다."

 

행복을 파는 상점

 

9개 국어로 번역된 '나는 걷는다'는 프랑스에서만 40만부가 팔렸다. 인세 수익이 꽤 많았겠다.

 

"인세의 절반은 쇠이유에 주었고, 절반은 세금으로 냈다. 나는 돈에는 관심이 없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모를까. 행복을 파는 상점은 어디에도 없다."

 

'문턱'이라는 뜻의 '쇠이유'를 협회 이름으로 정한 이유는 뭘까.

 

"문턱은 어디에나 있다. 집에 들어갈 때, 사원에 들어갈 때에도 문턱을 넘는다. 범죄의 늪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이 문턱을 넘어서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기를 소망했다."

 

걷는 행위가 어떻게 아이들을 변화시키나.

 

"아이들은 배낭을 하나 짊어지고 3개월 동안 2000를 걷는다. 하루에 보통 25정도 걷는다. 두 달 정도는 몹시 추운 날씨이거나 눈 속에서 걷는다. 첫 달 몇 주는 등이 아프거나 발이 아프다며 저항한다. 이 고비를 넘기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걷기에 즐거움을 느낀다. 끝까지 걷고 나면 아이들은 늘 숙이고 다니던 고개를 똑바로 들기 시작한다. 스스로 해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기 존엄성을 회복한다.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의 격려와 칭찬도 그들이 문턱을 넘는 데 힘을 실어준다."

 

프랑스 정부와 함께 이 일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나.

 

"수감 청소년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비행 청소년의 85%가 재범한다고 한다. 그러나 '쇠이유'의 걷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의 재범률은 15%에 불과하다. 어떤 방법으로도 변화하지 않는 아이들을 정부는 쇠이유로 보낸다."

 

은퇴 후 무엇이 그렇게도 당신을 힘들게 했던 걸까. 자살을 생각할 만큼.

 

"직장에 다닐 때는 내 자리와 이름과 존재할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연금생활자가 되면서 방향 잡을 키도, 목적지도 없는 구제민이 되어버렸다. 무기력감,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괴로웠다. 내가 사랑한 아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자식들은 독립해 떠나갔다. 내겐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 걸은 길이 파리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었다.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친 뒤 일단 파리를 떠나자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예수의 제자인 야곱이 순례한 길로 유명하지만 나는 종교적 이유로 걷지 않았다. 유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 이곳을 걸으면서 역사의 일부가 되어보고 싶었다. 석 달 동안 2300를 걸으면서 걷기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매일 20씩 걸으니 내 몸이 젊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주 전만 해도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3주 후 걷기의 즐거움에 빠져버린 거다. 인간이란 걷기 위해서 태어난 동물이란 생각을 그때 했다. 신체의 균형이 잡히면 정신의 균형도 잡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걷기'는 육체의 운동이 아니라 정신의 운동이라고 말했다.

 

"걸으면서 사람들은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러운 바람, 울퉁불퉁한 길, 미모사의 향기처럼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작은 풍경을 관찰하게 된다.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을 탐구하게 되고,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세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위안을 받는다. 걷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물속 깊은 곳에서 숨이 차 수면으로 올라오려 발버둥치는 수영 선수와도 같았다. 공기가 간절히 필요했다. 걸으면서 투지가 생겨났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세상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울퉁불퉁한 길을 수천킬로미터씩 걷는다는 건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의 몸이 훈련된 육상 선수처럼 적응할 테니까. 실크로드를 걷기 시작한 지 13일째 되던 날 내 몸의 근육들은 걷기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분당 맥박 수도 쉴 때는 60까지 내려갔고 걸을 때에도 85까지만 올라갔다. 예순한 살이었지만, 피로는 즉시 해소됐고, 짐도 덜 무겁게 느껴졌다. 세포 하나하나마다 취기 같은 게 느껴졌다. 당신도 나처럼 보행자의 열반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웃음)."

 

실크로드의 기적

 

산티아고에서 그치지 않고 실크로드로 간 이유는 뭔가.

 

"산티아고 도착점을 50앞에 두고 그곳에 닿으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래서 그보다 더 역사가 깊고 거대한 길 실크로드를 떠올렸다. 미친 모험이란 걸 나도 안다. 내 나이에는 장미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 데 말이다. 더구나 내가 실크로드로 떠났을 땐 터키와 쿠르드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9·11테러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졌고 그로 인해 테러리스트로 숱하게 오인받았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시기에 실크로드를 걷지 않는다. 유서 깊고 아름답고 안전한 길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내가 실크로드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적인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진정한 세계화는 실크로드에서 시작됐다. 실크로드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진 길이 있을까. 실크와 값비싼 보물, 향신료 같은 물품이 교역되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찬란한 아이디어들이 교환되는 장소가 실크로드였다. 세계 정복에 도움을 준 나침반, 화약, 종이, 그리고 과학과 사상이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됐다. 유럽인 4명 중 1명을 사망하게 한 페스트 역시 실크로드를 통해 전파됐다. 참으로 역사적이고 진기하고 놀라운 장소다. 이 길을 완주한 사람은 마르코 폴로와 일부 대사들이겠지만 말이나 자동차가 아닌, 걸어서 완주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책을 읽어보니 고생만 엄청 했지,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지는 대목은 별로 없더라.

 

"그렇지 않다. 걸을 때보다 걷기를 멈추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을 만큼, 길에서 만난 친구들은 나에게 우정과 사랑을 베풀었다. 나무꾼 철학자 셀림과 아직도 내게 펜으로 쓴 편지를 보내는 정겨운 할아버지 베흐체트, 내가 굶어 죽을까 봐 내 식량 주머니를 꽉꽉 채워주던 여인들, 일주일만 더 머물다 가라고 붙잡으며 포옹해주던 남자들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 정말 힘들었다."

 

가장 큰 고비는 터키와 이란의 국경에서 이질로 쓰러져 파리로 이송됐을 때일까.

 

"위험은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 있었다.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나를 잡으러 온 40여명의 군인,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뛰어다니던 광인, 살기를 띠고 달려들던 맹견 캉갈, 하다못해 발가락의 화농성 염증까지.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유서를 써놓고 온 것이 다행스러웠을 정도다. 그렇다고 내게 닥칠 위험에 무방비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실크로드에 관해 전문가 이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했다. 수십장의 지도를 모으고, 터키어와 이란어도 배웠다. 관공서에 미리 도움도 청해놨고. 생명의 안전을 기적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아파 불가피하게 자동차를 타게 되면 회복된 뒤 자동차를 탔던 바로 그 자리로 되돌아와 걷더라. 일종의 결벽증 아닐까.

 

"보는 관점에 따라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고 미친 사람, 편집증 환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 좀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하나 꼼꼼하게 세운 계획에 흠을 내거나 첫 단계부터 얼렁뚱땅 넘기고 싶지 않았다. 걷기는 다른 누구와도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실크로드 최초의 도보 여행자다. 당신은 '나는 영웅이 아니다, 자랑할 일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책을 펴냈다는 건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나처럼 특별한 재능도 없고 소심한 사람도 실크로드를 걸었으니 누구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가난이 준 선물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태어났다. 농사꾼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난으로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웨이터 일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갔다. 독학으로 바칼로레아(대학입시 자격시험)에 합격해 대학에 들어간 게 그의 나이 서른 살 때. 졸업 후 기자가 된 그는 '파리 마치''르마탱''르피가로' 등 프랑스의 유수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걸 배울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기자라는 직업은 새로운 걸 습득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지. 특종? 물론 많이 써봤다. 특종이 아니라도 기자는 자기가 쓰는 모든 기사를 특종처럼 여기고 써야 한다."

 

실크로드를 걸을 때 엉터리 지도 때문에 애를 먹었다는 푸념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갈림길'이 나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신 인생의 갈림길도 그렇게 많았을까.

 

"물론이다. 내 인생의 첫 갈림길은 학교였다. 집이 너무 가난하니 7남매를 도저히 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 되는데, 선생님이 부모님을 찾아와 베르나르만은 꼭 고등학교에 보내라고 부탁하셨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내가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갈림길은 퇴직 후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 그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때였다."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1929년 대공황이 왔을 때 쫄딱 망한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두 분 다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가장 큰 미덕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너그러움이었다. 돈은 없었지만 우리 집엔 늘 사랑이 넘쳤다. 내가 이런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모험가 기질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돌아올 안식처가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모험을 떠날 수 없다."

 

가난이 당신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작은 것에 만족하는 능력."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밑바닥 생업을 전전했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나는 굶어 죽지 않겠다는 확신을 그 시기에 얻었다. 뛰어난 적응력은 내가 기자로 일할 때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했다."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돌체비타'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보고 기자가 돼야겠다, 결심한 뒤 대입 자격시험을 봤다. 영화와 현실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기자란 직업이 그냥 멋져 보였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공부했다. 접시를 닦을 때에도 공사판에서 일할 때에도 나는 책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역사책은 나를 매료시켰다."

 

기자로 일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을 만났을 텐데, 굳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뭔가.

 

"정치부 기자였던 내가 주로 만난 사람들은 정치인, 장관들이었다. 내가 쓴 기사 때문에 친구보다는 적()이 된 경우가 훨씬 많았다(웃음). 비즈니스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난 사람들과 우정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실크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환대하면서도 그들은 (사랑을 베풀 기회를 준) 나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2002년 중국 시안에서 걷기를 끝낸 뒤 다시 그 나라들에 가본 적이 있는지.

 

"2005년 다시 실크로드에 갔다. '나는 걷는다'를 읽은 독자들이 왜 책에 이미지가 없느냐고 해서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려고 9주 동안 자동차로 실크로드를 완주했다. 키르기스스탄에 갔을 때 핫산이란 이름의 목동과 재회했다. 키가 크고 덩치도 산만한 이 사람은 나를 한눈에 알아보고 껴안았다. 핫산이 나를 얼마나 세게 껴안았는지 목에 걸었던 내 안경이 박살 나고 말았다. 단지 하룻밤을 잤을 뿐인데, 그는 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이 걷기의 기적이다. 불꽃이 튀는 강렬한 만남이 걷는 동안 이루어진다."

 

사진은 왜 싣지 않았나.

 

"감동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글이다. 내가 독자들에게서 받은 가장 큰 칭찬은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저자의 옆에서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의 사진을 실었다면 이런 감동은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왜 가져갔나.

 

"기록하기 위해서. 사막을 건널 때 빼고 하루 10여명의 사람을 만났다. 매일 저녁 하루를 정리할 때 나의 기억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길에서 만난 꼬마의 이름까지 책에 적을 수 있는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

 

"기자생활을 할 때부터 주머니가 많이 달린 바지를 즐겨 입었다. 주머니 하나에는 여권을 넣고, 다른 하나에는 수첩과 펜, 또 다른 주머니에는 카메라를 넣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이름부터 묻고 메모했다. 엄청난 양의 메모를 하고, 엄청난 양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 책은 3권이지만, 메모한 것의 5%도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도 매 순간 메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실크로드로 떠날 때 자식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아버지가 실종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고 묻더라. 고심 끝에 약속했다. 저녁마다 편지를 한 장씩 쓰겠다고. 그날 하루 있었던 일, 내가 있었던 장소와 날짜를 적은 편지를 써서 부치겠다고. 만일 내가 실종되면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에 등장하는 장소부터 나를 찾아 나서라고 했다. 여행이 끝난 지 수개월이 지난 뒤에도 메모를 읽고 사진을 보면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혼자 걸어야 하는 이유

 

31일 아침, 올리비에는 제주올레 10코스를 걷기 위해 모인 수백 명의 사람을 보고 입을 벌렸다. '혼자 걸어야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진 그에게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1년에 한 번쯤 이런 걷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웃던 그는 "걷기 열풍은 한국 사회가 성찰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제주올레길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걷기 열풍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다고 말하자 올리비에가 반문했다. "1년 동안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자동차를 타는 것이 걷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

 

왜 혼자 걸어야 하는가.

 

"혼자 걸어야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생각도 자유로워진다. 상상력이 부족해졌다고 느낄 때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걷는다."

 

실크로드 이후 걸은 길이 또 있을까.

 

"15일 동안 피레네산맥을 걸었고, 노르망디의 성지 순례길 3000를 걸었다."

 

다시 걸을 계획은?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6개월간 걸어볼 생각이다. 처음 실크로드를 완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땐 집이 있던 노르망디에서 중국까지 걸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건상 이스탄불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번에 그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싶다."

 

역시 혼자서 걷겠지?

 

"아니다. 이번엔 고독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걷게 될 것 같다. 걷기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동료와 함께 걷는다."

 

혼자 걸어야 걷기의 완벽한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나.

 

"동료가 실은 내 여자친구다. 아내와 사별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사람이다(웃음). 그런데 우리는 걸을 땐 각각 혼자 걷는다. 걸을 때는 침묵하고 멈추었을 때 대화한다. 서로 침묵을 존중한다."

 

당신은 은퇴자들에게 도보여행을 권유하지만, 은퇴자들은 인생 2막에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에도 바쁘다.

 

"2000년 이란 국경을 넘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4개월간 내가 쓴 돈은 겨우 300달러였다. 집에 있었다면 더 많은 돈을 썼겠지(웃음). 걷다 보면 인생 후반부, 무한하게 주어진 시간과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영감과 에너지를 얻게 될 것이다."

 

74세에 이처럼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역시 걷기일까?

 

"매일 아침 30분 이상 걸은 뒤 찬물로 샤워하는 것을 거르지 않는다. 당신도 하루 6~7씩 걸으려고 노력해보라. 실크로드도 거뜬히 걷게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도보여행자가 될 것인가.

 

"나는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 환생을 믿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생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고 싶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걷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2/2012110201391.html

<김윤덕의 사람인 2012.11.03>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본문

 

P17. 나는 다시 길을 떠났고, 조금 가다가 멈춰서 휴식을 취했다.

눈을 들어보니, 거북이 한 마리가 비탈길 위쪽에서 둥그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친구여. 미리 말해두지만, 난 너와 경주하지는 않을 거야.

 

1. 길 끝의 마을들

 

P25.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때로 힘겨웠던 젊은 시절 그리고 부러울 것 없던 성인으로서의 삶. 나는 아주 풍요로운 두 인생을 살았다. 그런데 왜 그것이 이제 중단돼야 하나?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침착하게, 체념하듯 벽난로 옆에 앉아 책을 읽거나 소파에 안자 tv를 보면서 노년의 덜미에 붙잡히기를 기다리를 것? 아니, 내게 그런 세월은 해당하지 않는다. 내겐 아직도 만남과 새로운 얼굴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머나먼 초원과 얼굴에 쏟아지는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는 것을 꿈꾼다.

 

P35. 걷는 것에는 꿈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잘 짜여진 사고와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사고는 고운 모래밭에 말랑말랑한 베개를 베고 누워 반쯤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거나, 솔밭에서 낮잠을 청할 때 더 잘 이루어진다. 걷는 것은 행동이고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부지불식 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런 바람, 구덩이투성이인 길,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 자줓빛 체리, 잘려나간 건초 또는 꽃이 핀 미모사의 냄새,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뺏기기도 하고 정신이 분산되기도 하며 계속되는 행군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나도 이렇게 걷기고 했는데실천을 하지 못했네 ㅜㅜ 너무나 아쉽다. 하다가 만 듯한 기분에 찝찝하구나..

 

P36.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고독, 나는 과연 그 심연과 맞서 싸워 그 달콤함을 음미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지닌 모든 이점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독이 도피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에 더욱 절실한 질문이다. 고독이 칠판이라면, 난 그 위에다 계속 써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내가 가시 돋친 혹은 매끄러운 생각들을 심어서, 돌아왔을 때 그것들이 활짝 필 수 있게 해야 할, 일종의 밭과 같은 것.

고독과 외로움과 싸우는 법. 그것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이겨가는 것은 힘들다. 달콤? 달콤할까? 근데 시간이 지나니 어떤 것이 달콤한지는 알겠다. 이겨내고 있다는, 그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내 자신을 볼 때가 참 달콤한 것 같다.

 

P43. 배에서 내릴 때면 드디어 아시아에, 내 여행의 출발점에 서게 되리라. 테헤란에 도착하기까지 이제 3000킬로미터도 채 남지 않았다.

긍정적인 분이다^^

 

 

2. 나무꾼 철학자

 

P46. 대상의 길을 따라가려는 것이 나의 바람이라면, 그들의 노선 자체보다는 정신을 존중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보다는 대상의 일상을 이루고 있던 생각, 감정 그리고 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그들의 분위기와 전통, 삶의 방식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을 거쳐야 한다고 확신했다.

 

P50. 사실 자연 속에 있을 때 기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는 귀에 거슬리기도 했다. 게다가 제대로 맞춰놓지 않아서 계보기는 그리 정확하지도 않았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P52. 여행을 준비하면서 맞닥뜨린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을을 거쳐 가기로 선택한 이상, 거의 매일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만나게 되리라.

인생이 여행이구나..

 

P56. 두 시간 정도 걷자 근육이 충분히 풀어져서 아픔은 사라졌지만, 마찰이 많은 허벅지와 엉덩이는 불에 덴 듯했다. 아직도 불필요한 지방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도록 몸을 내러벼둘 줄도 알았고, 너무 점잔 빼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몸무게 몇 킬로그램이 줄면 몇 킬로미터를 더 걸을 수 있을테고, 다리는 저절로 단단해질 것이다.

 

P57. 이런 상태가 지속될 때 평화로움과 기쁨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걷는 것은 조화로움을 만들고 또 자리 잡게 한다.

처음에는 자신과 맞지 않아 힘들고 고되겠지만, 이렇 듯 적응의 단계가 필요하다. 반대로 적응할 시간을 줄 여유도 필요할텐데

 

P67. 걷는 것의 미덕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파리에 있을 때는 잡이 들려면 두 시간 정도는 고요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밤 열한시경 확성기를 통해 기도를 알리는 이브라힘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바로 다시 잠이 들었다.

 

P67. 나는 옷을 입고 수돗가로 가서 찬물로 몸을 씻고 면도를 했다. 전날 빨아둔 티셔츠는 아직 축축하고 차가웠지만, 그냥 배낭 속에 쑤셔 넣었다. 길을 가는 동안 마르리라.

길을 가는 동안 마르리라그냥 마르지 않은 셔츠를 쑤셔 넣었다는 의미를 글로 쓴 것이지만, 참 많은 것이 내포된 한 문장이다. 길을 가는 동안은 시간이 흐르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마르리라는 해결되리라로 나는 들린다.

 

P73. 숲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숲길은 끝없이 펼쳐진 언덕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이어졌다. 모스타파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경치를 가리키곤 했다. 이곳은 그의 왕국이었으며, 그는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3. 터키식 환대

 

P77. 여행자를 자기 집에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대접하는 것은 이슬람 교도의 의무였다. 독실한 이슬람 교도에게 환대손님인 여행자에게 모든 권리를 갖게 한다는 의미였다. 너의 집이 그의 집이며, 너의 음식을 그와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행자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가장 나쁜 죄였다. 이렇게 온화한 기후 아래서라면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가 말했다.

 

P81. 그들은 돈을 받지 않으려 했고

어디나 참 시골의 인심은이런 따뜻함을 찾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닌지하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이제 존재할까?

 

P84. 두어 차례 나는 또다시 길을 잃었다.

이렇게 돌아와 책을 썼다는 것은 것은 결국 길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라 점! 그저 잠시 잘못들어선 것일뿐이다.

 

P85. 이제 햇빛과 비에 노출되는 것을 줄이고, 걷는 시간도 줄여야 한다. 도보여행의 모든 결과는 정직하다. 몸 전체를 던지는 일이다. 내 몸을, 내 기억과 약과 옷, 식량, 침낭을 짊어질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모든 실수는 곧바로 혹은 이튿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혼자 걷는 이상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 낯선 언어와 엉터리 지도 그리고 내가 택한 길로 인해 나는 고립 상태일 수밖에 없다. (중략) 이곳에서 숙식과 안전을 해결해주는 것은 거창한 국제 교류도 몇 푼의 돈도 아니다. 그것은 불안한 가운데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나와 정말 비슷하지만 또 매우 다른 이 인간 형제들의 손에 달린 것이다.

 

 

P90. 그의 미소, 그의 시선, 목소리 그리고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 등 나는 모스타파의 모든 것이 좋았다. 이런 잠점들이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P100. 내 정신상태를 고스란히 알려주는 신호라도 되듯이 사방에 잠복해 있던 상처들이 한꺼번에 도지기 시작했다.

표현 굿

 

P105. “여행자들에게 그들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식사를 대접하거나 여행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그들만큼 신속한 이들은 이 지상에 또 없다.”

 

 

4. 의구심

 

P109. 무엇이 나를 이렇듯 자꾸 더 멀리 가게 만드는 것일까? 내가 지닌 상식과 신중함은 분명 멈추라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었다. 조금만 더, 좀더 멀리, 내 안에 억누를 수 없는 원초적인 충동이라도 있는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스스로에게 무척 비판적이다. 언제나 나 자신이 그 희생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걷고 또 걷게 만드는 이러 격렬한 욕망은 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버티는지 시험해보려고 그리고 기록을 깨보겠다는 어쭙잖은 허영일까? 아니면 오만? 의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20여년 전 도보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이 느낌만큼은 잘 알고 있다.

 

P110. 마라토너는 결승선을 넘어섰을 때 비로소 크로노미터를 돌아본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거기, 그가 단축한 몇 초안에 숨어 있다. 마라토너에게 어느 날엔가 그를 훌쩍 추월할 수 있는 적수라고는 단 한명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

 

하지만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욕구가 걷고 또 걷는 행위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중략) 하지만 나를 앞으로 떠미는 이 통제되지 않는 충동은 내가 애써 숨기려 하는 어떤 두려움과 뒤섞여 있다. 끝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수전노가 동전을 긁어보으듯 1킬로미터라도 더 모아두는 것이다.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는 한 그리고 배낭을 짊어질 힘이 남아 있는 한, 목표에 이르길 갈망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내게 주어진 이 의무는 바로 내가 정한 것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게 시간 제약이 있는 것도, 매일매일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는 것도, 또 최소한 몇 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매년 네 단계로 나누어 시안까지 걸어가겠다는 목표가 있다. 하지만 일년을 추가한다고 한들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짧게 보아서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나뿐이다. 이 나라의 비자 만료 기간 전에 이란 국경까지 도달하는 것.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앞에서 나오네~^^

 

P125. 이렇듯 머릿속이 온통 과거의 행적들로 가득 차다 보니, 정작 나의 길에 대해서는 무심한 채 있었다.

 

P126. ‘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발톱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낙관적인 생가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여기에 언어에서 오는 소외감이 더해졌다. 내가 과소평가했던 적이었다. 걸을 때는 고독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내 안에 쌓여가는 여상들, 자신과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숙소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사람들과 만날 때 나는 외딴 언어의 섬에 고립돼 있었다. 떠나기 전에 배운 말과 길을 가며 알게 된 말만으론 부족했다. 언어의 감옥이라는 이 넘지 못할 장벽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페르시아어라고는 한 마디도 모르는데, 이란에 가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나에게도 던지고 싶은 물음

 

P131. 내가 웃으며 거절하자 그는 어리둥절해하면서 데려다 주는게 자신에게도 기쁨임을 거듭 밝혔다. 자신의 호의가 묵살되자 그는 아주 불쾌한 표정이었고 나도 울적해졌다. 그러니 자유로워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데려다 주겠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기쁨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불쾌해 하는 것은 진짜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것일까? 상대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아무래도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아주 이기적이다.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편하고자 남의 자유를 속박하는

 

 

5. 맹견 캉갈

 

P142. 철학자 미셸 세르는 수동성은 야만적인 것의 다른 형태라고 했다. 이러한 일상의 노력, 멀고 먼 목표를 향한 알 수 없는 그러나 강렬한 부추김 그리고 유익한 땀방울을 통해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어린 시절과 두려움과 고정관념의 사슬에서 해방된다.

 

P142. 걷는다는 것은 꿈꾸는 자에게 더욱 관대하다. 심사숙고할 때와 달리 몽상은 일단 끊겼다가도 별 어려움 없이 다시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다. 날아오르는 황새, 지분거리는 벌레, 타는 듯이 붉은 진홍빛 꽃, 신발에 부딪치는 특이하게 생긴 조약돌 등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을 가며 생각에 골몰했다가 공상에 빠져드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P156. 나는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능적이고 실제적이고 자연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도 않는 이런 길들은 아무런 몽상도 생각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6. 왔노라, 보았노라

 

P189.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고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여행을 마친 후엔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느낀다. 이는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발견할 수 없었을 자신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여정에서 친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P202. 이 집에는 세상이 힘들게만 느껴져서 절망할 때도 위안을 줄 수 있는 소박한 행복과 아름다운 모습들이 가득했다.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

 

 

7. 1000킬로미터

 

P206. 길고 먼지 나는 파자르 대로를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며칠 전부터 미뤄왔던 결심을 했다. 이제부터는 긴 바지 차림으로만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과 마주치거나 혹은 그들의 집에 묵으며 일상의 삶을 가까이서 공유해야 하는 한, 나는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 내 존재가 그들을 놀라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내 맨다리가 그들에게 충격이라면 내가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P212. 이 구역은 이제는 거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스만 문화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콘크리트가 나무로 지은 전통 집들 대신 들어서지 않은 것이다. 마치 불도저에 꿋꿋하게 대항하려는 듯 서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오래된 시를 읽을 때처럼 감동적이었으며, 반항적이고 연대적이고 고집스러운 정신만이 오직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도 영혼이 있는 법이다. 바로 그곳, 무너져가는 사원의 그늘 밑 작은 광장에서 내가 세 명의 노인과 친분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P215. 두 남자는 자신만만하고 느긋해보였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떨었다. 사진을 찍어주자 그들은 보답으로 버찌를 주었다. “손님이 많은가요?”라고 묻자 그들은 무심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이 아름다운 낙과주의는 나를 더없이 즐겁게 했다, 이 장면을 마음속에 잘 간직했다가 세상의 번잡함으로 인해 평정을 잃으려 할 때마다 꺼내보리라.

여유나는 요새 참 마음의 여유가 없다. 무엇이 그리 조급한지

 

P229. 그는 나를 테라스로 안내한 후 딸을 보러 갔다. 잠시 후 아주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돌아왔다.

당신이 테러리스트인 줄 알고 내 딸이 걱정을 하더군요!”

내 시선에서 보는 모든 것이 낯설지만, 반대의 시선에서는 내가 낯설고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

 

P231. 새로운 풍경을 갈구하는 나의 취향은 정말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마치 새로운 미인을 보면 그 전의 연인은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바람난 애인 같지 않은가. 환상적인 장면을 막 보고 돌아섰는데도, 나는 다음에 올 경치에 다시 관심을 갖는다. 내게 행복은 항상 저 평원 너머에, 저 돌 장벽 뒤에 숨어 있는 것이고, 땅의 굴곡 속에, 강줄기가 바뀌는 곳에 그리고 좁은 통로를 빠져 나온 그곳 어딘가에 있다. 그 행복을 잡으려는 욕망에 이끌려 나는 시간을 잊는다.

 

 

8. 헌병들

 

P264. “하지만 나는 당신이 배고프지 않은지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에이치 발음을 분명하게 했다.

사실 푸른 눈은 내게 시장하지 않은지 정중하게 물으려던 것이었는데 Are you hungry?, 그만 Are you angry?라고 발음해 버린 것이었다.

발음도 발음이지만,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은 아닌지

 

P266. 모든 게 단지 불운의 연속일 뿐이기를 그리고 빨리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차분하게 여행을 계속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랐다. 하지만 그런 상상의 날개를 펴기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할 뿐이었다.

 

 

9. 대상 숙소

 

P278. 바로 그 순간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겁먹었던 것은 공포 때문도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보호가 철통 같은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사람들은 죽음을 감추거나 억누르거나 아니면 내던져 버린다. 나는 최후에 대해 자주 생각해봤다. 심지어 그걸 바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죽음을 그렇게 가까이 직면한 적은 없었다. “태양도 죽음도 뚫어지게 바라볼 수는 없다라는 프랑스 작가 라 로슈푸코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런데 나의 죽음이, 내 배낭 때문에 겁에 질린 무지한 미치광이의 불안정한 손가락에 내맡겨진 채 거기 있었던 것이다!

 

 

10. 여인들

 

P307. 시골 마을에서 터키 여인들의 운명을 접할 때마다 나는 늘 반감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뒷전으로 물러서도록 배우고 일만하도록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관찰해보니 사진을 찍을 때도 사내아이들은 좋아하며 카메라 앞에서 설쳐대는 데 비해 계집아이들은 사내애들 뒤로 숨었다.

그래도 대한민국이 행복하다는

 

P317. 서아시아를 여행하고 나면,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에서 장사의 기본을 이루는 것을 대화의 기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손님이 상점에 들어올 때 상이니 기대하는 것은 실제적인 이익도 이익이지만 좋은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P317. 이렇듯 인간 대 인간으로 부딪침으로써 서로 마음을 열게 되고, 진심 혹은 거짓이 눈에서 눈으로 표현된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의 장사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P321. 여행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은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 않았다. 언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정보수집에 사실 가장 큰 단점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가 맺은 진한 관계들, 특히 신세를 지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가족들은 어휘나 문장을 늘리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정말 중요한 건 바로 그런 점이 아니던가.

 

 

11. 그리고 도둑들

 

P373. 나는 조금씩 이 부드러운 여자들만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게 만족스럽기만 하던 어린 시절 한때의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성인이 돼서 되찾은 듯한 위안을 받았다. 시간은 천천 흘렀고 전화는 여전히 불통이었다. 모든 게 정지된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가 차를 모두 마셨을 무렵 마침내 전화 신호가 떨어졌고 외부세계와 연결됐다.

 

 

12. 고원의 고독

 

P376. 나는 한 순간 그 버스에 오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어제 강도를 당할 뻔한 일 때문에 나는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실제 사건 이상으로 경계해야 하는 분위기 그리고 그로 인한 긴장이 내게 낙심과 환멸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음울한 생각으로 마음이 동요돼서 나는 의욕과 상실과 분노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P378.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이 세상에는 유럽, 미국, 알프스나 산악지대 등 걷는 것이 그야말로 행복인, 이곳만큼 아름다운 꿈의 고장들이 있다.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전설 같은 길들도 있다.

그런데 그 길들도 결국 힘들고 고되고, 그 길에서 부딪히는 두려움과 고독은 똑같지 않을까?

 

P378. 이전에도 몇 차례나 있었던 일이지만, 험난한 길을 갈 때면 나를 탐색하고 나 자신과 겨루기 위해서 나를 잃어간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친구 조제가 이번 여행이 자신과 벌이는 일 대 일 싸움이라고 표현으로 요약될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는, 바로 지금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P387. 우리 문명국가들에서는 이러한 접대의 개념이 잊혀져가고 변질돼 버렸다. 사람들은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만을 초대한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투숙만을 전담하는 집, 즉 호텔이 있다. 이곳은 국제적인 대신 개성은 없다. 프랑스나 일본 여행자는 뉴옥, 부에노스아이레스 혹은 방콕에 있으며넛 자기 집에 있는 것과 같이 편안하게 느끼고 싶어한다.

불편함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지

 

P387. 발견, 나눔 그리고 대화의 즐거움을 위해 식탁을 마련하는 일이 아직도 우리에게 가능한가?

이제는 없어졌다고 봐야지

 

P390. 변화가 없는 사회라고?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보 사회가 이곳에서도 창궐하고 있다.

변화는 언젠가는 온다. 시간차이겠지만

 

P395. 걷기 시작했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차량은 별로 없었다. 오늘 나를 기다리고 있을 즐거움을 나는 벌써 맛보고 있었다.

 

P397.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문제들이라면 출발 할 때부터 경험했다. 몇 가지 문제를 더 만난다고 해서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래 맞아 문제는 계속해서 만나고 해결해 나가거나, 저절로 없어지기도 하지. 또 만난다고 두려울 것은 없는 것이지

 

 

13. 큰 고통의 산

 

P411.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제까지 나의 시간표는 걷고 먹고 숙박하는 것으로 매우 간단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공백을 마주해야 한다.

공백을 마주한다라

 

P419. 안타깝게도 나는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 시간은 내게서 멀어져가고 그와 더불어 내 마음대로 풍경을 즐기는 즐거움도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학대했다. 나는 여러 주째 자동차 타기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이제 그 자동차 공포증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P423. 나는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앰뷸런스의 유리창에 코를 대고, 나의 걸음걸이에 맞춰 최근 며칠 동안 감상했던 그 풍경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풍경들을 알아보았지만 그것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바라보니 도시 하나, 마음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천천히 사랑스럽게 그것들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P436. 이 모든 고독한 나날들이 지나고 나는 노력과 시련, 예외적인 일들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금욕주의자인 나는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쾌락주의를 또 다시 이겼다. 진정한 느림은 포기를 내포한다.

 

 

옮긴이의 글_떠나든 머물든 삶은 계속된다

 

P439. 사람들이 그에게 수도 없이 질문했던, 그리고 그 자신도 걷는 동안 늘 자문했던 지룸ㄴ, “왜 걷는가?”에 대한 대답은, 사실 이 책 어디에나 있고 또한 아무 곳에도 없다.

 

P440. 그에게 있어서 실크로드는 마르코 폴로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미지의 길이 아니었지만,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느낌과 발견은 언제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이렇듯 느림과 고행을 고집스럽게 감수하는 올리비에의 발로 쓰는 실크로드 기행, 모든 게 초고속으로 편하게 이루어지는 시대에 신선한 충격임임과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꿈구도록 이끄는 조용한 초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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