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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0시 41분 등록

삼국유사

 

일연(고운기)/현암사

 

저자 연구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생애 연구

1214(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고종 14)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界)를 받았다.

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 받았다.

1261(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1277(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저서로는 『화록(話錄) 2, 『게송잡저(偈頌雜著) 3, 『중편조동오위』 2, 『조파도(祖派圖) 2,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 『제승법수(諸乘法數) 7, 『조정사원(祖庭事苑) 30,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연 [一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중 발췌

 

고운기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생이며,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하였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1999~2002 8),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2004), 일본 메이지 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2007 4~2008 3)를 거쳐 2015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월인, 2001)

《일연을 묻는다》(미래인, 2006)

《길 위의 삼국유사》(현암사, 20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현암사, 2005)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산하, 2006 초판, 2011 개정판) ― 윤동주 평전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ISBN 978-89-323-1536-2

삼국유사의 발굴, 대중화 등의 과정에 관한 책이다.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 2011)

《듕귁과 오뤤지》(현암사, 2013)

《삼국 유사 글쓰기 감각》(현암사, 2015)

학술·번역서

《삼국유사》(홍익출판사, 2001, 일연 저)

《논어》(현암사, 2003, 시모무라 고진 저)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 》(이회문화사, 2003, 노무라 신이치 저)

《그늘에 대하여》(눌와, 2005, 다니자키 준이치로 저)

《한국 고전시가의 근대》(보고사, 2007)

《사객통통집》(보고사, 2013)

《화한창수집 이》(보고사, 2013)

《위험한 논어》(현암사, 2014)

《상한성사답향 상한성사여향》(보고사, 2014)

《객관최찬집 봉도유주 신양산인한관창화고》(보고사, 2014)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4 – 들어가며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었다. 당에서 송으로 이어지며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족의 자손짐을 일거에 무너뜨린 이 일은, 그렇지 않아도 우리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해 보려던 고려의 정권 담당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암시를 함께 주었다.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비록 150년 차이로 뒤 늦게 쓰여진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는 달리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계기인 것 같다.

 

P5- 들어가며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P12 – 이 땅의 첫 나라

10세기부터의 고려 사회는 중국적 유교 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의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장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P15– 이 땅의 첫 나라

북위는 오랑캐족으로 처음 중원을 차지한 막강한 나라였지만, 특히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장수왕과 대적하거나 협력하여, 한반도와는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된 동이전이 딸려 있다.

 

P16– 이 땅의 첫 나라

널리 사람 사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곧 홍익인간이다. 그러므로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말이다.

 

 

P21 – 이 땅의 첫 나라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는 그러한 상징이다. 우리는 먼저 단군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중에서도 단군신화는 창세 신화인가 아니면 건국신화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이 땅 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일연이 ‘고조선’ 조를 시작하기 전에 서문을 붙었는데거기서 중국의 이러저러한 나라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음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창세신화와 건국신화에는 차이가 있다. 건국신화라함은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차이 하나로 우리의 역사는 단군으로 시작되는 것이 공식화되는 것이다.

 

 

 

P23 – 이 땅의 첫 나라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늘 우리 역사에서 아쉬운 부분인 것 같다.

 

P24 – 이 땅의 첫 나라

고려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두 가지 사건을 겪었다. 첫째는 무신정권의 성립이고, 둘째는 몽고와의 전쟁이다.

 

P25 – 이 땅의 첫 나라

천자의 나라를 넘보자는 것 은 아니지만 적어도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었고무인 정권이 내세웠던 ‘새로운 진서’ 라는 대의명분에 상당한 힘이 실렸다.

 

P29 – 이 땅의 첫 나라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P34 – 이 땅의 첫 나라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P36 – 고구려와 북방계

고대 왕권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P36 – 고구려와 북방계

하나의 체제가 무너진 다음 일정 한 혼란기를 거처 새로운 센서가 잡혀지는 것 또한 중국의 고대사가 그랬듯이 매우 자연스럽다.

 

P43 – 고구려와 북방계

그것을 받아들인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 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하다.

 

P44 – 고구려와 북방계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주몽이 신화가 고대 왕국의 설립 신화 중 가장 드라마틱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마치 영웅여정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하다.

 

P48 – 고구려와 북방계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지 전에 이미 아들을 하나 낳았었다. 아들은 신표를 남겨 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가 고구려의 제 2대 유리왕이 된다. 태자란 바로 유리왕이다.

아버지를 찾는 아들의 신화까지 주몽신화는 여러가지로 다양하다.

 

P52 – 고구려와 북방계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P54 – 신라와 남방계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되도록 이성적 판단에 맞아 들어가는 것을 추구했던 삼국사기의 세계와 일연 사이에 놓이는 차이점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일연이 소개한 여섯 부족은 다음과 같다.

 

 

P59 – 신라와 남방계

박혁거세가 열세 살 떼인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섰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모두 같다이를 근거로 한다면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그보다 20년 뒤진 기원전 37. 백제의 온조왕은 40년 뒤진 기원전 18년에 출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P66 – 신라와 남방계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비도 오지 않는데 넘쳐 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황봉 꼭대기에 올라가보자.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짝이 될 인연을 만나려 오줌을 눈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떫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 났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다.

굉장히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상을 표현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P70 –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석탈해는, 헌칠한 체구에 꾀도 많고 덕망도 갖추었지만, 촌놈에서 출발해 왕이 사위에 이어 왕까지 된 신라드림의 원조다. 이 시골 출신이 어떻게 그런 벼락 출세를 할 수 있었을까? 탈해는 무척 복잡하고 신비한 인간이다. 그 출생 과정부터 한 남자의 생애는 파란만장을 예고하고도 남았다. 물론 밑바닥에서 시작한 인생이 평탄할 수만 있겠는가?

신라판 드림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P73 –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이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말 이 것도 맞는 이야기인가?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P82 –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탈해는 여섯 부 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 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그나마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 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그나마 그가 타고난 재주에다 출중한 지략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왕이 된 다음 그는 지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 노력했을 것이다왕위 에 오른 지 3년 만에 신라와 일본이 맺은 우호조약은 그 같은 사정을 말해준다.

 

P89 – 연오랑과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우리의 영웅 김일 선수는 몹쓸 병마저 얻어 만년을 쓸쓸히 지내고 있지만링에서 김일 선수를 괴롭히던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대부 가 되어 그 인기를 느긋하게 끌어 나가고 있다.

인생이란 모른 것인 것 같다. 무엇이 인생을 구성하고 만드는 것인가?

 

P91 – 연오랑과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다.

 

P92 – 연오랑과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P95 – 연오랑과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일연은 삼국의 역사적 사실을 쓰면서 삼국사기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자신이 조사한 부분이 일부 첨가되기는 한다. 그런데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연은 삼국사기를 떠나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는데,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P103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람은 생긴 모습만으로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들어 보면 중국사람은 구분된다. 말소리까지 들어도 잘 구분되지 않는 사람은 한국인과 일본인이다.

 

 

P109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가까운 사이라고 함부로 대하다 보면 틀어지기 마련이다왜의 잦은 침략을 받는 신라로서는 더 이상 그들을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로 굳혀 갔으리라 보인다.

 

P110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조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P111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 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축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P115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P116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나라의 일이며 충성이 중한들. 목숨을 내놓은 값은 무엇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나라를 위한 죽음이 과연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 것 인가?란 의문이 든다.

 

P119 -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다고 한 데서도 굳이 적을 따지자면 일본만이 아니었고,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이 절을 짓다 돌아가시자 아들 신문황이 공사를 마쳤다.”는 절의 기록을, 본문이 아닌 주석에다 인용해 놓는 데 그쳤다.

 

P120 – 밤에 찾아오는 손님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우리는 지금 삼국유사의 편찬자 일연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삼국유사의 역사적 의의 중 가장 큰 의의라고 생각한다.

 

P121 – 밤에 찾아오는 손님

바야흐로 신라가 법흥왕과 진흥왕을 지나며 한반도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할 때다. 그런데 진지왕은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등극하여 불과 4년만에 왕위를 진평왕에게 물려주고 있다.

 

 

P124 – 밤에 찾아오는 손님

사량부에 사는 백성의 딸이 자태가 요염하고 얼굴이 예뻐 도화랑 (挑花娘이라 불리고 있었다 왕이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가지려 했다여 자가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바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아비가 있으면서 다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비록 황제의 위력으로도 끝내 빼앗지 못합니다."

 

p134 – 밤에 찾아오는 손님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설화가 지난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造化)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 하다.

인간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르는 것에 대한 많은 미신과 상상력이 더해진다. 지난 역사를 보면 후대에 아주 당연해 보이는 것이 미지의 세계였을 때는 무시무시한 힘과 두려움을 가져온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

 

 

p137 – 밤에 찾아오는 손님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p140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삼국시대 선진 문명을 상징할 불교 관계의 이런 기사에서 우리는 신라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게 된다. 신라는 6세기가 끝나갈 때쯤에야 제대로 된 유학승 한 명을 겨우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진국이 어떻게 삼국을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이제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통해 이 의문을 해결하기로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나중 된 자가먼저 된다’ 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p141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신라의 후진성을 인정하고 그 극복을 처음으로 꾀한 왕은 아무래도 법흥왕(514~539)일 것이다법제 정비와 불교 공인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지만이 두 가지가 곧 후진성 탈피에 기치를 든 일이나 다름 없다.

 

p145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거기 처음 추대된 국선이 설원랑이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점이 눈에 띠지만, 기본적인 취지나 수련 방법은 원화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불교가 스며들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연이 보이고자 했던 대목은 이것이다.

 

 

p150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 늦었기에 오히려 선진적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점만 적어두기로 하자. 마치 오늘날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이루려는 개발도상국가들이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첨단의 그것으로 건너 뛰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까?

 

 

P150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첫째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둘째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셋째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넷째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P153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한반도의 한 쪽에 치우쳐 농토도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바다 건너 서는 일본으로부터 안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다시련 속에서 연단 되는 것일까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쳤는지도 모르겠다.

 

P156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진흥왕이 구사한 외교적 수완으로, 이후 신라가 삼국 통일까지 걸어가면서 변함없이 지켰던 어떤 대원칙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일본이 가까워지면서 신라로서는 협공을 받는 입장이 되었는데, 거기서 고구려까지 적이 된다면 그야말로 사면이 포위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백제나 일본과는 오랫동안 좋지 않은 관계였다. 이제 그런 관계를 개선하기보다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이 더 쉽고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법하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과도 비슷한 것 같다. 한반도에 위치한 나라가 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P156 -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국이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루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진다. 다만 신라로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당나라와의 거리가 멀다는 점이 이득이었다. 일단 침공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도 없고, 당나라와 화친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할 수 있다는 이중의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P161 -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삼국시대를 정리한 두 권의 책에서, 김유신은 그렇게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명한 왕들이 많았고, 충성스런 신하가 끊이지 않았건만, 그에게 맞춰지는 역사의 서치라이트는 밝기만 하다.

왜 일까? 그 이유가 참 궁금하다. 삼국시대를 통틀어보면 이와 같은 인물이 많지 않았나?

 

P164 -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김춘추는 김유신보다 여덟살이 아래였다. 김유신이 진평왕 17(595), 김춘추는 같은 왕 25(603)생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곧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이루어 내는 드라마의 시작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문희라는 두사람을 굳게 묶어 주는 제3의 인물이 매우 중요한 배역으로 등장한다.

 

P171 -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처남 매제간으로 맺어진 김춘추와 김유신 콤비는 이후 거칠 것이 없이 자신들의 뜻을 펼쳐 간다.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특히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p172 –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드디어 춘추의 나이 51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기회는 그에게 아왔다자신의 오른팔 김유신은 이제 누구도 거역 못하는 군부의 고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유신은 신이(神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사비강에 이르렀을 때의 일 하나를 일연은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P177 -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까?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 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

저자가 문희란 이름에 감정이입을 지나치게 한 것 같다. 김유신의 여동생이자 김춘추의 부인이 된 여인이 과연 김유신의 지략에 의해서만 움직인 가엾은 여인이었을까?

 

P178 –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왕 3년이요, 고구려가 멸망한 666년이 문무왕 8년이다.

법민은 줄곧 당나라에 머물며 외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당할 정치적 견제를 피하고, 당나라 조정과의 친분을 쌓아 왕으로 등극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김춘추나 김유신의 뜻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P181 –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은 끝까지 당나라와의 살얼음을 밟는 듯한 관계를 계속했다. 싸움은 거의 그칠 날이 없을 정도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투했는가가 삼국사기에서는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특히 국가간에 호의, 형제의 우의란 없다.

 

P186 –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인 데 비해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이다. 두 이름을 합쳐보면 법정, 민명, 두 왕에 걸쳐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한 것이지만, 실제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 값을 하고 있다.

 

P187 –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만파식적, 이 신기한 요술 피리에 대해서 그는 심히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삼국사기, 잡지의 삼죽조에 고기의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기는 하나,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p189 –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선민사상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 다만 신라는 그것이 선조의 보살핌이지 종교로까지 발전하진 않은 것 같다.

 

P204 – 권력의 끝 

그들은 전쟁 때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권력의 무상함이다.

 

p205 – 권력의 끝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할’ 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화랑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무리들은 주안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철저한 토사구팽이다.

 

P210 – 권력의 끝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의 배경 설화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득오가 새로운 자리에 전출되어 임지에 가서 일하는 데, 옛 상관으로서 죽지랑이 면회를 갔던 일 정도, 거기서 좀더 나간다면 비뚤어진 관리가 사람 속을 썩인 일 정도로 보면 그만일 수 있는 일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P212 – 권력의 끝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p219 –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p219 –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은 반역의 칼날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막을 불러 왔다.

 

P226 –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자주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P228 -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너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홈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 문이다그렇다고 감춰 놓고 있겠는가훔쳐간 들 닮지 않는 것이라며 적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런데 순정공은 그 이상의 일을 당했다아예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여기에 한 노인이 나타난다그가 앞서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 던 노인인지 알 수 없다다만 세상을 살며 경험해 터득한 지혜를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같다그가 알려 준 방법은 강원도의 힘’ 이 아니라 한마디로 ‘여론의 힘’ 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 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聚口鍵金) 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 란 곧 오늘날의 여론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물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은 그렇게 힘을 모을 방법으로 노래를 권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눈 도둑이란 표현이 재미있다. 그런데 적선이라도 하라니 이것 참 표현이 애매하다.

 

P232 -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7호선은 1,3,5선이 모두 태백산맥의 서쪽에 놓인 데 비해, 오직 관동 지방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 길은 입장을 떠나서도 이 길만큼 아름다운 국도는 없어서 더욱 소중하다. 검푸른 바다를 보고 가는가 하면, 어느새 우뚝 솟은 산맥의 허리허리를 담게 되고, 아예 한 눈을 산 쪽으로 한 눈을 바다 쪽으로 두고 가기도 한다.

7번국도 여행을 꿈꾸게 되는 이유이다.

 

P235 – 첫 성전환증 환자

거기에다 한 가지 더 이유를 붙이자면경덕왕 때 두 사람의 뛰어난 향가 시인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두 사람은 물론 충담사와 월명사다.

 

p241 – 첫 성전환증 환자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라리

 

P253 – 왕이 되는 자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인 것이 쿠데타다. 그런데 마침 같은 집안의 김양상이 상대등이 되었다. 경신은 그를 부추겨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양상은 얼굴 마담역할이었을 뿐이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경신은 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다음 이벌찬 곧 각간으로 승진하면서 상대등이 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P257 – 왕이 되는 자

왕은 이 피리가 진평왕 때 만들어졌다고 했으나 실은 신문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해중능 곧 대왕암에서 받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P257 – 왕이 되는 자

원성왕이 아버지로부터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앞서 나왔다그런데도 왕은 두 번씩이나 시치미를 떼고 있다금을 싸 들고 찾아오는 사신들을 도리어 은을 주며 돌려세운다왕이 한 선의의 거짓말은 국보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거절하되 어떤 다른 외교적 분쟁이 야기되지 않도록 섬세히 배려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그의 조심스런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P258 – 왕이 되는 자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에도 도교를 전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데, “당나라 사신이 도덕경 등을 보내와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아들였다는 경덕왕과 충담사 그리고 표훈대덕조 모두의 기록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사신으로 오고 국가의 공식적인 교류에서 도교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P261 – 왕이 되는 자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를 고려조에 와서 공민왕, 조선조에 와서 영정조 같은 이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신라의 원성왕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왕이었다.

원성왕 사후 신라 왕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기에 빠진다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란 결국 정권을 잡고자 하는 진골 귀족 계급간의 골육상쟁이었는데특히 소성왕부터 헌안왕까지 9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살해되면서 혼란은 극도에 달한다.

 

P264 – 왕이 되는 자

우리는 여기서 신라의 화랑 제도가 아직 근근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데 경문왕을 따르는 부하 가운데 범교사는 그에게 목숨을 건 제안을 하고 있다. 결국 그것이 경문왕의 즉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나중에 범교사가 왕에게 와서 말했다.

“제가 말씀 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나타났습니다큰딸을 맞아 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

 

 

P267 – 왕이 되는 자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양의 동화를 들으면서 컸다거기에 따르는 구구한 해석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니 여기서 거들 일은 아니고설화가 지닌 우연한 일치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고자 하는 자리도 아니어서다만 우리 이야기가 해석의 여지에서 더 넓은데 어찌 그다지 철저히 외면당했는가 그 아쉬움만 표명해 두기로 하자.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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